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25(연중 30주일) 성공회 대전주교좌교회 설교문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윤정현 신부 (그레고리, 대전주교좌교회)
욥 42:1-6, 10-17, 시 34:1-8, 19-22, 히 7:23-28, 마르 10:46-52
전신자의 날, 서로 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확장되어 참 기쁘고 좋은 하루였습니다.
주님의 뜰 안에서 하루의 시간을 서로 사랑하며 즐겁게 보내는 교우 여러분의 모습이 참 보기에 좋았습니다.
함께 동심에 세계로 돌아간 서로 도우며 운동하는 교우 여러분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어린이, 학생, 청년, 성인, 어르신들이 함께 하나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편 84편 10절에 주님의 뜰 안에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보내는 천 날보다도 더 낫다고 하였는데, 그러한 하루가 되었나요?
옆 사람과 서로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나누십시다.
오늘 복음말씀의 핵심은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라는 말씀입니다.
눈에는 육신이 눈과 마음의 눈(또는 얼의 눈) 두 종류가 있습니다.
소경인 바르 티메오는 오늘 복음에서 육신의 눈이 뜨기를 원합니다.
히브리어로 ‘바르’라는 아들이란 말이므로 바르 티메오라는 말은 ‘티메오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티메오라는 이름이 성서에 거론될 정도면 당시 유명한 사람이거나 예리고 잘 아려진 사람임을 예측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의 아들이 예리고를 지나는 있는 예수님께 큰 소리로 간청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하고 외쳤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두루뭉술하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이 때 티메오의 아들은 구체적으로 예수님께 구합니다.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의 말씀이 떨어지자 곧 소경은 눈을 뜨고 예수를 따라 나섰다. 소경은 육신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대개 새로운 세상, 사람과, 집, 꽃과 나무 등을 새롭게 보게 되면 보느라 정신 없을 것입니다.
다른 기적 설화에서처럼 친구나 집으로 돌아가 자랑하러 뛰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르 티메오는 집으로 뛰어가거나 사물을 보는데, 정신이 팔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육신의 눈만 뜬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도 뜬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경이 아닌 우리는 어떠한 눈을 떠야 할까요?
요사이 나이 든 지성인 어르신이 세태에 대하여 한탄하며 “눈에 뵈는게 없나(眼下無人)” 라는 시를 썻는데, 한 번 읽겠습니다.
눈에 뵈는 게 없나?(眼下無人)
새파란 젊은이가 입에 담배를 꼬나물고서 번잡한 거리를 버젓이 걸어가는 꼴을 자주 본다
눈에 뵈는 게 없으니 늙은이의 백발이 보이겠는가?
사춘기의 청년남녀가 둘이 찰싹 붙어 속삭인다 전철 안에 여러 승객들의 시선은 아랑곳 안 한다
눈에 뵈는 게 없으니 여러 사람들의 눈길이 뭔데
지방의회 의원들 저이 받을 세비를 두둑하니 올려 어려운 백성들을 위해 일하겠단 입 발린 소리이지
눈에 뵈는게 없으니 당선된 뒤라 시민이 두려울까?
나라의 국회의원들이 의사상에서 난장판쳐 잘난 모습에 점잖은 체면은 어디에 동댕이 쳤나
눈에 뵈는 게 없으니 권력과 먼 국민이 보이랴
나이를 쉰살이나 먹은 이가 여덟살소녀를 성폭행 옛사람 이르기를 쉰이면 천명도 안다고 하였거늘
눈에 뵈는 게 없으니 없이 계시는 한웋님 거리끼랴
집주인이라는 자가 제집 지하방에 세든 이의 가스배관을 뚫어 칠년동안 가스를 훔쳐왔다고
눈에 뵈는 게 없으니 하늘아래 무서운 게 없지
두눈은 멀건히 떴지만 맘속에 얼눈은 장님이라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운줄도 몰라
하느님 아버지 저 가엾은 이들 속눈을 뜨게 하소서
(2009.10.5 박영호)
이 시는 얼른 보아 육신의 눈, 사회를 보는 눈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나가서 마음의 눈, 얼의 눈으로 하느님을 보게 하소서하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보게 속 눈 뜨게 하소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시를 썼습니다.
사회를 보는 눈 말고 또 다른 눈이 있습니다.
마음의 눈, 영의 눈 즉, 얼의 눈은 오랜 수덕과 관상기도를 통해서 열리는 눈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고 이해하는 지혜의 눈이 열려야 떠지는 눈입니다.
영성신학에서 영혼의 밤을 거처 순수한 영으로 정화되면, 하느님의 영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이 때, 인간의 오감, 감성으로 알게 된 것과 인간의 경험, 지식, 이해 그리고 인간의 정신세계의 지성(intellectual), 기억(memory), 의지(will)까지도 정화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느님은 영이시기에 영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 경험, 이해, 감각, 기억, 의지 등등 모두 내려놓아야 순수 영혼이 되어 영이신 하느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과 하나가 되는 합일 체험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영성가들은 한결같이 영혼의 밤의 터널을 지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언어로는 영적 세계를 표현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당시 동방의 최고의 지성인, 지혜의 사람, 동방의 의인이라고 하였던 욥이 오랜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는 가운데, 마음의 눈을 뜨고 하느님의 세계를 이해하게 됩니다.
오늘 제 1독서 욥의 결론부분인 42장에서 욥은 고백합니다.
자신의 말과 생각, 자신이 이해했던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이고, 모르고 지껄였던 것이라고 욥은 솔직히 고백합니다.
욥은 ‘무지의 지’(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을 아는 지혜)로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게 됩니다.
지혜의 눈이 열려, 모르는 세계, 어마어마한 거룩한 세계를 보게 되고 됩니다.
이것을 하느님 앞에서 어마어마한 거룩한 체험이라고 합니다.
종교학에서는 누미노제 체험이라고 말합니다.
이 체험을 하면 “하느님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아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1고린 13:12)고 바우로도 영적으로 정화 받은 사람은 우리가 불완전하게 아는 것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해서 욥은 마음의 눈, 지혜의 눈이 열렸을까요?
자신은 잘못이 없고, 하느님께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말한 욥이, 친구들이 조언하고 자신의 잘못을 성찰하도록 계속해서 간언을 했어도 잘 못이 조금도 없다고 했던 욥이 어떻게 마음의 눈이 떴을까요?
어떻게 하여 욥은 최고의 지혜를 얻게 되었을까요?
욥이 얼의 눈, 영의 눈을 뜨고 새로운 하느님의 세계를 알게 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도, 온 몸에 종기가 나고 몸이 문드러져 가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욕심과 분노심, 육체적 즐거움을 찾는 어리석음, 삼독(三毒)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최고의 지혜를 아는 눈이 열렸습니다.
어떤 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지속적으로 기도했기 때문에, 고통과 어려움을 겪은 후에 힘든 과정을 극복했기 때문에 마음의 눈이 열렸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욥은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게 되었고, 자신의 잘못을 재를 뒤집어 쓴 채 통회하였던 것입니다.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이루십니다.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운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욥 42:2-6).
바른 눈을 뜬 욥에게 하느님은 온갖 축복과 장수의 복을 주십니다.
소박하고 겸허한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축복과 오래 사는 복을 주십니다(욥 42:10-17).
땅바닥까지 낮아진 사람, 하느님 앞에 두 무릎을 끊은 겸허한 사람, 온순한 사람만이 땅을 차지하리라(마태 5:5)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완벽한 사람의 모범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거룩하고 순결하고 흠도 죄도 없고 하늘보다 더 높으신 대사제가 필요합니다.
다른 대사제들은 날마다 먼저 자기들의 죄를 용서받으려고 희생제물을 드리고 그 다음으로 백성들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날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속죄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이 일을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율법을 따라 대사제가 된 사람들은 연약한 인간이지만 율법이 생긴 이후에 하느님의 맹세의 말씀을 따라 대사제가 되신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영원히 완전하신 분이십니다”(히브 10:26-28).
예수님은 지혜의 눈이 열러 단 한 번에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성윤이 엄마란 사람이 이러한 기도문을 썼습니다.
참 소박하고 순수한 꿈을 가졌습니다. 아주 겸허하고 온순한 어머니,
땅을 차지할 어머니의 마음으로 기도문을 쓴 주부가 있어 함께 읽어 보고자 합니다.
“저희 아이에게 예쁜 손을 주신 주님,
그 예쁜 손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것처럼 이 아이의 손을 통해 귀한 예술품이 나오게 하시며 아름다운 인생을 빚어가게 하옵소서.
누구보다도 예쁜 손을 만들어 주신 주님, 이 손으로 복되고 귀한 일을 하게 하옵소서.
저희 아이에게 복된 손을 주신 주님,
이 복된 손이 머무는 곳마다 더러운 곳이 깨끗해지고, 아픈 사람들이 위로받게 하시며,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곳에는 섬김이 있게 하시고 추한 곳에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손이 되게 하옵소서.
이 손이 복되고 관대해 가난한 자에게 많은 것으로 나누어 주고 구제하게 하옵소서.
언제나 관용하는 손, 인색하지 않은 손이 되게 하옵소서.
저희 아이에게 부지런한 손을 주신 주님,
잠언 31장에 나오는 부지런한 아내의 손같이 어디에서나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한 손이 되게 하여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기업을 이루게 하옵소서.
그 손으로 복된 소식을 써서 전하는 문서 선교를 할 수 있게 하옵시며, 건강하고 복된 인생을 누리게 하옵소서.
귀한 손을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