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은 그렇게 수영과 몇 번을 만나고 바로 시험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려던 지민은 도저히 학교 도서관에서
자리를 마련할 수 없어서 집 근처 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세림을 통해 수한이 그곳에서 공부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리를 잡아
달라는 전화도 미리해두었다.
수한은 지민의 전화를 받은 뒤로는 문이 열릴때마다 들어오는 사람이
혹 지민은 아닐까 싶어 자꾸 쳐다보고 있었다. 당장 내일로 닥친 전공
시험에만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시간인데 집중하지 못하고 지민에게만
신경이 가 있는 자신이 우습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럴수록 더 문을
보고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마침내 지민이 검정색 가방을 메고 안으로 들어왔고 수한은 손을 높이
들어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렸다. 요즘 들어 많이 밝아보이는 얼굴에
수한도 기분이 좋았다. 수영의 일도 궁금해져서 물어보려고 연습장을
한장 찢었다.
[얼굴 좋아진거 같다. 무슨 좋은 일 있어?]
지민이 가방을 풀고 자리를 잡은 걸 확인하고 수한은 자신의 칸막이
건너편에 앉은 지민에게 쪽지를 써서 보냈다. 하지만 자신의 책상으로
넘어온 것은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쪽지와 함께 시원한 음료수였다.
다리를 들어 맞은편의 지민을 몇 번 툭툭치고는 다시 쪽지를 넘겨본다.
[확인은 했어?]
[응.]
[어때?]
[수영씨 참 좋은 사람인 거 같아.]
[그냥 좋은 사람인 거 같아?]
[응. 굉장히 따뜻해.
그 사람이 수영이가 맞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냥 좋아.]
수영이가 맞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냥 좋아...
수영이가 맞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냥 좋아..
수영이가 맞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냥 좋아.
몇 번을 왔다갔다한 쪽지를 눈으로 반복해 읽으며 수한은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수한은 눈에서 종이를 떼지 못하고 있는데 쪽지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지금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수영일 것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도서관의 거추장스럽고 답답할 정도로 높은 칸막이가 고맙게 느껴진다.
* * *
[콘서트랑 영화 중에 하나만 선택해요 ^^*]
지민이 마지막 시험을 보고 천천히 걸어 나오는데 수영에게서 문자가
왔다. 무슨일인가 궁금했지만 무슨 일인지 묻지 않고 수영의 말대로
한 가지를 선택해서 답장을 보냈다.
[잘 됐네요. ↖^^↗ 나도 소리지르고 싶었는데. 어디에요?]
다시 문자로 답장을 보내려다 직접 말을 하는게 덜 수고스러울 것 같아
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학교 정문에서 지민을 기다렸다는 수영의
말에 빠른 걸음으로 교정을 지나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자신은 이기적인 이유로 그를 귀찮게만 하는데 이렇게 챙겨주는 그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수영이 말한 콘서트는 군대를 가는 가수가 하는 마지막 콘서트였다.
꽤 큰 규모였는데 자신이 아는 외국곡도 꽤 많이 불렀고 열광하는
관중들과 그에 보답하듯 열띤 공연을 펼치는 가수가 멋있어 보였다.
그렇게 중간중간 말을 하기도 하며 쉼없이 달려오던 공연이 마지막으로
접어들었다. 그 가수는 천천히 정리를 하며 앞으로 한동안 자신을 못
볼것이라고 말했고 그 말에 공연장은 아쉬움으로 가득 찼다.
이어서 자신이 제대를 하고 다시 음반을 내면 아마 지금 여기에 모인
사람들 중 몇몇은 자신을 잊을 것이라 했다. 팬들은 아니라고 언제든
기다릴거라 했지만 그는 그 말에 기분이 좋은지 아니면 아쉬운지 그래도
괜찮다고 했다. 다만 자신의 음반을 보면 '이런 가수도 있었고, 내가
꽤 좋아했었지.'라는 것만 다시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끝까지 기다려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왜 그래요?”
공연이 다 끝나고 빈 무대를 바라보던 지민에게 수영이 물었다.
“기다려 달라는 말은 하지 않네요.”
“시간이 가면 잊혀지기 마련이니까요.”
“다 잊혀질까요? 잊혀지기는 할까요.”
들리지 않게 조용이 숨죽여 말하는 지민의 모습에 수영은 서글픔이
서린 것 같아 안쓰러웠다. 그래서 아무말 없이 그저 바라보며 천천히
등을 쓸어주었다.
“나갈까요?”
수영의 손에 이끌려 나오니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몇 시나 되었나
궁금해서 시계를 보았다. 공연이 긴 것 같지는 않았는데 벌써 시간이
자정을 향해가고 있었다.
“뭐 먹고 들어갈래요?”
“아뇨. 지금 문 연 음식점도 없을거에요.”
“그럼 우리 저거 먹을래요?”
정류장쪽으로 걸어나오자 바로 보이는 노점상을 가르키며 수영이 말을
했다. 지민은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수영은 벌써 지민의 한쪽 팔을 잡
고 그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자요.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요.”
【자,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
저번처럼 막 먹다가 홀라당 데지 말고.
고양이 혀 아가씨.】
꼬치에 꽂혀있는 기다란 어묵을 집어주며 말했다.
뜨거운 것을 호호 불어가며 식혀주는 수영을 보며 애인에게도 참 잘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세요. 제가 할께요.”
지민은 수영에게서 어묵을 받아들고는 직접 입으로 불어가며 천천히
식혀먹었다. 벌써 하나를 다 먹은 수영에게도 하나 집어 주었다.
떡볶이가 생각보다 꽤 매워서 속이 얼얼했다. 하지만 시장이 반찬인지
맛있고 배부르게 먹었다. 지민은 문득 이렇게 누군가와 맛있게 음식을
먹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엔 제가 살께요. 번번히 수영씨가 저 때문에.”
“아녜요. 현빈이는 이런데 오자고 해도 안 오는걸요.
저야말로 혼자 공연보러 오지 않아서 좋아요.”
수영과 말하고 있는데 빈 택시가 보였다. 지민은 손을 들어 그 택시를
잡았다.
“집까지 차비는 제가 낼께요. 타요.”
지민이 웃으며 말했다. 수영은 자신쪽으로 열려진 문을 보며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문이 닫히고 차가 출발했다.
“학생들, 많이 피곤했나봐요.”
횡단보도 앞에 잠시 멈췄을 때 인자하게 생기신 기사 아저씨가 수영을
향해 말을 건넸다. 그의 말처럼 지민이 꽤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전 괜찮은데, 이 친구가 많이 피곤했나 봐요.
오늘까지 시험이었거든요.”
수영은 잠들어 있는 지민을 보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의 자세를
고쳐주며 언젠가처럼 자신에게 기대도록 했다. 미소를 지은채로 잠든
지민의 얼굴이 편해 보였다.
* * *
“너 나 모르게 연애해?”
“응?”
현빈의 갑작스런 질문에 수영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뭐야, 뭔데 맨날 어디다 그렇게 전화하는 거며,
어디에 정신이 팔렸길래 보내달라는 자료도 하나 제대로
안 보내는 건데.”
“미안, 요즘 머리가 복잡했어.”
“복잡한 머리로 문화생활은 잘 되나보지?
콘서트는 잘 봤어?”
무슨 뜻이 있느냐며 수영이 쳐다보자 현빈은 더 다그치듯 보챘다.
하지만 수영은 계속 자리를 피하려고만 할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책쪽으로 시선을 자꾸 돌렸다.
“너 정말 이상해.”
“뭐가, 암것도 아냐. 정리되면 말해줄께.”
“전에 사귀던 애인이랑
이름이 같은 사람이라도 만나는 거야?”
현빈은 전에 수영이 물었었던 질문을 정확히 생각해 내고 물었다.
그러자 들고있던 책을 덮어 아래로 내리고 드디어 수영이 현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런거 아냐.”
“아닌데 왜 나한테는 말 못하는 건데!”
“글쎄 정리되면 말해준다는데 왜 화를 내?”
“지금 화 안내게 생겼어?
나는 뭐든지 말하는데 너는 자꾸 감추려고만 들잖아.”
누군가 자신이 지민을 만나는 것이 사귀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현빈에게
전한 것 같았다.
“니가 내 마누라라도 돼?”
“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파르르 떨며 씩씩거리는 현빈을 보자 수영은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어릴때부터 쭉 같이 자라온 형제나 다름없는 현빈이었다.
“미안, 실수했어.”
수영은 현빈에게 지민의 이야기를 하려다가 아무래도 현빈이 흥분한
상태에서는 안될 것 같아 시험이 끝나는 대로 말해 주겠다고 약속하고는
열람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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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소설 1.
[ 중편 ]
Never Ever 12
네버에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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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4.05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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