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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36
1월10일 [주님 세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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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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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DYFXenVif4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62236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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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정화하는 예식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물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어린 시절 꽤나 궁금했던 부분이 예수님의 세례였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 무죄하신 분이신데, 왜 인간인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셔서 세례를 받으시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 세례의 주관자, 세례의 창시자인 예수님께서 나약한 한 인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너무나 깨끗하신 분, 그래서 세례가 전혀 필요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 사이에 서셔서, 마치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마치 한 기업의 CEO가 신입사원 연수를 받는 일입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연대장이 훈련병에게 거수경례하는 일입니다. 환갑을 넘긴 교장이 아직 철도 들지 않은 신입생에게 허리를 굽히는 일입니다.
‘주님 세례 사건’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베들레헴 마구간 탄생 때부터 골고타 산에서의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평생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극단적 자기 낮춤, 한없는 겸손,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순명의 틀 안에서 주님 세례 사건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연히 무죄하신 분이기에 굳이 요르단 강을 찾아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베푸시고 죄를 사해주셔야 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자신을 낮추셔서 세례를 받기 위해 줄을 쭉 서있는 사람들 사이에 서셨습니다.
다른 죄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기 위해 요르단 강을 찾아오신 모습을 확인한 세례자 요한은 얼마나 당황했던지 극구 사양하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구세주 하느님의 참으로 놀라운 겸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는 첫 여정인 마구간 탄생을 통해서 한없는 겸손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세례성사를 통해 다시 한 번 지극한 겸손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한 평생은 초지일관 극단의 겸손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의 세례에 대해서 교부들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영원하신 아드님께서는 세례를 받아야 할 어떤 필요도 없었지만, 스스로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정화하는 예식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물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티끌이라고는 한점도 없는 무죄하고 순수한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통해 정화제인 당신의 몸으로 오염된 세상과 인간을 정화시킨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물속으로 들어가심을 통해, 그 물을 정화시키시고, 부패한 우리 인간의 본성을 회복시켜주셨으며, 우리에게 불멸의 옷을 입혀주신 것입니다.
존재 자체로 무죄, 순수, 청량 그 자체였던 예수님이셨기에 요르단 강에 들어가자마자 죄와 부패, 타락과 우상숭배로 물들어있던 이스라엘 전체가
말끔히 정화되는 효과를 입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발길 닿는 곳마다 혼탁한 공기를 청량하게 변화시키셨습니다. 세리와 환전상으로 욕심으로 오염된 이스라엘의 성전을 깨끗이 정화시키시는가 하면 악령으로 더럽혀진 인간의 영혼을 말끔히 치유해주셨습니다.
일관되게 자신을 낮추시며 아버지 뜻에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에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크게 기뻐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코 복음 1장 11절)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택하신 지극히 겸손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할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그분께서 평생토록 일관되게 지니셨던 겸손의 덕을 우리도 청해야겠습니다.
우리 역시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아랫사람들 앞에 용기 있게 고개 숙일 수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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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춘기 반항은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는 신호>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2XNWSGB-P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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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날입니다. 30년간의 사람의 아들로 사는 삶을 마감하고 3년간의 하느님 아들로 사는 삶을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해주듯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여기서 “너는”이라는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직접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이심을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너를 낳았다”라는 뜻입니다. 왜 나이가 서른이 다 되어서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그런 인정을 받으셔야 했을까요? 인간의 성장 과정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당신을 따라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인간이 아는 것은 당신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기 이전의 상태를 인간 성장 과정에 빗대어보면 ‘사춘기’입니다. 많든 적든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는 때가 있습니다. 요즘은 초등학교 4~5학년이면 사춘기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부모에게 대한 반항입니다. 사실 부모가 너무 잘난 사람이라면 자녀는 더 큰 사춘기를 겪을 수 있습니다.
김미경 강사는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자퇴하였습니다. 사실 자퇴지만 퇴학 이틀 전에 학교에서 전화가 와서 어쩔 수 없이 자퇴한 것입니다. 아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 스트레스가 컸던 것입니다. 5년 동안 엄마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아이도 그래서 지옥과 같은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고 합니다. 엄마는 대한민국 최고의 강사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 아들인 자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니 열등감과 무기력감에 피시방만 전전하는 폐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입시학원에 다니다가 갑자기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처음으로 무언가 의욕적으로 하고 싶어 해서 기뻤지만, 입시 석 달 남겨놓고 예대를 가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엄마는 웃겨서 말이 안 나왔지만 그래도 뭔가 하려고 하니까 시켜주었는데 아이는 음악성이 있는지 악보도 못 보면서 한 곡을 몽땅 외워서 시험을 보고 입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치다가 들어온 학생들과는 경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 년을 겨우 버티다 또 자퇴하였습니다.
무기력증에 시달리다 엄마가 믿어주는 것에 죄송했는지 이번엔 일본 여행을 떠나보겠다고 합니다. 엄마는 기쁜 마음에 돈을 대 줍니다. 아이는 일본에서 성당에 다니게 되었고 다시 노력해서 음대에 들어갔습니다. 어쩌면 왜 태어났는지 성당을 다니며 알게 되었을 수도 있고, 그때부터 하루에 6시간씩 피아노 연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는 모르지만 아마도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미경 강사는 사춘기를 길게 앓고 있는 아들이 자신에게 계속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들렸다고 말합니다.
“엄마,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어! 나 진짜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거든. 근데 나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모르겠어.”
사춘기는 ‘왜 태어났는지’ 알려주어야 하는 시기입니다. 흔히들 ‘사춘기에 맞는 부모의 대화법’이란 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춘기는 ‘왜 태어났는지’를 묻는 시간입니다. 왜 태어났는지 알아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왜 태어났는지 가장 처음에 묻는 때가 언제일까요? 아기가 태어났을 때입니다. 물론 생각을 할 수가 없어서 아기는 그저 불안해서 울기만 합니다. 다행히도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문제는 엄마가 금방 해결해 줍니다. 젖을 줌으로써 자신이 엄마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기는 엄마 품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게 됩니다. 엄마, 아빠처럼 되면 됩니다.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고민이 다시 시작되는 때가 사춘기입니다. 진화론자들은 사춘기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굳이 부모에게 반항하고 무기력하고 고립되는 시기가 성장에서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조론에서는 이 시기가 참 부모를 찾으라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춘기가 없다면 하느님을 굳이 찾을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춘기 때 참으로 세례를 체험해야 합니다. 이때 부모가 자신이 부모임을 강조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너는 내 자녀다”라고 인정받아야 합니다. 사춘기가 되면 자신들도 아기를 낳을 수 있음을 알게 되며 더는 부모를 믿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아기의 모든 문제가 부모를 만나면서 해결되었던 것처럼 사춘기 때의 모든 문제는 하느님을 만나야 해결됩니다. 하느님만이 다시 생명을 주시고 몸을 만들어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부모처럼 되려고 하는 것으로 모든 고민이 사라지듯이, 세례를 받으면 하느님처럼 되려는 것으로 모든 고민이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기 시작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바로 시작하신 두 가지는 ‘자기 자신과 싸움’과 ‘아버지 뜻의 실현’입니다. 성령은 마치 어머니가 아기에게 자신이 부모임을 믿으라고 주는 젖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체 성혈을 먹고 마시며 당신 생명을 양식으로 주시는 그분을 우리의 참 부모로 확신합니다.
저도 사춘기를 극복한 것은 아마도 ‘나는 누구인가?’를 넘어선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에 대한 어쩌면 배신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였습니다. 그때 자주 하던 말이 “외롭다, 외롭다!”였습니다. 한 개신교 친구가 “너 성당 다니잖아. 예수님이 옆에 계시는데 뭐가 외로워?”라고 했을 때 저는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성체를 영해도 그분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혼자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정말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이 믿어졌고 그 이후로 사춘기의 반항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사춘기는 하느님을 찾으라는 신호였던 것입니다.
요즘 계속 같은 말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첫영성체와 세례가 진정으로 우리 삶에 스며들어 우리를 변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그렇고 특별히 자녀들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고 그래서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처럼 편안히 하느님처럼 되려는 일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합시다. 사춘기는 진화론이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진화론적으로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해 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아버지께 자녀임을 인정받도록 주님께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 세례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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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전례의 의미는 예수님의 세례가 바로 그분을 메시아로 축성하고 또 하느님의 아들로 세상에 선포하는 의미를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 그분이 수행할 구원사명에 관한 어떤 것을 선포한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우리의 세례의 의미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복음: 마르 1,7-11: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전반부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을 제시하고(7-8절) 후반부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9-11절). 그러나 이 두 부분은 서로 연결시켜 생각해야 한다. 요한의 세례는 그의 말로 미루어 볼 때, 메시아의 오심을 선포하고 준비하기를 지향하였다는 것이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7-8절). 이것은 바로 예수께서 사탄을 쳐 이기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더 힘센 분으로 제시하는 것이다(마르 3,27; 루가 11,22; 사도 10,38 참조). 그러면서 요한은 자기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을 위한 자리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메시아는 더 힘센 분이시기 때문에 요한의 세례보다 더 강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쇄신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8절). 이 성령은 새로워진 하느님의 자녀들의 전 존재에 내적으로 생기를 주는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된다. 성령에 ‘잠기게 하는 일’, 이것이 예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믿는 모든 이들에게 베푸실 새로운 세례이다.
예수께서는 다른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다.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세례를 통해 자신을 낮추시는 행위를 이루신다. 즉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하느님의 무죄선언을 받도록 하기 위해(갈라 3,13-14; 2고린 5,21 참조) 몸소 저주받은 자, 죄지은 자가 되시는 그 십자가상의 낮추심을 예고하는 행위이다. 이 행위는 예수께서 모든 사람과 동등한 자리를 취하시게 하며, 죄인들인 우리 모든 인간들과 연대성을 갖으심을 표현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와 더불어 계속 펼쳐지는 광경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구원사명을 세상에 구현시키고자 하는 낮추심의 행위를 하늘이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며, 십자가상의 죽음이 실제로 그 정점을 이루게 될 만큼 그 어려운 사명에 대해 하늘이 확실히 보장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한다. 이것이 하늘이 열림의 의미이며,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는 성령의 형상은 마치 비둘기가 새끼들 주위를 이리저리 날며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듯이, 아들에게 기울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의 정을 표현해 준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절). 이 말씀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여기서‘사랑하는’이라는 형용사는 유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야훼께서 이사악을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을 봉헌하기를 요구하시는 그 때 세 번이나 부르시는 이사악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너는 내 아들이다”는 말씀은 시편 2,7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며, 유다 전승은 그것을 메시아적 의미로 해석하였다.
이것을 예수께 적용시켜 해석하여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와 그분의 메시아적 왕의 품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표현은 바로 야훼의 고통 받는 종의 노래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1).
이 장엄한 천상소리에는 그러므로 초기교회의 신앙이 잘 반영되고 있다. 초기교회는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재해석하여 그분의 공적인 사명을 스스로의 낮춤과 죄인들과의 연대성의 표징 하에서 인식한다. 예수께서는 천국에서 특별한 자리를 달라고 청하는 제배대오의 두 아들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라고 하셨다.
이 비극적인 세례는 바로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던 그 날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성령은 이 길고도 극적인 구원의 여정에 예수께 힘을 주셨던 것이다. 이 힘은 바로 뒤이어 나오는 유혹사화에서 사탄이 제시하는 세속적 메시아니즘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필요했던 힘이다.
예수님의 세례는 단순히 목가적인 면으로는 볼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분의 세례는 이제 십자가 위에서 죽음과 이어지는 영광스러운 부활로 완성되는 구원의 사명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우리의 세례까지도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 인간들과의 연대성을 표현하는 것에서부터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을 따라 그분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세례를 기록하면서 우리의 세례도 기억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받은 세례도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면, 우리 자신의 세례의 사명 역시 세상의 구원을 위한 세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도 살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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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국장)]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한 하느님이시다.’라고 우리 신앙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마주합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늘 함께 있는 보호자처럼 그분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오십니다. 성자의 강생은 나약한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놓으시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세례는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동참하는 가장 아름다운 결심이며, 사랑의 표현입니다.
세례가 하느님과 만나는 문이라면,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면,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세례는, 이 세상을 구하러 오신 성자께서 성부와 늘 함께하신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나약한 우리에게 드러내어 보이신 것입니다. 구유에 누워 계신 어린아이의 모습을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셨듯이,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늘 함께 계심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세례는 영광이고, 예수님께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하시는 사랑의 일치입니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성부께 순종하시고 예언을 성취하시고자 택하신 겸손의 표양입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에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간인 우리도 주님의 세례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임마누엘의 하느님으로 함께하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내 삶의 중심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놓는 것처럼, 세례를 받은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시작하고 마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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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세례는 십자가의 시작>
“(요한은)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7-11)
여기서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말은,
‘메시아’(구세주)를 뜻하는 말입니다. “내 뒤에 오신다.” 라는 말은,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며 메시아의 선구자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라는 말은, 메시아와 비교할 때 자기는 그분의 노예만도 못하다는 뜻으로, 그만큼 자기 자신을 낮춘 표현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렇게 자신을 낮춘 것은, 예수님의 위대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구원받아야 할 인류에 속한 세례자 요한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위대한 분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이라는 말은, 요한의 세례는 물로만 주는 세례, 즉 회개했음을 표시하는 세례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세례는 죄와 벌을 모두 사해주고 인류를 구원하는 성령과 불의 세례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으로서 회개, 보속, 세례가 모두 필요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분으로서, 또 인류의 죄의 보속자로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요한에게 가셔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을 나타냅니다. ‘물에서 올라오신’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갈라지며’ 라는 말은 원래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표현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지금의 ‘성령의 내려오심’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라는 말은, 비둘기 모습으로 성령께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내려오심’이라는 상황이, 또는 그 장면이 비둘기가 내려앉는 것과 같았다는 뜻입니다. (새가 내려앉는 것처럼 성령께서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마르코는 이 사건을 예수님만 보신 것으로 기록했는데,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뭔가를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서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에는 ‘외아들’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말은, 단순히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인류 구원이라는 사명을 맡기려고 특별히 하느님께서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유일하고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선언하는) 말씀이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직접 증언하신 말씀입니다.
1)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있었던 일을,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할 때 했던 말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두 장면 모두 인간에게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 보여주신 장면인데,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세례는 모두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그 ‘하느님의 신비’를 ‘삼위일체의 신비’ 라고 부릅니다.)
2)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일은,
‘하느님이신 분께서 사람으로 오신 일’에 속한 일입니다. 그 일을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예수님의 ‘낮춤’과 ‘비움’은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한 일이기도 하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물에 빠져서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구조대원이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들 위치로 내려오신 분이고, 사람들과 같아지신 분입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에도 ‘낮춤’과 ‘비움’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세례는 자신이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일이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3) ‘낮춤’과 ‘비움’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의 세례는 십자가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일이고,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일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도 십자가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뒤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뒤를 따르는 일 자체가(신앙생활 자체가)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세례는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뒤를 따르는 일의 시작입니다.
4) 십자가는 십자가로 끝나지 않고, 승리와 영광으로 이어지는 일이고, 부활과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받는 세례도 승리, 영광, 부활,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 고난과 시련을 겪기도 하지만, 그것은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에서 잠시 거쳐 가는 중간 경유지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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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서울의 신학교에는 성인이 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기념품이 있습니다. 교황님께서 앉으셨던 의자와 교황님께서 입으셨던 제의가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한 것은 제게는 영광입니다. 그러나 교황님께서 신학교를 방문한 것은 신학교에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대학교에서는 사회에 공헌이 큰 인사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곤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도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 추기경님께는 큰 영광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한 대학교에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한국 사회에서 존경받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세례자 요한에게는 큰 영광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직접 오셨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줄 때 물은 ‘정화’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물은 ‘성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물은 성수(聖水)가 된 것입니다. 신앙인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행동을 하면 안 됩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이 머문 자리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3번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동방박사의 경배입니다. 이방인인 동방박사가 황금, 유향, 몰약으로 예수님께 예물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구세주가 아닌 인류의 구세주로 오셨음을 나타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은 1784년 한국에까지 전해졌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입니다. 단순한 정화의 상징인 세례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구원의 성사가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의 모습으로 내려오면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타볼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엘리야, 모세와 함께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하게 변모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곳에 천막을 짓고 살고 싶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거쳐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변모는 죽음을 넘어 부활하심으로서 이루어졌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세상의 것을 버리고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신앙인이 가야할 길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변화된 삶을 살았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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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마르코 1,7-11 (세례를 받으시다)
그때에 요한은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나는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른 새벽
작은 죽음에서 깨어나
하루를 열면서
늘 그렇게
내가
세례를 받은 사람임을
마음에 새깁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빚으시고
지금여기에 보내셨음을
그리하여
지금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야 함을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그리하여
나의 모든 것으로
하느님을 드러내야 함을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그리하여
나를 사랑하고
벗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하느님께서
나를 살리심을
그리하여
나는 살아야 하고
나는 살려야 함을
늦은 밤
작은 죽음을 맞아
하루를 닫으면서
늘 그렇게
내가
세례를 받은 사람답게
살았는지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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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사목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찬미예수님
신학생 시절, 저의 불만은 공부를 강조하시는 교수 신부님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좋은 사제가 되려면 기도, 묵상과 같은 영성적인 부분과 삶을 대하는 태도 등이 훨씬 중요할 것 같은데 석사 논문을 왜 써야 하는지, 좋은 학점이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학점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절대평가가 아닌, 과목당 일정 인원 이상 높은 학점을 받을 수 없는 상대평가로 전환되며 이러한 불만은 더욱 커졌습니다.
나아가 실제로 성적이 좋지 않아 학교에서 퇴학당하는 동기들의 모습은, 이게 정말 하느님의 뜻일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기 충분했습니다. 생각 같아선, “사목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학생들의 불만을 감지했는지 한 교수 신부님께서 훈화시간에 학생들에게 성적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요지는,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있는데,
첫 번째는 “하느님의 부르심”,
두 번째는 “본인의 응답”,
세 번째는 “교회의 선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하나라도 결여되면 사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교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성적은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조건에 모두 해당됩니다. 실제로 하느님이 부르셔서 우리가 응답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잘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척도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음에 대한 직접적인 표지는 개인의 노력, 즉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한 지식의 습득에서 객관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를 분별해 교회가 선택하는 것이 바로 성소의 완성이 되는 셈입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기도와 인성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며, 신학생들의 공부가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만나게 될 신자들을 위해서이고 여러 가지 의심어린 질문에 가득 찬 청소년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국 교회와 긴밀히 연결되고 하느님을 위한 거룩한 일의 발판이 되는 셈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며, “아... 공부가 되게 중요한 거구나” 생각하고 다시금 마음을 다 잡았던 기억이 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본인의 응답”,
“교회의 선택”.
이 세 가지 조건은 신학생들 뿐만이 아닌 교회에 소속된 모든 구성원들에게도 통용됩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세례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저마다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성당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즉 사랑을 실천하지 않거나 미사에 나오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신자라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선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비자교리를 받거나 첫영성체를 받는 당사자가 성실하지 않으며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교회는 함부로 그 사람에게 세례 혹은 영성체를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거룩한 사업이므로 아무에게나 주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는 환경과 여건 등 많은 것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본인의 의지에는 세례에 대한 열망과 욕구가 전제 되며 교회의 의지에는 대상자에 대한 선택과 배려가 속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갖추어졌을 때에 우리는 세례를 받을 수 있으며 신앙의 은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유아세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아이는 본인의 신앙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이 아이를 신앙인으로 선하게 키우겠다는 부모의 의지로 대체되며 이는 곧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이러한 조건들이 모두 충족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식 때에 세례 받는 모든 이를 진심으로 축하해주며, 세례를 이미 받은 우리들은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며 언제나 이를 기쁘고 영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예리고의 동쪽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는데,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요르단 강까지 세례자 요한을 만나기 위해 직접 찾아오게 됩니다. 당시 길이 제대로 나있지 않은 상황에서 나자렛으로부터 요르단 까지의 거리는 약 130km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거리를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인간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직접 걸어오신 것입니다.
이에 오늘 복음의 병행구절인 마태오 복음 3장 14절을 보면,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기를 주저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곧 “속죄, 회개”의 의미를 담고 있었는데, 예수님께는 속죄와 회개가 필요 없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이 세례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효과, 즉 성령의 내려옴을 야기합니다.
이것은 곧 지금까지의 세례와는 다른,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질 앞으로의 세례 성사가 성령이 함께 하시는 새로운 삶을 인간에게 선사할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파견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의지(하느님의 부르심), 세례를 베푸는 세례자 요한의 순명의 선택(교회의 선택),
회개와 속죄의 모범이 되는 예수님의 응답(본인의 응답)이 있습니다.
이러한 의지들의 조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이 시간까지 연결되어 우리 역시 세례를 통해 다시금 새롭게 태어나게 되고 성령의 은총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세례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그저 나의 의지 혹은 주변의 환경으로 인해 받게 된 것처럼 인식되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리하여 가끔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에, 즉 사랑을 실천하고 복음에 귀기울이는 데에 있어 게으르지는 않았는지요.
그러나 분명 여기에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었으며 세례를 베푸는 교회의 열성어린 선택 또한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소중히 간직하며 이에 대해 감사하며 응답하고자 하는 마음을
언제나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기억하고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며 선하게 살아나갈 때, 우리는 삶의 끝에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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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철규 아오스딩성 신부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찬미 예수님,
코로나19로 성당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는 요즘이지만 ... 어느새 성탄시기 마지막 날인 ‘주님세례축일’이 다가왔습니다. 시간 참 빠릅니다... 새해 여러 계획들을 세우셨을 텐데 ... 그 계획들은 어떠하신가요? 슬슬 그 피할 수 없는 ‘작심삼일’이라는 법칙과 싸움을 하고 계시는 분들이 많이들 생겨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득 ... 그 한계에 부딪친 새해 소망들을 다시금 돌아보니 ...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행복이라는 것이 참 얻기 힘든 것이구나...” 무언가를 이루고, 어떤 상태가 되고, 또는 무엇이든 충족되어야만 행복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 그 안에 담겨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세례축일 복음에선 이런 말씀이 나오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울렸던 음성입니다. 그 음성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기도 하지만(제1독서 참조), 그 안에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 인류를 사랑하시는지 ... 그 마음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상태나, 조건, 시기 등을 떠나 ... 한 사람 한 사람 그 존재로서 인정해주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습관적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대체로 ‘내가 무엇을 잘 했을 때’나 ‘무언가를 좀 이루었을 때’, 또는 ‘좀 더 나은 상태가 되었을 때’라든지... 우리들은 이렇게 조금이라도 어떤 만족을 이루었을 때에만 자신을 인정해주고, 사랑하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장을 위한 채찍질이 되기도 하지만 ... 하느님의 시선에선 그 자체로 소중한 ‘현재의 나’를 매번 부정해버리는 안타까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올해 작심삼일, 무너진 계획들을 다시 점검하며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계획을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요? 먼저 ‘현재-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라고 말씀하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현재 나를 긍정하며 출발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현재의 나를 부정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며 ...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성장하는 올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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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정비오 비오 신부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자>
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주님 공현 대축일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축일이다. 하늘이 열리며 소리가 들려오고 성령께서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오늘로 성탄 시기가 끝나고, 내일부터연중시기가 시작된다. 루카 복음은 주님 세례 장면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루카 3,21-22 참조)
하느님께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 당신의 아들이 죄 많은 인간을 위하여 스스로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신 것에 감동하시어 참된 아들로 인정하신 것이다. 참된 아들로 인정받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다짐을 하셨을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답게 그리고 세례 받은 이답게 살자’ ,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리고 세상에서 성실하게 공정을 펼치자.’
(이사 42,3 참조)
예수님은 이러한 다짐들을 죽는 순간까지 충실하게 지키셨다. 그래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세례를 받았고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세례를 받으면서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자녀답게’ 또 ‘세례 받은 사람답게’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짐은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동시에 오늘 사도행전에서 사도 베드로가 한 말씀처럼 사는 것이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사도 3,34-35)
나아가서 교구80주년을 맞아 주교님께서 제안하신 세 가지를 실천하는 것이다.
1. 남들이 바뀌길 바라기에 앞서 ‘나부터 먼저 바뀌자’
2. 서로가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알고 ‘사랑으로 하나가 되자’
3. 이미 받은 은총에 감사하며 ‘신앙의 기쁨을 다른 이들과 나누자’
우리가 이러한 다짐을 충실하게 지켜나간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는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고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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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정찬 사도 요한 신부님]
<함께 채우는 첫 단추>
저는 태중교우는 아닙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세례를 받고 첫영성체를 함께 하였습니다. 제가 세례 받았을 때를 회상해 보면 교리 내용이 기억나기보다는 호되게 준비했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예비자 교리반에서 성지순례를 오시면 간혹 당시의 제 기억들을 나누어 드리는데, 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지금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예비자들을 보며 괜히 뿌듯함을 느끼곤 합니다.
첫영성체 교리가 막바지에 이르면 ‘찰고’를 해야 하는데 넘어야 할 이 산은 아이들뿐만이 아닌 어른 예비자 교리반에도 예외 없이 매우 높은 산입니다.
암기식 교육에 익숙지 않기 때문인데 담당 수녀님이 교리와 주요기도문 암기 상태를 확인하지만 주임 신부님 앞에서 대답하는 것 자체가 긴장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기도문을 다 외우지 못하는 친구가 생겼는데, 당시 주임신부님의 불호령과 함께
한 사람도 낙오 없이 모두가 통과할 때까지 2주간 연장했던 보충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첫영성체 하면 이 시간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물에 잠겨 숨 못 쉬는 고통의 시간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찾을 줄 알았으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순수하고 까불기만 했던 어린 마음에 ‘세례받기가 이렇게 힘든건가? 이럴 바엔 그만 두어야겠다!’, ‘연대책임은 과연 나랑 무슨 상관인가?’
당장의 아픔만 보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솔직히 저랑 같이 첫영성체 교리 받았던 친구들 중에 성당 다니는 사람은 제가 유일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그리고 또 사목자로서 세례를 베풀고 준비하는 입장에 서 보니 나 혼자만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준비했던 주위의 모든 사람들, 가정에서는 부모님의 노력을 비롯하여 교리교사와 봉사자, 수녀님들의 관심과 노력이 오히려 더 컸음을, 오히려 이 부분이 더 커야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례 받은 후 대부모들의 지속적인 관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가는 것이 능사가 아닌 신앙의 첫 단추라 말할 수 있는 ‘세례성사’는 잘 준비해야 합니다.
특별히 준비하는 기간이라 말할 수 있는 첫영성체 교리, 예비자 교리 기간이 은총의 시간임을 준비하는 이들이 느낄 수 있도록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함은 세례자 요한과 성령의 비둘기, 그리고 하느님의 음성이 예수님의 세례를 중심으로 주변에 배치된 모습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관용을 빙자하여 남용되는 세례가 아닌 모두가 한마음으로 준비했던 세례 때의 다짐을 되새겨보며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이 절박했던 시기에 신앙의 선조들은 어쩌면 준비된 세례만으로도 순교의 삶에 동참했기에, 우리 역시도 이러한 모범을 따라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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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박인수 요셉 신부님]
<누군가를 위한 삶>
오래전부터 친하게 지내는 후배가 있습니다.
지금은 6년차가 된 소방관입니다. 가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는 합니다.
소방서에서 근무를 하다가 비상벨이 울리면 자신도 모르게 방화복을 입고 소방차를 직접 운전해서
사고 현장으로 간다고 합니다. 누가 시켜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본능적으로 움직입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누군가를 지키고 살려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고, 가족을 위해서 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만나본 적도 없는 그 누군가를 위해 활동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라 함은 본래 죄를 씻고 주님 앞에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세례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알고 있고 그 죄를 깨끗하게 씻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세례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대신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생각해봅니다. 나의 삶이 소중하고 내가 살아가는 이 틈바구니가 참으로 귀합니다.
이웃을 위하여 사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이며 그것이 나의 인격을 높여 줄 것을 알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기 쉽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어릴 때부터 오늘의 주님 세례 축일은 항상 의구심이었습니다. 주일학교 교리시간에,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교리시간에 배운 세례라 함은 나의 죄를 씻는, 다시 말해 원죄를 없애는 일종의 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없는 예수님께서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
철저하게 누군가를 위해 대신 살아가는 삶이 예수님의 생애였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죄가 없지만, 죄 많은 인간을 위해 직접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배워가는 우리이기에 부족하지만 오늘의 복음을 기억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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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이상형을 만났습니까? 지금의 배우자 또는 연인이 내 이상형이 맞습니까? 종종 자신의 이상형을 만났다면서 기뻐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이상형이 아니었다면서 실망의 표정을 짓곤 합니다. 그렇다면 이상형을 만날 확률은 어떻게 될까요?
실제로는 아주 희박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이상형이 될 확률은 100%에 가깝다고 하더군요.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실망하면서 “이상형이 아니다.”라고도 말하지만, 그래도 이상형이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될 확률은 높아집니다. 왜냐하면, 이상형은 찾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완벽한 사랑을 찾고 있다고 하지만, 부족한 사람들이 만나 완벽한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진정한 사랑으로 만들어 갈 때 꿈꿔왔던 이상형이 보이게 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받으신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세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실 세례는 회개를 위해 필요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는 하느님이시기에 굳이 회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 땅에 참사랑을 만들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만으로 완전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신 것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가 받아야 할 세례도 직접 받으시고, 아프고 힘들어하는 이에게 위로와 힘을 주셨습니다. 그 모든 활동으로 주님께서는 사랑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우리의 이상형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이상형이 되어 오신 주님을 보면서, 우리 역시 나의 이웃에게 또 다른 이상형이 되어 주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만들어 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께서는 원하셨고, 그런 이유로 이 땅에 오셨고 오늘 기념하듯이 세례도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온 순간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지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사야 예언자가 오늘 제1독서를 통해 말하고 있는, 하느님께서 붙들어 주는 이, 선택한 이, 마음에 드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 주셨던 사랑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이 가득한 곳, 최고의 이상형이 가득한 곳. 바로 지금 이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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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만드는 방법>
한 젊은이가 지혜를 얻기 위해서 한 현인을 찾아가 생활했지만, 스승은 몇 달이 지나도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스승은 제자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저기 벽돌 뒤에 많은 금괴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돌벽으로 막아두었으니 어떻게 꺼낼 수 있겠느냐?” 제자는 망설이지 않고 “망치로 돌벽을 깨뜨리고 꺼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스승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여기 있는 이 닭의 알에서 생명을 꺼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제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품어주고 따뜻하게 해주고 기다려 주면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품어주고 따뜻하게 해주고 기다리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망치로 껍질을 깨는 줄 알지만,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한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힘으로 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품어주고 따뜻하게 해주고 기다려 주는 것만이 사랑을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강제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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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를 살려내기 위해서>
세례성사의 효과에서 가장 먼저 얘기하는 것이 ‘모든 죄를 용서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16,16).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더군다나 죄인들인 군중 틈에 끼여서 아주 평범하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죄인도 아니시면서 죄인들 속에서 세례를 받으셨을까?
예수님은 분명히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세례를 받으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러 세상 안에 직접 들어오신 것입니다. 마치 불 속에 있는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불 속에 뛰어들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더 없이 큰 사랑입니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성탄의 신비가 세례 안에서도 드러납니다.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는 주님의 세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전, 또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먼저 요르단강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영과 육신이시므로 성령과 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티토3,5-7)
일찍이 세례자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창세기의 말씀을 기억함으로써 이해를 도울 수 있겠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2,7)고 하였습니다.
‘생명의 숨’을 불어 넣을 그릇을 만드는 일은 요한이 하고 그 그릇을 채우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의미는 ‘하느님의 생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하느님의 생명을 받기 위해 그릇을 준비하는 일인데 그것은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는 회개요,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사도22,16)
우리는 가끔 세례를 주신 분을 기억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교리를 가르쳐 주신 분들, 신부님, 수녀님, 대부, 대모를 기억합니다. 성당에로 인도하시분도 잊을 수 없습니다. 다들 고맙고 소중한 분들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으니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그들은 나의 영적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 세례를 받은 것도 중요하지만 은총은 분명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사방팔방에서 모여들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특별하지 않게 겸손한 모습으로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1,10-11)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들, 딸이 되었다는 것을 일깨웠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생명의 숨을 넣어주신 주님의 세례를 기억하고 우리의 세례를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는 날이 지속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태어나면서 받은 이름, 세례명을 자주 불러 나의 정체성을 일깨우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3,27)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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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주님께 보답해야 되나?>
-회개, 겸손, 자비-
새벽 교황님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한 눈에 들어 온 메시지가 강렬했습니다. 미국 수도 의사당에 난입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들에 대한 난동에 대한 교황님의 메시지입니다. 민주주의의 초강대국 미국의 추한 민낯을 보여준 참 실망스런 사상 초유의 충격적 사건입니다.
“폭력을 거부하라. 치유의 시간이다(Reject violence. It’s time for healing)”
역시 세계의 큰 어른다운 말씀입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야만적 폭력의 언행은 합리화할 수 없으며 강력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좌우간 너나 할 것 없이 참으로 치유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오늘로서 성탄시기는 끝나고 내일부터는 다시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세 번째 주님의 위대한 공현날이기도 합니다. 바로 주님 공현 대축일 저녁성무일도시 흥겹게 불렀던 마리아의 노래 후렴이 이를 입증합니다.
“1.오늘 별이 박사들을 구유에로 인도하였고, 2.오늘 혼인 잔치에서 물이 술로 변하였으며, 3.오늘 그리스도께서 요른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도다. 알렐루야.”
주님과 하나되어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의 ‘오늘’이 대림이요 성탄이요 공현이요 세례 축일입니다. 마침 얼마전 입양된 수도원의 반려견 ‘성탄’이 생각납나다. 반려견들을 돌보는 자매들이 지어준 기발한 이름인데 기존의 ‘대림’ 반려견과 좋은 짝을 이루는 거룩한 이름에 저절로 미소짓게 됩니다. 참 복도 많은 개팔자입니다.
어제 주님 세례 축일 전날 저는 한없이 기분 밝아지는 참 좋은 선물 셋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비신자지만 사랑하는 사촌형님으로부터 생신을 맞이하여 가족이 함께 찍은 다복한 사진을 받은 것이며, 하나는 전남 영광에 사시는 생면부지의 자매로부터 제 매일 강론에 감사하며 선물한 영광굴비를 받은 것이고, 셋째는 참 고맙고 좋은 분이 박사논문 심사에 통과했다는 소식을 받은 것입니다. 가톡 내용 그대로 소개합니다.
1.“아, 해철형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감사미사도 봉헌합니다. 참으로 성공인생 사셨으니 장하십니다! 우리 수도원의 예수님께서도 축하인사 드린답니다.”
“수철 신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도원 뜨락의 밝은 햇살이 광명光明입니다.”
축하메시지와 더불어 전송한 수도원 십자로 중앙의 ‘예수님 부활상’ 사진에 대한 감사의 답신입니다.
2.“송진여 데레사 자매님, 보내주신 사랑의 귀한 선물, 영광굴비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사님들 모두 기뻐합니다. 예수님 감사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안녕하세요. 매일 수사님 강론을 보면서 작게나마 감사인사드렸습니다. 맛있는 식사하시고 영육간에 건강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은총 가득한 날 되세요!”
역시 감사메시지와 더불어 전송한 예수님 부활상 사진에 대한 자매의 고맙고 반가운 답신입니다.
3.“논문심사 잘 다녀왔습니다. 부족한 부분 수정하는 조건으로 통과입니다. 신부님 덕분이옵니다. 고맙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 자매님께 축하! 인사 드립니다. 누구보다 수도원의 예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감사하는 자매님께도 격려 메시지와 더불어 역시 수도원 예수님 부활상 사진을 전송하니 저 또한 나를 듯 기뻤습니다. 좋으신 주님께서 당신 세례 축일 전날 참 좋은 선물 셋을 주신 것입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가니 몸 불편한 곳이 하나둘 생겨납니다. 분명한 깨달음이 마음 깊이 각인됩니다.
‘약藥은 은총恩寵을 상징한다. 이젠 말 그대로 은총으로 사는구나! 사랑의 빚으로 사는구나! 겸손하자! 약먹으면서, 은총으로 살면서, 사랑의 빚으로 살면서 절대 죄짓지 말자! 영혼 건강에 각별히 힘쓰자! 팬티천같은 육신이 좀 부실해도 팬티끈같은 주인인 영혼靈魂이 튼튼하면 부실한 종의 육신肉身도 잘 관리할 수 있다!’
이런 저런 감사와 깨달음에서 저절로 나오는 자문自問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주님께 보답해야 되나? 라는 물음이요,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첫째, 회개입니다.
무엇보다 회개의 삶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을 향한 방향전환의 회개의 삶입니다. 기존의 삶의 방식에 대한 전적 전환입니다. 참으로 단순하고 검소한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생태적 회개까지 포함되는 내적혁명의 회개입니다. 값싼 회개가 아니라 늘 깨어있는 삶을 전제로 하는 회개입니다.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의 선포의 핵심도 회개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시공을 초월하여 만고불변의 진리는 단 하나,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선언입니다. 두분 다 평생 깨어 회개의 걸맞는 삶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두분의 삶에 우리 삶을 비추어 보면 저절로 부끄러움과 더불어 회개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검박儉朴한 외모와 삶이 그대로 회개의 표징처럼 감동을 줍니다. 말그대로 쓰레기를 전혀 내지 않는 자연친화적인 무공해의 삶입니다. 정말 생태적 회개의 모범입니다. 요즘은 1회용 쓰레기를 얼마나 많이 배출하는지 먹는 일이 죄짓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가죽띠를 둘렸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추상적이거나 애매한 마음의 회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참으로 절박한 회개의 실천이 요구됩니다. 서로 연대하여 삶의 방식의 전환을 통해 구체적으로 회개의 증거를 보여줘야 비로소 진정성있는 회개입니다.
둘째, 겸손입니다.
회개의 빛나는 표지요 열매가 겸손입니다. 참 멋지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인품이 겸손입니다. 겸자무적謙者無敵입니다. 악마가 다 흉내낼 수 있어도 겸손만은 흉내내지 못합니다. 회개 은총의 열매가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참영성, 참성덕의 표지가, 잣대가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에 나오는 다음 두분의 아름다운 겸손의 장면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이어 자청하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도 빛나는 겸손을 만납니다. 바로 이런 겸손한 삶이 우리의 회개를 촉발시켜 겸손에 이르게 합니다. 회개의 열매가 겸손이요 겸손의 삶이 이웃을 회개에로 이끕니다. 선순환 관계에 있는 회개와 겸손의 삶이 점차 아름다운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셋째, 자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 자비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얼굴이 자비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예수님뿐 아니라 세례받아 예수님과 하나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사도행전에서 하느님을 닮은 임마누엘 예수님의 자비행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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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은총의 성탄 시기를 마무리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주 커다란 행복의 현장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0-11)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하느님과 하나이신 분이 인간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놀라운 겸손의 현장이고, 또 성삼위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은총 가득한 순간입니다.
이 장면 안에서는 모두가 기쁘고 행복합니다. 놀라운 광경과 신비로운 목소리도 그렇거니와 이 은총이 예수님 한 인간에게만 내리시는 축복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임을 저마다 감지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의 신원에 대해 고민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을 예수님께는 앞으로의 길을 확고히 하는 결정적 순간이 되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내 마음에 든다는 말씀이 예수님께는 하느님 아들로서의 신원을 확신해주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인간들 사이에서도 이 말은 마법 이상의 특효약일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마음에 들어하고 사랑한다는 말은 의혹에 싸인 마음을 붙들어 주고 방황하는 영혼에게 힘을 줍니다. 절망으로 쓰러져가는 이를 일으켜 세우고, 의기소침한 어깨를 활짝 펴게 해 주며, 슬픈 눈물을 닦아 주지요. 새롭게 시작할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이 말씀에 오래 머물러 봅니다.
"나는 보았다. 그래서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였다."(영성체송)
이 영광스런 광경을 지켜본 요한이 고백합니다. 이 현장에는 세례자 요한과, 또 다른 이들도 있었겠지요. 세례 후 성부 하느님과 성령의 방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이렇게 세상에 드러나십니다. 또 다른 주님 공현의 현장인 셈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가 들려 옵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1)
복음 속 하느님의 말씀과 예언자가 전하는 목소리가 겹칩니다. 오늘 복음 내용이 바로 예언서의 이 부분의 실현임을 증명하고 있지요.
하느님의 영을 받은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울타리를 넘어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실 것입니다. 주님이 어느 민족이나 국가에 국한된 분이 아니심을 드러냅니다. 종족과 율법, 할례와 안식일 규정으로 구분되는 구약의 하느님 백성이 이제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모든 이에게로 확장되지요. 우리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제2독서는 성령에 이끌려 고르넬리우스의 집을 방문한 베드로의 설교 중 한 대목입니다.
"여러분은 ...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사도 10,38)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세례에 대해 증언합니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시어 당시 종교 기득권자들의 유대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 실은 하느님의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메시아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곧 만민의 주님을 통하여"(사도 10,36)
열렬한 유다교 신자였다가 예수님의 복음을 따르는 이들 중에는 율법이 정해 놓은 이방인과의 관계성 앞에서 멈칫대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할례나 안식일법, 정결례 등이 그들에게 갈등 요소가 되었지요.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민의 주님"이시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하느님 앞에 유다인과 이방인은 차이가 없습니다.
오늘 독서의 대목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설교가 이루어진 후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이 내리셨다"(사도 10,44)고 하지요. 이어 베드로는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반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포함한 온 세상 만민의 구원자시고 주님이심이 말씀 안에 새겨집니다.
성탄 시기는 이처럼 장엄하고 영광스럽게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면서 막을 내립니다. 주님의 구원이 온 세상에 내립니다. 민족과 국적, 인종과 피부색, 학식과 재력, 종교와 문화, 신분과 직업을 막론하고 모든 이가 구원자 예수님의 자비 앞에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마주한 우리 모두를 바라보시며 기쁨에 겨워 외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사랑의 불로 정화되고 성화되는 이 자리에서 주님이 참 행복해 하십니다. 우리도 행복합니다. 이 행복이 연중시기 내내 이어지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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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정립하면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줍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에서 세례를 베푸셨다’(요한 3,22 참조)는 보고로 시작됩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유일한 본문입니다. 그리고 뒤에 4장 2절에서는 그의 제자들이 베푼 것으로 소개됩니다. 아마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 중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있었고, 예수님의 방식으로 세례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제자들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주어진 분”으로, 계시를 통해 오신 분이심을 밝힙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이어서, 자신과 예수님을 동시에 증언하면서, 그리스도의 현현을 드러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신랑’과 ‘신부’는 성경적 표상입니다. 곧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신부를 표상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를 받아들여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보았습니다(에페 5,21-33). 그러니 신부인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차지임을 표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교회의 신랑’으로 드러내줍니다. 구약성경의 <아가서>는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신부인 교회와의 사랑을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라는 말은 그분만이 교회의 신랑이시며, 민족들의 구원의 동반자임을 말해줍니다.
한편,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고 신랑의 기쁨을 나누나, 결코 신부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주시며’(요한 15,15 참조),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이토록, 우리는 그분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되고, 함께 깊이 믿기에 예수님과 서로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 친구들에게 당신 신부인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깊은 우정과 사랑으로 말입니다. 그토록, 친구를 깊이 신뢰하고 존중한 까닭입니다. 당신께서는 친구에 대한 그 사랑, 그 신의를 십자가에서 온몸으로 몸소 드러내셨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그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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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입니다.”(요한 3,29)
주님!
당신만이 저의 신랑입니다.
당신 마음을 듣게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시고, 당신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기뻐하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당신을 다 내어주셨듯이 제 전부를 드리오니, 저를 차지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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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마르1,9)
오늘은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세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1,11)
예수님의 신원이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야 말로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에 대한 분명한 선포입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으로부터 성령과 힘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시기"(이사42,7)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 위에 내려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 세례의 예표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우리의 세례를 미리 보여준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죽음과 부활을 함께 전하고 있습니다. 물에 잠김은 죽음을 상징하고, 물에서 올라옴은 부활, 곧 새로운 탄생을 상징합니다.
새로운 탄생은 반드시 옛 것이 씻어져야 하는 죽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세례 축일을 기억하는 오늘,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우리가 받은 세례도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세례 때의 은총과 기쁨을 잘 간직하고 있는지?
세례의 은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세례의 의미인 죽음과 부활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는지?
교회는 오늘 주님세례축일을 끝으로, 성탄시기를 마치고, 내일부터는 예수님의 부지런함과 땀을 묵상하는 '연중시기'를 시작합니다.
아직도 코로나로 인해 불편함과 아픔 속에 있지만, 조용히 지내는 이 때에 나의 세례와 그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면서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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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e998Em0LHhw&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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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세례 안에
삶의 해답이
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다.
세례를 통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사람은
세례를
향해 있고
세례는
사람을 향해
열려있다.
세례는
사랑의 뜨거운
관계 맺음
이다.
세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일깨워준다.
세례로
우리의 삶 또한
주님의 삶 안에서
사랑으로
공유된다.
세례는
우리 삶의
가장 고귀한
변화이다.
세례는
참된 세례의
여정을 걸어간다.
더 나은
삶을 향해
나가게 한다.
세례는
우리의 삶의
목적이
사랑의
하느님께
있음을
알려준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랑의
자녀들이다.
하느님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세례는
구원을 향해
열려있다.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께서
세례의 은총을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세례로 세상을
바꾸신다.
세례는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통한
세례의
내면화이다.
우리의 소중한
세례를
진심으로
축하드리는
삶의
주일이다.
소중한 삶을
살아가길
바라시며
소중한 세례를
주셨다.
세례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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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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