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7일 판대아이스파크 사고 정황 및 원인
아침 9시경
이미 많은 등반인들이 판대아이스파크에 모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사람들이 불어나고 있었다. 등반할 자리에는 대개 톱로핑 줄이 걸려 있었고, 많은 이들이 등반에 열중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날 중의 하루 같았다. 줄을 걸만한 자리를 찾아 빨리 줄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빙장에 도착해 차도 마시지 않은 채 등반 준비를 할 만큼 마음이 조급해졌다. 판대아이스파크에 도착해 쉘터 안을 정리하고 차를 마실 시간을 갖으려는 후배에게 어서 장비를 차고 확보를 보아달라고 말했다. 60미터 빙벽 우측 편에 줄을 걸만한 지점이 있었고, 그 자리를 다른 이에게 빼앗기기 싫어 될 수 있으면 빨리 줄을 걸고 싶었다.
손가락이 시려웠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먹기 시작한 약 때문일까. 의사의 말처럼 약을 먹고부터 계속 설사를 했고, 멀미 기운이 났었다. 여러 차례 아이스바일에 매달려 쉬다가 60미터 등반을 종료했다. 쌍볼트 지점에 퀵드로 두 개를 걸어 등반줄과 달고 온 줄을 연결해 톱로핑 줄을 만들었다. 슬링을 이용해 백업까지 마무리했다. 쌍볼트 지점에서 1.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아이스스크류를 박아 퀵드로를 이용해 로프에 연결했다. 줄이 서로 꼬이지 않도록 줄 사이의 간격을 벌여놓기 위해서였다. 두줄 하강하고나서야 알았다. 내가 잘못된 방향에 아이스스크류를 박아 퀵드로를 걸어 줄을 연결했다는 것을. 두 줄을 연결한 매듭이 있는 쪽에, 즉 확보줄에 아이스스크류를 박아 퀵드로를 연결한 것이다. 당연히 매듭이 퀵드로에 걸리니 확보를 볼 수 없어 톱로핑 등반을 할 수 없게 된 셈이다. 누군가 다시 올라가 확보줄 방향의 퀵드로를 해제해야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걸 나비효과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사소한 실수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사고. 만약에 내가 어처구니없이 확보줄 방향의 줄에 퀵드로를 걸지 않았다면, 이혜영 회원이 슈퍼베이직을 걸고 등반을 하지 않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쉬이 떠나지 않았다.
톱로핑 줄이므로 빨간 색 로프에 퀵드로가 연결되면 안 된다. 대신 하늘 색 로프에 퀵드로가 연결되었어야 했다.
아침 10시 30분 ~ 12시
어쩔 수없이 이혜영 회원이 로프를 고정하고 슈퍼베이직을 걸어 등반해서 올라가기로 했다. 등반 후 확보줄에 걸린 퀵드로를 제거하고 두줄 하강하기로 했다. 나는 빙벽초보자들을 위한 줄을 설치하기 위해 40미터 빙벽으로 갔다. 이혜영 회원이 등반하는 모습이 멀리서 보였다. 줄에 매달려서인지, 아니면 아이스바일에 매달려서 쉬는 모습도 보였다. 푸석 얼음이 많아 힘이 많이 들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빙벽초보자들을 위해 줄을 낮게 설치했고, 동희가 그 줄을 이용해 등반을 시작했다. 판대아이스파크는 오색의 로프로 뒤덮여 있을 만큼 많은 줄이 걸려 있었다. 이 무렵 나는 이혜영 회원의 등반이 끝난 줄 알았다. 차 한 잔 마시기 위해 쉘터로 갔고 60미터 상단 부근에서 여전히 등반 중인 모습을 보고 너무 늦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차를 마셨다. 아마도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정오 무렵이었을까. 사람들의 비명에 따라 나는 60미터 빙벽을 바라보았고 하단 부근에 추락 후 누군가 실신한 채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나는 상단을 올려다보았다.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추락한 사람이 이혜영임을 알았다. 실신한 채 매달려 있던 모습이 내겐 마치 죽은 자의 모습처럼 보였다. 아직도 그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온 몸이 오싹해진다.
고정 로프에 슈퍼베이직 걸기 - 착용 후 제동이 되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하네스에 슈퍼베이직 바로 걸기
슬링 등을 이용해 하네스와 슈퍼베이직의 간격을 벌려서 걸기 - 이날 이혜영 회원이 착용한 방식
**하네스에 슈퍼베이직을 바로 거는 것과 슬링 등을 연결해 거는 것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어떤 방식이 더 안전한 것인지 설명해 줄 수 있는 분들은 설명해 주기 바란다. 사람마다 주장이 다르므로 보다 논리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왜 슈퍼베이직은 25미터 이상 추락하는 동안 제동되지 않았는가.
60미터 상단 부근에서 추락한 이혜영 회원은 25미터 이상 추락하고 난 뒤에야 슈퍼베이직에 걸려 제동되었다. 즉, 25미터 이상 떨어지는 동안 슈퍼베이직은 작동하지 않았다. 고정로프나 슈퍼베이직 착용 상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슈퍼베이직이 작동하지 않은 이유는 추락과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추락자가 손으로 줄을 잡았기 때문이다. 슈퍼베이직 상단 부분에 손이 닿으면 슈퍼베이직은 작동하지 않는다. 추락자가 일시적으로 줄을 잡기도 했지만, 추락과 동시에 오른 팔 안쪽으로 줄이 감겨 들어갔기에 줄을 감싸 앉은 채 추락했다. 로프에 옷에 쓸린 자욱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팔 안쪽에 줄로 인한 화상 자욱이 이를 증명한다. 25미터 추락 후 얼음에 부딪히고 나서야 줄에 감겼던 팔이 풀리면서 슈퍼베이직이 작동했고 비로서 제동했다. 이것은 자기 확보기로서의 심각한 결격 사유임에 틀림없다. 슈퍼베이직 사용시 추락자가 추락과 동시에 줄에서 손을 놓아야 한다고 말하는 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추락시 여러 변수로 인해 손으로 줄을 잡은 것과 같은 상황이(손으로 줄을 잡지 않더라도 무언가가 줄에 걸린다거나) 발생할 수도 있다. 슈퍼베이직은 이런 변수에 대한 고려 없이 만들어진 위험한 자기 확보기인 셈이다.
위와 같이 슈퍼베이직 위의 줄을 손으로 잡으면 슈퍼베이직은 제동되지 않고 아래로 줄과 함께 내려간다.
옷에 쓸린 로프 - 마치 불에 데인 것처럼 꺼칠하다.
슈퍼베이직을 사용해야 하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슈퍼베이직을 자기확보용 등강기로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다. 이번 이혜영 회원과 같은 추락 사고를 경험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러 변수에 따라 추락 시 제동이 안 될 수 있으니 가급적 사용을 자제하는 게 좋겠다.
장비 사용법에 대해 숙지하고 알려주었는가?
등반대장으로서 미흡했다. 등반자에게 슈퍼베이직의 제동 원리에 대해 충분히 설명해 주고, 추락 시 절대로 줄을 손으로 잡으면 안 된다는 걸 알려주어야 했다. 더구나 이혜영 회원은 이날 슈퍼베이직을 처음 사용했다. 장비 사용법에 대한 보다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는데 설명이 부족했다. 등반대장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한다.
이혜영 회원의 부상 정도
25미터 이상 추락과 충돌에 비한다면 이혜영 회원이 살아 있다는게 천운이라고 할만하다. 지난 1월 19일 양쪽 발목 골절에 대한 수술이 있었고,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한다. 통깁스 대신 반깁스 상태로 2달 정도 뼈가 아물기를 기다려야 한다. 2달이 지나야 발을 땅에 댈 수 있고 그때야 비로소 재활에 들어갈 수 있다. 이제 시간이 약이다. 어서 뼈가 아물고 재활 치료를 받게 되기를 바란다. 멀지 않아 다시금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등반할 날이 올 것이다. 1월 24일 현재 이혜영 회원은 원주연세세브란스병원에서 속초의료원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