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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반 특강 -바다의 공간 연구(평론분석)
‘바다’의 생태 공간 지향성
- ‘모성과 생명의식’에서 ‘몽환과 성취의식’으로의 변용 -
권대근
(문학박사, 명예철학박사)
1. 들어가며
산업사회의 현대는 독자를 감동시키는 강렬한 흡인력과 공감대를 지닌 수필을 요청한다. 뉴턴이 말한 수필의 보편성이야말로 소재의 다양성에 의미를 둔다고 하겠다. 문학적 보편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수필은 편중적인 소재주의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틸 다이가 상상을 ‘소재를 변형시켜 새 현실을 창조하는 힘’이라고 한 것은 소재의 확장이 수필 영역의 확대와 직결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여기서 한국수필은 그 동안 멀리 해온 ‘바다’ 소재의 접근성을 요구받는다고 하겠다. 위의 측면에서 이 시대의 많은 문인들은 하나뿐인 지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생태문학’ ‘해양문학’ 등의 장르를 내세우면서 ‘바다’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에게 있어 바다는 환경인 동시에 문화다. 바다를 함께 하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치열한 삶의 일부분이고 도전과 응전 속에서도 경외와 적응 속에서 삶의 순리를 따르기도 하였다. 미래로 가고 있는 수필 속에서 바다는 중대한 화두 이상의 무엇을 가지고 있다. 물의 총합으로 표징되는 바다, 생명의 원천으로 화합과 끌어안음의 그 바다를 배경으로 하거나 주요 대상물로 하는 해양문학은 사람도 등장하지만, 주역을 담당한 바다라는 무대에 내포된다. 일찍이 문덕수는 “해양문학의 빈곤은 우리 문학사의 맹점이다. 삶의 무대로서의 바다를 인식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자연이라는 관점에서 바다는 공간을 구성하는 두 요소 중 하나다. 그만큼 바다는 그 공간성이라는 관점에서 자연을 이야기할 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다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모성 혹은 생명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것은 신화원형적인 관점에서 그럴 뿐 실제의 문학작품에서 등장하는 바다가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바다를 소재로 하거나 또는 바다에서 직접 취재한 문학 작품은 예로부터 다른 문학 장르에는 많이 있었다. 구약성서의 ‘요나서’나 그리스 신화가 그렇고, ‘보물섬’, ‘백경’, ‘노인과 바다’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우리 나라도 반도의 삼면이 바다를 끼고 있는 까닭에 자연스럽게 바다를 읊은 노래가 많다. 우리 시가의 최초 작품이라고 말해지는 ‘구지가’나 ‘공무도하가’가 바다 또는 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부터 그렇다. 그러나 고대시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학에 투영된 바다의 모습이 한결같지 않으리라는 것은 물론이다. 이 글은 이런 관점에서 출발한다.
이제 필자는 이 장에서 바다의 공간성이 우리의 수필에서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지 그리고 공간의 지향성이 어떻게 변모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수필에서 바다는 대체로 세 가지 공간으로 제시된다. 첫째 외적 공간, 둘째 내적 공간, 셋째 관념적 공간이다. 외적 공간이란 문자 그대로 우리의 감각적 세계가 인지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제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적 공간이란 시인에 의하여 주관화된 공간 그리하여 시인의 내면 의식에 의하여 다시 창조된 공간이다. 그것은 현실에는 없고 오직 인간의 의식에만 있는 정신적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념적 공간이란 실제로는 있을 수 없고 다만 신념을 통해 가상할 수 있는 혹은 소원 성취의 대상으로 설정된 그러한 공간을 의미한다. 그것은 감각적 세계를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외적 공간과 구분되며 인간 의식을 초월해 있다는 점에서 내적 공간과 다르다.
2. 펼치며
1. 바다수필과 생태적 상관성에 대하여
바다는 자연계 중에서도 가장 신비스러운 공간이다. 일찍이 융은 “바다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요, 영적 신비이며 영원성이요, 죽음과 재생을 나타낸다‘고 하였고, 프라이도 바다는 겨울, 밤, 죽음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보면서 죽음의 표상인 동시에 죽음의 승화과정을 거쳐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통로로 보고 있다. 또한 엘리아데도 바다는 죽음과 재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있어 이들 모두가 소멸과 창조, 죽음과 삶의 속성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즉 바다를 침몰과 외경과 동경의 양가치적 의미로 표상된다고 할 때, 표해류 작품에 나타나는 상징적 의미는 창조나 동경보다는 죽음이나 침몰과 외경의 대상으로 설명되고 있다.
바다와 관련된 수필을 최근의 생태학이나 환경문학 등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긍정적인 면이나 부정적인 면, 나아가서는 소재주의의 편협성으로 제한되는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생태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생태계 질서의 파괴가 가져온 부정적 결과를 부각시켜 그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건강한 생태계의 긍정적 효과를 보여주는 방법이다. 김성곤은 문학 생태학을 자연, 사회 생태계와 인간의 정신 생태계의 파괴를 다룬 문학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송희복은 새로운 세계 인식의 패러다임으로서 생명관과 생태학적 가치 기준 및 책임 윤리에 문학의 인식적 내지 상상적 기능을 부과하고 있는 포괄적 글쓰기의 소산, 즉 인간다운 품위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죽음의 현실에 맞서 생명의 존엄성을 확인하거나 생명에의 경외로운 의식을 고양하는 문학을 ‘생명문학’이라 정의한다.
바다의 환경문제가 문명사회의 삶을 위협하는 위기의식으로 다가오는 현대는 물리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으로도 ‘바다’이미지는 우리에게 이상을 가져다준다. 인문학의 대상으로서 바다가 지닌 진정한 의의는 상상의 모태일 것이다. 바다는 자기 변화를 부단하게 추구하면서도 원래의 정체성을 지켜 가는 존재이고, 닫힘에서 열림으로, 맺힘에서 풀림으로 나아가는 출구이며 떠남과 벗음의 자유를 가르쳐주는 역동적인 언어이다. 그렇다면 이태준의 『무서록』에 실린 “바다”라는 수필에 적혀 있듯이 위성은 ‘지구“(땅의 위성)가 아니라 수구(물의 위성)일 것이다. 바다가 문학의 소재가 되는 이유도 생존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실존이 바다와 관련되어서다. 그렇다면 바다의 존재가 생태주의라는 생명주의와 관련을 맺는 것은 당연하다.
2. 바다수필에 공간 지향성 고찰 개관
1970년 영국 BBC는 생태학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방송했고, 3년 후 노르웨이에선 아느 네스가 환경문제의 시각을 근본적으로 전환하자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서구에서는 생태 패러다임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한국에서의 패러다임 전환론은 1989년 <한살림 선언문>으로 시작되었으며, 환경문제의 실용주의적 해결과 세계화의 덫에 걸려 여전히 미개척 상태에 머물렀으나, 서구에서는 지난 30년여 년 동안 생태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들이 환경철학, 환경사회학, 생태 정치론 그리고 새로운 대안 사회에 대한 실험 등으로 조금씩 구체화되고 체계화되었다 이런 상생의 패러다임이 늦게나마 수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이명재 씨는 1999년 수필문학사가 주최한 ‘바다를 주제로 한 수필문학의 전개’라는 심포지엄에서 바다라는 소재를 해외 해양수필의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분류한 바 있다. 첫째는 굴원의 ‘어부사’와 소동파의 ‘적벽부’의 예로서 강을 뱃놀이 장소로 읊은 감상의 대상, 둘째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처럼 원양항해와 개척의 공간, 셋째는 헤밍웨이의 ‘로운 운하에서의 낚시질’(19220 등처럼 바다낚시라는 레크리에이션의 공간, 넷째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무인도 까마귀 섬의 비밀’(1990)에 나타난 환경보호의식이 가미된 원시성의 공간이다. 수필에 나타난 바다와 대비하여 시에 표현된 바다와 바다소설에 나타난 그 정체성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차이가 발견된다.
바다문학 또는 해양문학의 개념 정의와 관련하여 구모룡은 엄밀한 의미에서 바다 수필의 구성요건을 ‘바다’, ‘배’, ‘항해’ 세 가지로 든 바 있다. 소설의 경우 이런 세 가지 요건을 갖춘 진정한 의미의 바다소설은 이미 동서양에 공히 많이 공존한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허만 멜빌의 『모비 딕』이나 우리나라의 경우 김원일의 『앓는 바다』, 강인수의 『밀물』등의 소설 등이 그것이다. 이들 소설은 대체적으로 무대가 바다 위이고, 배가 나오고, 항해 중의 이야기를 그려나가고 있다. 수필의 경우는 이런 작품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아동문학가 오정임이 『부산여류문학』에 발표한 수필 ‘바다, 그대와의 화해를 위한’은과 제24회 한국해양문학상 우수상을 받은 수필 ‘고등어의 눈물’ ‘바다’, ‘배’, ‘항해’의 삼 요소를 갖추고 있는, 협의의 관점에서 본 진정한 의미의 바다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바다 위의 배에서 전개되는 승선 체험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바다수필은 항해 체험이 녹아 있는 그런 바다공간 수필로 가야 할 것이다.
3. 바다수필에 나타난 공간의 세 가지 양상
수필 작품의 공간은 필자가 관찰하고 회상하고 상상하는 대상과 그 대상이 있는 곳이다. 시간과 공간은 작품 속에서 분리되지 않고 결합되어 있으나, 작품의 분석과 해석을 위하여 따로 고찰할 수 있다. 여기서 상상력은 이미지의 재현이 아니라 변형, 해방, 창조라고 주장한 바슐라르의 견해를 주시할 필요가 있게 된다. 그것은 이 지상엔 조물주가 창조한 우주적 자연 공간과 작가의 상상력이 창조한 인위적 공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수필은 언어예술의 한 장르다. 허구적 양식인 시와 소설과는 달리 수필문학은 체험의 영역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수필문학이 확보하고 있는 언어공간은 제약받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은 시간적인 구조와 함께 공간적인 구조를 갖는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은 분리될 수 없는 상관성을 지니며, 이 실체가 없는 시간과 공간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칸트와 베르그송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어 중요한 철학적인 명제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바다가 나오고 파도가 나온다고 해서 바다수필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다와 인간이 만나 나누는 교감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편으로 바다를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다 쪽으로 향하여 가서 어느덧 사물과 작가가 경계를 잊고 하나가 되는 동화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1) 외적 공간으로서의 바다
하르트만은 공간을 삼분하고 있는데, 실제공간, 직관공간, 이념공간이다. 수필의 제재로서 ‘바다’의 존재는 실제 공간이다. 여기서 실제공간은 우주적 자연 공간으로서 경험적 가시 공간으로 풀이될 수 있다. 문제는 바다문학의 구성요소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관점이다. 좀더 엄밀하게 바다수필의 구성요소를 정하여 바다수필의 개념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으나, 필자는 바다문학 내지 바다수필의 개념을 광의적으로 봐서, 일단 ‘바다’를 소재로 하고 있으면 바다수필로 본다. 이 바다란 외적 공간에서 수필가가 맨 처음 본 것은 무엇보다도 교훈적, 계몽적인 성격이었다. 인간은 바다를 통해서 무엇인가 배울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적 공간을 대상으로 한 바다수필의 첫 번째 유형은 바다로부터 얻은 교훈을 수필로 쓴 것이다. 즉 바다는 수필에서 교훈적, 계몽적 공간을 제공해 준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영애의 「아버지의 바다」가 바다를 소재로 하여 씌어졌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이는 문학과 자연의 반영 관계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이 수필의 바다는 바로 아버지의 정을 받아들이는 통로로서의 바다였기 때문이다.
내 유년의 기억은 아버지의 등에 업혀 바라본 새벽 바다로부터 출발한다. 통금 해제 싸이렌이 어둔 정적을 깨우고 나면 아버지는 어린 내 손을 잡고 새벽 산책에 나섰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고, 그 말미 선창에는 새벽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가족에게 먹일 횟감을 구하는 것이 아버지의 즐거움이요, 산책에 대한 핑계였지만 어둠으로 눈 뜨는 바다를 통해 당신께서 풀어갔음을 나는 알 수 있다. 등 뒤로 들려오던 잔잔한 노래가락에는 집에서 느끼지 못한 우수가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 기억의 층에는 성성하고 분명하시던 어머니보다 인자하고 조용한 아버지 자리가 더 두텁게 남아 있다. 두 오라버니를 두고 한참 후에 내가 태어났기에 더 귀여움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정작 내 손을 잡고 바래다주어야 하던 시집가는 날, 아버지는 살아계시지 않았다.
-이영애, 「아버지의 바다」중에서
‘내 유년의 기억은 아버지의 등에 업혀 바라 본 새벽바다로부터 출발된다’와 ‘아버지가 보여주는 바다는 신비로움에 눈을 뜨면서 나의 정서는 뿌리를 내렸다. 새벽을 기다리는 것이 체질화되고, 물살 뒤척이는 그 아침을 좋아하면서 성장했다’는 그는 <아버지의 바다>에서 아버지의 등 뒤에서 느낀 따스함과 고독이 사랑의 원천이었고, 새벽바다는 자신을 넉넉하게 해주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바다와 새벽 그리고 조용한 성품의 아버지는 그녀로 하여금 긍정적 세계관을 심어주는 결정적 모체로 작용한다.
얼마나 어둠을 바라보았을까. 내 두 눈은 드디어 검은 빛이 연한 담묵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재빨리 포착했다. 그 담묵은 좀더 희미하게 물 탄 듯 번지더니 순간 한 줄기 오렌지 빛이 선명하게 수평선을 긋고 있지 않는가. 이 선은 점점 굵어지며 황금빛으로 변하고 그 양쪽 끝은 환상의 보라빛이 되어 길게 꼬리를 잇고 있었다.
- 고임순의 「해돋이」중에서
인용 수필은 바다의 해돋이가 연출하는 외적 모습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수필가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바다의 일출로부터 어떤 교훈적 의미를 탐색하는 일이다. 그것은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그것은 출발과 완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일어섬이며 일상의 갈등으로부터 이탈이기도 하다. 수필가는 이와 같은 인생길의 방향을 이 수필에서 항상 푸른 바다를 뚫고 상승하는 해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신비의 광경을 고임순은 인간의 삶과 접속시켜, 그 아픔을 흥건한 사랑의 의미와 접속시켜 하나의 생명으로 응축하고 있다. 작가는 이를 위대한 분만이라고 말하고 있다.
외적 공간으로 자연에 관심을 가진 두 번째 유형의 수필은 미학적 관심으로 씌어진 것들이다. 문학의 기능은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작가의 사상과 감정 혹은 체험의 모두를 표현할 때 숨결을 갖게 된다. 그러나 말의 진정한 암시는 언어가 언어로 조립된 전체적인 맥락의 행간에 숨겨진 또 다른 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감동의 요소는 언어 자체가 아니라 언어로 조립된 분위기요, 거기서 나온 조화의 묘미라는 점이다. 수필에서 표현된 외적 공간으로서의 바다는 다양한 성격을 지니지만 그 중에서도 지배적인 것이 미학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예술의 한 장르인 까닭에 수필가가 이처럼 그 외적 공간을 미학적인 관점에서 수용하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햇빛에 그을린 바위가 호젓하게 에두런 바다가 추녀 끝처럼 구비틀었다. 끝 머리쯤에 서너 채의 집이 멀찍이 보인다. 어두워질수록 해풍은 서늘해지는데 낙조에 반사된 갯벌이 피범벅 질감으로 번득인다. 촉촉한 물기와 따뜻한 불기로 빚어진 막사발 빛이다. 열정으로 달구어진 여인의 피부를 떠올린다.
흑갈색의 모래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낮 동안 바닷물로 데워지고, 태양빛으로 구워진 그곳은 따뜻하면서도 차가웠다. 야릇한 즐거움이 실핏줄을 타고 정수리까지 올라왔다. 만일 휑한 쓰레기장이나 모난 자갈밭이었다면 어땠을까? 곱게 보아주던 여자가 무심결에 던진 앙칼진 말 비늘처럼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깊게 깔려 부드러워진 뻘이 알맞게 단단했다. 남자의 가슴에 눌린 여인의 젖가슴이 이럴까. 햇솜을 넣은 요에 처음 누울 때처럼 시원한 느낌도 빠지지 않았다.
파도 소리가 점점 내 귀를 울렸다. 숨도 덩달아 차올랐다. 다른 피서객은 어둠과 밀물이 낯선 까닭인지 이미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긴장감이 있으면 밀회의 쾌감은 높아지는 법, 홀랑 맨몸으로 눕기로 했다. 등에 와 닿는 모래알과 얕은 물살이 한결 까슬해지면서 매끄러워진다. 그래 몸을 죄다 맡긴 터에 이곳에서 밤늦도록 노닥거려야지. 하루 밤 인연인 걸.
- 박양근, 『파도 몸살』중에서
이 작품은 바다의 외적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갯벌, 바위, 해풍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면서 작가가 흑갈색 모래 위에서 마치 해변의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로 모래 위에서 나누는 교감의 운치를 감미롭게 표현하고 있다. <피범벅 질감으로 번득인다>, <촉촉한 물기와 따뜻한 불기로 빚어진 막사발이다>, <열정으로 달구어진 여인의 피부를 떠올린다>, <야릇한 즐거움이 실핏줄을 타고 정수리까지 올라왔다>, <남자의 가슴에 눌린 젖가슴이 이럴까>, <숨도 덩달아 차올랐다>, <등에 와 닿는 모래알과 얕은 물살이 한결 까슬해지면서 매끄러워진다> 는 표현들은 정사를 벌이고 있는 남녀의 모습을 미학적으로 바라보고 연상케 한다. ‘밀회의 쾌감’, ‘홀랑 맨몸’, ‘몸을 죄다 맡긴 터’, ‘하루 밤 인연’ 등의 어휘는 노골적이다.
셋째 유형은 바다에 수필가의 감정이 이입된 유형이다. 이 경우는 작가의 감정이 자연을 통해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체론적 입장에서 보면 한 편의 글은 곧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체온계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글에 내포된 모든 의식은 결국 작가의 품성과 인격 그리고 삶의 모두를 살필 수 있는 기능의 문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유형은 첫째의 유형과 그 방법상에서 동일한 태도를 지닌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담는 내용만이 다를 뿐 모두 바다를 주관 표현의 도구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즉 첫째 유형이 바다를 통해 교훈을 담았지만 이 셋째 유형은 감정을 담았다.
산업화의 제물로 ‘바다’를 잃어버린 시민들에게선 어느새 바다가 낯설어졌으며 보기도 생각하기도 싫어졌다. 바다가 없는 항구는 존재할 수 없듯이, 병든 바다를 안고 있는 시민들의 마음에는 우울과 어둠이 깃들었다. 바다라는 천혜의 복을 지닌 도시는 이 바다를 자연 그대로 청정의 모습을 잃지 않게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강이 있는 도시는 강의 청정 여부가 시민의 정서와 건강도를 보여주며 항구도시는 바다의 물빛을 통해 시민의 삶과 미래를 엿볼 수가 있다. 연안이 중금속과 쓰레기 오염으로 악취를 풍기며 죽어가는 도시는 아무리 번성을 구가한다고 해도 희망과 미래가 없다.
- 정목일, 『청정의 바다』중에서
산업화로 인해서 도시를 끼고 있는 바다가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는 작가의 심사가 잘 드러나 있다. ‘푸른 물결 넘실대는 내 고향 남쪽 바다’였던 마산항이 청정을 잃어버린다면 그 도시의 미래는 없다는 작가의 생각이 ‘바다의 물빛을 통해 시민의 삶과 미래를 볼 수 있다’는 표현에 그대로 담겨 있다. 이미 병들어버린 바다를 보고 살아가는 시민들의 가슴은 우울과 어둠이 깃들었음을 확인하는 작가는 바다가 자연을 모습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자신의 바다 사랑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윤재천은 ‘문학은 인간을 둘러싼 삶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고 마감된다’고 한 바 있다. 사회 현상에 대한 비판적 안목은 문학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문학이 존재하고 그 효용적 가치가 증대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삶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소명을 전제로 한다. 정목일 고향 마산 바다의 환경 오염 문제의 심각성을 이 작품에서 고발하고 있다.
네 번째 유형은 생활 공간이다. 수필가는 바다로부터 생활- 현실적 삶 그 자체를 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소재는 수필의 중요한 내용이 된다. 바다에 관련된 일체의 삶에 대한 묘사는 모두 이 유형에 든다.
광안리에 사는 재미는 바다에 있다. 바다 말고도 일출을 맞이하는 금련산이 배산임해의 포근한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다. 그 밖에 역사의 뿌리를 안은 늠름한 수영강이 좌수영을 옆구리에 끼고 흐른다. 바다, 산, 강으로 이루어진 지리며 역사의 향기가 스민 곳이 광안리 일대라고 하겠다.
뿐만 아니다. 케이비에스와 엠비씨 방송국을 찾으려면 십중팔구 광안리를 거쳐가게 마련이다. 예전에 한 고을에서 힘깨나 쓰는 만석꾼은 대개 그 고을의 전답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아무개의 땅을 밟지 않고는 바깥나들이를 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 광안리 또한 그런 힘깨나 쓰는 만석꾼 고을이라면 어떨까 싶다.
덩달아 광안리 사는 사람들의 어깨가 들썩일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방자치제도라는 것이 어쩌면 그런 걸 은근히 부추기는지도 모른다. 땅따먹기 소꿉놀이를 하던 때처럼 내 구역 네 구역 하면서 같은 도시 안에서 서로 금을 그어 세를 불린다. 이런 일이 상호발전을 위한 디딤돌이 되기는 하겠다. 서로 경쟁을 벌이니까 이웃하고 있는 지역이 번영이란 깃발 아래 시샘이라도 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힘을 쓰게 된다.
- 유병근, 『광안리 바다』중에서
광안리 바다는 삶의 한 공간에 있다. 자연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자연이다. 유병은은 광안리에 산다. 행정구역은 분명 ‘광안동’이지만, ‘광안동’으로 불리기보다는 ‘광안리’라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작가는 광안리 사는 재미를 ‘바다’에서 찾는다. 배산임해의 지리적 여건과 역사의 향기가 스며 있다는 데서 우선 광안리에 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또 하나는 광안리를 만석꾼 마을에 비유하면서 은근히 부자 마을이라는 걸 부각시킨다. 부산의 광안리, 남천동 일대는 서울로 치면 ‘강남 특구’다 그만치 부자 동네라 소문이 나 있다. 작가의 표현대로 지방자치제로 인하여 구 단위로 땅에 금을 긋고, 자기 지역의 발전에 행정력을 집중시키는 시대다. 당연히 부자 동네인 광안리 지역은 발전이 다른 구에 비해 빠를 수밖에 없다. 작가는 광안리가 만석꾼 마을이기 때문에, ‘덩달아 광안리 사람들의 어깨가 들썩일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작가에게 있어서 ‘광안리’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유흥지보다는 집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생활 공간으로서의 작은 바다다. 거기에는 어떤 상징성도 관념도 없다. 광안리는 광안리 그 자체의 바다인 것이다.
인간들이 고맙다고, 고맙다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래서 바닷물이 눈물과 섞이면서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 짠맛을 내고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부엌에서, 식당에서, 축사에서, 공장에서, 임해공단에서 시커먼 오염물질이 쉬임없이 바다로 흘러 들어온다. 물고기가 자꾸만 죽어간다. 인간들의 배신감에 치를 떨며 눈도 감지 못한다. 죽은 원혼이 구천을 헤매고 있다.
- 최진호, 「생명의 바다」중에서
최진호는 「생명의 바다」란 수필집을 출간했다. 위의 수필 제목인 ‘생명의 바다’라는 말은 김지하 시인이 쓴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라는 책에서 빌려 쓴 차어라고 한다. 이 수필은 ‘우리나라의 바다오염이 이미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진단을 내리고, 육상의 생활하수를 비롯하여 축사의 오폐수가 하천으로 흘러들어 토양을 오염시키고 강을 따라 모두 바다로 모여들면서 ‘죽음의 바다’로 만들고 있다고 하면서 생명의 없는 죽음의 바다를 활력이 넘치는 생명의 바다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피력한 수필이다.
물은 생명의 원천인 동시에 인간의 젖줄이다. 바다는 미래 자연의 보고이기도 하다. 우리는 거기에서 태어났고, 거기에 의존하다가 생명을 다한다. 바다는 우리에게 싱싱한 꿈과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아이들에게 세계로의 포부를 심어주었다. 푸른 색깔과 그 광활함은 우리의 한을 씻어주었다. 그러나 지금 바다는 우리들이 믿고 의지하던 그 옛날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이제 ‘물고기가 자꾸만 죽어간다’. 그래서 우리 곁을 떠난 바다는 통한의 바다가 될 수밖에 없다. 자연은 우리에게 베푼 만큼 베풀어준다. 이탈리아 속담에 ‘물과 민중은 막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민중은 억누르면 폭발한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바다의 생명체인 물고기가 죽어가는 모습을 모여줌으로써 작가는 상대적으로 바다 생명의 소중함을 역설하고 있다.
(2) 내적 공간으로서 바다
내적 공간을 반영한 수필들은 기본적으로 자연을 외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 내면에서 숨겨진 의미를 탐구하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띄고 있다. 그러므로 이 유형의 수필은 자연의 외적 공간이 주는 의미를 넘어선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 세계로 침잠한다. 그리고 이 내면 탐구의 주된 무기가 직관과 상상력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모든 예술의 본질은 세계나 사물에 대한 미적 관심에 있음으로 내적 공간을 반영한 자연 수필의 첫째 유형이 미학적 관심으로 씌어진다는 것은 당연하다. 즉 내적 공간을 반영한 수필의 첫째 유형 역시 바다를 미학적으로 바라본다.
수필은 어떤 문학보다 미학적 정서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수필가는 정서가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무심한 사물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정은 인간의 심리 중에서 가장 원시적인 요소다. 그러나 그것이 물상을 사랑하는 마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객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가능한 것이다. 홍영순은 사물에 대한 감각적 묘사가 뛰어나다. 구체어를 이용한 감각적 이미지를 동원해 생동감 있게 문장을 표현하고 이다.
한꺼번에 자빠뜨릴 듯 자빠뜨릴 듯 달려드는 저 무지막지한 힘의 사내가 달려든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계집은 사내의 목을 끌어안고 속수무책으로 엎어진다. 그녀는 방년 열아홉살 처녀다. 갯바람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해변 구석구석 흰 파도가 부끄럽게 부서진다. 문득 파도를 보면서 야릇한 생각에 잠긴다. 두 몸뚱어리 마침내 하나 되어 쾌락의 허연 거품 쏟아내는 저 순수 육체들이 펼지는 한 낮의 정사가 졸리지 않는데도 눈을 감게 한다.
- 홍영순, 「파도를 보며」중에서
수필은 때로 아라베스크의 무늬와 같은 표현이 끼여드는 묘미 있는 문학이다. 대상을 두고 어떤 문양으로 치장할 것인가는 그 수필가의 수공업적 몫이다. 이 수필에서 작가는 바다를 열아홉 살 된 여자의 육신으로 파악하는데 이는 우리들의 원형적 상상력에 있어서 바다는 본래 여성 혹은 우주모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홍영순이 바다에서 부끄럼 많이 타는 열아홉 살의 순결한 소녀를 보았던 것은 아마도 그 바다가 청명한 봄날, 미풍에 잔잔히 물결치는 바다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수필은 외적 모습에서 접근하지 않고 내적으로 접근한다. 그리고 그 내적 접근에 있어서도 바다를 통해 어떤 인생론적 진실이나 자연의 이법을 발견하려 하기보다는 새로운 상상력의 지평을 확장하려 하고 있다. 예컨대 홍영순은 이 수필에서 파도를 하나의 사내로, 바위를 하나의 여자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이성적 사유를 넘어 존재한 시적 상상의 세계이다. 이러한 탐색은 이성적 사유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철학적이기보다는 미학적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떻든 인용 수필은 자연을 그 외적인 모습에서가 아니라 그 내면에서 탐색한 작품들이다. 그리고 그 탐색된 내면의 의미는 어떤 인생론적, 철학적 진실이라기보다는 상상력을 통해 재현된 아름다움의 등가물이라는 점에서 미학적이다.
둘째 유형은 자연을 내면적으로 사유하여 그로부터 어떤 인생론적 진실을 추구한 작품들이다. 이 유형의 수필은 바다를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적인 깊이로 다룬다는 점에서 첫째 유형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 관심의 주된 대상이 아름다움의 등가물이 아니라 철학적 혹은 인생론적 진실에 있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바다는 언제나와 같이 갓 태어난 듯한 푸르름으로 그 싱싱한 몸짓을 계속하고 잇었다. 물결은 더위에 달궈진 모을 서늘하게 식혀주고 마치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발바닥을 간지럽히고 달아나곤 했다. 우리는 배를 타고 섬 주위를 돌기도 하고,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온몸으로 바닷 냄새를 숨쉬며 즐거워했다.
바다는 우리가 잃고 있던 원초적 야성과 생명력 그 풋풋한 사랑의 힘을 회복시켜 주는 것 같았다. 바닷가에서 보낸 2,3일은 도시에서의 숨막히는 듯한 무력감을 말끔히 가시게 해주었다. 서울에 돌아오니 뜻밖의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어릴적부터 친구인 S아주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녀는 행방불명이 된 며칠 후에 고향의 바닷가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바로 우리가 휴가를 보내던 그때, 그 근처의 바닷가에서...... 우리에게 환희를 주던 바다가 바로, 생명을 함몰시키는 절망의 바다였다는 사실에 몸처리 쳐졌다.
-염정임,「엄마는 바다로 갔다」중에서
위의 수필에서 염정임은 바다에서 죽음과 재생의 인생론적 진실을 발견한다. 작가는 어느 여름날 두 딸과 함께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보았다”라는 연극을 보고 이 수필을 썼다. 모녀간의 세대차이로 인한 갈등과 노인의 소외 문제를 다룬 연극이다. 연극 속에서 엄마와 같이 살던 딸은 이 세속적 삶의 질곡 속에서 희망과 꿈을 상실한 인간이다. 어느 날 문득 딸은 독립할 것을 선언하고 집을 떠난다. 엄마는 병이 들고 딸이 여행을 떠난 사이에 쓸쓸히 숨을 거둔다. 딸은 지난 날을 아프게 회상하는 장면을 끝으로 연극은 막을 내린다는 내용이다. 이상과 같은 연극의 내용이 고단한 삶을 앞에 둔 이 수필의 독자에게 던져진 화두이다. 이에 대한 작가의 답은 다음과 같다. “인생은 연극이라고들 한다. 죽음으로써 그 삶이 완성되는 것이라면 그녀는 자신의 비극적 역할을 완벽하게 연기한 것이 아닐까” 이는 무슨 뜻일까. S가 떠난 지 일 주년이 되던 날 작가의 어머니가 내뱉는 독백은 그녀의 비극적 운명을 말해준다. 이는 “그녀는 진정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기처럼 행복과 휴식을 얻었는지도 모른다‘는 진술에서 바다가 유혹에 빠진 것을 행복한 선택이었다고 암시한다.
<바다는 손짓하며 속삭였으리라>는 것은 더 적극적으로 그 자신 죽음을 선택하여 새로운 생을 준비하라는 뜻일 것이다. 바다는 죽음과 재생의 신화적 상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바다로 흘러든 것들은 새로운 것으로 다시 태어난다. 땅에 떨어져 바다에 흘러든 물은 하늘로 상승하는 것이며 지상의 모든 죽은 것들은 바닷물에 흘러든 물은 하늘로 상승하는 것이며 지상의 모든 죽은 것들은 바닷물에 용해되어 소금이나 새로운 유기물로 재생되는 것이다. 작가는 바다가 지닌 이와 같은 신화적 상상력을 원용하여 우리 시대의 비극적 삶을 초월하는 하나의 방식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자연의 내적 공간에 대하여 수필가가 관심을 갖는 또 다른 부분은 무의식의 세계이다. 즉 셋째 유형의 수필들은 바다를 통하여 인간 내면의 잠재 의식을 탐구한다. 그러나 이 경우 대부분은 바다에 한정되어 있다. 산을 소재로 하여 잠재의식을 탐구한 시들은 거의 없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의 상상력에 있어서 열려 있으면서 상방 공간을 지향하는 산보다는 닫혀 있으면서 상방 공간을 지향하는 바다가 자연스럽게 잠재 의식을 상징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일반적으로 잠재 의식은 바다의 심층부로 비유되어 왔거니와 눈에 보이는 수면 위의 공간이 의식의 세계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의 공간, 즉 심해는 잠재 의식의 세계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수필가는 산보다 바다를 통해 잠재 의식을 탐험코자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둑 밑의 즐거움은 그분이 아니었다. 어린 순을 잘라내면 잘라진 부분에서 빨간 진이 이슬처럼 맺히는 풀이 있는데, 그 피어오른 진을 손톱에 꼭꼭 눌러 바르는 일도 비밀스런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그 행복의 시가들은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에 한꺼번에 물거품이 되기 예사였다. “예야 저쪽 너머로는 절대로 가지 마라” 아버지가 나를 부르신 뒤 정색을 하시면서 가리키는 곳은 언제나 둑 너머에 있는 넓은 바다였다. 아버지는 바다 곁에서 일생을 사셨으면서도 언제나 바다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 임학자, 「아버지와 바다」중에서
임학자의 <아버지와 바다>는 바다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의미소 즉 ‘저쪽 너머 바다는 무서운 곳이다’는 것은 바다에서는 죽음과 삶이 교차함을 의미한다. 절대로 바닷가에 나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엄명은 바다 이미지를 두려움의 존재로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아버지의 바다는 자신이 알고 있던 바다와는 너무 다르다. 여기서의 바다는 역시 현실적인 바다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수필가의 잠재 의식에 떠오르는 바다를 자유 연상의 형식으로 표출한 것이다. 작가의 아버지는 홀홀 단신으로 월남하여 가솔을 책임지고 이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 현실의 절박함에 따라 해마다 저수지 부근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사고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작가에게는 동경의 바다였지만 작가의 아버지에게는 현실의 바다다. 죽음이 연상된 무작위의 바다 이미지는 마을이 공단으로 지정되면서 매립이 되고 만다. 덕분에 작가는 아버지와 친정나들이를 하게 된다. 이와 같은 유형의 수필은 바다를 내적으로 탐구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의식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잠재 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파도 소리를 타고 지난날의 바다와의 대화는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바다 풍경 속에 지금은 훌훌이 흩어져 달아난 추억의 파편이 모래 위에 조개 껍데기처럼 여기저기 뒹굴어 다닌다. 여름나라에서는 바다가 읊는 시에 귀기울이며 장엄 경쾌하고 광대 무변한 바다의 섭리를 닮아 가는 것이 우선 무엇보다도 좋다. 내가 내 마음 속에 바다를 상실하는 날 나는 나의 모두를 잃게 되려니.
- 김성희, 「여름나라」중에서
김성희의 수필 ‘여름나라’는 자연으로의 회귀, 과거로의 회귀에 대한 동경에서 ‘여행’이란 떠남의 장을 일궈낸 후에 전개되는 제물상에 대한 자연 밀착적 사유를 한 자 한 자 잘 다듬어 안개같이 아련한 정서의 의상으로 치장시킨 글이다. 그의 표현대로 바다는 작가의 청춘의 꿈과 이상을 싹틔운 곳이다. 김성희는 유독 바다에 애착적이다. 따라서 바다는 그녀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결정적 인자로 작용하게 된다. 그녀의 바다는 그녀에게 있어 구원의 장소요, 작가의 삶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정신적 고향이다. 그녀는 바다 여행을 통해 자연이 베푸는 교훈, 그 경이로운 힘을 느낀다.
그녀가 작품의 배경으로 하고 있는 회상적 공간은 바다에서 바져 나와 교정으로 이어지며, 다시 촌가로 이어지다가 강가에까지 미친다. 그녀는 유년 시절 교정과 촌가에서 목격한 소녀와 조부의 죽음을 보고 결말의 실마리를 구한다. 자연에 위대함에 비해 너무나 무기력한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은 이 부분에서 절정을 이룬다. 강물의 포용성 그 무한 혜량에서부터 시작되는 따가운 삶의 관조는 자기 삶의 반성적 회의로 승화되어 나간다. 작가의 내부에서 연소되지 않고 남아 있는 회상적 시공의 재음미를 통해 삶의 본지를 규명하고자 하는 작가의 인생 여행이 독자들의 공감대 위에 서는 것은 그만큼 작가의 목소리가 진지하게 들여오고 있기 때문이다.
(3) 관념적 공간으로서 바다
바다를 소재로 다룬 수필 가운데서 마지막으로 지적할 수 있는 유형은 바다를 관념적 공간으로 다룬 것들이다. 이들 작품에서 제시하는 바다는 현실적인 것도 아니요, 인간의 내면에 반영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어떤 절대적 세계에 홀로 존재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그것은 현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이상화된 세계 혹은 완전하고 무한한 세계라 할 수 있다. 인간은 현실의 삶이 모순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미화된 이상 세계를 가정하고 그곳으로 초월하려 한다.
문학에서는 이와 같은 인간의 원초적 감정을 <무한에의 향수>라고 불러 낭만주의의 중요한 본질로 규정하였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바다가 바로 그 무한한 세계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많은 선학들에 의하여 지적되어 온 바이다. 가령 바슐라르나 엘리아데 같은 학자들은 바다가 수평선과 끝간데 모를 넓이로 인해 피안 혹은 영원성을 상징하는 세계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바다를 소재로 다룬 작품들이 바다가 지닌 이 같은 영원 혹은 무한의 상징을 통해 현실의 모순을 초월하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소장은 퍽 협조적인 사람이었으나, 문제는 현장 담당 형사들이 범행 사안의 중요성을 들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5일 동안 파출소에 근무(?)하면서 해결 방안을 강구하였으나, 워낙 기만이의 행동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이어서 해결의 기미가 영 보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5일째, 비가 억수 같이 내린 날이었다. 내가 기만이에게 줄 도시락을 준비하여 갔더니 담당 형사들이 모두 비 때문에 외근을 하지 못한 채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어제 본서에 아는 친구를 통하여 이곳 파출소에 전화를 부탁한 덕분인지 나의 모습이 불쌍하게 보였던지, 그날따라 파출소의 분위기가 퍽 따뜻하게 느껴졌다. 난 이때를 놓치지 않고 따뜻한 커피를 시켜 형사들에게 선심 공세를 취하면서, 한편으론 현재 기만이의 불유한 가정 사정과 유능한 학생의 장래를 망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설득력 있는 호소력으로 기만이의 구제 작업에 들어갔다.
- 강영환, 「넓은 바다에 비가 내리고」중에서
강영환의 수필에 나타나는 수필적 관심은 교육에 대한 열정이다. 물론 여기에도 사랑이 철학이 유감 없이 발휘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관심을 보이고 사랑을 주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정된 범위를 뛰어 넘지 못하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만다. 특히 교육의 현장인 스승과 제자의 사이에서는 차별이 없는 절대적 사랑이 요구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을 박은 사람들을 용서해 주었듯이 교사 역시 예수와 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잘못이 잦은 아이들, 부족한 아이들, 소위 문제아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려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사도로서 표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피교육자의 입장에서 보면, 교육의 가치는 훌륭한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인생의 복이다. 그 역시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가슴이 따뜻한 교사이기에 교직 생활의 보람이 수필화되는 것이 아닐까? 이 수필에서 ‘넓은 바다’는 물리적 공간으로서 자갈치 시장 앞 바다를 의미한다기보다, ‘사랑’의 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부정과 비행, 잘못과 연행이 없는 사랑의 가슴이 ‘바다’이미지로 나타났다고 보겠다. 넓은 바다의 이미지와 물의 이미지가 결합됨으로 해서 영혼치료법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 끌어당긴다. 바다엘 가고 싶다고. 내 속의 누군가가 속삭인다. 바다가 보고 싶다고. 버려야 할 것이 있다고.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 끝간 데 없는 수평선과 하늘이 맞닿은 서해 바다 안면도, 역시 바다였다. 바다에 내리고 있는 눈을 바라보는 건 처음이었다. 마치 흰나비떼의 난무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빛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색깔 같은 투명한 눈송이를 바다는 말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치유해주는 마술사 같은 능력을 가진 곳 바다에서 우리는 소리 없는 속삭임으로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겨울 바다의 차가운 투명함, 푸른 침묵은 우리둘을 생각하게 하는 사람이 되게 해다.
- 박영선, 「등대를 바라보며」중에서
박영선이 찾아간 곳은 외적 공간인 서해 안면도라는 섬이지만, 작가가 추구하는 공간은 현실 초월적 공간으로써 이상적 삶이 그려지는 세계다. 이 작품에서 바다는 자신과 딸이 궁극적으로 다다라야 할 피안의 세계로 상정되어 있다. 작가가 서해 바다 안면도에서 버려야 할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욕심을 버린다는 의미보다 아마 흔들리는 자신의 영혼, 심신의 피로, 삶에 대한 어두운 전망, 뜨거운 욕망에 대한 여진, 애증의 반란으로 인한 분노 등의 자신을 괴롭혔던 부정적인 억압 기제를 제거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바다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치유해 주는 마술사다. 등대가 서 있는 곳도 바다다. 인접성에 의한 비유와 암시는 이 작품 전체에 향기를 풍긴다. 딸로 비유된 등대 그리고 바다를 좋아하는 엄마의 상관성은 더욱 더 강한 함축의 맛과 향기를 풍겨나게 한다.
그녀에게 바다는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글을 쓰면서 그 때 그 순간의 모습을 영상으로 떠올리며 딸과의 추억들을 간직한 과거 속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동시에 수필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한 딸의 고독한 모습에 더욱 괴로워하는 작가는 자책감으로 방황하다, 결국 쓰러진다. 그 와중에 딸의 극진한 간호가 있었고, 엄마는 딸의 모습에 감동하고,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다. 그리고 바다로 간다. 작가는 거기서 상처 난 심신을 치유하고, 평화와 희망 그리고 안정을 얻는다. 어두운 공간에서 밝은 공간으로의 이동, 어두운 과거로부터 밝은 현재로의 복귀에서 보여주는 박영선의 인간적 체취는 독자를 안타까운 연민에 서게 했다가 결국 안도감에 젖게 한다. 긴장의 해소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 구성적 전개가 좋았다. 가슴 졸이게 하는 슬픈 이야기는 존재의 구원이라는 대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우리에게 소중한 메시지를 하나 던진다.
삶의 많은 바다를 건너 이 '아름다운 신비의 섬' 울릉도에 당도했다. 이제 그 아름다움과 신비도 내가 헤엄쳐 가야 할 또 하나의 바다일지도 모른다. 힘찬 몸짓으로, 때로는 정겨운 손길로 이 바다를 헤엄치리라. 나의 바다 건너기는 끝이 없을 것이다. 그 건너편에 내 삶의 의미를 다시 새롭게 할 세계가 있는 한 나의 '바다 건너기'는 영원토록 끝이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음은 또 어떤 바다가, 어떤 섬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 이일배,「바다 건너기 -'섬 살기' 프롤로그」에서
이일배의 수필에서 제시된 바다는 영원한 안식의 세계이다. 그것은 이 수필에서 바다가 모두 아름답고 성스럽고 순결한 모습 즉 <이제 그 아름다움과 신비도 내가 헤엄쳐 가야 할 또 하나의 바다일지도 모른다. 힘찬 몸짓으로, 때로는 정겨운 손길로 이 바다를 헤엄치리라. 나의 바다 건너기는 끝이 없을 것이다>에 진술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수필에서 작가가 그 아름다운 바다를 보는 순간부터 바다 건너기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다는 인위의 세계를 떠난 자연의 원시성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는 존재인데 자연의 원시성이란 바로 자연과 합일된 세계, 그러니까 자연의 무한성을 몸으로 체득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수필은 세속적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의 그 무한한 원시성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작가의 향수를 이야기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그 무한의 상징이 바로 바다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편 바다 건너서 도달하고자 하는 섬의 세계는 바다 건너에 있는 어떤 영원한 세계이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할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한 바다 건너기를 계속할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는 그 영원한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 그리하여 수필에서 언급된 것처럼 그는 언제나 도전적인 존재로 살아간다. 이렇듯 이 수필은 유한과 무한의 경계선에서 초월을 꿈꾸는 작가의 순수 서정을 수필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수필에서 제시된 바다 역시 세속적 삶이 초월하고자 하는 어떤 이상적 세계라 말할 수 있다.
수필이 수필다울 수 있는 것은 어떤 문학 장르보다도 글쓴이 고유의 자아와 세상에 대한 인식 체계가 깊게 집약되어 드러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시와 소설에 비해 작가 자신의 감상적 태도와 과거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볼 수 있다. 이 같은 점 때문에 일부 수필가들은 지나친 감상으로 인해 통속을 낳는 우를 범하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최대한 아름다운 문장을 통한 정서, 감상, 추억, 향수의 표출에 많은 매력을 느껴온 것도 사실이다. 정영일 선생의 수필이 지나친 향수와 감상의 분출이라는 위험을 무릅쓴 일차적인 이유는 일견 그의 의식에 투영된 현실의 일상 경험을 여과 없이 담아내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낙관적 사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 타향에서 헤매는 새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밤, 흙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방을 챙겨도 정낭이 열릴까요. 그 동안 불확실한 미래를 등에 메고 얼마나 진저리치며 산 줄 아십니까. 언제까고 울고 웃어야 완성되는 삶이란 말입니까. 인생의 승리자는 고향을 지킨 사람들이랍니다. 흙이 인생의 고향이듯, 나의 고향은 불나방이 넘나드는 돌담집이랍니다.
- 오차숙, 「바람 부는 날이면 그 섬에 가고싶다」중에서
‘바람 부는 날’이 주는 상징성은 ‘힘든 삶’이다. 삶이 힘들 때, 작가는 그 섬으로 가고 싶어한다. 섬을 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바다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작가가 상정하고 있는 ‘바다’는 관념의 바다다. 자신이 혼을 일구고 싶은 장소를 안온하게 지켜 줄 이상의 바다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 ‘섬’은 바다의 중앙에 놓인 인간의 희구를 안고 있는 꿈의 상징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는 누구나 고민하고 있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과제 중의 하나다.
기대했던 삶의 시간표대로 살 수는 없다고 해도 그런 꿈을 가져보는 자체는 아름다운 일이다. 여유라는 것은 이런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구속에 시달리지 않고 홀가분하게 살기를 소망한다. 행복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지 않더라도, 그 안에서 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이를 소망으로 남겨 놓은 채, 그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허둥대며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죽음이 아무리 미화된다 하더라도, 슬플 수박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수필 안에서 인상적인 것은 어느 정도 연령에 이르면 모든 일에서 떠나 한적한 곳을 찾아 혼을 일구며 살겠다는, 한 사람의 기대어린 꿈이다.
‘맨발로 걷는 곳’을 지나 발을 씻는 계곡에서도, 몇 개의 숲을 더 지나 미술관이 보이는 마지막 휴게소에서도 고래 사냥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제 부채는 마지막 친구의 큰 바다였습니다. 망망한 바다로 들어가 고래를 발견하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지만 그 일은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과제로 되고 있었습니다. 고래를 본 사람에게는 이미 이루어낸 꿈이고 마지막 친구에게는 이루어야 할 꿈인 것처럼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다시 우리 모두의 꿈으로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 정화신, 「바다가 된 부채」중에서
동심 어린 청순함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바다’는 외적인 물리적 바다가 아닌 관념의 바다다. ‘부채는 마지막 친구의 큰 바다였습니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바다’는 일종의 상징으로 쓰였다. 마지막 귀착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서둘러 길을 떠나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곁눈질하며 발길을 재촉하는 우리들의 어리석은 행보는 ‘고래를 보는 꿈이 우리 모두의 꿈으로 남게 되었다’는 표현에 잘 녹아 있다. 일종의 착시 현상을 응용해 하나의 구체적 형상을 감지케 함으로써,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는 그림이 이 글의 소재가 되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림을 통해 고래가 모습을 드러내는 바다를 만나고, 우뚝 솟아있는 산마루에 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에 젖으며, 잠시나마 일상을 잊고 저마다 즐거움에 들떠 있다.
작가 자신도 우리가 실제 현실이라 알고 있는 것은 한낱 허상에 지나지 않고, ‘꿈꾸는 것’만이 살아있는 세상의 실상인지도 몰라 한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상태가 아니면 수면의 상태에 있는지도 모르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향해 치달음을 계속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평생을 손에 잡히지 않는 운명적인 허상을 좇아 끊임없이 방황을 거듭하는, 치유가 불가능한 어리석은 존재다. 명예나 재물은 대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잇지만, 버릴 곳조차 마땅치 않은 허접쓰레기와 다를 것이 없다. 인간은 그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불행한 일이 잡초처럼 무성하다.
3. 닫으며
지금까지 필자는 한국의 현대수필이 등장한 이래 우리 수필문학사에서 바다가 수필에서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살펴보았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바다는 외적 공간으로서 반영되었으며 그것은 다시 계몽적 공간, 미학적 공간, 생활 공간, 감정 이입으로서의 공간, 알레고리의 공간으로서의 공간으로 세분된다. 둘째 바다는 또한 내적 공간으로 형상화되었다. 미학적 공간, 철학적 공간, 잠재의식으로서의 공간 등이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바다는 관념적 공간으로 제시되었다. 수필도 생태주의 시와 마찬가지로 생태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직접 노래함으로써 문제의식을 부각하고, 생태 파괴나 환경 오염 문제를 직접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들로 인해 당면하고 있는 비극적 상황을 형상화하고, 생명의 존귀함을 노래함으로써 생명 보존의 필요성을 노래하고 있었다. 이는 우리 현대수필에서 바다는 다양한 의미와 형태로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생태수필과 바다와의 관계를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몇 가지 현상이 드러난다. 대체로 근대 초기에서 바다라는 자연은 외적 공간 그 중에서도 계몽적 공간과 미학적 공간이 지배적이었다. 식민지 중기를 넘기면서 바다수필들은 주로 관념적 공간을 지향하였다. 이들은 당대의 시대적 상황이 너무나도 암울하고 절망적이었던 까닭에 낭만주의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현실의 바다가 아닌 이상화된 관념세계를 꿈꾸었다. 해방 후에는 바다수필이 다수 씌어졌고, 작품은 얼마 되지 않지만 해방 이전의 수필에 비한다면 내적인 공간에 훨씬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주목되는 것은 잠재의식을 반영한 공간으로서 바다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산업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생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라 볼 수 있겠다. 즉 물질문명으로 훼손되고 있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본래적인 것으로 복원하려는 우리 수필가의 몸부림으로 이해된다고 하겠다.
수필이 다루는 삶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삶의 절대적인 명제는 변화 속에서 살아가고 살아가면서 변화하는 것이다. 바다가 모성과 생명을 상징한다는 명제는 더더욱 고정된 것이 아니다. 시대적 상황과 개인의 체험 결과에 따라 그 의미의 파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수필이 의식한 바다가 생명과 모성을 주로 상징했다면, 현대수필에 나타난 바다의 얼굴은 그리움의 대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도시의 일상에서 탈피해 보고자 하는 자연 동경 의식에서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문학은 그런 삶을 형상화하는 과정이다. 수필도 새로운 형상화와 의미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수필작가는 외적 관찰력과 내적 해석력을 조화시켜 바다라는 소재가 한 편의 문학수필로 완성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진정한 바다수필은 바다의 황폐화나 오염 상태의 고발이 아니라 실은 더 무서운 정신의 황폐화를 경계하는 치열하고 진지한 꿈을 계속 생산해 내라는 주문에 화답해야 할 것이다. 삶의 진실은 반전이고 수필의 출발점은 ‘인식’이 되어야 함을 수필가들이 명심하고, 현재의 바다를 새로운 것으로, 낯선 대상으로 받아들인다면, 바다수필의 장르도 머잖아 한국수필문학사에 큰 흐름을 형성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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