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 많이 회자되고 있는 개념은 ‘공공성’입니다. 공공성이란 개인과 관련된 것과는 대조되는 것으로서 다수의 사람이 관련된 문제 내지는 가치 실현에 대한 책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다수와 관련된 사안이라는 점에서 공공성은 공익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개인적인 것이 아니므로 공개성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 공공성 개념이 사용되고 있는 맥락은 대단히 다양하며 또 우리 사회에서 최근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공공성 담론에서 공공성이라는 개념의 의미는 단순히 사회과학적 차원을 넘어서 현재 세계 사회를 지배하는 아주 중요한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정신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 정신으로 중요하게 자리매김을 했습니다.
특히 젊은 기독 청년들에게 그러했는데 특별히 이들에게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공공의 신앙’을 신학적으로 지지한 본 훼퍼(D. Bonhoeffer, 1906-1945)입니다. 본 훼퍼는 1970-80년대 한국의 독재 정치하의 암울했던 정치적․역사적 현실상황 속에서, 불의하고도 왜곡된 역사현실을 변혁하기 위해, 저항과 비판의 신학적 실천운동을 펼쳤던 수많은 진보적 한국 기독교 청년들과 지성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본 훼퍼는 1906년 독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의사인 아버지에게 “병든 사람들에게는 돈을 받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하니 정말 그에게서 공공성의 인간미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17세에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21세에는 베를린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히틀러 정권에 저항하며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라고 말하며 히틀러 암살단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1945년에 교수형에 처하기 직전 열정적으로 무릎 끓고 하나님께 기도한 후 “이것이 마지막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는 말과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합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천재성이 빛나는 그의 단편들은 체계적 신학서로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성도의 교제’, ‘나를 따르라’, ‘신도의 공동생활’, ‘창조와 타락’, ‘저항과 복종: 옥중서한’등 그의 대표적 저술물들은 거의 모두 한국어로 번역된 것만 보아도 한국 젊은이들 정신세계에 불어 넣어 준 그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고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본 훼퍼의 신학과 신앙이 그렇게도 강력하게 1970-80년대 한국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사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직’이 지닌 고귀한 가치와 의미를 각성시켜준 것과, 교회를 제도나 조직체나 전통의 유물로서가 아니라 세상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볼 수 있도록 일깨어 준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젊은 진보적 그리스도 청년들은 기독교윤리의 과제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이 이 땅에서의 피조물 가운데서 실현되어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랬기에 군부독재시절, 수많은 진보적 기독학생들이 그들의 몸에 덮어씌우는 수년 동안의 감옥행이나 육체적 고문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상화된 권력을 비판하면서 신앙적 저항 운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본 훼퍼로부터의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진보적 신앙집단들이 보였던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등은 단순한 정치운동이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한 신앙 고백적 정신 운동이었습니다.
한국에도 이러한 신앙 고백적 신앙공동체를 이끈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은 가나안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님입니다. 가나안농군학교는 김용기 장로님(1909-1988)이 1954년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풍산리 척박 한 땅 1만여 평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기독교 신앙을 기본으로 근로․봉사․희생이라는 3가지 교육이념을 가지고 개척한 영농일꾼의 양성학교입니다. 1962년엔 ‘가나안 농군학교’로 발전하였고, 1973년엔 ‘가나안 복민운동’을 제창하였습니다. 그는 1966년 아시아의 대표적 지역공동체 농민운동의 공로자로서 막사이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김용기 장로님은 “절대 벼슬을 하지 말고 남들이 싫어하고 어렵게 생각하는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며 기독교의 ‘신앙생활’을 ‘생활신앙’으로 승화시킨 개척적 이상농촌운동가였습니다. 김용기 장로님은 한국의 절대빈곤 문제, 특히 농촌사회의 빈곤과 도덕적 정신적 패배주의를 기독교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실천으로 보여준 사람입니다. 근대화와 공업화의 주체적 시발이었다고 평가되는 제 3공화국의 ‘새마을 운동’의 정신적 기반과 그 실천적 실험이 김용기장로의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부터 시작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사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역사적으로 이 세상에서 공적인 책임들을 많이 수행해 왔습니다. 일찍이 한국의 기독교는 계몽차원에서 민족의 희망이었고, 한글을 보급하였으며, 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세웠고, 평등사상을 고취시켰으며, 교육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해 왔습니다. 그리고 일부일처제와 여권신장에 힘써 왔고, 3•1운동과 같은 나라 살리기 운동에도 동참하였으며, 신사참배운동도 일으켰습니다. 나아가서 1970년대의 반독재운동과 1980년 남북평화통일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공적인 책임에 등한시 하지 않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랬기에 세상 속에 있는 교회는 놀라울 정도로 부흥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의 교회는 부흥은커녕 도리어 쇠퇴해 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존재하겠지만 그 중 하나는 현대 교회들이 이 사회 속에서 공공의 모습보다는 내 교회만 부르짖는 개교회 중심으로만 치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의 교회는 세상 속에 있는 교회가 아닌 세상 밖에 있는 교회로 이미지화를 하기 때문에 세상 속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 밖에 있는 교회를 향하여 발걸음을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세우신 교회는 이 세상과 동떨어진 어느 한 곳에 우뚝 세워져 있는 자신들만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바로 이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삶 속에서 공공성의 삶의 표준을 보여주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의 이웃의 대상이 누구인지도 분명히 제시해 주셨습니다. 자신 스스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 병든 자와 고통 받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셔서 자신의 말씀 그대로 이 땅에서 살아가셨습니다. 교회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인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하려면 성도인 우리는 개인의 삶 속에서의 신앙에만 안주하지 말고 이 땅의 구성원으로 공공의 장인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눈을 돌릴 것이며 세상은 복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