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 공사
노병철
관행(慣行)이란 말은 ‘오랜 기간 똑같이 하던 것들’이라는 의미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공정하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은 것을 억지로 꿰맞추며 이상한 짓을 할 때 붙이는 용어이다. 여직원이 커피 타는 것은 관행이라는 말을 대놓고 한 적도 있다. 이런 여직원이 커피 타려고 회사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면 여태 그런 관행에 익숙했던 사람들 눈엔 그 여직원은 완전 또라이로 보인다. 세상은 변하고 ‘페미’라는 새로운 단어가 익숙해진 요즘 그런 여직원이 있다면 여직원을 욕할까 아니면 커피 타라고 시킨 그 누구를 욕하게 될까. 참고로 절대 난 아니다.
“이 바닥이 원래 이래.”
공무원 회의하는 데 한번 가본 적이 있다. 고위공무원이 들어오면 갑자기 다 일어난다. 나도 덩달아 영문도 모르고 일어났다. 재판 구경을 가보면 정말 끝내준다. 판사 들어오면 다 일어나야 한다. 여긴 일어나라고 말을 한다. 한번은 방청석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는데 판사가 나를 째려보더니 자기 앞에서 다리 꼬지 말란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 관행은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일제 강점기부터 내려온 것일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난 죄인이 아니다. 왜 판사 앞에서 다리 모으고 두 손 가지런히 하고 앉아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 듣고 싶다. 민주공화국에는 모든 권력자는 견제를 받게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유독 우리나라에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존재한다. 바로 검사, 판사이다. 이들은 죄를 지어도 99% 기소를 당하지 않는다. 미국은 24시간 내 완전 공개를 원칙으로 하는 판결문도 우리나라에선 겨우 0.3%밖에 밝히지 않는다. 이러니 판결이 판사 마음대로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그들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해야만 한다. 관행이다.
기자가 기사에 ‘핏짜, 커리’쓴다. 물론 허접한 잡지사 기자 나부랭이가 본배 없이 껄떡거리는 것이다. 피자나 카레라고 글을 쓰면 밋밋해 보여서 그렇게 썼다고 항변할지는 모르지만, 외국어와 외래어가 어떻게 다른지 모르는 얼뜨기 기자이리라. ‘셀렙샵 에디션의 2021 Winter 홀리데이 컬렉션.’ 한글이지만 해독이 안 된다. 구제역이란 말도 마찬가지이다. 익산 춘포역이나 군위 화본역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구제역은 입구(口), 발톱제(蹄), 돌림병역(疫)이다. 따라서 소나 돼지 등의 동물의 입이나 발굽에 생기는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 병을 가리켜 구제역이라고 쓰고 말한다. 가축들이 구제역에 걸리면 입의 점막이나 발톱 사이의 피부에 물집이 생기고 침을 흘리다 죽게 되는데 이게 전염성이 강하다. 상당히 위험한 병이기에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데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다. ‘신병을 확보하다.’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군대에서 신병(新兵)이 새로 들어왔나 싶었다. 하지만 그 신병이 아니다. 범인을 잡았다는 이야기다. 신병(身柄)이란 말을 제대로 해석하는 사람도 못 봤다. 물으면 전부 얼버무린다. 자루병(柄)자가 해석이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알아먹지도 못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왜일까? 물어보니 관행이란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게 되고 하니 차츰 문자를 고르는 습성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냥 쉬운 말로 쓰면 아무 문제 없는데 조금은 유식한 척하고도 싶고 해서 사자성어를 억지로 외워서 한 번씩 사용한다. 문제는 겨우 외워놓았는데 막상 사용하려니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거다. 버벅거리다 일 끝낸다. 그나마 어렴풋이 생각나는 사자성어는 사람 꼴을 더 우습게 만든다. ‘야밤도주’ ‘일사분란’ ‘명약가관’ 나오는 대로 말하다 보니 가방끈이 짧은 것도 아닌데 이런 것도 모르나 싶어 괜히 부끄럽고 쪽팔린다. 다행히 끼리끼리 논다고 대충 이야기해도 주위 지인들이 다 알아들으니 다행이다. 자기도 모르거나 혹은 대충 그런 뜻이겠지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목례하지 말고 정중하게....”
정확하게는 대가리만 까딱거리지 말고 고개 숙여 인사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목례가 아니고 묵례라고 이야기해야 한다. 목례(目禮)는 눈웃음을 이야기하기에 말하는 이의 본래 뜻과는 다르다. 하지만 듣는 사람들은 다 알아듣는다. 세상 굴러가는 게 다 이런 모양이다. 이 바닥이 원래 이렇다.
기승전결에 익숙하고 수미상관을 해야 좋은 글이고 기가 막힌 묘사와 형상화를 해야 문학적인 글이 된다고 해서 주저리주저리 이상한 단어를 엮어놓은 글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온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한참 읽어서야 겨우 아는 글자 두어 개로 글의 맥락을 이해하게 된다. 작가는 육하원칙을 적용해서 글을 쓰라는 말도 있다. 키플링의 말이다. 가방에 몽키가 달린 키플링이라는 회사 이야기가 아니다. ‘정글북’을 쓴 러디어드 키플링 작가를 말한다. 이 작가가 작품인 '코끼리 아이' 글 속에 ‘작가라면 몇 가지 W로 시작하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육하원칙을 썼고, 이것을 대한민국 교육부에서 그대로 차용하여 환갑 넘은 작가들도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를 지금까지 비판 없이 사용하고 있다. 아직 키플링의 육하원칙을 따르는 사람이 있다면, ‘현대 심리학이나 현대 논리학을 전혀 모르는 무식 용감한 사람이다’라고 대놓고 비판하는 세상에 말이다. 하지만 이 바닥엔 이미 관행이 되었다.
구어체 문어체가 없는 글을 사용하는 나라와 이게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나라에서 어느 나라가 문학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글은 독자가 바로 이해 할 수 있어야 한다. 두 번 세 번 읽고 이해하면 뭔가 잘못 된 글이고 백번 읽어도 이해가 안 되면 그 글은 읽지 말아야 할 글이다. 작가들이 책을 낸 것을 축하한다고 많은 문자가 올라온다. “청안욱필하소서.” 확실한 뜻은 잘 모르지만 멋진 말이 아닌가. 책 낸 작가에게는 축하드린다는 인사말 대신 “상재하셨습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또한 용비어천가에서나 나옴 직한 멋지고 찰진 단어 아닌가. 절대 내 머리에선 나올 수 없는 단어들이다. “건필하십시오” “옥고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왜 내가 조선 시대에 사는 느낌이 들까. 우리말을 희한하게 만든 장본인이 국어 문법학자와 기자 그리고 작가들이라고 하니 기가 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