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이도「국제시장」을 보고 울었다.
충남이는 내 이름이다. 정충남!
어제 아들과 함께 영화「국제시장」을 봤다. 영화를 제대로 영화관에 가서 본 게 한 3년은 족히 넘은 것 같다.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영화관에서 조조할인(65세 이세 이상 우대 4천원, 성인 할인 6천원)으로 아침 9시 50분에 시작해서 낮 12시 6분에 끝나는 1회 상영을 감상했다.
내 아내는 지난주 교회 어른들 성가대에서 대원들과 함께 신촌에 있는 극장에서 봤다고 했다. 영화 상영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일찍 서둘러 도착해 표를 끊고 대기실에 앉아 있으려니 젊은이들도 있었지만 나처럼 나이든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1천만명 돌파가 코앞이라는 홍보에다 여기 저기 모임마다 신문에다 TV까지 얘기가 온통 「국제시장」이라니까 더 궁금해서인가보다.
그렇지만 그런 이유들 보다는 어릴 때 경험했던 6・25전쟁과 어른이 돼서 청룡부대 전투소대장으로 참전했던 베트남전쟁은 내가 직접 겪었던 역사적 사건들이였으니까...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 이순신 장군의 “명량”은 어쩌다 보니 놓쳤다.
방학 중이라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있는 외손자들을 오전까지 봐주느라 딸네 집에 다녀온 아내의 첫 마디가 “당신 울었어요?”였고, 내 대답도 “그래! 울었다!. 당신도 울었겠구먼!" 그 말 맞다! 정말이지 영화가 시작된 지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주책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영화관을 나서면서 아들도 ”저도 울었어요! 서독 광산에서 덕수와 의리의 사나이 달구가 매몰됐다가 동료들의 구조로 살아 나오는 장면은 대한민국 동포라면 다 울었을 거에요!“ 정말이다. 장면들이 리얼해서 구조되는 순간까지 관객들도 너무나 안타까워 손에 땀을 쥐게 했고 구출되었을 때는 영화보러 온 관객들 모두가 야구구경 보러 온 관중들처럼 일제히 일어나 환호했다.
누가 혹시 내게 영화를 본 소감을 묻는다면 “2014년 세월호 사건으로 땅바닥에 내던져 버려졌던 아프고 슬프고 심란했던 백성들 마음을 추스려 하나로 묶어 일으켜 바로 세워 준 일등공신이다!”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리고 또 한마디 더 보태라면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65년 동안 마음의 상처로 남아있는 6・25전쟁의 악몽을 담담한 모습의 서사시로 탈바꿈시킨 명작이였다. 영어 제목도 "Ode to My Father!"였다.
흥남부두에서 손을 놓쳐 헤어진 막내 여동생의 이름을 금순이가 아니고 왜 막순이라고 지었까? 라는 의문도 영화가 끝나 갈 무렵, 가족들 앞에서 손녀가 부르는 ”굳세어라! 금순아!“를 들으면서 풀렸다. 이제 얼마 후면 ”굳세어라! 금순아!“라고 부르면서 더 이상 동생 금순이를 찾을 사람도, 또 오빠를 찾는 사람도 더 이상 이 세상에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1950년 12월 22일 흥남부두에서 기적의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y. 1945년~1993년)“가 피난민 9만명을 포함, 한국인1만4천명을 싣고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찼다는 이유로 입항이 거절되어 50마일을 더 항해해서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을 내려 놓았을 때 나는 9살이였다.
물밀듯 처내려오는 중공군에 밀려 국군이 후퇴할 그즈음, 중국어에 능통했던 내 아버님은 중공군 포로심문을 위해 대한민국 육군 중국어통역장교요원으로 국방부에 차출되어 집을 나가신 후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서울을 떠나 남들처럼 피난을 가야하나? 가지말고 아버지를 더 기다려야 하나?를 망설이던 1950년 12월 중순 어느 날 서울상대 2학년생이던 막내 삼춘이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USIS(주한미국공보처)에서 마련해 준 화물열차에 몸을 싣고 어머니, 내 동생, 큰삼춘네 식구들, 큰고모님과 막내 삼촌이랑 피난길에 올라 부산에 도착한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 하루 전날인 1950년 12월 24일 오후였고, 임시거처는 부산역 길 건너편 골목 안 ”애린유치원“이였다.
크리스마스 트리도 유치원 마당에 보였지만 아버지와 헤어진 우리형제와 가족들은 우울하기만 했다. 우리 형제는 부산 아이들이 다니는 서대신동에 있는 대신국민학교에 편입되어 "서울내기 고르레기(=고래고기의 부산말)"라는 놀림을 받으면서 다녔고, 어머님은 가족들 생계를 위해 아버님 친구분들의 도움으로 ”국제시장“ 골목에 좌판을 하나 차려 미국 구제품 옷장사를 시작했다. 장사라고는 한번도 해보신 적이 없으셨던 분이셨지만 말이다. 전쟁이 그렇게 만들었다.
내가 대신국민학교 4학년 2학기에 접어 들 무렵에 구덕산아래 공설운동장 근처 미군부대 Motor Pool 옆에 "서울금화피란국민학교" 천막학교가 생겨서 그리로 옮겼다. 천막교실이 만들어지기 전 까지는 미군 레이션박스로 요사이 화판같은 걸 만들어 목에다 걸고 구덕산 산기슭 공동묘지 돌무더기(애들 공동묘지)에 앉아 공부를 했다. 쉬는 시간에는 칡 뿌리를 캐서 먹는 재미도 있었다. 미군부대 Motor Pool 쓰레기 장에서 주운 면도칼(지금도 GEM이라는 영어대문자 상표가 면도널 양옆에 새겨져 있던 것을 기억한다)로 칡을 캐다가 손가락을 크게 베어 피를 철철흘렸던 아픈 기억도 함께 말이다. 그 때 그 상처가 얼마나 컸던지 지금도 오른쪽 검지손각락에 흉터가 있다.
이 금화피란국민학교에서 만난 친구들 중에는 서울중ㆍ고등학교 학창시절까지도 연이 이어진 친구들 중에 지금은 세상을 떠난 노창수, 오도현 동창과 홍도에서 실종되어 지금까지도 생사를 알 수 없는 최승렬 동창과 요사이도 고등학교 동기동창모임에서 가끔 만나는 노의건 동창, 그리고 미국에 살다가 한국에 다시 온 최승홍 동창과 대한성공회 부산교구장과 의장주교신부를 지낸 이대용 동창을 들 수 있다. 지금은 정말 아스라한 옛날 얘기지만 아름다운 추억이다.
서울로 환도 후에 노의건 동창은 서울 서대문에 있는 금화국민학교를 다니다 졸업까지 했고 나는 부산으로 피난가기전인 1948년(단기 4281년) 1학년 4반부터 1950년(단기 4283년) 6월 26일(월) 아침 3학년 마직마 수업까지 줄곧 한동석 군과 함께 다녔던 서울의 미동국민학교로 다시 왔다. 그렇지만 1학년 때 담임선생님과 내짝은 영원히 돌아 오지 않있다. 동석이는 다시 돌아왔고 중ㆍ고등학교와 대학도 같이 다녔다. 미동국민학교는 지금도 서대문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영화 국제시장에 이런 장면이 있다. 주인공 덕수가 사고뭉치 여동생 끝순이를 결혼시키려고 다시 돈벌러 베트남에 회사원으로 가 있을 때 ”꽃분이네“ 가게의 옆 가게 여자주인이 덕수의 부인을 깔보고 ”과부여편네!“라고 욕하는 영화 장면을 보면서 나는 ”과부도 아니면서 남편이 살아 있는지 소식도 모르는 생과수 내 어머님께서도 남들한테는 과부처럼 오해를 받고 저런 수모를 당하셨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또 눈물이 나왔다.
베트남에서 월남 소녀를 구하느라 다리를 다쳐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꽃분이네 가게에 나타나 수모를 당하던 아내 앞에 나타난 영회속의 주인공 덕수처럼, 헤어져 소식조차 모르던 내 아버님이 영화 [국제시장]속의 바로 그 장면의 덕수처럼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해 [대구육군병원]입원 치료중에 가족들 소식을 수소문하기 이해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부산 [국제시장]에 나타 나셨다. 부산으로 출장을 왔던 길에 치약, 비누 등 생필품을 사러 [국제시장]에 들렸다가 마침, 형수를 집으로 모시고 가기위해 저녁마다 [국제시장]의 내 어머님 가게에 들리는 막내삼춘을 [국제시장]골목에서 기적처럼 우연히 만났었다.
그후 아버님은 상이군인 육군대위로 제대하셨고, 수복과 함께 부산에서의 피난생활을 끝내고 온 식구가 다시 서울 서대문 집으로 돌아왔다.
부산피난시절 학교수업이 끝나면 내 동생과 함께 [국제시장]으로 가서 장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우리 형제가 엄마손을 잡고 서대신동 집으로 돌아오곤했던 기억이 지금도 영화장면처럼 생생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기억을 함께 할 그 어머님도 아버님도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시고 두 분 모두 다 안계시다.
국제시장]을 보면서 6・25때 [국제시장]에서 고생하시던 어머님과 [국제시장]에서 절뚝거리는 모습으로 다시 만났던 아버님 생각이 나서 영화 [국제시장]이 끝나 엔딩 자막이 올라가는 동안에도 나는 내내 울었다.
▲ 글쓴이 : 예비역 해병중위 정충남(해간33기)-해병대전우회중앙회 안보특보-해병대전우신문 大記者
▲ 1953년 1월 30일 국제시장 화재현장이다. 국재시장 서북쪽 멀리 보이는 산이 구덕산이 왼쪽 아랫마을이 서대신동이다.
▲ 4281년(=6.25가 터지기 2년전인 서기1948년)에 집근처 서울 서대문에 있는 미동국민학교 1학년 4반이였을 때 미동국민학교 학예회에 출연힌 "미동어린음악대"기념사진(맨앞줄 왼쪽에서 4번째 트라이앵글이 필자)
▲ 구덕산아래 공설운동장 근처 미군부대 Motor Pool 옆에 "서울금화피란국민학교" 천막학교가 생겨...
▲ 다시 메러디스 빅토리호 문이 다시 열리고...
▲ 군장비 트럭등이 다시 하선하느라 뒷걸음질쳐 나오고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와 승선을 하는 절박한 순간...
▲ 막내 여동생 막순이를 힘겹게 업고 잃어버리지 읺으려고 했지만 ....
▲ Meredith Victory 함정에 엄마랑 함께 타긴했지만 막내 막순이를 차으러 배에서 다시 내린 아버지를 애타게 불러 보았지만...
▲ 떠나가는 가족들을 쳐다만 볼 수 밖에 없다. 막내딸 막순이를 그냥 놔두고 갈 수 없는 덕수 아버지...
첫댓글 우리들의 얘기가 아닐까요? 주인공 덕수가 아마 우리세대이면서 동갑쯤 되겠드라구요. 저도 '국제시장' 관람하면서 흐르는 눈물 주체하지 못해 혼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