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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붓다와 예수, 소크라테스 등 진리를 전한 선각자들도 당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선지자로 인정받고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가르침이 기존의 관습이나 종교의 권위와 충돌하면서 비난과 박해를 겪기도 하였다.
불경의 기록에 따르면, 붓다가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은 뒤 법을 전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차례 비방과 위해를 겪었다.
순다리와 친차가 붓다를 비난하고 모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붓다의 사촌동생 데바닷타는 붓다를 해치려 하거나 교단을 차지하려고 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일화들은 진리를 전하는 대각자라 하더라도 언제나 모든 사람들의 이해와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니며 진리를 전함에도 위험이 따른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당시 붓다의 가르침은 바라문교를 비롯한 기존 종교의 관습과 교리와 사상적으로 차이를 보였기에, 붓다의 가르침이 기존 종교의 권위를 건들면서 사상적 논쟁과 갈등이 발생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 역시 진리를 전하다가 극심한 고초를 겪었다. 예수는 마태복음 5장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義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이 말씀은 진리와 정의를 실천하고 양심에 따라 살아가다가 부당한 핍박과 희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복이 있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진리를 따른다는 이유로 모욕과 박해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11~12)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두 가지다.
첫째, 설령 불이익이 따르더라도 진리와 양심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이익이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대각자와 진리를 외면하거나 배신하지 말아야 하며, 더욱이 불의의 악행에 가담하지 말아야 한다. 권력이나 다수의 압력으로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 양심을 저버리고 부당한 악행을 방조한다면, 결국 불의가 지속되는 데 힘을 보태는 셈이 된다. 수제자 베드로는 두려움으로 인해 예수를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정하였고, 가롯 유다는 이익을 위해 돈을 받고 예수를 넘겼는데, 나중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둘째, 자신의 잘못으로 비판받는 것과 의로운 일을 행하다 부당하게 박해받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자신이 잘못한 일에 대한 비판은 겸허히 반성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예수의 말씀은 자신의 잘못을 감싸고 정당화하라는 뜻이 아니라, 진실과 정의를 지키다가 부당한 핍박을 받더라도 양심과 의로움을 포기하지 말고 그들을 미워하고 원망하지 말라는 당부이자 격려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비판하고, 죄의 회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강조했다.
그분은 권력자와 제사장, 부유한 상류층만을 가까이 한게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였으며, 당시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과도 함께했다.
그는 이들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돌보는 일이 진정한 사랑의 실천임을 가르쳤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40)
이는 자신의 안락함만을 추구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서로 도우며, 진리를 알게 하여 타인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덜어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인 것이다.
또한 예수는 선행을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거나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지 말라고 하였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義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마태복음 6:1)
그리고 "구제할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6:3~4).
이는 선행을 과시하거나 대가를 바라기보다 순수한 마음으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진정한 선행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타인을 순수하게 위하는 자비로운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예수가 활동하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교 제사장들의 권위와 종교제도가 집중된 곳으로, 예수의 가르침과 대중적 인기는 일부 유태교 제사장들과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유태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그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위협적인 인물로 여기고 그를 제거할 방안을 모색했으며,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압력을 가해 결국 십자가형을 당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로마 황제 폭군 네로는 예수의 제자들에게 거짓말로 누명을 씌우고, 그 구실로 예수의 신도들을 잔혹하게 박해했는데 무려 300년 동안 지속되었다.
강력했던 로마제국은 이와 같은 큰 죄악으로 인해 페스트 전염병이 발생하여 대부분 멸망했다. 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믿었던 사람들과 박해받는 사람들을 마음 속으로 동정하고 지지했던 사람들, 박해받는 예수의 제자들을 몰래 보호한 의인들은 페스트 역병에서 무사히 살아남았다고 한다.
붓다 재세시에도 인도 마가다국의 왕사성에서 심각한 역병(전염병)이 퍼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부처님은 이 상황을 보고 “이것은 사람들의 탐·진·치 삼독(三毒)으로 인해 쌓인 共業의 과보”라고 말씀하셨다. 다만, 선업(공덕)을 쌓은 자는 고통 속에서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음을 설했다.(잡아함경)
이처럼 붓다와 예수의 생애는 진리를 전하여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일이 기존 종교 권력과 충돌할 수도 있으며, 진리를 실천하는 길에도 고난이 따를 수 있지만, 선량함을 지키고 진리를 따르면 복이 있음을 일깨워 준다.
서양 철학의 대표적인 인물인 소크라테스의 삶 역시 고초를 겪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며 자기의 내면에 있는 신성을 깨닫도록 자아를 성찰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는 당시 젊은이들을 邪說로 타락시키고 아테네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지키다가 사형을 선고받았고, 결국 감옥에서 독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노자는 대중들에게 진리를 전하지 않고 도덕경에 진리와 인간의 삶에 관해 깊은 통찰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上士聞道,勤而行之;中士聞道,若存若亡;下士聞道,大笑之。不笑不足以為道。”
“상근기는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실천하고, 중근기는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하며, 하근기는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만약 비웃음을 당하지 않는다면 道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도덕경》 제41장)
이 구절은 진정한 道가 모든 사람들의 지식관념이나 사회적 통념과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사람들은 자신이 익숙하게 믿어 온 사상관념과 다른 가르침을 접하게 되면 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기보다 먼저 의심하거나 미신이라며 비웃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는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종교가 꼭 진리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진리를 빙자하여 혹세무민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가르침이 우주의 이치에 맞는지, 실제 삶에서 선과 지혜를 실현하는지, 그리고 사람들에게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살펴보고 판단하는 일이다.
붓다와 예수, 소크라테스와 노자의 사례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같다.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하는 일에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며, 자신의 지식과 신앙만을 고집하기보다 진리와 진실을 이해하려는 겸허하고 열린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된다. 오늘날에도 종교와 사상, 양심과 권력의 충돌 속에서 박해와 인권 침해가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장쩌민 집권기인 1999년 7월, 중국 공산당이 법륜대법(파룬궁)에 대한 전국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법륜대법은 李洪志 대사가 창시한 수련법으로, 마음을 닦아 우주의 본성 진(眞)·선(善)·인(忍)과 동화되고, 이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최후에는 해탈하여 본향으로 돌아감을 수련 목적으로 삼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수련을 통해 심신의 건강을 회복하고 이전보다 더 좋은 사람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당시 공산당의 수괴 장쩌민은 상무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룬궁의 사회적 영향력이 공산당 체제에 대해 위협을 가한다며 박해의 명분을 정당화하였다. 그 후 민중의 사랑을 받는 李洪志 대사에 대한 질투심에 의거하여 여러 차례의 암살을 시도하고, 수련자들에 대한 불법적인 구금과 폭행, 살인 등의 광범위한 탄압을 지속하고 있다.
그 결과 파룬궁 박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거나 동조한 많은 공산당의 당원들이 코로나로 인해 목숨을 잃었지만, 공산당 조직에서 탈퇴하고 진리의 편에 선 선량한 사람들은 전회위복으로 살아남았다.
李洪志 대사는 전염병이 발생하는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농도가 큰 업력이 어느 지역에 나타나면, 그 지역은 곧 전염병이 발생하는데, 흔히 그 지역 사람들이 빚은 業이 매우 커서 조성된 것이다. 내가 왜 이것을 말하는가? 나는 인류의 도덕이 아주 심하게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음을 보았다." (96년 싱가포르 법륜불학회 설법)
양심과 정의, 그리고 눈앞의 이익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미 연방상원은 2026년 9월 28일 ‘法輪功 및 강제 장기 적출 피해자 보호법안(S.4009)’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S.4009 법안은 중국 내에서 법륜대법(파룬궁) 수련자 및 기타 양심수들을 상대로 한 강제 장기 적출에 가담하거나 조력하는 자들을 강력하게 제재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양심과 정의를 지킬 것인지, 아니면 눈앞의 이익을 선택할 것인지 갈등하는 순간을 자주 맞이한다.
많은 선진국가들이 말로는 자유와 인권을 앞세우지만, 자신들의 이익에 손해가 될 것 같으면 공산당이 저지르는 불의를 보고도 외면하고 침묵을 지킨다.
때로는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익을 위해 공산당의 악행에 동조하기도 한다. 반대로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부당한 일을 바로잡고 진실을 밝히려는 정의로운 사람들도 존재한다.
이러한 선택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안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많은 사람이 불의를 외면하고 침묵하면 부당한 권력과 악행은 더 강해질 수 있다. 반면 한 사람이라도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진실을 말한다면, 그것이 진리를 따르다 고초를 겪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고, 정의와 불의를 구별하며,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까지 헤아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하는가?
붓다나 예수가 비판을 받을 때처럼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명성이나 사회적 권위와 신분, 특정 정치 권력의 일방적인 선전만을 기준만으로 진위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 가르침이 실제로 진실에 부합하는지, 자비와 정의를 실천하게 하는지, 제자들의 수행결과로 입증되는지 등을 살펴보고 선택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각자의 자유다. 그러나 그 선택에는 결과가 따른다. 불의를 행하거나 방조하면 그로 인한 피해와 책임을 피하기 어렵고, 양심과 정의를 지키는 행동은 당장 손해를 가져오더라도 후세의 행복과 공동체의 선을 이루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붓다와 예수, 소크라테스와 노자가 남긴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진리와 진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불의를 목격하고도 불이익이 두려워 침묵하고 방관하고 있지는 않은가?
재물을 얻고 지위를 높이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양심과 자비의 실천을 잃고 있지는 않은가?
진리를 실천하는 길은 언제나 쉽지만은 않다. 때로는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주변의 오해와 비난을 견뎌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며, 진실과 정의에 따라 행동하는 삶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다.
양심과 정의를 지키며 살아갈 것인가, 눈앞의 이익을 위해 정의와 양심을 포기할 것인가. 이것은 과거 성자들만이 마주했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모두 앞에 직면한 선택의 과제다.
우리는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는 지혜를 기르고, 양심과 정의를 실천하는 용기를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결국 진정한 행복인 해탈을 실현하고, 더 나아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밝고 평화로운 곳으로 만드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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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悟)
인간 세상이 혼탁(渾渾)하여 옥석이 뒤섞였구나(珠目相混). 여래가 세상에 내려옴은 필연 은밀하다. 법(法)을 전함에 필연 사문(邪門)의 교란이 있다.
도(道)와 마(魔)가 함께 전해져, 한 세상에 함께 있으니, 진짜와 가짜를 가려냄은 주로 깨달음에 달렸다. 어떻게 분별하는가, 필연 상사(上士)가 있다.
과연 맺은 연분대로 깨달을 수 있는 자들인지라, 잇따라 모여와 입도(入道)하여 법(法)을 얻는구나. 정(正)과 사(邪)를 가려내어 진경(眞經)을 얻고, 그 몸을 가볍게, 그 지혜를 풍부하게, 그 마음을 충실하게 하여 법선(法船)에 오르니 유유하구나. 옳도다! 원만을 이룰 때까지 정진하라.
혼세(混世)에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돈을 위해 살고 권세를 위해 죽는다. 파리 대가리만한 작은 이익을 위해 기뻐하고 걱정하며 고달프게 다투니 일생토록 업(業)을 빚는구나.
이런 사람이 만약 이 법(法)을 들으면 필연 비웃으며 미신이란 두 글자를 뱉어내고, 마음속으로 이해하고 믿기 어려워하니, 이런 사람은 하사(下士)라 제도하기 어렵다. 業이 커서 이미 그 몸을 봉(封)하고, 그 지혜를 닫아버렸으니, 본성이 없구나.
(전법륜2 李洪志)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