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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하리라 말씀/ 마가복음 9:30-50 요절/ 마가복음 9:35 | 2024. 7. 7 | |
마가복음 제 15 강 |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2024 믿음 생명 여름수양회를 통해서 큰 은혜를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수양회를 통해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을 충만히 얻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복음을 붙들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함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도 ‘누가 크냐’ 쟁론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어떤 자가 첫째가 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낮아짐과 섬김을 통해 진정으로 큰 자가 되는 진리를 배우고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메시아의 길을 가시며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않고 제자들을 집중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깊이 배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3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제자들의 장점은 모르면 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묻기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부터 거부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병 고치고 귀신 내 쫓고 장차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대를 해방할 그리스도는 있었지만 인간의 죄로 인해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실 그리스도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닫혀 있기에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은 이해의 문제 이전에 마음의 문제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33,34절을 보십시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소수 정예 특강을 귓등으로 듣고 자체 길거리 토론회를 열어 쟁론했습니다. 주제는 “누가 크냐?” “who is the greatest?” 였습니다. 야고보는 요한에게 “이제 베드로는 밀려 났어. 나서기 좋아하더니 예수님께 사단이라고 책망까지 들었잖아, 우레의 아들인 너와 내가 서열 1.2위가 아니겠어?”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 예수님이 변화산에 나도 데려가셨어” 그러자 안드레도 말했습니다. “내가 안드레라서 안 드러내서 그렇지, 예수님이 내가 가져온 오병이어를 받으사 오천명을 먹이시는 것 봤지” 열띤 쟁론으로 제자들의 얼굴은 상기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는 잠잠했습니다. 저라면 “아~ 나는 너희들에게 정말 실망했다. 너희들 모두 F학점이야, 순금프로젝트부터 다시 받아라”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사실 제자들이 처음 예수님을 따를 때 그 동기는 순수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구하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랍비여, 어디계시오니이까?” 하며 예수님 자체를 알고자 하였습니다(요1:38). 그런데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로 세워지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대해 들으면서 큰 자가 되고 위대해지고 싶은 소원이 생겼습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정복하고 다스리는 위대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소원 자체를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을 보면 예수님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하시며 제자들의 영적 소원을 격려하셨습니다. 문제는 첫째가 되고자 하는 소원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으로 큰 자인가 하는 가치관이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35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뭇 사람의 끝이 된다는 것은 NIV 성경에 ‘he must be the very last’로 순서상의 맨끝, 마지막 사람, 꼴찌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공부도 하지 말고 영적 투쟁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히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의 은사와 장점을 인정해 주고 높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뭇 사람’이라고 하셨으니 이는 불신자들에게도 그들의 귀한 점을 인정하고 높여주라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이 많은 자신이 제자로 부름 받고 쓰임 받는 것이 다만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이 부족한 자로 여기고 사도중에 가장 작은 자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이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거하였습니다(고전15:8-10). 또 뭇 사람의 끝이 되라는 것은 무슨 일을 하든 상대방에게 좋은 기회, 좋은 자리를 양보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선택할 우선권을 준 것처럼 축복의 하나님을 믿고 다른 이의 유익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첫째가 되기 위해 해야 할 것은 뭇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나와 가족의 필요를 넘어 동역자와 양들, 공동체의 필요, 사람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잘 살피고 돌보아 섬기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하기 싫어하는 것을 묵묵히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하나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고 위대한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치열한 경쟁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쉽게 영접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첫째가 되기 위해서 더 많은 스펙을 갖추어 인정받고 높은 자리로 가고자 힘씁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약점을 찾아 들추어내서라도 나를 높이고자 합니다. 이런 시대에 뭇 사람의 끝이 되라니요?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라니요? 이렇게 낮아지고 섬기는 삶을 살면 나만 호구가 되고 뒤처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뭇 사람의 끝이 되어 섬길 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꼴찌는 다른 모든 사람의 자존감을 높여 주기에 적이 없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경쟁심에 자기를 높이고 섬김 받고자 하는 곳에는 다툼과 허영과 교만과 패배감과 상처가 많습니다. 그러나 뭇 사람의 끝이 되고 섬기고자 하는 곳에는 평화와 위로와 사랑과 치유가 넘치게 됩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운동회 때 였습니다. 10명씩 달리기를 해서 분명 1등으로 들어왔는데 선생님이 2등 도장을 찍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공책을 못 받고 연필을 받았습니다. 저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이 불의한 세상에 대해서 운동회 내내 울며 불평을 했습니다. 그런데 용인의 한 초등학교 운동회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같은 달리기 시합을 하는데 아이들이 갑자기 중간 지점부터 속도를 늦추더니 꼴찌와 손을 잡고 함께 결승점에 통과한 것입니다. 뒤에 오던 아이는 키가 작고 발이 느린 연골무형성증 즉, 뼈가 자라지 않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친구였습니다. 이 친구는 아이들의 배려에 눈물을 흘렸고 보는 이들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낮아져 섬기는 곳에 사랑이 넘칩니다.
또한 낮아져 다른 사람을 섬기려고 하면 지치고 손해 볼 것 같지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발견하고 성장하게 됩니다. 자기 일을 잘 감당하고 여력이 있어야 하기에 매우 부지런해집니다. 믿음과 역량이 커져 다양한 역사에 쓰임 받는 큰 그릇이 됩니다. 무엇보다 창조주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말구유에 까지 낮아져 뭇 사람의 끝이 되신 예수님, 십자가에 죽기 까지 뭇 사람을 섬기신 예수님을 삶으로 배우게 됩니다.
강찬솔 목자님은 오병이어 밴드팀에서 드럼을 섬기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주 오병이어 밴드 연습에 적극 참여하여 5만원짜리 연습용 드럼패드를 믿음으로 치며 연습했습니다. 그는 이번 수양회 개회 메신저이고 할 것이 많았지만 강원대 음악동아리에서 전자드럼을 빌려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를 통해 이번 여름수양회 찬양이 풍성해 졌습니다. 어릴적 피아노만 조금 쳐봤던 찬솔목자님은 이제 춘천UBF 공식 드러머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뭇 사람의 끝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을 구체적이고 시각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당시 유대에서는 어린아이를 훈육의 대상으로 보고 무시하고 숫자에도 넣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는 순수하고 순종적이며 부모를 무한 신뢰하는 귀한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이고 끝없이 요구하고 작은 일에도 두려워하며 인내심이 약합니다.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고 섬기려면 진이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빠들에게 아이 돌볼래 나가서 일할래 하면 대부분 나가서 일한다고 합니다. 또 어린아이들은 많아도 별로 생산적이지 못해서 약장사들은 돈도 없이 모여들어 떠드는 아이들을 “얘들은 가라 애들은 가”하면서 쫓아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시고 두 팔 벌려 품에 안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7절에는 영접 ‘welcome’이라는 말이 5번이나 반복됩니다. 어린 아이는 훈육하고 절제시키고 조용히 시키기 이전에 뜨겁게 환영할 존재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귀하게 여기고 함께 해 주어야 할 존재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되려면 성숙하고 영향력 있는 어른들을 함께 큰 프로젝트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크고 위대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일입니까? 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어린 아이 하나를 위해 하나뿐인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이 어린 아이 하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흘려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마음이 어리고 연약한 자녀들에게 늘 가 있듯이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은 상한 갈대 같고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어린 영혼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 하나, 어린 영혼 한 생명을 낮아져 섬기는 위대한 일을 하는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저는 어린아이 같은 양들을 섬기고자 할 때 힘만 들고 열매는 안 되는 것 같아 마음으로 잘 할 수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도운 한 양은 자기 발견을 하지 못하고 피해의식이 많아 직장생활에서 거듭 실패하였습니다. 작년부터 도왔던 한 양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3개월 전에 문자 하나 보내고 잠수를 탔습니다. 그러더니 지난주 갑자기 연락이 와서 밥 먹자고 하며 다시 일대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어린 아이 같은 양들보다 좀 성숙한 양을 섬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올해 기도제목이 ‘디모데 같이 준비된 양을 보내 주소서’ 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 어린 아이 같은 한 양을 영접하고 섬기는 것이 작은 일이 아니요 크고 위대한 일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또 우리 모임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캠퍼스 어린 양들을 영접하고 섬겨온 것을 생각할 때 영적인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어린 EBF를 섬기기 위해, 질풍노도의 JBF를 섬기기 위해, 캠퍼스 어린 양들을 섬기기 위해 뭇 사람의 끝이 되고 섬기는 삶을 사는 목자님들이 참으로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저의 올해 기도제목이 수정되었습니다. ‘보내주신 어린 아이 같은 양들을 예수님의 이름을 영접하고 겸손히 섬기게 해 주소서’ 제가 죄 많고 영적으로 어린 저를 섬겨주신 예수님과 선배 목자님들의 은혜를 기억하며 이 위대한 일을 마음을 다하여 계속하는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예수님께 자랑하듯 말했습니다.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제자 그룹에 속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람이 제자 그룹이 아님으로 이런 일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제자들은 독선과 배타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39,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편협한 사람이 아니라 내 그룹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넓게 포용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크고 다양합니다. 찬양 사역, 장애인 사역, 연예인 사역, 가출 청소년 사역, 다문화 가정 사역, 임종을 준비하는 호스피스 사역, 이단을 분별하고 대처하는 사역 등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는 나를 부르신 곳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다른 그룹에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사람들을 인정하고 귀하게 여기는 포용력 있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사람들 중에는 내가 직접 예수님을 따르기는 어렵지만 예수님의 제자를 귀히 여기고 섬겨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물 한 그릇’이라도 이런 섬김을 귀히 여기고 감사해야 합니다.
42절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제자들은 사도로 세워지고 많은 무리가 따르면서 작은 자를 섬세히 살피지 못하고 거칠게 대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 하나를 실족케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 경각심을 갖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옷 입는 것, 음식 먹는 것에도 혹시나 믿음이 작은 자가 실족할 일이 없나 주의하는 세심한 제자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43절을 보십시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3절부터 47절 말씀은 무시무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손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고, 발이 범죄케 하거든 잘라 버리고, 눈이 범죄케 하거든 빼버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너무 무지막지한 말씀 같아 보입니다. 이렇게 하면 손과 발, 눈이 남아나는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처럼 극단적인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는 죄의 댓가가 얼마나 무서운가 깨닫고 죄의 유혹을 뿌리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암세포가 커져 몸 전체에 퍼지기 전에 과감하게 잘라내듯이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철저하게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죄지을 수 있는 원인이나 환경을 과감하게 잘라버리고 성령을 의지하여 죄와 끝까지 싸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죄의 세력을 방치하고 회개치 않는 자가 들어가는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48,49절을 보십시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제가 마석에 있는 가구 공장에 다닐 때 가구 설치 때문에 타지에서 자야 하는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때 저에게 자기가 돈을 다 대줄 테니 죄 짓기 쉬운 곳에 가자고 자꾸 유혹하는 직장동료가 있었습니다. 저는 단호히 거절했지만 그는 또 기회만 있으면 그런 제안을 할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 문제로 인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사의 경영이 악화되게 하시고 제가 구조조정 대상이 되어 퇴직하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이후 저는 춘천에 직장을 얻게 되었고 영적으로 깨끗한 환경에서 캠퍼스 목자의 삶도 더 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50절을 보십시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세상의 소금이라고 할수 있는 제자의 짠맛은 제자도와 거룩성입니다. 제자들은 제자도의 짠맛을 가지고 세상에 녹아져 세상이 살맛 나게 하고 부폐를 방지해야 합니다. 또한 제자들 간에도 인간적인 화목이 아니라 죄와 타협하지 않는 참된 경건, 혼합되지 않는 순수 복음 신앙과 같은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이때 제자모임은 건강하고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거룩한 공동체가 됩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뭇 사람의 끝이 되고 뭇 사람의 종이 되어 어린 아이 같은 한 사람을 영접하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품고 포용하고 죄와 철저하게 싸우는 자입니디. 우리가 뭇 사람의 끝이 되고 섬기는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첫째요, 위대한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