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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21
당신의 여리고성이 무너지려면? / 김흥규 목사
<여리고성을 누가 무너뜨렸나요?>
목사님이 교회학교에 다니는 한 어린이에게 물었습니다.
"여리고성을 누가 무너뜨렸지?"
겁에 질린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안했습니다."
기가 막힌 목사님이 그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반의 아이에게 여리고성을 누가 무너뜨렸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아니라고 대답하는데 도대체 아이를 어떻게 가르친 것입니까?"
교사가 정색을 하면서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그 애는 결코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애가 아니에요."
더욱 황당해진 목사님은 교회학교 교장인 장로님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한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자 장로님이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목사님,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장본인을 색출하려면 아무래도 예산을 책정해서 철저히 조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여리고성을 누가 무너뜨렸습니까?
옳습니다.
여러분이 안했습니다.
여러분은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그럴 분들이 아니지요.
그러면 누가 했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격적인 가나안 정복작전을 수행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아주 신기한 방법으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뒤 정복해야 할 가나안 땅의 첫 번째 관문이 바로 여리고성이었습니다. 여리고성을 정복해야지만 가나안 땅의 여러 성읍들을 향하여 진격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여리고성은 신앙적으로 이스라엘이 얻은 첫 번째 열매요 첫 번째 희생 제물이기도 했습니다.
첫 것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성별해서 바쳐야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여리고성 역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얻은 첫 번째 열매이기 때문에 17절 말씀에 보면 여리고성과 그 성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라고 명령합니다. 기생 라합과 그 여인의 집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살려두지 말고 도시 전체를 불로 태워 진멸하라고 했습니다(24절). 바로 첫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온전한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도시들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도 정확하게 여리고라는 이름의 도시가 똑같은 장소에 건재하는데 무려 12,000년 이상이 된 도시입니다. 여리고는 요단강에서 서쪽으로 약 8km, 예루살렘에서 동북방면으로 약 30km 지점에 위치했는데 난공불락의 성벽도시로써 유명했습니다. 여리고 주민들은 주전 6,800여 년 전 신석기 시대에 이미 둘레 770m, 높이 9m의 성을 만들었는데 특히 안벽이 1.8m, 바깥벽이 5m나 되는 이중성벽을 쌓아올렸습니다. 그야말로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한 축성기술이었지요. 그런데 이 철옹성이 너무나 쉽게 허물어졌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고대에 이와 같이 견고한 성읍을 함락시키는 군사적인 방법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희랍에서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아주 치밀한 계략을 세워서 주거지 성안에 몰래 진입한 뒤 성문을 열고 아군을 끌어들여 정복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아니면 성곽 가운데 가장 취약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 정면 돌파해서 성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셋째 방법은 꽤 오랫동안 성 주변을 포위해서 물이나 양식을 차단해서 항복을 받아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성이 함락된 것은 이런 전형적인 방법들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하나의 예배요 제의를 통해 어이없이 무너졌습니다. 이제 여리고성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살펴봅시다.
<여리고성은 어떻게 무너졌나요?>
제일 먼저 1절 말씀을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성문 안과 밖이 다 굳게 닫혀 있습니다. 사람들이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리고성의 주민들이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비를 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데 이스라엘의 포위작전까지 내다보고 성안에서 전열을 가다듬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새해 들어 첫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이 말씀을 신앙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무너뜨리기 어려운 여리고성들이 있습니다. 성문이 굳게 닫혀 도무지 열 수 없을 것만 같은 여리고성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인간관계의 여리고성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여리고성이 있습니다. 심리적인 여리고성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무너뜨릴 수 없는 새해의 여리고성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제일 처음 만난 난공불락의 요새가 여리고성이었는데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수행하시는 전쟁이라는 것이지요. 승리할 것이라는 전제의 결과를 미리 보장받고 하는 싸움입니다. 마치 이겨 놓은 축구 경기의 결과를 미리 다 알고서는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를 다시 보듯이 이겨 놓은 전쟁을 지금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여러분,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포인트인데 금년 한 해 동안 여러분에게 그 어떤 여리고성들이 딱 버티고 서 있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 여리고성들을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붙이셨기 때문에 우리는 미리 승리를 보장받은 채 그 성들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여리고성은 안과 밖이 다 굳게 닫혀 있습니다. 어떤 인간의 방법을 써도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닫힌 성문을 보지 말고 그 문의 열쇠를 쥐고 계신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이 그 여리고성을 우리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이지요. 어떤 여리고성을 만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에 붙이셨으므로 반드시 무너뜨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여리고성은 무너져있습니다. 미래의 사실을 현재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주시기 위해 군사 전략으로 볼 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3-5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총사령관에게 명령을 주십니다.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하나님께서 주신 책략은 너무나 비전투적입니다. 상식 밖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들이 엿새 동안 하루에 한 바퀴씩 여리고성을 돌라는 것입니다. 한 바퀴 삥 돌아서 출발 지점으로 되돌아오라는 것이지요. 다만 일곱째 날은 한 바퀴만 돌지 말고 일곱 번을 돌라고 했습니다. 여기 일곱이라는 숫자가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7이라는 숫자는 성수(聖數)요 천수(天數), 완전수(完全數)이지요.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하루 한 바퀴씩 모두 여섯 바퀴를 돌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아, 도합 13바퀴를 돌다가 마지막 날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부를 때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 여리고성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참 황당하고 무모한 말이지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여기 보세요. 이렇게 7일 동안 총 13바퀴를 도는데 그냥 함부로 도는 것이 아닙니다. 전열을 분명히 해서 돌라고 했습니다. 6-21절을 보면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정중앙에 섭니다. 이와 같이 언약궤를 중심으로 해서 가장 앞쪽에는 무장한 선발대가 앞서 갑니다. 바로 그 다음 열에 일곱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불면서 선발대를 뒤따라갑니다. 그리고 정중앙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걸어가고 맨 뒤쪽에는 후발대가 뒤따르고 바로 그 뒤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라갑니다. 이제 그림을 그려봅시다.
정중앙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이 언약궤 바로 앞쪽에 일곱 양각 나팔을 부는 일곱 제사장이 있습니다. 이 언약궤와 바로 앞 쪽에 위치한 일곱 제사장을 호위하기 위한 선발대와 후발대가 앞과 뒤에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은 중심부를 뒤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6일 동안 매일 한 바퀴씩 성 주변을 돌 때 일체의 함성을 지르지 말고 침묵하라고 했습니다. 오직 일곱 나팔을 든 일곱 제사장들만 행군하면서 나팔을 불고 일반 백성들은 아무 소리도 발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여리고성이 무너지기 전 놀라운 사실을 하나 지적해야 합니다.
여리고성을 돌 때 여호수아나 이스라엘이 절대로 게으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런 공격 태세도 갖추지 않고 그냥 성 주변만 돌라는 말은 굉장히 소극적인 말입니다. 아침 늦게 일어나 천천히 해도 될 일이지요.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누구보다도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12절을 보세요.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
15절을 보세요.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 일어나서." ]
여리고성은 분명히 하나님이 무너뜨리신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은 아주 수동적이고 나태하게 이 하나님의 일에 뛰어든 것이 아닙니다. 아침 일찍, 새벽 일찍 일어나 부지런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여리고성을 하나님께서 허물어주심을 믿는 사람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결코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제 7일이 되었습니다. 이 날은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 제사장들이 일곱 번째 돌다가 일곱 번째 나팔을 불 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 성이 떠나가도록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0절을 보세요.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난공불락의 요새,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철옹성 여리고성이 맥없이 무너졌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2009년도 한 해 동안에도 우리 앞에는 숱한 여리고성들이 가로막고 서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을까요? 제가 볼 때 여리고성 함락 기사에서 중요한 논점은 그 성이 기적적으로 무너졌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는 여리고성이 무너지던 바로 그 시간에 지진이 일어나서 그렇게 되었다고 해석합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중요한 것은 여리고성의 초자연적인 괴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가르치시려는 교훈이 중요합니다. 그 교훈은 세 가지입니다. 믿음과 인내와 순종입니다.
무너뜨리기 어려운 여리고성을 만나거든 하나님이 그 성을 우리 손에 붙이셨다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미 그 성이 허물어져 우리가 그 성안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는 미래의 장면을 미리 보라는 것이지요. 이미 이겨놓은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치르는 그 어떤 영적 전쟁도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는 확신을 가져야만 합니다. 여리고성이 왜 무너졌습니까? 그냥 수동적으로 돌기만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이스라엘의 믿음을 보시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려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 다음에 인내해야 합니다.
엄청난 인구가 7일 동안 여리고성을 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며칠 하다가 그만두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무모하게 보였기 때문이지요. 엿새 동안 날마다 돌았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질 징조는 털끝만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도 6일 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사기충천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도 무너질까 말까인데 끽 소리하지 말라니요. 인내에 한계가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참았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마지막 날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선발대는 선발대의 사명을, 후발대는 후발대의 사명을, 제사장은 제사장대로 언약궤를 메고 나팔을 불고, 백성들은 침묵하고 함성 지르고, 인내하며 각자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랬더니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7일만이 아니라 한 달, 일년, 10년을 돌라고 해도 돌 수 있는 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각자 맡은 바 역할을 다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는 사람은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여리고성은 순종할 때 무너집니다.
아주 기발한 전술전략을 세우고 기병대와 특공대를 앞세워 공격해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여리고성인데 빙글빙글 돌기만 하라니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코웃음을 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대로 움직였습니다. 돌라면 돌았습니다. 한 바퀴 돌라면 한 바퀴 돌고 일곱 바퀴 돌라면 일곱 바퀴 돌았습니다. 침묵하라면 침묵했습니다. 함성을 지르라고 했을 때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순종했더니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여리고성 함락 작전은 하나의 예배요 종교적인 의식이었습니다. 전쟁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배를 주관하는 제사장이 중심 역할을 합니다. 행진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언약궤가 구심점이 되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불었던 양각 나팔은 전쟁을 알리는 신호도 되었지만(욥 39: 25), 예배에 있어서 두드러진 기능을 했습니다(대하 15: 14). 여리고성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중심으로 무너졌습니다.
예배의 세 요소는 말씀과 찬송과 기도입니다.
제사장이 멘 언약궤는 말씀을 상징합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여러분이 말씀 충만할 때 여리고성은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나팔을 불었다는 말은 찬송했다는 말입니다. 찬송할 때 마귀가 물러갈 줄로 믿습니다. 찬송 부를 때 여리고성이 무너질 것입니다. 침묵을 지켰다는 말은 묵언정진, 묵상기도를 말합니다. 때로 우리는 입을 닫고 조용히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는 말은 통성기도했다는 말입니다.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성도는 기도하는 성도입니다. 묵상기도이든 통성기도이든 기도할 때 승리합니다. 뜨겁게 기도할 때 여리고성은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외부에 있는 여리고성보다 더욱 더 무너뜨리기 어려운 것은 우리의 내부에 있는 여리고성입니다.
불신앙과 조급함과 불순종의 여리고성이 더 큰 문제입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내부에 있는 여리고성부터 무너뜨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고전 1: 25)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여리고성도 무너집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는 내면의 여리고성부터 무너뜨려야 합니다.
<담쟁이가 절망의 벽을 넘듯이>
도종환 시인이 쓴 '담쟁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우리 교회의 금년 표어는 '장벽을 허무는 교회'입니다.
때로 저 벽은 우리가 도저히 허물 수 없다고 생각되는 벽도 있을 것입니다. 도종환 시인의 말대로 물 한 방울도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콘크리트 장벽, 절망의 벽도 있겠지요. 그러나 담쟁이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혼자 넘으려 하지 않고 여럿이 함께 손을 맞잡고 넘습니다. 저기 앞에 있는 우리 교회의 표어를 적은 배너를 보세요. 담쟁이는 저 살벌하고 넘기 어려운 콘크리트 장벽을 여럿이 손을 맞잡고 결국 넘지 않습니까?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예배하는 심정으로 말씀과 찬송과 기도를 앞세우고 행진하면 여리고성이 무너집니다.
믿음과 인내와 순종하면 여리고성이 허물어집니다.
이미 다 이겨놓은 게임을 우리는 하고 있습니다.
2009년도에 여러분의 개인과 가정과 직장과 사업체와 우리 교회, 그리고 이 나라 이 민족 앞에 그 어떤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가로막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성은 무너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