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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강단-560 성도들의 가정생활(베드로전서3장1-6절)
성경말씀은 베드로전서 3장 1절에서 6절까지 봉독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베드로 사도께서 소망에 대한 말씀을 쭉 해 오시면서 가정생활을 할 때에 여성들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는 얘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가정생활뿐 아니라 사명자들이 사명자의 길을 가거나 혹은 순교자의 길을 간다고 할 때도 그 아내의 자세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실 박해 시대에 교역자가 된다든지 이런 복음전도자가 되는 분들이 결혼을 하지 않거나 또는 못하게 하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아내나 자식들이 마음이 약해지면 순교자의 길을 가거나 고난의 길을 갈 때 큰 부담이 됩니다.
그래서 지금 이 험악한 날이 다가올 때 그 아내된 사람들이 조그만한 어려운 일 조금 두려운 일도 그렇게 못 견뎌하고 하면 남편도 마음이 약해지는 거죠.
6절 끄트머리에 보면,
..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그러니까 어떤 아내들은 네로황제 박해라든지 앞으로 250년간 계속될 어떤 박해에서 남편을 잃어버리게 되는, 여자들을 잡아 죽이는 것은 많지 않으니까..
그런 일들이 일어날 때 그 아내된 자들의 의연한 자세는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예요.
주기철 목사님의 사모님 되시는 분은 남편이 살아서 돌아오면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겠다. 그 정도로 당당했다는 거예요.
대단한 분이죠.
당당하게 순교해야지 살아서 돌아올 생각하지 마라. 이 정도로 강한 여성이었어요.
그런데 여기 처음에 시작할 때는,
[베드로전서 3장]
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보통 이것만 보지 그 뒤에 어떤 배경에서 이러한 말이 주어졌는지를 잘 모르고 그저 무조건 남편에게 여자들은 순종하라고 했다. 이렇게만 볼게 아니라 그 때에 그 시절에 예수 믿는 남자들은 고난이나 환난이나 고문이나 순교나 이런 일을 앞두고 있는 그런 남편들이기 때문에 아내들이 자세를 똑바로 해야 남자들이 바른 길을 갈 수 있다.
이런 정신이 여기 들어있다는 거죠.
또 어떤 경우는 남자들이 믿지 않는 경우가 있죠.
우리 교회는 그래도 아내 남편 거의 다 믿는 편인데, 혹 남편이 교회 안 나오는 경우가 많아요. 대체로 보면..
그럴 때 사도 베드로의 말이 2천년 전에 한 말인데, 오늘 들어도 천번만번 옳은 말이야.
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순종하고 복종하라.
..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남편이 믿지 않는 그럴 경우에,
..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여성들의 강점이 말을 잘 하죠.
그래서 그 말 잘하는 그것을 가지고 남편을 이겨가지고 꺾어가지고 교회에 나오게 하겠다. 이것은 아예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그리고 우리가 남편에게뿐 아니라 아무에게도 변론이나 말 잘하는 것을 가지고는 전도가 안 됩니다.
사람들이 그러죠. ‘예수쟁이 말은 잘 한다.’
그러면 더 안 나와요.
우리가 만약에 변론해서 이론적으로 우리가 이겼다. 그러면 기분 나빠서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절대로 우리가 이론으로 변론으로 꺾어서 그 사람들 기분 나빠 교회에 안 나오니까 말을 안 하는 게 좋습니다.
그저 ‘예’ 하고 ‘아니오’ 하고 그 외에는 아예 그냥 전도한다 할지라도, 전도야 교회까지 오신 분들에게 도를 심어주는 것은 말로 하지만, 교회 나오게 하는 데에는 말로 안 돼요.
행실로만 가능해요.
그 행실이 선한 행실 정결한 행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런 품성 자세.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거죠.
그래서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남편들이 구원된다..
제가 볼 때는 행실뿐 아니라 성품도 중요해요. 성품..
아내들이 성품을 잘 가다듬어서 남자들은 어차피 가족들에게 라든지 일반사람들에게 합법적으로 주먹은 못 쓰잖아요. 주먹은 못 쓰는데, 그러면 할 수 있는 게 남자 뭐 내놓을 게 있습니까?
돈 벌어오는 것 자존심 하나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자존심을 상하게 해 버렸다.
우리 예수 믿는 자매들이 무슨 살인을 하겠어요? 간음을 하겠어요? 도둑질을 하겠어요?
그런 것은 안 하는데, 제일 하기 쉬운 게 말로서 남편이나 가족이나 어른들이나 이웃이나 친구나 인간관계 가운데에서 남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 말을 함부로 해가지고..
그러니까 말을 아예 안 하는 게 제일 좋아요.
나중에도 나옵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라..
말을 하지 말라고 했어요. 말을..
우리가 말을 함부로 해가지고 사람들 마음을 상하게 하는 거야.
그래서 절대 말로서 남편을 꺾어서 교회에 나오게 하겠다. 이것은 아예 안 됩니다.
베드로 때도 안 되고 지금도 안 되고 앞으로도 안 돼요.
그래서 항상 행실로,
2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저 여편네가 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정결한 행위를 볼 때, 하나님의 능력이 오묘하다.’ 하고 남편이 감동되게 그렇게 살아야 돼요.
그리고 3절에는,
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여성들은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욕망이 돌아가실 때까지 그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세벨 눈썹 그리는 것 봤잖아요.
예후가 자기를 잡아 죽일려고 오는데 눈썹 그리고 있는 것 보면 아름답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또 남자들은 그것을 알아줘야 돼요.
여자가 아름답고 싶은 욕망은 대단하다는 거야.
그런데 그 단장을 할 때 예수 믿는 사람의 화장은 달라야 돼요.
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외적으로 자꾸 지나치게 하지 말고, 분수에 맞게 조금 절제된 조금 모자란 듯한 그 정도로 해야지, 넘치게 되면 사람의 속이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조심해야 돼요.
참 아름다운 성품을 갖고 있다면 옷을 수수하게 입을수록 인품이 더 돋보일 수 있는 거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그러니까 사람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온유할 때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 다음에 마음에 평안이 있을 때 안정하고 정숙하고 그리고 평안하고..
평안과 정숙이 마음속에 있을 때 그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다.
그리고 여간 어려운 일이 생겨도 안절부절 못하고 그렇게 하지 말고, 평안하게 그런 자세가 되어 있어야 돼요.
예수 안 믿는 사람들 보면 조금 좋은 일 생기면 ‘와 이래 좋노’ 하면서 길길이 뛰고 하다가, 조금 어려우면 완전히 살림 다 산 것처럼 이렇게 겁을 내고 낙심하고 술을 퍼마시고 이렇게 하면 안 되고, 항상 한결같이 마음속이 평안하고 온유하고 이런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굉장히 돋보인다는 거예요.
‘도대체 저분들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어떻게 저런 평안이 있나?’
그리고 늘 조용히 소리없이 웃는 모습들 이런 모습들이 아주 값진 단장품이 된다는 거예요.
5절입니다.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전에’ 라는 것은 대개 구약시대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았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다.
예를 듭니다.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선을 행하고 정결한 삶을 가지고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으로 살아가면, 살아있으면 일할 것이고, 죽으면 하나님께 간다 하고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 가는 것이다.
바울이 그러잖아요.
그저 내가 간절히 바라는 소망은 이 육체를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는 그것이 더 바라는 것이지만, 살아있는 것이 교회를 위해서 유익하다면 어느 편을 택할지 모르겠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그런 자세를 가지고 살았어요. 바울이..
그래서 애굽에 가서 사라를 빼앗겼을 때 사라가 그 남편이 시원찮아 보이겠죠.
그렇다고 아브라함과 바로왕과 싸울 수 있습니까?
아내 빼앗기고 사라가 바로왕의 왕궁에 들어갔을 때 얼마나 불안했겠어요?
그렇지만 조용히 담대하게 고요하고 안정한 심정으로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된 것이다.
그 다음에 7절에,
7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남편 된 사람들이 아내에게 무리하거나 무례하게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요구하거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남자도 연약한 겁니다.
남자가 별로 강한 게 아녜요. 여자는 조금 더 연약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안 약한 것 같지만 다 약해요.
어려운 일 안 닥쳐봐서 그렇지, 어려운 일 닥치면 우리 믿음이 한 방울도 없는 것 같은.. 굉장히 약한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려움을 안 겪어보면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 몰라요.
어려운 일을 겪어봐야 우리가 연약한 존재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왜 인생이 이렇게 살아가다가 이런 저런 어려움이 있느냐?
우리가 인간인 것을 알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깜박하면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잘 나가고 형통하고 그러면 우리가 까딱하면 교만해져요.
그래서 형통한 날에는 찬송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능히 장래사를 더듬어 알지 못하게 해 놨다.
아무도 미래를 큰 소리 치지 못하게 해 놨다는 겁니다.
그래서,
..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부부라는 것은 잘했건 잘못했건 거의 상이 같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인생을 조금 살아오면서 보니까 부부가 좋은 점도 대개 함께 공유하지만, 못된 것도 닮아가요.
아나니아 삽비라 봤죠? 똑 같아요. 진짜..
그런데 못된 것도 은근히 닮아가지고 남편이 택도 아닌 소리를 하는데, 그래도 남편이라고 아내가 남편 편을 드는 것을 봤어요. 그런 것을 많이 봤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데도 계속 아내는 남편 편이야.
결국은 상도 함께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남편이 잘하고 아내는 못한다고 해가지고 남편은 상 받고 아내는 상 못받고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제가 볼 때..
한몸이니까 상도 공동수상으로 같이 받을 것 같아요. 벌 받아도 함께 벌을 받아야 돼요.
그래서,
..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제일 가까운 사람이 제일 잘 알죠.
아내나 남편이 서로를 제일 잘 알기 때문에 거기서 오금을 딱 걸고 용서 안 하고 섭섭해가지고 꽁 하고 있으면 서로 기도가 막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딴 사람 때문에 기도가 막히는 게 아니고 대개 가족 때문이예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는 그런 말이 있죠.
다른 사람은 많이 섭섭하게 하는 게 없어요.
먼데 사람 우리가 섭섭하게 할 일이 없어요.
우리가 스페인 사람 섭섭하게 할 일이 없잖아요.
브라질 사람 그렇게 섭섭하게 한 일이 없는데, 가족은 우리 바로 옆에 매일 부딪히면서 사니까 흔히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섭섭하게 하거나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우리 한국사람이 아르헨티나 사람과는 잘 지내는데 일본사람과는 맨날 잘 못 지내죠.
가까운데 있다보니까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그런 것처럼, 부부사이에도 그런 거죠.
말라기서를 우리가 볼 때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아라.
조강지처가 와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남편들이 그것도 모르고 걸핏하면 부인을 구박하고 그런 것을 두고 궤사를 행한다. 그런 얘기가 있어요. 말라기 우리가 봤지 않습니까?
3장 8절,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산상보훈에 있는 윤리의 기본이죠.
몸을 가졌으니까 자기도 육체가 있으니까 육체로 고난당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라.
..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동정이라는 것도 하나의 사랑이죠. 헬라어로 엘레오스라고 하는데, 측은지심 동정심 아픈 사람의 어려운 사람의 심정과 입장을 이해하는 마음, 이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손을 펴서 도우려는 마음 이런 마음이 중요한 거죠.
긍휼이 없는 사람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다.
우리 지난번에 야고보서에서 봤지 않습니까?
그래서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남을 불쌍히 여겼다고 고자세에 있으면 안돼.
나는 잘 나가고 너는 불쌍하다 이런 고자세에서 하면 안 되고, 그들과 함께 곁에 서는 겁니다.
아픔을 당하고 어려움 당한 사람 곁에 같이 있어주는 거예요.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않는 게 산상보훈의 기본 정신이죠.
..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기 위해서 욕을 욕으로 갚지 아니하기 위해서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때는 이것을 문자대로 실천했어요.
이것을 해석하고 하지 않았습니다. 문자대로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말씀을 자꾸 에누리 하거나 자꾸 해석해서 왜곡하지 말고, 그대로 실천하면 거기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대로 실천하면 항상 내가 손해보는 것 같습니다.
항상 내가 손해보는 사람이 있어야 누가 덕보는 사람이 있는 것이지, 항상 내가 이익을 챙기면 항상 누가 손해보는 거예요.
그래서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어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선택을 받았고 부르심을 입었으니,
..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복을 빌어주고 복을 나누어 주고 하는 사람이 복을 유업으로 받는 거죠.
10절,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이것처럼 중요한 게 없는 거예요.
교회가 왜 무너지느냐?
입에 재갈을 물리지 않는 것 때문에 무너집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 피로 세운 교회를 사람들이 말 함부로 해서 무너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 악한 사람 다 보고 계신다 그 말이죠.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왜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하는 말은 당시에 기독교인들이 해를 입을까 해를 당할까 또 순교나 핍박이나 고문을 당할까 너무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너희가 네로가 오건 바로가 오건간에 일단 선을 행하고 있어. 그냥..
선을 행하는데, 누가 너희를 잡아가겠느냐?
너무 겁내지 말고 벌벌떨고 그렇게 추태를 부리지 말고 품위를 잃지 말고 열심으로 선을 행하라.
그러면 열심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소문이 날 것 아니냐.
그 열심으로 선을 행하는데, 누가 너희를 잡아 가겠느냐?
지금 현재 박해를 앞두고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돼요.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 보이고 안 들리는 거예요.
대박해가 지금 다가오는데 이것이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고 250년간 계속될 거야.
AD64년에 네로황제 박해로 시작해서 AD311년까지 갈거거든.
그래서 제 1라운드 박해 시기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해요.
어떻든 우리가 그냥 까딱하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데 이판사판이다 하고 나 몰라라 하고 악을 행할 수 있는데, 베드로 얘기는 이판사판이거든 선을 행하고 죽으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는 선을 행하고 죽으라.. 죽어도..
겁이 나서 안절부절 못하고 추태를 부리고 그렇게 하지 말고, 의연하게.. 어차피 죽을 때 폼나게 죽을 준비를 하라는 말이예요.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저희’라는 것은 세상사람들이죠.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또 소동도 하지 말고, 막 그저 죽지도 않았으면서 죽겠다 살겠다.. 그러면 품위를 잃어버린다는 거야.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않음으로 그의 딸이 되었다 하면, 어려운 일 닥칠 때 저희 세상 사람들은 두려움 당하겠지만 너희는 두려워 하지 말고 소동하지 말라.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지금 굉장히 두려워할 때인데도 전혀 얼굴에 동요하는 기색 하나 없이 마음에 평강이 보이고 온유함이 보이면, 세상 사람들이 묻지 않겠어요?
‘도대체 당신들은 무슨 소망이 있다고 지금 순교로 말미암아 죽거나 고문당할 텐데, 이렇게 태연자약 할 수 있느냐?’ 하고 물어오면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하라..
그럴 때 웅변을 하라는 게 아니라 조용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항상 우리의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거든 대답할 수 있게, 온유함으로 하고 두려움으로 조용하게 증거할 수 있도록..
절박한 그런 대환난 박해가 다가올 때 그 성도들 아끼는 마음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이 퇴색하지 않게 믿는 사람답게 고난을 맞이하지만 구차하게가 아니라 정말 의연하게 맞이하는 그런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겉으로 선한 채 하라는 게 아니라, 선한 양심을 가지라.
..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워낙 우리가 선해버리면 우리를 욕하던 사람이 오히려 부끄러움 당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워낙 선하니까 한편 강도가 욕하다가 강도 앞에 제지를 당하잖아요.
‘이 사람아 너는 같은 형벌 받고도 두려운 것도 없나? 이 사람이 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 사람보다는 현저하게 표가 날만큼 선하게 살아야 돼요.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선한 모습이 안 보이고 그러면 우리를 욕하던 것 그냥 계속됩니다.
우리 기독교인을 비방하고 욕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어떤 길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고 오직 성도의 옳은 행실로만, 최선을 다해서 열심으로 선을 행하는 것만이 우리를 비방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는 겁니다.
17절,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어차피 이판사판으로 고난받을 것 같으면 선을 행하고 고난받으라는 거예요. 선을 행하고..
그런 일을 위해서 우리는 선택된 사람들이다.
베드로의 자세가 이렇게 적극적이예요.
‘나는 선한 일을 했는데 왜 이렇게 억울하냐?’ 이렇게 길길이 뛰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 자격이 없는 거야.
제가 전에도 한번 언급을 했는데 시간이 제법 흘러갔기 때문에 여러분 잊어버린 분도 있을 거예요.
고난을 받는 의미가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이 일곱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꼭 같이 성도인데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성도라도 고난이 있어요.
첫째 어떤 고난이 있느냐?
성도는 성도인데 죄를 짓고 또 짓고 계속 짓고 지속적으로 짓고 반복적으로 짓고 하면 하나님 그냥 두지 않습니다. 때리는 수가 있다는 겁니다.
징계로서 이런 고난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회개시키기 위해서, 회개해서 그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돌이키게 하는 게 목적입니다.
징계라는 것은 결론이 아닙니다. 저주와는 달라요.
징계라는 것은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해서 바로 돌아오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징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징계가 질병이 될 수 있고, 아니면 물질적인 손해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명예에 어떤 손상이 올 수 있고, 그런 징계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고난이 있는데, 그것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실려고 하는 것이 있어요.
자신의 죄도 아니고 조상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낼려고 하는 그런 고난도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의 영광에 참여케 하실려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내가 동참하려고 한다.
왜 고난에 참여하느냐?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도 동참하게 하는..
그래서 힘겨운 일이고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되는, 불이익은 기본이고 이런 고난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받은 많은 고난이 바로 그런 고난이죠.
네 번째는 성도를 연단하는, 성도의 연단과 단련을 위해서 고난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시련이라는 고난이죠.
그 목적은 강하게 하고 순수하게 단련하는 거죠.
단조공장에서 쇠를 다룰 때 불가마에서 벌겋게 달구어서 때리면 단단해지고 부스럭 하면서 어떤 찌꺼기가 나와요. 불순물들이..
그래서 우리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순수해지고 강해진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다섯 번째는 검증하기 위해서, 우리가 정말 바르게 믿는지 스스로 검증하게 하고, 욥이 당한 고난이 그런 겁니다.
정말 내가 하나님을 바로 믿는 건지 잘 몰라요.
편할 때 좋을 때는 몰라요. 그런데 어려움을 닥쳐봐야 그 믿음이 진실한 건지 알 수 있겠죠.
그 다음에 여섯 번째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실려고 주시는 고난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바로 그런 고난이 있었는데, 받은 계시가 너무 크고 놀라워서 까딱하면 교만해질 소지가 있다.
그래서 사단의 가시를 자기에게 주셨다. 그런 고난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일곱 번째 사탄이 어떤 사람을 딱 표적으로 삼아요. 저것을 찍어 넘겨야 되겠다, 저것을 두면 곤난하겠다 하면 그 사람을 그냥 표적으로 삼아가지고 사탄이 집중으로 공략해와서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럴 때도 우리가 추태를 부리지 말고 담대하게 잘 이겨나가야 돼요.
그래서 이런 여러 가지 고난들이 있고, 하나도 우리가 죄를 지어서 받는 고난도 그 고난이 유익할 수 있다는 겁니다.
고난이 없으면 회개 안 해요..
그래서 여러분 지난번에 우리가 야고보서를 볼 때,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 시련 당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런 말을 하잖아요.
다 우리의 유익을 위한 거예요.
우리 육신의 아버지는 때로는 기분 나쁘다고 우리를 때릴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기분 나쁘다고 괜히 우리를 때리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만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할려고 그래서 고난이 있는 거죠.
그래서 이런 고난이기 때문에 이러한 고난은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었고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기만 하면 이런 저런 일들이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지, 우리를 망하게 할려고 온 게 아니라는 겁니다.
심지어 이런 것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 하는데, 안 나오는 게 아니라 나오고 세례를 받고 모든 절차를 다 밟았는데 삐딱하게 가는 거예요.
아무리 지도해도 안 돼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를 죽여버릴 수 있어요. 진짜로 데려갈 수 있다고..
그런 경우는 완전히 끝난 것 같은데, 그런 경우라도 베드로 사도라든지 바울 사도의 말씀은 육체라도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하게 해서 멸하고 그 영이라도 심판날에 구원받게 할려고 한다. 그것도 유익하다는 거예요. 그것까지라도..
믿음이 없이는 그것까지 받아들이기 힘들겠죠.
‘예수 믿다가 삐딱하게 나가다가 죽었으면 시원찮게 믿은 것이고 저주받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쉬울텐데, 바울이나 베드로의 얘기는 육체는 멸하고 영이라도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게 할려고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신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예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만 고난도 허락하시고 시험도 시련도 허락하신다는 거죠.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해야 되고, 여러 가지 시험과 시련을 만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이 맞잖아요.
성경이 맞는 거예요.
어떻게 여러 가지 시련을 당했는데, 기쁘게 여길 수 있느냐? 말도 안 된다 싶어도 말이 되는 거예요. 생각해보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눈치야. 보니까..
그 동안에 우리가 너무 편한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이런 부담되는 말을 수용하기 힘들 거예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그런가 안 그런가..
맞습니다. 맞으니까 성경 말씀이죠.
18절,
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여러분 수요일에 온 사람만 듣는 거죠.
어떻게 예수님께서 죽어가지고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했다 하는데, 옥이 뭐냐?
영어로 사도신경을 번역할 때, 예수님께서 ‘인투 더 헬(into the hell) 지옥에 내려가셨다’ 그렇게 해 놨죠?
‘지옥’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이게..
지옥으로 번역하면 실수예요. 그냥 ‘옥’으로 되어 있어요.
여기 헬라어로 된 것은 ‘필라케’예요. 필라케라는 말은 그냥 감옥입니다. 그냥 감옥..
그냥 감옥이 지옥은 아닙니다.
지옥은 아무도 들어간 사람도 없는데 예수님이 뭐하러 내려가요.
지옥에 제일 먼저 내려가는 것은 적그리스도와 음녀가 들어가요. 거짓 선지자.. 예수님이 재림 했을 때..
아직 지옥에는 아무도 안 들어갔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서 불에게 전도하게?
그러니까 이것은 말이 안 된다는 거야.
그러면 음부에 갔으면 음부라는 단어가 많이 있는데, 음부에까지 내려갔다 하지 않고 필라케라고 되어 있어요.
필라케의 뜻은 ‘보호 감시 파수 보초’ 이런 뜻이거든요.
신약성경에 필라케라는 말이 자주 쓰였습니다.
대부분 이것은 감옥입니다. 감옥..
감옥이라는 것은 지옥은 아닙니다.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여기 ‘옥에’ 라고 필라케라는 것은 지옥도 아니고 음부도 아닌데 거기 가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그 대상이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에 순종치 아니하던 어떤 사람들이예요.
창세로부터 하나님 모르고 죽은 모든 사람이 갇혀 있는 것은 음부이지 필라케가 아니라는 거예요.
여기 나오는 옥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음부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고 그리고 낙원도 아닙니다.
아닌 또 한 곳이 나온 거예요.
그런데 죽은 사람의 영혼이 가 있는 곳이예요.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가 조금 생각을 유연하게 가질 것은 이게 아직도 한번도 제대로 논의가 안 되었거든요.
그냥 난제야. 난제.. 이렇게 보통 우리 기독교에서는 난제라고 제쳐놓은 곳이고, 왜 난제라고 하느냐 하면, 여기 어떤 교리적 가치가 있는 진리라면 여기 한군데만 있어서는 안 돼요.
다른 분도 어떤 사실을 증언할려면 증언이 둘이니까 두 군데 나와 있어야 난제가 아니고 ‘봐라 이분도 이렇게 말하잖아.’ 하고 진리로 확정을 할 수 있는데, 이것은 한군데밖에 없어요.
이런 경우에는 ‘잘 모르겠다’ 하고 난제로 넘깁니다.
신약성경에 그런 난제가 몇개 있습니다.
한곳밖에 안 나오기 때문에 난제로 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하는데, 그렇게 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게 성경에 있고 또 이것 때문에 어떤 목사님이 ‘죽은 자를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야 된다.’ 그래가지고 지금 우리 교단에서 잘렸어요. 그 목사가..
우리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에는 ‘죽은 자를 위해서는 기도할 수 없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렇게 하면 안 돼요. 그 말을 못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이나 빌고 자기 영혼이나 잘 챙기라고.. 죽은 사람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고..
그렇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런 말 해도 안 되고 그리고 죽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뭐가 나쁘냐?’
여러분 나쁘지 않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안 나빠도 옳지 않으면 안 해야 돼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우리 교단에서 그 목사님을 다룰 때 잘못되었다 하고 소환해도 안 오고 재판해도 안 오고 하니까 그냥 제명을 해버렸습니다. 완전히..
그런데 그 목사님도 괜히 고집할게 죽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 하지 말지.. 또 이게 지옥이 아니고 음부도 아니거든요.
이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들어줄 것도 아니고..
결국은 죽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면 유족들이 위로를 받지 않느냐는 거야.
속이는 것이지 그게 어떻게 위로야? 거짓말인데.. 그렇잖아요.
비록 하나님 알지 못하고 죽었지만 긍휼히 여겨 주셔서 천당갈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그렇게 하면 가족이 위로될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위로가 아니라 속임수 밖에 안 되잖아요.
그래서 옳다 옳지 않다 굉장히 논란이 많았는데, 어떻든 이 옥이라는 것은 필라케라는 것은 감옥이라는 말은 되는데, 지옥도 낙원도 음부도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특히 들어가 있는 대상이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에 순종하지 않은 어떤 특정인들이 들어가 있어요. 거기에..
그래서,
..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러니까 이게 지금 죽으면 영원히 모든 사람이 끝장난다.
그렇게 보는 게 일반이지만 우리가 모르는 또 하나의 감옥이 있었다는 것을 이 말씀이 시사하는 거예요. 없으면 모르겠는데, 있으니까..
난제로만 제켜놓을 수 있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한두절도 아니고 꽤 여러구절을 할애해서 쓰고 있거든요.
그것은 어떤 대상으로 예수님이 전파했느냐?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그래서 그 사람들 찾아가서 예수님께서 아마 그 때 그 사람들은 따로 무더기로 한 구덩이에 다 가둬놓은 게 아니라 그런 사람이 있는 곳은 다른가 봐요.
너무 우리가 사후세계에 대해서 정확한 정보가 없습니다.
그래서 겨우 우리가 아는 게 믿고 죽은 사람은 낙원에 당분간 육체가 부활할 때까지, 안 믿고 죽은 사람들은 음부에 둘째 부활때까지 천년왕국 때까지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그 정도밖에 없고, 여기 하나가 더 나온 거예요.
더 나온게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사람들이 있던 어떤 필라케가 있다는 거예요.
음부와도 달라요.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예수님께서 오셔서 세례를 우리에게 말씀하셨는데, 그 세례라는 것은 우리가 세례 받고 물에 집어넣거나 물을 끼얹었을 때 그 물이 죄를 씻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게 아니고 그렇게 할 때 베드로의 세례 정신이 뭐냐 하면,
..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마치 양심이 죽어 있다가 떠내려가다가 살아나서 세상 물결 거슬러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게 세례다..
이것도 굉장히 중요한 얘기죠.
세례 받는다해서 그냥 죄가 싹 씻어지면 물을 한 바가지가 아니고 한 드럼을 가져오지..
그래서 물 자체가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세례의 참된 의미다..
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베드로전서 3장은 조금 어려운 얘기죠.
[베드로전서 4장]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 육체의 고난을 받아서 죄를 그칠려고 하면 우리가 맞아 죽도록 해도 안 되고 지옥에나 가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이 대신 맞아서 우리 죄를 그치게 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나 때문에 누가 죽도록 두들겨 맞는 것을 봤으면 우리가 어떻게 또 나쁜 짓 하겠어요?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쫓아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쫓아서 육체의 남의 때를 살게 할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한 것만 해도 너무 많이 했잖아요. 이제는 그만 하자는 거죠. 그런 것은..
충분히 했고 너무 했으니까 그런 것은 그만 하자..
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 때 죽은 자들은 아까 옥에 있는 영들과 다릅니다.
그것을 연결하지 않도록..
여기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우리가 사실은 다 죽은 거예요.
아담 안에서 다 죽은 사람들인데, 복음이 전파 되었다는 거죠.
..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육체라는 것은 한번 죽게 되어 있어요.
그렇지만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할려고 복음이 전파된 것이다.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었을 때는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하나님처럼 사는 거죠.
우리 낮은 육체 형상을 예수님의 높은 영광의 형체로 변하게 하신다는 거죠.
7절입니다.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그야말로 만물의 마지막, 지구의 역사라는 것은 예수님때부터 마지막때이고, 우리는 지금 그 마지막때의 마지막이예요. 말세지말(末世之末)에 우리가 살고 있는 거죠.
..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기도할 때 몽롱하게 비몽사몽간에 그렇게 하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맑은 정신으로 인격적으로 그렇게 기도해야 돼요.
정신없이 기도해놓고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모르고 그렇게 하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하는 것이 최고죠.
최고 경지가 사랑하는 것이니까..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대접을 해 놓고 원망하고..
부인들 가끔 그런 것 많이 하죠. ‘어느 놈 잡을려고 사람들 데려오나’ 하면서 대접 해놓고 또 원망하고..
대접을 하되 원망없이 해야 돼요.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입이 하나님처럼 무거워야 돼요.
여러분 하나님은 말 잘하지 않죠? 하나님은 말을 잘 안해요.
말을 너무 가볍게 떠들고 수다를 떨고 하지 말고, 조금 무거워야 돼요.
..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내가 잘나서 내 것을 네게 준다.’ 주는 사람은 고자세로, 받는 사람은 비굴하게 하지 말고, 준다가 아니고 나누는 정신..
나눈다 할 때 본래 여기 네 몫도 있다. 하는 그런 나눔의 정신으로 해야 돼요.
..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사실 여기까지 하고 이야기가 끝날 듯 하다가 새로 다시 한번 베드로 사도께서 자기의 마지막 날이 점점 다가온다고 할 때 다시 한번 주의를 환기시킬려고,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자꾸 고난이 다가오는 게 보이죠.
네로황제 박해하에서 이게 쓰여졌다. 점점 일각 그런 역경과 고난과 환난과 시험과 박해와 이런 것이 옥죄어오는 것처럼 마음이 많이 무거워지고 할 때, 믿음이 약한 사람이 흔들리고 할 때, 베드로가 이렇게 아주 강하게 담대하게 하라고 하는 거죠.
..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그런 고난의 정신을 가지고 즐거워하라.
..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받은 사람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즐거워하라는 거예요.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그러니까 열심을 품고 선을 행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했는데, 단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욕을 먹는다면 억울한 게 아니라 복있는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런데,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당연히 목회자가 맨 먼저 끌려나가고 잡혀가고 하는 것이니까,
..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예수님도 그렇게 했잖아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육체는 죽임을 당하지만 그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을 했습니다.
5장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영광에 참여할 마음이 있는 사람은 항상 고난에도 참여해야 돼요.
고난과 힘든 것 어려운 것은 솔솔 빠지고 요리조리 요령 피우고 영광에 참예하겠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노 크로스 노 크라운(No cross No crown)’ 그런 말이 있어요.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장로 된 사람들 교회를 섬기는 기본 자세죠.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면류관을 얻을려면 이런 기본 자세를 예수님께 배운대로 해야 됩니다.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겸손한 자들만 하나님께서 높이실 겁니다.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염려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염려가 있습니다.
왜 염려가 있는 거죠?
박해가 점점 압박해오니까, 박해 당할 때 그 때 겁나는 게 아니라 미리 겁나거든요. 사실은..
막상 닥치고 보면 넘어갈 일도..
어떤 사람은 오기 전에 1년 전부터 근심하고 걱정하고 잠도 못자고..
예수님께서 기가 막힌 말씀을 하셨어요.
‘내일 염려는 내일 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만 해도 족하다.’
하루에 하루뿐씩만 염려하라.
참 예수님께서 대단한 분이죠. 어떻게 그렇게 하라 하는지..
그런데 사실은 염려 해봤자 우리 머리카락 희게 검게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순교하게 되면 순교할 힘을 그 때 주시는 걸로 봐야 돼요.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자꾸 너무 염려하고 너무 근심하고 이렇게 하면 일을 못해요.
그리고 선도 못합니다. 염려가 꽉 들어차면 잠을 못자요.
잠을 못 자면 이튿날 일도 못하고 선도 못하고 아무 것도 못해요.
그러니까,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염려를 절반만 맡기라.’ 그런 것이 아니고 다 맡겨버리라.
지금 교회가 이것을 안 해요.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주님께 맡깁시다.’ 이렇게 하고 마음이 쉼을 얻어야 되는데, ‘주님을 어떻게 믿어? 우리가 알아서 해야지..’
전부 내가 다 알아서 하고.. 이래가지고 서로 피곤하게 만들어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깁시다.’ 하고 넘어가야 돼요.
회복해야 될 말인데, 우리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어요.
우리가 처음 믿을 때만해도 그런 말을 더러 썼는데 이제는 교회에서 들을 수가 없는 말이예요.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돌아보고 계시니까 맡길 수 있지 않느냐?
그러면서,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혼자만 당하는 게 아니고 너희만 당하는 게 아니고 다 당한다.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그러니까 베드로가 성도들이 당할 이 고난이 사실 엄청난 것인데도 잠깐 받는 것이다. 잠깐 받는 거야.
여러분 평생 받았는데요, 평생도 잠깐이야.
인생이 일장춘몽(一場春夢)이야.
하나님이 볼 때는 천년이 하루같고, 여러분 2천년 해봐야 두 사람 평생 밖에 안 돼요. 아담이나 노아 같으면.. 짧은 거야.
우리가 누릴 영원에 비해서는 ‘우리 평생 고생했다’ 해도 그 평생이 잠깐이야.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죠.
그래서 이런 위대한 사람들의 말이 이렇게 스케일이 커가지고 일생 받는 고난도 잠깐 받는 것이다.
..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11 권력이 세세 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하고 진짜 끝냅니다.
아까 끝낼뻔 했는데, 다시 ‘종말로’ 하다가 ‘마지막으로’ 하다가 ‘끝으로’ 하다가 이제는 정말 끝냅니다.
12절,
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실루아노를 실라라고도 하죠.
..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5장까지 써놓고 간단히 썼답니다.
..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이 때는 마가도 베드로와 함께 있었던 것 같죠.
마가 베드로 실루아노 이렇게 팀을 이루어서 일 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에 있는 교회’를 영적인 바벨론 로마라고 하는 것은 아무 근거가 없습니다.
저는 그냥 바벨론에서 쓴다고 했으면 바벨론에서 썼다고 봐요.
14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베드로전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하고 베드로가 이 베드로전서를 쓸 때에는 언제 자기에게도 로마 병정이 와서 끌고 갈지 모르는 일이야.
자기는 열두 사도중에 수제자니까 일순위죠. 완전히..
진짜 일순위예요.
그러니까 하시라도 끌려갈 수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 편지를 유언처럼 썼는데, 왜 베드로후서가 써졌느냐? 빨리 안 끌려갔거든요.
그래서 아마 한편 더 써야 되겠다 하고 후서를 쓰게 되었다고 봐요.
베드로후서는 3장까지 밖에 안 되는데, 다음 주일 낮예배때 전체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 사도 베드로의 편지 중에 우리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당부를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환난과 어려움과 시험과 시련과 이런 고난이 다가올 때 어떠한 자세로 임할 것인지,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어떻게 서로 귀하게 여길 것인지, 사람이 마땅히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시험과 환난을 당할 때 어떠한 자세로 맞이할 것인지, 이런 소중한 말씀들을 우리가 오늘 살펴 들었습니다.
우리도 어려운 일 닥칠 때 소란을 떨지 아니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고, 마음 속에 숨은 사랑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하나님 믿는 사람의 모습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도록, 또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며, 이왕에 고난을 받을 때 악을 행하고 고난 받는 것보다 선을 행하고 고난 받는 일에 선택된 것을 감사하면서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