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타의 일기
게이지 하트라인은 과거 미국 비밀 특수부대의 일급 요원이었으나
작전 수행 중 민간인 아이들을 사망케 한 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전역한다.
각국 정보부의 비폭력적인 청부만을 싼값에 의뢰받아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중,
유대인 학살의 희생자가 남긴 걸로 추측되는 일기장을 발견한다.
그 내용은 아돌프 히틀러와 연관된 충격적인 진실을 담고 있었다.
본래 주인의 후손을 찾아 일기장을 돌려주려던 게이지의 계획은,
그가 지닌 일기장의 엄청난 가치를 눈치 챈 프랑스 마피아와 정보부에 의해 방해받고,
결국엔 목숨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른다.
(인터넷 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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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이지만 이야기 구조는 심플합니다.
히틀러의 치명적인 진실이 담긴 일기장을 둘러싼 전형적인 첩보-액션 스릴러인데,
큰 얼개만 보면 ‘본 아이덴티티’와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폭력과 절연한 채 소소한 청부업자로 살아가던 전직 특수요원 게이지 하트라인은
일기장을 빼앗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덤비는 프랑스 정보부 요원과 마피아를 상대합니다.
그 과정에 게이지의 연인, 휴가 중인 미국 육군 수사대원 등이 말려들게 되고,
게이지는 수차례 치명적인 위기를 넘긴 끝에 결국 억눌렀던 폭력의 본능을 부활시킵니다.
영화로 만들기에 딱 알맞은 소재와 인물 설정 덕분에
읽는 내내 저절로 그림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품입니다.
인물들의 배치나 사건 전개는 할리우드 액션물의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대략 예상되는 방식과 타이밍에 위기가 찾아오고,
게이지는 주인공다운 포스를 발휘하며 그 위기를 벗어나고, 통쾌한 복수를 감행합니다.
상투적이긴 하지만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탄탄한 서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레타의 일기’(원제 The Diaries)라는 제목이 알려주듯
이 작품을 다른 할리우드 액션물과 차별화시키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문제의 일기장입니다.
그레타가 쓴 일기에는 ‘히틀러의 치명적인 진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데,
게이지는 어떻게든 이 일기를 그레타의 후손에게 전해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하지만 악당들에게 그레타의 일기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물건일 뿐입니다.
즉, 향후 수십 년간 무한한 부(富)를 축적시켜줄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것입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약발이 떨어진 히틀러와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소재를 대체할,
모든 영화사와 출판사가 탐낼 만한 엄청난 ‘원작’으로서의 가치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연과 운명이 교차하면서 온갖 악당과 조연들이 일기장 주위로 몰려들게 되고,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야기는 첩보와 액션의 매력을 구사하며 물 흐르듯 흘러가지만,
히틀러나 홀로코스트에 대해 조금은 구경꾼 같은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는 한국의 독자에겐
그레타가 남긴 일기의 ‘엄청난 충격’이 100% 이입되지 않은 탓에
일기장 주변으로 몰려든 인물들의 욕망이나 감정들이 조금은 낯설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히틀러라면 (일기에 적힌)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위인 아닌가?’,
또는 ‘과연 그 일기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역사관과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당연한 의문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 낯선 느낌만 극복한다면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첩보-액션물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모두 4편의 ‘게이지 하트라인 시리즈’가 나왔다고 하는데,
봉인됐던 폭력의 본능을 되찾은 전직 특수요원 게이지 하트라인이
‘그레타의 일기’ 이후 또 어떤 사건에 말려들었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전직 특수요원의 인생역경은 아무리 반복돼도 흥미로운 소재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