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상사[ 龍床寺 ]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월롱산(月籠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일승종 소속 사찰.
ㅡ현종과 용상사 전설ㅡ
고려 제8대 왕인 현종(顯宗)이 거란에게 패할 당시 경기도(京畿道) 파주시(坡州市) 월롱산(月籠山)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강감찬(姜邯贊) 장군이 귀주대첩(龜州大捷) 등으로 거란을 몰아내자 현종(顯宗)은 국난을 당했을 때 자신을 숨겨준 월롱산(月籠山)을 잊지 못해 현재의 월롱면(月籠面) 덕은리(德隱里) 산117번에 암 자를 세웠다. 암자는 임금이 머물렀다는 뜻에서 용상사 (龍床寺)라 이름 지었다.
【전설】
『고려 현종(顯宗) 1년 10월 이부상서(吏部尙書) 겸 참지정사(參知政事) 강조(康兆)는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하여 30만 대군을 이끌고 통진 선천에 나아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임금 성종(聖宗)은 끝내 야욕을 품고 11월16일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興化鎭) 의주를 함락시킨 후 지금 대군으로 쳐들어 왔다.
옛 고려 임금 제7대 목종(穆宗)을 죽이고 새 임금을 세운 것을 이유로 들었는데, 강조를 보내면 회군할 것이나 만일 그렇지 않으면 개경(開京)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고 엄포하였다. 그러나 강조(康兆)는 3부로 나누어 거란군과 대진 수차에 걸쳐 격전을 벌였다. 거란의 임금은 포로로 잡혀온 강조(康兆)를 보고,
“너를 풀어주면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
고 물으니,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
며 끝내 허락을 하지 않아 거기서 피살되었다.
거란군 20만 대군은 의기양양 진격을 하여 12월 6일 청천강을 건너 서경을 지나 개경에 들어와 선봉장 사진분노(先鋒將 邪律盆奴)가 현종 있는 곳을 물으니 하공신(河拱辰) 등이 강남으로 향하였다고 말했다. 선봉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옳게 듣고 돌아가 버린 후 현종 2년 1월 1일 거란의 임금이 개경에 들어와 보니 종묘와 궁궐 민가뿐만 아니라 문화재는 거의 불타버린 정상을 보고 1월 3일 하공신 등이 철군할 것을 간청하니 거란의 임금도 1월 11일 회군하였다.
그리하여 1월 23일 현종은 이 소식을 듣고 환경하여 4월 22일 공부랑중 왕첨(工部郞中 王瞻)을 거란에 보내어 회군한 것을 사례하고 자주 사신을 보내 화평을 유지하는데 노력하였다. 관하 월롱면 덕은리 산117번지 소재에 있는 용상사(龍床寺)는 고려 목종(穆宗)이 후계자가 없게 되자 현종 9년(1018) 목종의 어머니(경종왕비) 헌애왕후(獻哀王后)와 외숙 김치양(金致陽)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를 왕위로 삼으려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서경도순검사(西京都巡檢使) 강조(康兆)가 김치양(金致陽) 일족을 사살한 후 목종(穆宗)이 충주(忠州)로 가는 도중 적성에서 살해시키고 대량군(大良君) 순(楯)을 제8대 왕으로 추봉하니 거란족은 이틈을 타서 20만 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침입하게 되자 현종(顯宗)은 민복차림으로 이곳 월롱산(月籠山)에 도피 은신하다 평전 후 환도하였다.
그 후 강감찬장군(姜邯瓚將軍)이 귀주대첩(龜州大捷)에서 승전하고 국내가 평정해지자 현종은 난시에 자신의 목숨을 구하게 된 이곳 월롱산을 잊을 수 없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암자(庵子)를 건립하였는데 임금이 머물렀다는 뜻에서 용상사(龍床寺)라 명칭이 붙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 후 여러 스님을 거쳐 내려오다 조선조 개국이후 회진(灰盡)된 이 자리에 덕은화주(德隱化主) 스님이 세종 10년(1445)에 재건하고 ‘正統十年 乙丑 五月 ○○德隱’이라고 명문이 새긴 석불좌상을 당초 2m가량 되는 벽장굴에 안치 봉안하였던 석불(높이 61cm, 폭 50cm)을 모시고 여러 스님을 거치는 동안 명맥만을 유지하다 회진(灰盡)되었으나, 1940년 4월 10일(일제시) 석파(石破)스님이 약간 아래쪽에서 터를 닦아 암자를 재건 봉안하면서 1967년 대웅전을 중수하고 서쪽에 삼신각(三神閣)을 신설하여 내려오다 문두(文斗) 스님에게 이어 내려오면서 대한불교 일승종(一乘宗)에 소속하게 되었다.
고려 현종(재위:1010∼1031)이 창건하였다. 1018년(현종 9)에 40만 명의 거란군이 개성까지 쳐들어왔을 때 현종은 민간인 차림으로 이 절이 있는 월롱산에 피신했다고 한다. 그 뒤 강감찬(姜邯讚)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물리치자 현종이 이곳에 절을 지었으며, 절 이름은 왕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해서 용상사라고 하였다.
1445년(조선 세종 27) 덕은(德隱)이 중건하였다. 이 절은 특히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많은 왜군을 무찌른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왜군의 시체가 용상계곡에 가득 차서 이 일대를 무덤골이라고 불렀다. 이후 조선 후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에 석파(石破)가 중건하였으며, 벽장굴에 있던 석불을 옮겨와 모셨다. 1967년 대웅전을 다시 짓고 삼성각 등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대적광전과 삼성각·요사 등의 건물이 있으며, 유물로는 석불좌상이 남아 있다. 이 불상은 바닥에 1445년 5월 조성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세종 때 덕은이 중건하면서 조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 불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유물이다.
2015년 대웅전 화재후 대적광전을 중건하였다. 용산사 석불좌상은 화재로 인한 훼손으로 보존 처리후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다. 사진은 인터넷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