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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1921. 4. 2 ~ 2006.11.19
1) 걸어온 발자취
일중 김충현 선생은 명문의 후예로서 1921년 5월, 8백년 동안 도학(道學) 문장 (文章) 절의(節義)가 이어진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한 가정에서 유소시 (幼少時)부터 경학과 서예를 공구(功究)하였으니 서권(書卷)의 기가
서려있고 문자의 향이 배어 있어 약관의 나이로 한국 서단에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선생은 1943년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경동중학교와 대전고등학교에 재직 하였으며 1957년에는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를
창립하였다. 이어서 1964년 이후에는 한국서예가협회(韓國書藝家協會)를 이끌어 왔으며, 1981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83년에는 한국미술계의 활발한 창작활동에 보탬을 주고자 백악미술관(白岳美術館)을
건립하였다.
선생은 반세기 넘게 연구한 국.한문 각 체의 주옥같은 필적을 수 없이 발표하고 나아가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으며,
우리나라 정통 서법 진흥을 위하여 속서(俗書), 왜체(倭體)를 배격하고 참다운 인격도야(人格陶冶) 및 전통
서법의 계승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한 분이다.
선생은 일찍이 일제 암흑기 속에서도 우리 글씨의 근원을 찾아 현대감각에 맞게 서법(書法)을 다듬었고
한문의 전(篆).예서(隸書)의 필법을 빌어 옛판본체를 조형성(造形性)이 풍부하게 창출하여 이른바, 고체(古體)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한문 서법에 있어서도 전(篆).예(隸).해(楷)).행(行).초(草), 오체를 두루 고구습득(考究習得)하여
청정무후한 작품을 발표 하였다.
2) 문학세계
붓과 함께 외길을 걸으며 서예술(書藝術)을 풍미한 노대가(老大家)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선생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한글서예로 민족의 서러움을 달랜 10대의 어린 애국자였으나, 지금은 80 중반을
바라보는 연세에 이르렀다.
선생의 한문 호는 一中, 한글 호는 찬내, 딱 한번 “한계(寒溪)라는 한문 호를 쓴 일도 있으니 이는
아마도 차가우나 청정(淸淨)한 시냇물이라는 뜻이리라. 선생의 한글 호 “찬내”는 순수 우리의 시어(詩語)이다.
선생은 말을 절제하시고 집안에서나 밖에서나 나무처럼 과묵하시다. 선생의 서예의 아름다움은 예술가의 천품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그 아름다움의 예술은 시문학과 밀접해 있을 것이다. 아니 문학적 삶이 서예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서예는 구도자의 예술이다. 구도의 경지에 따라 선생의 예술 모습이 드러난다. 선생은 이미 10대에 정인보
선생의 글을 서예로 승화시켰다. 이충무공비를 쓰실 때에는 민족의 아픔과 사랑을 담았다. 소월의 시 진달래를
쓰실 때에는 시인이 되어 썼다.
선생이 쓰신 책 안에는 서예인들에게 주는 노대가의 끊임없는 조언이 들어있고 그 밑 어디에는 서예라는
예술은 문학의 심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찾아질 것이다.
일중 김충현 선생은 시인적인 은유나 수사학에 개의치 않는다. 선생은 자연스럽게 그의 마음을 이어나간다.
그러나 선생의 언어 선택은 정교 하면서도 소박하다. 선생에게는 과장이나 축소가 없다. 하늘을 우러러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사는 삶에서 우러나온 기(氣)가 있다.
선생에게는 예술을 하는 긍지가 있다. 아무도 선생을 오만한 예술가라 보지 않는다. 선생은 우리시대 마지막
문필가일 것이다. 편지를 붓글씨로 보내는 마지막 현대인일 것이다.
세월은 가고 새로운 사상과 기술이 우리를 찾아온다. 그러나 선생은 잊혀져 가고 있는 우리시대의 선비정신을
영원히 보여주실 것이다.
3) 주요 서예작품
〈정읍사(井邑詞)〉,
〈한림별곡(翰林別曲)〉,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서대행(犀帶行)〉,
〈홍경사비시(弘慶寺碑詩)〉
상기 외 다수
4) 주요 금석문(金石文)
〈사육신 묘비명〉, 〈백범 김구선생 묘비〉, 〈이충무공 한산도 제승당비〉〈이충무공 기념비 병전(竝篆)〉,
〈3.1정신 찬양비〉, 〈4.19혁명 기념탑명〉 외 다수
5) 주요 저서
≪우리글씨 쓰는 법≫, ≪우리글씨 체≫, ≪중등 글씨체≫, ≪초등 글씨체≫, ≪일중 한글 서예≫, ≪국한서예(國漢書藝)≫,
≪서예집성(書藝集成)≫, ≪근역서보(槿域書譜)≫,≪예(藝)에 살다≫
외길 80년
藝에살다 - 漢學者 집안에서 태어나
나는 1921년 4월 21일 조선조의 고종 밑에서 형조판서를 지낸 김석진(金奭鎭)의 증손자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곳은 도봉구 번동 93번지로 당시에는 한성부였으나, 후에 일제가 행정구역을
변경하여 경기도 고양군 동부면으로 격하된 적이 있었다.
해방 후 내 고향은 다시 서울시로 편입되었으니 결국 나는 서울 토박이인 셈이다. 지금도 나는
본적을 도봉구 번동의 생가에 두고 있는 데 막상 그곳에 가본 지 몇 해나 되었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내가 태어날 때에는 집에 나의 조부 김년한(金寗漢)을 비롯해 아버님 김윤동(金潤東)과 어머님
그리고 일가 친척이 한 집에 모여 그야말로 대가족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조부님과 아버님은 인근 지역에서는 이름난 한학자로 밤낮없이 책을 벗삼아 지내고 집안
생계에는 별 신경쓰지 않으셨다. 우리 집은 1백석 가량 농사를 지었으나 그때의 가세는 몹시
어려운 형편이었다.
1백 석이라면 적지 않은 농사였으나 식구가 근 40명에 이르는 데다 따로이 돈을 버는 사람이 없어
항상 쪼들렸다.
더구나 뿌리 깊은 한학자 집안으로 조부님이나 아버님은 봉제사 접빈객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터였으므로 양식이 모자라 점심은 굶기가 일쑤였다. 조상들의 제사를 모시고 조부님의 친구분
발길이 끊이지 않아 손님접대를 하다보면 40명에 가까운 식구들 양식마저 모자라는 형편이었다.
여기서 잠시 나의 집안 내력을 이야기해 두고자 한다.
내 증조부 김석진은 고종조(高宗朝)의 형조판서로 1910년 한.일 합방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맛보았다.
일제는 합방 이후 조선조 고관들에 대한 유화책으로 합방에 동조한 고관이건 반대한 고관이건
소위 그들에게 귀족 작위를 주어 유화정책을 폈다. 나의 증조부에게도 남작(男爵)의 작위가
주어졌으나 증조부는 이를 거절하고 합방에 대한 통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일제는 다시 나의 조부에게 남작의 작위를 주고 마음을 돌리도록 종용했으나, 조부 역시 이를
거절하고 일가 권속을 이끌고 도봉구 번동으로 피신하게 된 것이다.
조부는 번동으로 옮긴 후에 일제에 대한 반발심에서 일체의 신학문을 배격하고 오로지 한서(漢書)
에만 묻혀 지내면서 찾아오는 손님들과 한담이나 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래서 나도 어린 시절을
농사나 지으면서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고 조부와 아버님 밑에서 한문을 배우며 보내야만 했다.
수구(守舊)파의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학교에는 가지 못했지만 일찍이 붓을 들고 한문을 배우기
시작한 일이다. 집에서 웬만큼 한문도 배우고 붓글씨도 익히자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 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조부와 부친에게 학교 보내 줄 것을 간청했고 또 주위 사람들이 조부께 권유한 덕분인지 나는
14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청진동에 있는 삼흥보통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간단한 시험과 함께
3학년에 편입한 나는 뒤떨어진 공부를 위해 퍽 열심히 공부했었다.
당시의 우리 집에서 청진동까지는 아주 먼 길이었지만 힘든지 모르고 통학했다. 번동에서 혜화동
까지는 걸어 왔고 창경원부터 청진동까지는 전차를 타고 다녔다. 새벽에 집을 나서야 학교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는 데 그래도 집에서 혹시 학교를 그만두랄까 두려워 힘들다는 말 한
마디 못 해 보았다.
그때 이미 나는 한문 글씨를 열심히 공부 했는 데 어떤 때는 연습할 종이가 없어 분판을 사용하기도
했다. 분판이란 하얀 분칠한 판으로 그 위에 먹으로 글씨를 연습하고는 물걸레로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삼흥보통학교 6학년을 마친 나는 1938년 중동(中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외길80년
藝에살다 - 혼자 한글 서예 연구
18세란 늦은 나이에 중동학교에 입학한 나는 다른 공부보다도 서예에 퍽 열심이었다.
중동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동아일보사에서 전조선 남녀학생의 작품전이란 걸 개최한 일이 있다. 동.서양화는 물론 조각.서예에
이르는 각 부분에서 학생작품을 공모하는 규모가 큰 행사였는 데 나는 평소 공부한 것을 시험도 해
볼 겸 별 다른 생각없이 서예부문에 작품을 내놓았다. 그런데 내 작품이 전시회 최고상인 특상을
받게 되었다.
비록 학생 신분이었지만 갑자기 내 이름이 여러 사람에게 알려졌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아마도 내가 평생 동안 서도(書道)를 걷게 된 것은 이 학생미전에서의 입상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보통학교 재학시절부터 한문 서예는 물론 궁체서예(한글서예)를 홀로 공부해 오던 나는 동아일보
공모전의 입상 이후 더욱 열심히 글씨 공부를 했다. 내가 혼자서 한글 서예를 연구할 때는 일제
말기여서 적당한 참고 서적은 물론, 정확한 한글 교본을 구하기 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나는 한글 서예를 공부하며 국문 서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랏글씨에
대한 사랑이나 애국심에서 한글 서예를 몰래 혼자서 공부했다기보다는 우리 글을 내가 써보지
않으면 누가 쓰겠는가 하는 소박한 생각에서 한글 서예를 꾸준히 계속했다.
그러나 아무런 지침서나 선생도 없이 혼자 서예를 터득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글씨 쓰는 틈틈이 국문 서법을 내 나름대로 정리, 국문서예 연구서를 따로 준비하고 있었다.
중동학교를 졸업한 것은 43년의 일로 이 당시에는 이미 국문서법 연구서가 완성되어 한 권의
책으로 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원고를 국학자(國學者)이자 시조시인인 정인보선생에게 들고 가 보여드리고 의견을 묻기로
했다. 내 원고를 자세히 살펴본 정 선생은 훌륭한 일을 해냈다고 극구 칭찬하며 즉석에서 내 책을
위한 서문을 지어 주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정인보 선생과 나는 이후로도 각별한 관계를 갖게
되었고 나를 무척이나 아껴주시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책은 일제하에서 빛을 못 보다가 3~4년 후에 해방을 맞아 초판본이 간행
되었다. 이 책의 초판본은 거의 유실되어 지금 내가 1 권을 보관하고 있을 뿐인데 6.25 후에
재판을 간행, 지금까지 한글 서예의 지침서로 널리 쓰이고 있다.
중동학교를 졸업한 나는 마땅한 일거리가 없어 형님이 하는 채석장 일을 도와 생활을 꾸려갔다.
중동학교를 다닐 때 부모님이 맺어준 집사람 송용순과 혼인을 해 가장이 된 나는 미아리의 채석장
옆에 있는 집으로 분가해 한동안 열심히 일했다. 채석장에서는 집짓는 돌이나 토목공사용 석재를
캐다가 팔았는데 그런대로 장사가 잘 되어 이때부터는 끼니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 채석장은 우리 집안과 깊은 관련을 가진 장소로 나는 여기서 다시 우리 집안의 내력을
밝히고자 한다.
당시 채석장이었던 도봉구 미아4동 8의 16에는 현재 창문여자 중.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학교의 설립자가 나의 부친이다.
부친은 지난 71년 가세가 어느 정도 일어서서 순국선열이신 오천(梧泉) 김석진의 유업을 이어받고자
학교 설립을 결심하고 우리 집안 재산인 채석장 자리에 학교를 세운 것이다.
창문학교의 초대 이사장에는 우리 형님 김문현(金文顯)이 부임했고 교장은 내 동생인 김창현
(金彰顯)이 맏아 집안 식구들의 힘으로 학교를 발전시켰다.
창문여중고의 교무실에는 벽오산(碧梧山)이라 쓴 현판이 하나 걸려 있다. 까만 나무에 양각(陽刻)된
이 글씨는 조선조 철종비 (哲宗妃)인 철인황후(哲仁皇后)의 어필(御筆)로 나의 증조부 오천에게
하사된 것으로 창문학교재단인 오산학원의 상징적인 유물이 되고 있다.
외길80년
藝에살다 - 집안에서 세운 梧山學園
철인왕후가 나의 증조부에게 친필로 쓴 "벽오산"이란 현판을 하사하게 된 연유는 이러하다.
나의 생가인 도봉구 번동은 순조(純祖)의 둘째 공주인 복온(福溫)공주와 부마 창녕위 김병주
(昌寧尉 金炳疇) 내외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조선조 때는 창녕위궁(昌寧尉宮) 또는 궁동(宮洞)
이라 불렀다.
증조부님 김석진은 바로 창녕위의 사손(嗣孫)으로 을사보호조약 이후에는 일가를 이끌고 이 곳으로
은퇴하였다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음독 자살, 지금도 이 곳에 유택이 모셔져 있다.
철인왕후는 증조부의 아호인 오천을 생각하고 이 곳을 오현(梧峴)이라 명명하시고는 이내 벽오산
이란 글을 써서 하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선조의 유래와 함께 시작된 창문여중고는 현재 5,845 평의 교지에 학생수가 4천 명에 이르는
학교로 발전되었다.
오산학원의 초대 이사장이었던 나의 형님이 별세하자 나는 지난 75년에 학교의 2대 이사장으로
부임해 오늘날까지 교육사업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창문여중고 옆에는 지금도 내가 채석업을 할 때 살던 집이 남아 있다. 이 집은 40여 년 전에
채석장에서 캐낸 돌로 지은 집으로 현관에 "오산봉포(梧山鳳苞)라고 돌에 음각된 글씨가 보인다.
이 글은 아버님이 친필로 자식에게 집을 지어 주며 기념으로 써 주신 것이다. 아무튼 채석장에서
4년 가량 살던 나는 45년 8월 14일 저녁 , 가까운 친구인 신창순이란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미아리에 있는 친구 집에는 당시 퍽 희귀하던 라디오가 있었는데, 방송을 한동안 듣고 있노라니까
내일 정오에 중대 방송이 있다는 예고를 했다.
나는 이튿날 정오에 잔뜩 부푼 기대를 안고 친구 집에 다시 갔다. 24세였던 나는 같은 또래의 친구
몇몇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까 일본 천황이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한다는
문서를 읽어내려 갔다.
나와 친구들은 환희에 넘쳐 한동안 어쩔줄을 몰랐다. 집주인 신창순은 "이제 살았구나"하면서
기뻐했고 나는 "이제는 우리가 할 일이 많구나" 하고 새로운 각오를 했다. 그 당시의 감격을 맛본
젊은이들은 누구나 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 몸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해방되던 해 경동학교의 국어교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채석장 일보다는 뭔가 뜻깊은 일거리를
찾던 나는 일본의 식민지교육의 때를 씻어내고 민족교육의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나랏말의
담당 선생이 할 일이 많을 것 같아 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시의 경동학교는 한국인 학생과 일본 학생이 반반이었는데 해방이 되자 일인(日人)선생과 학생이
일시에 쫓겨나 학교가 텅비게 되었다. 해방 직후에는 일인 학생만 다니던 경성(지금의 서울고),
용산 같은 공립학교는 한동안 문을 닫아야만 했다. 그러나 한국 학생이 남아있는 경동학교는 당장
학생을 가르칠 선생을 모집해야만 했다. 다행히 나는 일찍부터 한글서예를 연구했고 국어에 대한
지식이 있어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칠 수가 있었다.
많은 학교들이 문을 닫은 형편이어서 경동학교에는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선생들도 열과
성의를 다해 학생을 가르쳤다. 나는 국어 선생을 하며 경동의 새로운 교훈을 만들어 붓글씨도 써
주었고 교사도 내가 작사했다. 경동의 교가를 내가 짓게 된 것은 직원 회의에서 나의 시를 교가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시인도 아닌 내 작품이 뽑혀 송구스러운 마음에서 교가 가사를 들고 육당
최남선 선생을 찾아가 의견을 물었다.
육당은 "이만하면 훌륭하다"면서 한 자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넘겨 주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경동중고교의 교가는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다.
시원(枾園) - 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