어머니의 재봉틀
임병식 rbs1144@daum.net
'달달달 달달달'
나는 눈을 감고 있으면 때로 귓속에서 이런 소리가 울려온다. 실제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환청이다. 왜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일까. 확실한건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짐작 가는 데는 있다. 뭐냐면 어머니 생각을 떠올리면 불현 듯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어머니는 늘 재봉틀을 끼고 사셨다. 가족들의 옷가지를 새로 짓거나 헌옷을 수선하면서 함께하기도 했지만, 마을사람이나 인동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일감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분들이 부탁한 것은 주로 남자 옷은 조끼, 여자 옷은 저고리가 많았다.
나는 어렸을 적, 어머니가 옷 짓는 모습을 많이 지켜보았다. 옷 짓는 옆에서 숙제를 하거나 달달거리는 소리를 듣다가 잠시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런 데는 소리가 들을 만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무명 배 적삼에서 풍기는 상큼한 내음이 기분을 상쾌하게 해서였다.
실을 날 때 솔에 밥풀을 먹여 바르게 되는데 그것이 베가 짜진 뒤에도 내음이 스며들어 재단을 하거나 바느질을 할 때면 풍겨 나와서 후각을 자극했다.
우리 집에는 ‘싱가미싱’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시집오실 때 혼수로 가져온 것이었다. 오십호 남짓한 우리 마을에서는 오직 우리 집에만 미싱이 하나가 있어서 부탁을 많이 했다.
어머니의 반짇고리에는 견본의 종이가 몇 장 있었다. 조끼와 저고리, 그리고 버선의 견본이었다. 입을 사람의 체구만 물어보고는 견본을 꺼내 대충 겨냥하고서 품을 맞추었다.
바느질을 할 때는 북실을 끼우고 실패에 감긴 실을 확인한다. 그런 다음 옷감위에 노루발을 내리고서 한손으로 바퀴를 돌려 운전한다. 이때 왼손은 박음질이 되는 방향을 이끌고 가끔씩 손을 뒤로 뻗어 빼내게 된다.
아마 그런 과정이었을 것이다. 나의 왼손 중지의 손톱은 좀 기형으로 생겼는데 누루발이 아직 내려지지 않는 상태에서 그곳에 손가락이 끼었다. 무심결에 네버를 내려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손톱이 깨지면서 피가 낭자해졌다. 이후 손톱은 아물면서 기형적으로 자라고 있다. 어린 날에 입은 영광의 상처라고나 할까.
이후부터는 재봉틀 옆에 접근하는 건 제지 당했다.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는 그리 상급은 아니다. 그렇지만 주문이 들어오면 마다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끼나 저고리를 만들어주면 하루치의 놉을 얻을 수 있어서 집안에 병약한 아버지가 계신 입장에선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농촌에서 일꾼이 필요한 시기는 모내기철과 보리나 벼를 거둬들여 타작을 하는 때이다. 타작을 하는 때는 적당한 날을 정할수도 있고 가족끼리 모여서 호락질로 작업을 할 수도 있지만 모내기는 좀 사정이 다르다. 하루나 이틀사이에 집중적으로 손포를 모아서 일을 해야 한다.
어머니는 바느질로 놉을 얻으면 모아주었다가 모내기 때 집중적으로 그 손포를 썼다. 그러니 얼마나 요긴한 일손인가.
어머니가 만든 적삼과 조끼는 특징이 있었다. 적삼은 소매 품이 넓지 않고 길이는 젖가슴을 겨우 덮을 만큼 짧았다. 그것은 부인네들이 일을 하다가 얼른 아기에게 젖을 물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한다.
그러고 조끼는 양옆에 기형적으로 크게 달았는데, 당시 남자들은 비교적 부피가 큰 풍년초가 담은 쌈지와 부싯돌을 지참하고 있어서 그것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감안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어렸을 적 일꾼들이 당산나무 아래에 지게를 받쳐두고 앉아서 조끼에서 부싯돌을 꺼내어 수회 그어댄 다음 마른 쑥에 불을 붙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면서 ‘저것도 어머니가 만든 조끼다’라고 생각하며 큰 자긍심을 느꼈다.
집에서 한때 효자노릇을 했던 재봉틀은 나중에 발로 운전하는 설비로 바뀌었다. 이때는 한층 작업하기가 쉬어졌다. 한손을 쓰던 것을 두 손을 사용하니 한결 수월해진 것이다. 한데 그런 재봉틀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방치하여 지금은 먼지가 켜켜이 낀 채 골동품으로 남아 있다.
나는 재봉틀을 생각하면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일을 잊을 수가 없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데 모자를 쓰고 학교를 갈 일이 생겼다.
모자를 사달라고 하니 어머니는 당신이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셨다.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만들어 주신다고 하니 더는 사달라는 말을 못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마침내 ‘엣다 됐다’하고 내미는 모자는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모자는 그런대로 형태를 갖추었는데 챙이 당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자를 쓰고 앞을 보니 챙이 아래로 축 내려와서 눈을 가려버렸다. 눈을 가린다고 하니 다시 제작을 했는데 이때는 그 반대가 되어 버렸다. 평형하게 앞을 향하지 않고 위로 쳐들어 버린 것이었다.
“나 안 쓸래”
생떼를 부리니 어머니의 눈가에 붉은 핏발이 서고 있었다. 울먹하신 것이 분명했다. 그때는 철이 없어 몰랐지만 아마 그랬을 것이다. 말은 안하셨지만 ‘이 철따구니 없는 놈아, 니 아버지는 아파서 일도 못하고 나 혼자 애면글면 재봉틀 돌리며 놉을 얻고 사는데 니가 지금 땡깡부릴 처지냐.’했을 것이다.
그토록 신산한 살림을 지탱해주던 어머니의 재봉틀은 이제 먼 옛날의 추억을 담은 유품이 되어 버렸다. 생각하면 애환이 많이 담긴 재봉틀인데 그립고 그립다. 노루발이 연필로 그어댄 실선을 따라 박음질되면서 내던 소리가 그립다. 아울러 풀 내가 여전히 남아서 콧속을 자극하던 그 무명베 옷감의 내음이 그립다.
오늘도 한가한 참에 눈을 감고 옛날을 회상하자니 어머니의 신산하신 얼굴과 그 재봉틀이 떠오르면서 달달달 울리던 미드미칼한 소리가 어제인 듯 귓전을 울린다. (2025)
첫댓글 어머니의 재봉틀 감동입니다. 우리 집도 처음으로 1951년 '드레스'라는 商名의 재봉틀을 구입하여 어머니께서 반느질을 해 주고 놉을 샀습니다.
우리 어머니께서도 무명과 삼베천을 가지고 옷을 만들었습니다. 50년대 종이도 부족하여 비료포대 종이를 가지고 틀을 짜서 천을 자르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제가 10살도 안 되었을 때 재봉틀 청소도 하고 바늘이 부러지면 제가 교체했던 일이 떠 오릅니다. 남이 옷을 해 달라고 부탁한 천을 가지고 제가 남의 것인지도 모르고 잘라서 제가 신발주니를 만들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이런 잘못을 했는데도 어머니나 할머니도 저를 나무라지 않는 것이 고맙게 여겨 집니다. 고달픈 생활 속에 재봉틀에 얽힌 얘기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어머니께서는 혼수로 싱가미싱을 가져오셨습니다. 형님이 1933생이니 그 전 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재봉틀로 등지개하는 조끼를 만들고, 적삼을 지으셨지요.
그것을 하나 만들면 하루 일하는 놉을 얻을수 있어 모내기철에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 왼손 중지에는 노루발톱에 찍혀 빠진 손가락이 있는데 지금도 그 손톱이 정상으로 자라지 않고 있습니다.
모자때문에 마음이 안들어 땡깡을 부리던 일이 많이 후회됩니다.
그때 엄마는 얼마나 속상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당시의 농촌 풍경은 어디나 별반 다르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저희 마을에도 유일하게 발재봉틀을 부리던 집이 있어 '틀집'이라 불렀었지요. 마침 그 집 둘째가 제 동무라서 가끔 재봉틀을 구경하며 만져보곤 했던 기억이 삼삼하네요. 선생님 어머님께서는 손재봉틀로 거동이 불편하신 아버님을 대신하여 집안의 기둥이 되어 살림을 꾸려나가셨으니 그 인고의 세월이 그려집니다. 그 시절의 그리웠던 추억을 어제런듯 술회하신 감회에 빠져듭니다.
어머니께서는 재봉틀로 옷을 지어 놉을 구했지요.
어머니의 신산하신 세월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자식이란 생명을 다하여 눈을 감을때까지는 잊울 수 없는 존재가
어머니가 아닌가 합니다.
2025 창작수필 가을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