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찬 발길질
젊은 시절 지 서방은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혼례를 올린 지 두달도 되지 않아 신부가 처녀 때부터 불장난을 하던 친정 동네 건달과 야반도주를 한 것이다.
농사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주야장천 주막에 붙어 있던 엉덩이를 떼서 정신을 차리고 보부상을 따라나섰다.
팔도강산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걷고 또 걸으며 도망간 새색시에 대한 분통을 가라앉혔다.
자연히 돈이 모였다. 장사에 눈을 떴다. 보부상 무리에서 나와 제 장사를 시작했다.
황포돛배를 한척 임차해 전남 영광에서 굴비를 가득 싣고 해안을 따라 남쪽을 돌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함흥·청진을 지나 조선 동해안 끝자락 라진항까지 가서 굴비를 내려놓자 그대로 금값이 되었다.
기껏해야 청어나 명태를 먹던 부자들에게는 말로만 듣던 굴비가 요릿집과 기생집의 등급을 결정하는
기준이 됐다. 지 서방은 두둑한 전대를 차고 어슬렁어슬렁 모피시장을 찾았다.
바로 국경을 사이에 두고 두만강을 건너면 노서아(‘러시아’의 한자식 말)라서
상인들이 마음대로 강을 건너 오갔다. 노서아의 질 좋은 모피가 라진에 쌓였다.
라진 장바닥을 어슬렁거리다 윗도리로 살며시 들어오는 손을 꽉 잡았다.
소매치기 소년을 잡은 것이다.
순라군(화재나 도적으로부터 백성을 지키는 순찰대)이 와서 육모방망이로 소매치기를 두드려 패며
끌고 가는 걸 순라에게 돈 몇푼을 주고 소년을 풀었다. “나으리, 고맙습니다.” 소년은 눈물을 훔쳤다.
지 서방이 국밥집에서 국밥을 먹다가 입구 밀창문(미닫이문)을 봤더니
소매치기 녀석이 손가락을 빨고 있기에 불러들여 국밥을 사줬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이 녀석이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걸 알았다.
한양에서 양반 대갓집 손자로 남부럽지 않게 살다가 할아버지가 사화에 휩쓸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녀석은 목숨만 부지한 채 한양을 탈출, 머나먼 라진에서 거지 소매치기로 다리 밑에서 살고 있었다.
녀석을 데리고서 족제비·여우·담비·수달 모피를 한배 가득 싣고 올라왔던 뱃길을 따라 내려가 목포에 접안했다.
국경 너머 노서아에서 온 담비 꼬리로 만든 붓은 값을 매길 수 없었다.
목돈을 당기는 곳은 필방이다.
수달 꼬리 세필붓, 여우 꼬리 중필붓, 족제비 꼬리 오죽붓은 예향 전라도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일자무식 지 서방의 사동이 된 열네살 소매치기 소년 해동이는
여간 영리한 녀석이 아니다. 왼손엔 치부책, 오른손엔 노서아산 연필을 들고 지 서방을 졸졸 따라다니는
경리책이 되었다. 라진을 오가며 삼년을 장사하고 나니 지 서방은 거부가 됐다.
경쟁자들이 생겨 장사도 재미없어진 터에 그 옛날 농사짓던 일이 그리워졌다.
고향 전북 김제로 가서 팔려고 내놓은 논밭을 무조건 사들여 천석꾼이 됐다.
논밭을 사들일 때도 열일곱살 해동이는 맹활약을 했다.
지 서방은 기와집 사랑방에 앉아 곰방대만 두드리며 집안 하인들을 다스리고 논밭을 관리하는 일은
모두 집사 해동이 알아서 했다.
어느 날 소작농 변 서방이 찾아와 셋째 딸을 하녀로 써달라고 청을 넣었다.
지 서방이 깜짝 놀랐다. 천하일색이다. 시집갔다가 신랑이 죽어 청상과부로 시집 눈치를 보다가
친정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스물다섯살 청상과부 죽매는 마음씨도 착한 데다 음식 솜씨도 빼어났다.
해동이가 변 서방 집을 왔다 갔다 하며 담판을 벌였다.
논 다섯마지기를 변 서방에게 주고 간단한 혼례를 올린 후 죽매는 지 서방의 마누라가 되었다.
지 서방은 죽매를 끔찍이도 아꼈다.
곳간 열쇠를 그녀에게 맡기고 장날이면 전대를 풀어줘 그녀는 장에 가서 주전부리에 사고 싶은 걸 다 샀다.
툭하면 지 서방의 명으로 우족을 사서 친정에 갖다줬다.
죽매가 장에 갈 때는 열일곱살 집사 해동이가 망태를 메고 동행했다.
어느 가을 날, 장터에 간 죽매와 집사 해동이가 날이 저물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지 서방은 젊은 날 첫 부인이 친정 동네 건달과 야반도주를 해서 절망과 분통으로 주막에서 술로 살았던
쓰라린 기억이 떠올랐다.
하인들을 모으고 저잣거리에서 날렵한 추노 둘을 구해 두 연놈을 잡아오도록 풀었다.
지난봄 다리 놓을 때 거금을 기부한지라 사또가 포졸을 풀고 병방이 앞장서서 진두지휘했다.
엿새 만에 전주 가는 길목의 황산 나루터 주막 뒷방에서 포박당한 죽매를 찾았고
납치를 공모한 해동이와 저잣거리 왈패들을 체포했다.
지 서방은 죄는 밉지만 그간의 공로를 생각해 형방에게 돈을 주고 해동이를 풀어내
얼마간의 장사 밑천을 줘서 쫓아냈다.
지 서방은 매일 밤 납치되었다가 풀려난 죽매의 배에 귀를 대고
“저 힘찬 발길질 좀 보게. 아들이여, 아들” 하며 즐거워했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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