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들어오는 틈 허 열 웅 세상사 모든 곳에 틈이 있어야 바람이 들어오고 숨도 쉬고 꽃도 핀다. 사전적 ‘틈’이란 한곳에서 다른 곳까지의 거리나 공간을 말한다. 일상적 의미는 어떤 일을 하다가 다른 일이나 생각 등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뜻한다. 틈은‘트임’이기도 하기 때문에 허점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의 소통의 창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사람 들어갈 틈이 없어, 할 경우 대화도 별로 없고 냉정하여 인간미가 좀 부족한 사람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이럴 경우 모든 면에서 박식하고 논리정연해도 정이 별로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런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되지만 본인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창호지 찢어진 틈으로 스며들던 아침햇살, 초가지붕 봉창封窓 틈으로 쏟아지던 달빛, 철도 침목 틈을 비집고 핀 민들레 홀씨가 우표도 없이 이집 저집 찾아간다. 높은 산 바위틈을 뚫고 서있던 키 작은 소나무 등은 유년시절에 무심히 보았던 풍광이었다. 홀로코스트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벽 틈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받아 자라던 풀 한 포기에서 희망의 싹을 틔우기도 했다. 그리고 바쁘게 일을 하다 잠시 쉬어보는 시간과 시간 사이의 틈, 하루에도 수없이 어떤 틈들과 우리는 만난다. 때로는 적막한 틈에서 나의 존재가 확인되기도 한다.
‘처음처럼’이란 서화書畵에세이를 쓴 저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제일 많이 팔리는 소주 이름을 대라면 ‘처음처럼’ 이라고 대답할 사람은 많을 것이다. ‘처음처럼’ 이란 용어를 특허 낸 신영복 교수가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에서 감형되어 20년 만에 출소한 후<나는 왜 자살하지 않고 무기징역을 살았을까?>자문자답을 했다. 독방 “창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을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은 살아있음의 어떤 절정이었다.”고 했다. 소주회사에 특허를 넘겨주고 받은 돈은 사회에 기부하고 2016년 세상을 떠난 분이다.
직장에 근무할 때 외부에서 새로 부임해온 빈틈이 없는 기관장 한 분이 있었다. 그는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좀 일찍 큰 기관의 수장이 된 것이다. 근무시간에는 성실하고 부하직원들에게 친절한 상사였다. 그런데 퇴근 후에는 공식적인 자리 외에는 간부직원은 물론 그 누구와도 개인적으로 식사나 술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
어느 날 기관장을 수행하여 지방 출장 일정을 마치던 날 어렵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하시는 말씀이 본부장급 이상 간부들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고 업무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이 오래된 기관이라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직장으로 파악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잘 못 어울리다 작은 실수라도 하면 트집이라도 잡힐까봐 조심하는 것이라 했다. 남에게 빈틈을 일체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그 분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바쁜 꿀벌이나 개미는 슬퍼하거나 외로워할 틈이 없다고도 한다. 이렇게 틈이 없거나 서로의 마음이 소통되지 않아 틈이 벌어지면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가 멀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틈이란 너무 벌어져도 안 되고 그렇다고 좁혀져도 그 기능의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또 그 틈을 잘 활용해야 삶이 풍요로워질 것이다. 틈틈이 써 놓은 글, 틈틈이 시간을 활용한 그림과 붓글씨는 물론 틈틈이 듣는 음악 등은 삶에 천연조미료 같은 맛을 느끼고 마음이 윤택해지는 여가생활이 될 것이다.
똑똑하고 깐깐한 사람보다는 어딘가 순박하고 때로는 틈이 훤히 보이는 사람에게 끌리는 경우가 많다. “현자賢者는 약우若愚” 라고도 했다. 진실로 현명한 사람은 모나지 않고 평범하므로 다가가기가 수월해 겉으로 보기엔 틈이 많아 보이는 약간 어리석어 보이는 삶을 사는 사람이란 뜻 일게다. 마케팅 분야에서 틈새시장(Nich market)이란 용어가 있다. 기존업체가 관심을 두지 않거나 적게 가지는 분야에 새로 시작하는 업체가 파고 들어가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시장을 말한다. 살아가는 방법도 하나의 마케팅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동안좀 소홀히 하였거나 사소한 문제로 틈이 벌어진 가족이나 친지들은 없었는지 되돌아보면 거의 대부분이 바쁘다는 핑계로 틈을 활용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들이다.
나도 형님이나 누님 등 친척을 틈을 내 찾아뵈어야지 하면서도 실행하지 못한 채 어느 날 세상을 뜨시는 경우가 많았다. 또 한 그리운 친구에게 전화 하여 술잔이라도 나눠야지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틈을 내지 못해 소원해진 경우도 있었다.
이제부터라도 틈을 내 떨어져 살고 있는 부모님이나 친척들에게 안부전화도 하고, 멀어진 친구에게 연락을 하여 식사라도 하면서 우정을 되돌려놓아야겠다. 부모의 입장에서도 자녀들한테 먼저 전화를 하여 사랑으로 다독거려 화목한 집안 내력을 만드는 일이다. 아무리 큰 것도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므로 짧은 틈을 잘 활용할수록 모든 일들이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부모 자식 간에는 서로 바라는 기대치가 상반되는 경우가 많아 틈이 벌어지는 사례가 적지 않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갖은 고생을 해가면서 자녀들에게 올인 했으니 노후에 의지하고픈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러나 자녀들 입장에서는 무한 경쟁시대에 자기 자식들의 뒷바라지도 힘든데 부모까지 생각할 틈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때론 재산이 있는 부모나 수입이 좋은 자녀에게 좀 도와주면 좋을 텐데 하는 서로의 기대감 때문에 틈이 생기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두 눈을 바라보며 무릎이 닿을 정도의 틈을 두고 마주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그 동안쌓였던 오해가 풀리리라 믿는다.
저 하늘의 지친 학 무리들/ 날아가네 저무는 하루의 안개 속을 무리지은 대오의 그 조그만 틈새/ 그 자리가 혹 내 자리가 아닐는지
90년대 드라마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64.5%) 모래시계의 주제가“백학白鶴”의 일부다. 전쟁에서 희생된 소련군 병사를 추억하며 부른 노래다. 학이 되어 날아가듯 죽어가는 젊은 영혼들의 틈새에 끼어 같이 가고자 했던 살아남은 사람들의 애달픈 가사였다.
남들이 다가 갈 틈이 없이 똑똑하고 완벽한 사람보다는 빈 틈이 좀 보이는 인간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 호감이 가게 마련이다. 나이가 들면 배운 사람이나 가방끈이 짧은 사람이나 , 권세를 휘둘렀던 자나 평범하게 살았던 사람이나, 돈이 있건 없건 똑 같은 존재가 된다. 내가 양보하고 틈을 보여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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