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쓰레기와 오물은 결국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산은 높고 바다는 낮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높이를 잴 때는 꼭 해발이라고 기준점을 바다에 둡니다. 맨발 걷기를 하면서 바다엘 자주 갑니다. 집에서 차를 타면 이십 분 안에 도착하는 바다는 동해입니다. 바다는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달과 태양 그리고 지구의 중력이 계속 움직이는 파도와 밀물과 썰물을 만듭니다. 이런 움직임은 바닷속에 거품을 만들어서 산소도 공급합니다. 움직이는 것은 살아있습니다.
바닷속에는 작은 고기에서부터 큰 고기까지 온갖 어종이 모여서 삽니다. 바다는 어떤 종류든, 어떤 크기든, 어떤 색깔이든 차별하거나 거부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잘생긴 놈도 있고, 못생긴 놈도 있고, 순한 놈도 있고 사나운 놈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바다를 좋아합니다. 자신의 취향과 성격에 따라서 호불호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받아들이는 바다, 그 바다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를 보여줍니다.
가끔 필리핀에 갈 기회가 생기면 꼭 바다를 갑니다. 스노클링 장비 하나만 가지면 신기한 바닷속을 다 볼 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산호들과 형형색색의 열대어들이 줄지어 다니는 모습을 보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때때로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고 하지만 그 미꾸라지도 살 곳이 필요합니다. 미운 놈이라고 내치고 따돌려 버리면 아무 문제는 없겠지만 생동력은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아픈 사람, 아프게 하는 사람, 모두 알고 보면 다 필요한 사람들이고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순기능이든 역기능이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파도가 되고 밀물과 썰물이 됩니다. 삶의 바람이 만드는 생동력이지요.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버렸습니다. 미웠고 보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요셉의 꿈대로 되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만 자랐다면 그의 꿈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의 형제들은 그런 의미에서 요셉을 성장시키고 꿈을 이루도록 도와준 디딤돌들이었습니다.
(창 45: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의 결론은 분명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당장에는 속상하고, 보기 싫고, 미워지더라도 멀리 보고 하나님의 눈으로 상대방을 대해야 합니다. 못생겼다고, 너무 튄다고, 괴롭힌다고,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걸림돌이 될지, 디딤돌이 될지는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도 우리의 몸은 괴롭혀도 생명과 품성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스데반은 돌을 맞을 때 천사의 얼굴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어서 영원히 살아있고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바다 같은 곳이 되어야 한다. 똑같은 사람들, 같은 색깔, 같은 목소리, 같은 사상만 가진 사람들만 받아들이는 곳이 아니라 누구든지 올 수 있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다 같고 어머니 품 같은 교회의 모습입니다.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교회가 언젠가는 정결해지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교회는 깨끗해지게 되겠지요. 그러나 그런 일은 사람들이 인간적인 판단과 잣대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흔들림과 박해와 시련이 만들어 내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실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픈 사람도 보듬어 앉고, 가시같이 아프게 하는 사람도 용납하고 가야 합니다. 우리가 단련된 후에는 우리도 요셉처럼 그런 모든 것이 우리를 정금 같게 하고 꿈을 이루는 디딤돌이 되었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크신 분이셨습니다. 넓고, 깊고, 높은 바다 같은 분이셨습니다. 어떤 돌팔매질과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깊은 바다, 나도 예수님 같은 바다가 되고 싶다. 바람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도 이내 원상태로 돌아오는 그런 바다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