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내 MBTI 검사 결과가 ENFP야. 이런 성향은 유튜버를 하면 딱 좋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이의 목소리에서 흥분이 넘친다. 뭔가 대단한 발견을 한 것 같다.
“엉? EN .. 뭐라고? 그게 뭐야?”
“아! 울엄마, MBTI도 몰라?”
“아니, MBTI는 아는데 ENFP가 어떤 성향이냐고?”
“몰라 그건, 하여간 나는 크리에이터가 딱 이래. 이거 말해주려고 전화했어. 끊는다. 안녕”
아이에게서 온 부재중 통화가 4통,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통화버튼을 급하게 눌렀는데, 웬걸, 전화 저편 아이의 기분은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원하는 미래 희망 직업과 MBTI가 딱 맞아떨어진다고.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드는 생각, ‘근데, 그게 이렇게나 즐거운 일인가?’
겨울 문턱에 들어서는 어느 저녁이었을 거다. TV에서 수능, 대입, 정시 등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나는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입시를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이의 미래가 갑자기 걱정되었다. 초등5학년, 아직까지 아이는 뭔가 하고 싶다, 되고 싶다는 말을 명확하게 한 적이 없었다.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아이 옆에 차가워진 몸을 좀 녹여야겠다는 핑계를 대며 쓰윽 누웠다.
“넌, 커서 뭐 되고 싶니?”
“그러게, 뭘 하면 좋을까?”
“엄마한테 되묻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거 없어?”
“음, 뭐...... 음...... 없어.”
“잘 생각해봐. 학교에서 뭔가 재밌게 했던 것 있지 않을까?”
“뭐 그냥 다 그저 그래.”
요 녀석, 뭔가 숨기고 있다.
“말해봐. 뭐라 안 할 테니까. 응? 엄마 궁금해 죽겠다.”
“음. 근데, 내가 하고 싶은 것 말하면 엄마가 싫어할 거 같아.”
“엥? 네가 하고 싶은 거를 엄마가 왜 싫어해?”
“아냐, 엄마는 분명 싫어할 거야. 말 안할래.”
궁금해 죽겠는데 말을 안 한다. 요리 꼬시고 저리 꼬셔서 겨우 답을 들었다.
“나, 유튜버 하고 싶어. 근데, 엄마가 싫어할 것 같아서 얘기 안 하려고 했어.”
“엄마가 왜 싫어할 거라고 생각해?”
“엄마는 맨날 공부하라고만 하잖아.”
어라? 내가 공부하라고 그랬던가? 나와 남편은 ‘그래도 초등학교 때 아니면 언제 노느냐, 공부는 필요하면 스스로 찾아서 하게 되어 있다. 아빠 엄마는 네가 행복한 게 더 중요하다. 커서 밥벌이만 잘하면 된다’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게 웬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정말 나는 ‘공부해’라고 다그친 적이 없다. 숙제도 ‘다했니?’ 정도만 묻지, 직장 후배처럼 아이의 숙제를 펴놓고 일일이 확인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 아이의 반응은 왜 이런 것인가?
“엄마는 ‘공부해’라는 말만 안 했지, 눈빛과 행동으로 늘 공부하라고 하고 있어.”
아. 이거였구나. “공부해”라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아이의 방에 들어갈 때 마음속으로 항상 ‘야, 너 지금 뭐하니, 공부는 안 하고! 책상 봐라. 빨리빨리 치우고 얼른 공부해!’라고 외치고 있었던 거다. 아이는 이런 엄마의 마음을 본능적인 감각으로 느끼고 있었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뜨끔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분위기와 행동으로 말 한마디보다 더한 압박을 아이에게 가하고 있으면서도 공부하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는 점을 내세우며 아이를 괴롭히지 않는다고 우쭐해하고 있었다.
“엄마가 무서웠겠다?”
“응.”
대답하는 아이의 눈이 살짝 촉촉해졌다. 나는 아이를 힘껏 안아주었고 아이는 내 품에서 속상했던 마음을 녹이고 있었다. 이불 속은 나와 아이가 나눈 온기로 아까보다 훨씬 따뜻해졌다.
첫댓글 아! 따뜻하네요. 꼭 안아주는 엄마 품만 있으면 아이들은 다 잘 크는 것 같아요.
그러게요. 정말 따뜻한 글이에요!
미래에 우리 아이들은 크든 작든 각자의 분야에서 크리에이터가 될 테니까요, 초5딸의 꿈은 충분히 이루고도 남으리라 생각해요. 부재중전화 4통이라니, 얼마나 엄마한테 말하고 싶었기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 글자를 보는 건데도 아이와의 대화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