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세계 도시를 걷다 - 차별과 혼종성: 열대의 네덜란드, 바타비아(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12. 11.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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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세계 도시를 걷다 - 차별과 혼종성: 열대의 네덜란드, 바타비아(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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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4. 21:50조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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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세계 도시를 걷다
차별과 혼종성: 열대의 네덜란드, 바타비아(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요약 현재 자카르타 북부(Kota Tua)에 해당되는 바타비아는, 17세기 이후 유럽의 아시아 무역을 주도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무역망의 중심지였다. 성곽, 운하, 벽돌집 등 유럽 도시의 모습이 재현된 바타비아는 흔히 “열대의 네덜란드”로 불렸다. 유럽인뿐 아니라 중국인을 비롯한 다양한 종족과 문화가 동인도회사의 선박을 통해 이 도시로 유입되었다. 이들이 때로 충돌하고 때로 혼합하면서, 18세기 바타비아에는 차별과 혼종성(hybridity)이 공존하는 사회구조가 형성되었다.
21세기의 자카르타 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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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아시아 무역, 바타비아
16세기에 유럽의 아시아 진출을 선도한 것이 포르투갈이었다면, 17세기 아시아 무역을 주도한 유럽 세력은 네덜란드였다. 1602년 결성된 동인도회사(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를 중심으로 한 네덜란드 상업 세력은 포르투갈 세력을 대체하면서, 남아프리카에서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을 거쳐 일본에 이르는 거대한 무역망을 구축했다. 믈라카, 캔턴(Canton, 광저우), 나가사키 등 각 지역 주요 거점 항구도시들에는 동인도회사의 사무소와 공장이 설치되었고, 인도네시아 제도의 향료를 비롯한 많은 물품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바타비아(오늘날의 북부 자카르타)는 17~18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업 제국의 중심지 기능을 담당했다. 무역 거점과 무역망 확보에 중점을 두었던 많은 다른 지역에서와 달리 바타비아에서 동인도회사는 정치적, 군사적 힘을 통해 영토를 지닌 세력으로 등장했고, 이를 통해 바타비아는 아시아 무역망 중심지를 넘어 동남아시아에서 네덜란드 제국의 영토 확장을 위한 기지가 되었다. 동인도회사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와 네덜란드인의 증가, 중국인 등 다양한 인구 유입, 이들 간의 빈번한 접촉 교류를 통해 17~18세기 바타비아에서는 독특한 문화와 사회관계가 발생했다.
바타비아의 크리스챤 일본인, 안드레아스 베크만 그림, 1656.
순다클라파(Sunda Kelapa)에서 바타비아로
16세기 말부터 향료무역을 위해 인도네시아 제도 진출을 시도하던 네덜란드는, 당시 말레이 세계(현재의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지역 이슬람 세력과의 협력을 통해 포르투갈과 경쟁하려 했다. 포르투갈에 맞설 무역기지를 물색했던 동인도회사는 17세기부터 자바 서부 반텐 지역에 무역기지를 설치했다. 순다해협(Sunda Straits)에 접해 있으면서 인도네시아 동쪽의 향료제도(Spice Islands, Moluccas)와 믈라카 해협의 경로에 위치한 이 지역은 많은 이슬람 상인들이 드나드는 요충지였다.
1610년 동인도회사는 술탄의 허가를 받아 인근의 한 지역에 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의 옛 명칭은 순다클라파(Sunda Kelapa)였는데, 16세기 이후 자바 섬의 이슬람 확산 과정에서 술탄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자야카르타(Jayakarta)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이후 동인도회사의 팽창을 우려한 술탄이 영국과 협력하여 이들을 몰아내려 했으나 실패했고, 1619년 동인도회사는 이 지역을 완전히 점령한 후 자신들 조상 부족의 이름을 따서 바타비아(Batavia)라는 명칭을 도입했다.
작은 지역이기는 하지만 바타비아의 점령을 통해, 네덜란드는 자바 섬 지역 정치의 일원이 되었다. 군사적 점령보다는 주변 정치세력들과의 교류, 동맹을 통해 경제적,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는 경우가 많았다. 포르투갈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도 아시아에서 현지의 관습, 체제에 잘 적응했고, 바타비아에서는 다양한 구성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네덜란드나 자바의 다른 지역에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사회가 발전했다.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이 모인 바타비아, 안드레아스 베크만 그림, 1661.
그림의 하단에는 네덜란드인, 일본인 차림을 한 사람과, 흑인, 아랍인 등이 보인다.
열대의 네덜란드
20세기 초 바타비아 운하
현재 북 자카르타 구시가지(Kota Tua)의 운하.
건너편 붉은 건물이 가장 오래된 네덜란드 건축물의 하나인 토코 메라(Tokoh Merah)이다.
바타비아에 정착한 네덜란드인들은 최대한 네덜란드와 유사한 경관과 생활환경을 재현하려고 노력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운하의 건설이었다. 북부 자카르타의 칠리웅 강(Ciliwung, 혹은 Kali Besar)을 따라 네덜란드의 도시와 유사하게 운하가 자리잡고, 운하를 따라 가로수와 벽돌 건물들이 늘어선 모습이 17세기 이후 바타비아의 풍경이었다. 지금도 구시가지에 가면 이런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770년의 바타비아 풍경과 시청 건물
파타힐라 광장의 구 시청 건물(현 자카르타 역사박물관)
건축물, 도시계획 등에 있어서도 네덜란드와 유사한 양식이 도입되었다. 1710년 완공된 시청을 중심으로 한 광장에 교회, 상점, 관청 건물이 늘어섰다. 열대지방의 높은 기온에 대비해 대부분 흰색으로 건축된 이 건물들은 다수는 그림에서만 볼 수 있지만, 일부 건물은 지금도 자카르타 북쪽에 형태가 보존되어 있다. 당시의 광장이 현재 구시가지 중심지인 파타힐라(Fatahillah) 광장이다. 대표적인 건축물인 시청 건물의 경우 두 차례의 재건축을 거쳐 현재 자카르타 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광장에서 처음에 교회가 있던 자리에 새로 들어선 건물은, 현재 그림자연극 박물관(Wayang Museum)으로 이용되고 있다.
무엇보다 바타비아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17세기 초 마타람 왕국의 공격 후에 건설된 성벽과 해자는 기본적으로 주변 이슬람 왕국들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외부로부터의 공격과 혼란에 대한 두려움으로 유럽인들은 성밖 출입을 자제하는 경향이 강했다. 1684년 반텐과의 평화조약 이후 출입이 잦아지고 휴양을 위해 반둥(Bandung)같이 기후가 서늘한 곳으로 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유럽인들은 성내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1740년의 바타비아. 현재 북 자카르타 지역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모습을 보여준다.
성내의 유럽인들이 완성한, 위에 언급된 네덜란드와 유사한 도시풍경으로 인해 바타비아는 “열대의 네덜란드” 또는 “동양의 여왕(Queens of the East)”라고 불리고는 했다. 18세기 이전 바타비아는 성벽 내부는 일정 정도 고립된 요새 같은 성격을 지녔다.
차별과 경계, 갈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