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규
이석규 열사 묘소 (남원시 사매면 소재)
여기는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노조설립 투쟁시 폭력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산화해 가신 이석규열사...
망월동으로 가다 시신 탈취로 여기 남원 선산으로 왔다.
비석에는 김ㅇ중 회장이름을 지운 흔적도 있다.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방명록
노무현 이야기/사료이야기
⑧87년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사건과 변호사 노무현의 구속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1981년 부산지역 최대 용공조작 사건인‘부림사건’은 변호사 노무현을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였다.
부림사건 변론을 계기로 변호사 노무현은 돈 많이 벌고 흔히 ‘잘 나가던’ 조세전문 변호사에서 인권·노동 변호사의 길을 걷는다.
사회 현실에 눈을 뜨면서 독재권력의 폭정과 사회 불의에 맞서 부산지역 시국사건과 노동사건 변론을 도맡는다. 변호사 사무실에 부산공해문제연구소와 노동법률상담소가 차려졌고, 변호사 노무현은 법정 아닌 거리의 시위현장을 누빈다.
노무현 변호사는 대우조선 노동자들로부터 사체 부검 입회 및 진상조사 요청을 받고 거제로 달려간다. 노동자와 유족들을 도와 사태수습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온 노 변호사에게 당국은 ‘장례식 방해’와 ‘3자개입’ 혐의를 씌워 구속한다. 그리고 부산구치소에 수감되어 23일간의 옥살이를 한다.
사료편찬위원회에서는 당시 노 대통령이 대학노트에 자필로 쓴 22장 분량의 <故 이석규 장례관계 사건일지>와 15장 분량의 <영장에 기재된 소위 범죄 사실에 대한 나의 항변>을 입수해 공개한다.
노 대통령은 <사건일지>에서 사태수습과 진상조사 활동에 대한 일자별 행적을 기록하면서“이석규 사망이 경찰이 저지른 고의적 살상”이라고 규탄한다. <사건일지> 말미에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료 뒤에 간략한 사건 개요를 붙였다.
故 이석규 장례관계 사건일지
변호사 노무현
나는 1987년 8월 22일 저녁, 민협(부산민주시민협의회) 사무실로부터 대우조선 이석규 씨가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숨졌다는 말을 듣고 다음날 아침 8시 배편으로 거제로 갔다가 26일 18시30분 옥포발 배로 부산으로 돌아왔다.
내가 거제 있는 동안 우리가 한 일에 관하여는 우리가 그곳에 있을 때부터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 내가 부산으로 돌아오고 난 이후에도 계속 정부나 언론의 공격을 받아왔다.
마침내 이상수 변호사는 먼저 구속되었고, 나는 9월 2일 23시경 장례식 방해, 노동쟁의조정법 위반 등의 죄명으로 구속되었고 지금 해운대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앉아있다.
나는 이후에도 이 문제에 관하여 수사 과정에서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반역적 독재집단의 잔재들로 이루어진 정부의 탄압이 있고, 그 장단에 춤추는 검찰과 법원이 있을 뿐 진실을 밝히려는 정의를 세우려는 검찰도 법원도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그들과 함께 하고자 하였던 선량한 우리 대중들마저 언론의 거짓말 보도 아래 판단이 흐려져 있는 듯하여 진실을 밝혀두고자 한다. 이하의 기록은 기억이 허용하는 한 내 양심을 건 진실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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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칠년노동자대투쟁87年勞動者大鬪爭
요약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민주적 노동조합을건설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분출한 노동자들의노동쟁의와 가두투쟁을 가리킨다.
/현대사
내용
1987년 6월 항쟁은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 최고의원이 6·29선언을 발표하고 직선제 개헌을 약속함으로써 일정하게 막을 내렸다. 하지만 7월부터는 노동자들이 민주노조건설, 임금인상, 근로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며 격렬한 민주화운동을 전개한다.
19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현대그룹에서 시작되었다.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자들 노조를 결성했고, 7월 16일 현대 미포조선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결성 신고서류를 탈취당하는 사건이 일어나 대립이 격화되었다.
7월 하순에는 민주노조운동이 영남권으로 확대되었다. 마산, 창원 지역의 대공장들이 민주화운동에 합류한 것이다. 8월 17일과 18일에는 3만여 명의 울산 현대그룹노조연합(현노협) 노동자들이 가두시위를 전개해 도시 전체에서 흡사 해방구와 유사한 상황을 연출했다. 뒤이어 노동자대투쟁은 부산과 거제로 확산되었으며 옥포 대우조선 노동자들이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8월 22일에 이석규 노동자가 직격 최루탄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석규 열사 투쟁으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8월 28일 이석규 열사 장례식 이후에 노태우 정부는 대대적인 탄압을 개시했다. 9월 4일 대우자동차와 현대중공업 파업농성장에 공권력이 투입되어 농성과 시위를 벌이는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시켰고 대규모 구속 사태가 벌어졌다. 이와 더불어 9월부터 제조업 노동자들의 투쟁은 점차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노태우 정부는 제3자 개입, 위장취업, 좌경용공 등의 여론 공세를 펴며 노동자들이 민주화운동을 고립시키려 했고, 기업주는 휴폐업 조치로 대응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민주화운동은 수도권, 경인지역의 중소기업과 비제조업으로 확산되었으며, 운수, 광산, 사무, 판매, 서비스 등의 직종에서 파업투쟁이 지속되었다.
7·8·9월 노동자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이 주로 요구한 것은 8시간 노동, 노동악법 개정, 노동3권 보장, 자유로운 노조결성 보장, 블랙리스트 철폐, 생존권 보장, 작업조건 개선, 저임금 개선 등이었다. 이와 같은 요구사항들은 노동자대투쟁이 기본적으로 경제적 민주화운동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동자대투쟁의 결과로서 1987년 12월 말 기준 노동조합수 4,103개(1986년 2,675개), 조합원수 1,267,457명(1986년 1,035,890)으로 증가했고, 1987년에 일어난 노동쟁의 3,749건 중 3,341건이 7·8·9월에 발생했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노동자들의 유익한 조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노동조합의 이념과 기능을 체득할 수 있었고, 노사 간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는 유효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노동자들의 최초의 대규모적인 분출이라고 평가되고 있으며, 민주노조결성, 어용노조의 민주화, 대폭적인 임금인상 등의 성과를 성취했다. 물론 이것은 6월 항쟁의 정치적 효과 가운데 하나였다. 그동안 제5공화국 정부의 강력한 억압과 탄압에 억눌려 있던 노동자들이 일정하게 정치적 자유가 허용된 국면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6월 항쟁에 비해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상대적으로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한바가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이후 노동자대투쟁은 민주노조운동의 연장선에서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건설로 이어진다.
참고문헌
『6월 항쟁』(서중석, 돌베개, 2011)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이행과정』(윤상철,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현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학 관련 최고의 지식 창고로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국학 지식 백과사전이다.
http://encykorea.aks.ac.kr
남원사매, 故이석규 열사 28주기 추모식 열려
2015.08.24 15:48:51
지난 22일 남원시 사매면 故이석규 민주노동열사 묘지에서 열린 추모식에서는 올해로 28주기를 맞은 추모행사를 위하여 추모비를 설치하고 故이석규 열사의 뜻을 기렸다.
故이석규 열사는 1966년 사매면 대신리에서 태어나 용북중학교를 졸업한 후 어려운 집안 형편을 돕기 위해 상급학교에 진학을 포기하고, 1983년 대우조선에 입사하여 조립부에서 근무하다가 1987년 8월 22일 노동자 대투쟁 당시 거리투쟁 중 최루탄을 가슴에 맞고 병원에 후송되었다가 사망했다.
이날 추모행사는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남원시민노동연대, 민주회복남원모임에서 주관하였으며, 故이석규 열사의 유가족, 시민단체, 각계각층 인사들이 참석하여 故이석규 열사를 추모하며 故이석규 열사의 정신 선양 및 계승 발전을 위한 자리가 되었다.
박용근 기자 news2200@naver.com
<저작권자 © 데일리전북
영화 `변호인` 마지막씬 실제 연출자 JPG
노동자들을 돕다가 구속된 노무현변호사
(대우 조선소)
그 당시 노무현변호사 구속 사건
진상조사위원장이
문재인변호사였다.
문재인은 부산에 등록된 변호사들을 모두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며 변호인단을 꾸렸다.
(부산 변호사 142명 중 99명이 변호인단으로 참여 )
#피고인 노무현’에 대한 문재인 변호사의 변론요지서.
(실제 원본) 마지막 페이지
(출처 - 노무현 사료관)
노무현은 석방된다.
출소당일
(김광일변호사, 권양숙여사, 문재인변호사)
첨부파일8스크랩 원문 : 젠틀재인 - 문재인과의 동행
무척 감동받았던장면..... 이니의 작품이었군요.... 영원히 역사에 빛날인물 노무현....
일베 이 ㄱㅅㄲ들아
니들이 함부로 주둥이에 올리실 분들이 아니다
두 분을 욕보이지 마라
Daum 백과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