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려라
에스 4,17; 마태 7,7-12 / 2022.3.10.;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도가 되어 복음을 잘 선포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은 사도들만이 아니라 신앙인들 누구라도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누리고 싶은 사람이라면 귀담아 들어야 할 권고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권고의 대전제는 진복팔단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이에게 들려주는 비결인 것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전제하신 바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고 들으면, 어떤 소원이든지 들어주겠다고 하는 매우 무책임한 만병통치약 같은 광고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대목을 루카 복음사가는 자신의 복음서에도 삽입하면서 이는 성령을 뜻함이라고 명기해 놓았습니다(루카 11,13). 성령을 받으면, 그 이끄심에 의해서 무엇을 청해야 하고 무엇을 찾아야 하며 무슨 문을 두드려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렇듯 성령의 이끄심에 의한 올바른 청원 기도는 청하는 대로 받고, 찾는 대로 얻을 것이며, 문을 두드리는 대로 열릴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일깨워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권고에 이어 황금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역시 사랑의 이치에 관한 진리로서,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라는 것입니다. 그 최대한은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먼저 남에게 해 줄 것이며, 그 최소한은 남이 우리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자는 자기 희생이 필요한 영성이라 할 것이고, 후자는 남에 대한 배려가 요구되는 예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전자의 방식으로 하기는 어렵겠지만, 가까운 가족 및 지인들이나 사도직에서 주어진 이웃들에게는 이러한 자기 헌신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는 후자의 방식으로 배려해야 하고 그러한 윤리의 최소한이 법률 규정일 것입니다. 그래서 준법정신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태도가 됩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에스테르는 일찍 세상을 떠난 부모 대신에 모르도카이의 손에서 자라났다가 페르시아 제국 크세르크스 임금의 왕비가 되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유다인 혈통이라는 사실은 임금이 모른 채였습니다. 그러다가 제국의 2인자인 하만이 유다인 민족을 모두 죽이고 그 재산을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미자, 이를 임금에게 고해달라는 당부를 수양 아버지 모르도카이에게서 받았습니다(에스 4,8). 에스테르는 사흘 밤낮동안 단식을 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 후에 왕명 없이 함부로 나아간 처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임금 앞에 나아가 청했는데, 다행히도 하느님께서 그 임금의 마음을 열어 주시어 왕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함은 물론이고 유다인들 대신에 악한 하만이 사형당함으로써 위기는 수습되었고, 유다인들은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에스테르는 바빌론 유배 시절에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증거하여 유다인들의 안전을 확보한 다니엘처럼 신앙으로 동족을 구해낸 유다인으로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처럼 에스테르도 청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리는 신심을 갖춘 신앙인이었습니다.
다니엘도, 에스테르도 절대군주의 권력에 신앙심에 기대어 맞서기는 했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벗어난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민족은 지역 패권을 추구하는 강대국들의 터무니없는 요구와 욕심에 떠밀려서 평화를 원해도 전쟁을 끝낼 수 없는 기가 막힌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백 년 전 구한말에 이웃 나라들의 탐욕에 휘둘려 민족이 왜인들의 종노릇을 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우리가 우리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상황이 되도록 청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려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구상에서 우리 민족만 빼고 다른 모든 민족들이 누리고 있는 민족 주체성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도 그 동안 서구 교회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정통 신앙을 비롯 여러 가지 교회 문물을 배워서 이만큼 성장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서구 교회의 아류처럼 그들을 좇아갈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사고방식으로 복음을 구현하는 교회를 이룩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민족의 종교적 심성을 반영하는 교리와 전례, 선한 영향력의 근원을 찾아내는 역사의식과 공동선을 위한 사회의식 등은 우리 스스로 청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려 이룩해야 할 과업입니다. 이는 교회가 복음화 과업을 수행하자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정체성입니다.
결국 나라도, 교회도 추구해야 할 과제는 주체성과 정체성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성령을 청해야 하고 찾아야 하며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이것도 실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