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조울병 환자들
"기분이 자주 오르락내리락 하나요?"
평소 나무랄 데 없는 30대 후반의 주부 N은 몇 주 전부터 설거짓거리를 쌓아 두기 일쑤고,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 학교 가는 아이들의 밥도 챙겨 주지 못한다. 출근해야 하는 남편이 아이들을 챙기고 대신 살림까지 해야 할 형편이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매우 활동적으로 달라졌다. 밤에 혼자 가구 위치를 옮기고 대청소를 하는가 하면,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간섭하고 방 정리가 안 되었다며 소리 지르고 야단친다. 남편은 온순한 아내가 돌변한 것 같아 당혹스럽다.
마음대로 비싼 가구와 명품 옷을 사느라 돈 씀씀이가 커졌는데, 오히려 남편에게 큰소리를 친다. 자신에게 해준 게 뭐가 있냐며 더 이상 참고 살지 않겠다고 흥분해서 언성을 높인다.
아내는 말이 빨라지고 큰소리로 자기주장만 하고 상대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며칠 후에는 화장이 진해지고 옷차림이 화려해지더니 이혼을 요구하며 집을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남편이 못 나가게 붙잡자 경찰에 신고한다. 친정 부모의 말로는 사춘기 때 오빠만 편애하고 자신은 무시한다고 분노를 폭발해서 한동안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괜찮아지고는 했는데 몇 년에 한 번씩 어린 시절 얘기를 꺼내면서 부모에게 대들곤 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잘 다니던 회사의 비리를 고발하겠다고 하고 상사의 잘못을 집요하게 따지다가 결국 회사의 권유로 사직하게 되었다. 다행히 결혼할 무렵에는 철이 들었는지 행동도 얌전해지고 가족 관계도 좋아졌다.
결혼하기 전까지 조울병을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한다. 조울병은 기분 조절에 장애가 있는 대표적 정신 질환 중 하나다. 조울병은 생각보다 흔한 병이다. 대략 100명 중 1~2명이 조울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경미한 증상을 보이는 경우는 잘 파악되지 않을 수 있어 실제 유병률은 그보다 높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울병은 N처럼 진단과 치료가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 환자에게 생긴 변화를 단순히 성격 문제로 보고 제때 치료하지 못해 병을 키우는 일이 적지 않다. 조울병은 기본적으로 조절이 가능한 병이다. 조증과 심한 우울증 시기를 제외하면 생활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
조울병을 앓았던 사람 중에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도 많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애수>의 여주인공 비비안 리(Vivien Leigh)도 조울병을 앓았다. 영국 수상을 역임한 윈스턴 처칠도 조울병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처칠은 자신의 우울증을 ‘검은 개(black dog)’라고 불 렀다.15
사도세자의 빈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閑中錄)》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평소에 온전하게 대리청정을 잘하다가 우울할 때면 근심 걱정뿐만 아니라 두려움이 많아지고 외모도 단정치 못해지는가하면, 기분이 들뜨면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나인들을 데리고 놀고 내관을 매질하고 해하기까지 했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도 조울병을 앓았을 가능성이 크다. 성종의 후궁이었던 윤씨가 궁궐 생활 3년 동안 까다로운 정희왕후(세조 비)와 안순왕후(예종 비), 시어머니 소혜왕후(인수대비, 성종의 모친)의 눈 밖에 나지 않고 왕비가 된 것으로 보아 평소 성품에 문제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정희왕후는 윤씨를 검소하고 현숙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했다. 회임 중에 중전이 된 윤씨는 3개월 후 연산군을 출산한다. 출산 4개월 후에 후궁을 저주하거나 해할 목적의 방양서(굿 하는 책)와 비상이 윤씨의 처소에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폐비가 논의되었으나 빈으로 강등되어 별궁에서 거처하게 된다.
그리고 약 2 년 3개월 후 윤씨의 생일날 성종은 신하들 앞에서 윤씨의 성격에 대해 하소연하기에 이른다. 성종의 말에 따르면 윤씨는 질투가 심하고 온화하지도 않은 데다 순종하지도 않았다.
또 그가 후궁의 처소에만 드는 데 불만을 품고 후궁과 함께 있는 침실에 불쑥 쳐들어오는 행 동을 서슴지 않고 하면서도 정작 윤씨 자신은 잘못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행동은 윤씨의 성격 때문이라기보다 조증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런가 하면 임금이 조회를 다녀온 후에야 잠에서 일어나는 윤씨의 모습은 조울병의 우울증을 떠올리게 한다.
후궁 때 별문제가 없던 윤씨가 후궁을 향한 병적 질투심을 행동으로 내보여 폐비 논의가 이루어지고 빈으로 강등된 시점이 첫 출산 후 4개월 만이었고 폐서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난 시점은 둘째 아들의 돌 지난 지 몇 개월이 채 안 돼서였다.
이렇게 출산 후 수개월 이내에 나타나는 기분 장애는 조울병일 가능성이 크다. 별궁에 거처하면서 둘째를 임신하고 성종과의 관계가 한동안 회복된 것처럼 보이는 기간이 있었던 것도 폐비 윤씨의 행동이 성격 문제라기보다는 조울병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성격 장애일 경우 문제 행동을 지속해서 보이는 데 반해 조울병의 경우는 증상이 발현될 때만 문제 행동을 보이고 증상이 없을 때는 별다른 이상이 없기 때문이다.
폐비 윤씨가 연산군의 생모란 점을 고려해 볼 때, 왕이 된 후 무오사화(1498)가 있기 전까지 4년간은 별문제가 없었으나, 이후 매일 향연을 베풀고 궁중에 기생을 불러들이고 흥청거리며 지낸 연산군 역시 조울병을 앓았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