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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21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한가위
제1독서 : 요엘 2,22-24.26ㄱㄴㄷ
제2독서 : 묵시 14,13-16
복 음 : 루카 12,15-21
그때에 예수님께서
15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얼마 전에 글을 쓰다가 갑자기 꽉 막히는 기분을 체험했습니다.
이런 적이 이제껏 없었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느낌이었습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옛날에 썼던 글들을 펼쳐보았습니다.
거의 20년 전에 썼던 글인데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이것도 글이라고 인터넷에 자신 있게 올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글을 봐주신 신자분들에게 너무나 큰 감사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른 살이 막 넘었을 때의 ‘젊은 나’와 쉰 살이 넘은 ‘중년의 나’는 같은 ‘나’일까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전혀 다른 ‘나’입니다.
왜냐하면 외모, 능력, 성격…. 모두가 다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변하는 ‘나’입니다.
언젠가 책에서 보니, 우리의 유전자도 쏵 바뀐다고 하더군요.
과거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종종 만납니다.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이라면서 후회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과거의 나만 바라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보며 후회하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나’도 나이지만, 현재의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발전하는 ‘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발전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때로는 후퇴하는 것이 아닐까 싶지만,
자신의 노력을 통해 충분히 변화되면서 더 나은 ‘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변화시키는 사람은 감사의 이유를 많이 찾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변화되었음에 감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이 한가위의 핵심 키워드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가족들이 모여서 먹고 즐기는 날일까요? 아닙니다.
그보다 감사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코로나로 인해서 예전과 같이 명절 때의 만남이 작년에 이어 올해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한가위는 분명히 아래와 같은 감사의 마음을 갖도록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신 조상님들께 감사를 드리는 것,
우리의 생명을 유지해 주기 위해 해마다 온갖 곡식과 과일을 제공해 주는 자연에 감사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 하나 감사를 드리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즉, 내 삶의 목표를 똑바로 두고 있으며, 그 올바른 목표를 향해서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감사할 일이 많다면 그만큼 자신의 변화를 이루며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일이 없다면 불평불만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으면서
자신의 변화도 이룰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더도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아라’라는 한가위입니다.
이 한가위를 잘 지내기 위해 특히 감사를 많이 외칠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추석 순례길
류해욱 요셉 신부
코로나로 정신이 없는 중에 추석 연휴를 맞았습니다.
정말 코로나가 빨리 끝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올 추석은 마침 김대건 신부와 정하상과 한국 순교자 대축일과 겹쳐 그 의미가 남다릅니다.
벌써 10년 전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모처럼 짐 보이어즈라는 지인 덕분에 추석을 아주 의미 있게 보냈습니다.
더구나 순교자 성월, 9월이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전혀 뜻밖의 계기로 중요한 순례지 몇 곳을 순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로 잠시 돌아가 봅니다.
그해 몇 주 전에 미국에 사는 어느 지인에게서
자기 친구 미국인 친구가 회사 출장으로 한국에 가는데,
비즈니스가 끝나고 이틀 정도의 시간을 한국의 성지순례를 하고 싶어 한다고 했습니다.
저에게 좀 안내를 해줄 수 있느냐는 부탁을 받고,
처음에 부탁받은 그 시기가 추석 연휴라는 생각도 미처 못 하고
별생각 없이 선뜻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했습니다.
그 미국인의 이름은 짐 보이어즈라고 하며
그는 자기 본당에서 기도 모임도 이끌어 주고 있고, 아주 신심이 깊은 사람이라,
한국에서 서울의 명동성당과 다른 성지를 순례하고 싶어 한다고 했습니다.
짐 보이어즈와 몇 번 이메일을 주고받았고,
제가 서울역에 가서 구미에서 오는 그를 픽업하기로 했지요.
저녁 7시 30분에 도착한다고 하더군요.
그가 도착하면 제게 전화를 주기로 하였기 때문에,
서로를 알아보는 어떤 표지도 주고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30분을 너무 일찍 도착하여 기다리다가 전화 한 통을 받기도 하여,
전혀 문제가 없어야 하는 제 전화기가 7시 25분에 확인하니,
꺼진 상태였고, 다시 켜지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분명히 아침에 배터리를 바꾸었다고 생각하여 배터리 문제는 아닐 거라고 확신하며,
다시 프로그램이 엉켜 고장이 난 줄 알았습니다. 하여튼 문제가 발생한 것이지요.
그날 기차가 도착한다는 10번 홈에서 올라오는 외국인마다 붙잡고
‘짐 보이어즈’냐고 묻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거의 승객들이 다 나온 후에야, 드디어 그를 만났지요. 반가웠습니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갔는데,
그는 놀랄 정도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하는 친구였습니다.
저는 워낙 식사를 빨리하는 편인데, 저녁 식사시간만 두 시간이 훨씬 지났으니,
못하는 영어로 제가 겪어야 했던 수난을 짐작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에 수난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9시에 명동성당을 시작으로 새남터, 절두산,
한때 신학교였던 성심여고 성당 등을 순례하고 나니, 저녁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가 감탄한 것은 순례지 어느 곳에서나 아주 진지하면서도 길게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었고,
순례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명동성당에서는 그곳에 있는 성화 하나하나에 그 의미를 묻고,
제 형편없는 대답을 필기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제가 그러리라고 미리 예상하고 나름대로 순례할 성지에 대해 대략 준비를 했지만,
질문에 다 대답을 해주기에는 너무 역부족이었습니다.
저녁 6시가 조금 넘어 고향 제천을 향해, 운전을 하고 떠났습니다.
운전 중에는 끝없이 계속되는 질문에 결국 두어 번 길을 놓치는 소동을 겪으면서,
9시가 다 된 시간에 제천 고향 집에 도착했지요.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는 영어를 제법 잘하는 조카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대화를 하였고,
저는 잠시 신경과 입을 쉴 수가 있었습니다.
10시 반 쯤 형이 예약해 준 호텔에 데려다주고 오니,
저는 거의 탈진된 것처럼 느껴졌고 그냥 쓰러져 잤습니다.
그날 아침에 호텔에서 제천 형님댁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미사를 드리고 아침 식사를 하고 성묘를 한 다음에, 배론 성지를 들렸습니다.
불과 열흘 전에 왔던 성지라서 더 반가웠습니다.
그와 함께 순례를 하면서 저는 배론 성지의 중요성과 의미를 하나하나 설명해주었습니다.
그제야 제가 왜 배론 성지에 대해 그런대로 자세히 공부해 두었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짐 보이어즈는 무엇보다 한국에 처음 세워진 신학교,
그곳 교수 신부님, 학생들에 대해 관심이 컸고, 놀라워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분의 시성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더니,
꼭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피의 순교’가 아닌 ‘땀의 순교’에 대해 깊이 공감해 주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정말 ‘땀의 순교자’이지요.
용소막 성당을 들리고, 마지막 순례지로 서울에서 가까운 구산성지에 갔었습니다.
해질녘의 구산성지는 고즈넉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성지 자체는 그리 크지 않지만, 한국적 미를 살리면서 잘 다듬어진, 제 마음에 드는 성지입니다.
특히 묵주기도를 하는 길과 묵주알도 마음에 듭니다.
저는 다만 이틀간의 뜻밖의 순례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나누고자 합니다.
정말 이틀간 너무 알차게 한국의 성지를 순례했다고 감사의 인사를 하는 짐에게
제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저는 손님은 늘 하느님의 선물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당신은 정말 순교 성월에 하느님이 보내 주신 놀라운 선물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이틀간의 짧은 시간에 이처럼 순례를 하고,
저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진 거랍니다.”
저는 짐 보이어즈의 놀랄 정도의 신심과 열정을 보며,
제 신앙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미국에서 돌아온 후, 꽤 오래되었지만,
그동안 영어 한 것보다 두 배 이상은 영어를 많이 한 시간에 대해서도,
우선은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그날 아침에 미사 중에 강론 대신 가족들에게 읽어주고
짐 보이어즈에게는 못하는 영어로 통역까지 한, 시 하나 소개하면서, 추석 인사 대신합니다.
길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길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7, 4712,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가장
풍요로운
생명의 때이다.
우리의 가을은
봄과 여름 없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생명의 질서이다.
처음으로 수확하는
햇곡식과 햇과일의
정성어린 계절이다.
마음의 고향은
언제나
은총의 하느님이시다.
은총은
따뜻한
인간미를 동반한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가르쳐주는
한가위의 명절이다.
힘든
현실 안에서
맞이하는
한가위의 마음이다.
대자연의
신비를 바라본다.
자연의 선물은
거짓을 나누지 않는다.
진실된 나눔은
언제나
욕심을 배제한다.
탐욕을 경계한다.
생명에 감사하는
감사의 시간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한가위의
넉넉한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이다.
하느님의 마음은
사람의 마음을 향한다.
사람의 마음은
인정이 넘치는
나눔의 마음이다.
나눔의 마음은
잘 익은
차례의 마음으로
하느님을 향한다.
하느님의
질서 안에
사람의 마음도 있다.
마음의 질서를
회복하는
넉넉한 한가위가 되길
가장 좋으신
하느님께 기도드린다.
마음이 생명이다.
마음을 나누기에
가장 좋은 한가위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은 뉴욕에서 3번째 맞이하는 한가위입니다.
본당에 있을 때는 추석합동위령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한지에 미사지향을 적어서 제대 앞에 놓았습니다.
조상들에게 드릴 음식도 차려놓았습니다.
향을 드리며 조상들에게 예를 올렸습니다.
강론은 본당에서 존경받는 어르신이 덕담을 해 주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한 한가위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뉴욕의 둥근 달도, 한국의 둥근 달도 모두 같은 달이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온 세상에 가득하기에
이곳 뉴욕에서도 기쁨이 가득한 한가위를 보내려 합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고 안전하게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뉴스가 많았습니다.
역사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제국의 무덤’이라고 불렸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한 제국은 모두 성공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 영국, 소련, 미국은 모두 막강한 힘을 가진 제국이었습니다.
그 나라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했지만 결국은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이 험준하고, 국민들의 저항이 컸기 때문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서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은 19억 명이라고 합니다.
여성들에 대한 인권탄압과 성전이라는 이름의 테러는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슬람은 평화를 사랑하고, 경건하게 기도하며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1400년 전부터 우리 민족과 인연을 맺은
이슬람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아라비아나이트의 한국 편’입니다.
이슬람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페르시아는 침략을 당하였습니다.
당시 페르시아의 왕자는 중국의 당나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러나 이슬람제국과 당나라가 외교를 맺으면서
페르시아 왕자는 당나라에서 쫓겨났습니다.
결국 도착한 곳은 신라였습니다.
이 왕자는 신라의 공주와 결혼하였고,
페르시아의 군사적인 전략과 기술을 알려주었습니다.
신라는 이런 도움으로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페르시아 왕자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다시금 페르시아로 갔지만 더욱 막강해진 이슬람제국을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낯선 땅에 정착하여 작은 나라를 세웠습니다.
페르시아의 왕자는 신라의 공주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에게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책이 최근에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 책의 상당부분은 신라에 관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고려사절요에 ‘쌍화점’이라는 가요가 나옵니다.
여기서 쌍화점은 이슬람식 만두가게라고 합니다.
고려시대에 이슬람식 만두가게가 있을 정도로
이슬람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 이슬람이 조선시대에도 많았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이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도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이슬람의 문화를
우리의 것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종대왕은 우리의 역법과 중국의 역법이 달라서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때 어려움이 많은 것을 알고,
신하들에게 조선의 상황에 맞는 역법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집현전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역법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칠정산 외편입니다.
당시 집현전의 학자인 정인지가 중국으로 가서 이슬람역법을 연구하였습니다.
중국의 역법 또한 이슬람의 역법을
중국의 상황에 맞게 적용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문화와 문화가 만나서 조화를 이루면 새로운 문화의 꽃이 피게 됩니다.
그것이 세종대왕이 이룩한 문화의 꽃입니다.
한국의 지하철에는 대부분 한국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뉴욕의 지하철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습니다.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 지하철을 타고 출근합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미국이라는 곳, 뉴욕에서 첨단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한가위의 둥근 달이 모든 곳을 비추듯이,
우리가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곳에서 사랑이 꽃 피울 것입니다.
사랑이 가득한 한가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들마다 각각의 수확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풍성한 결실을 선사하십니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6)
주님께서 "정의에 따라" 때에 맞춰 내려 주시는 가을비와 봄비로
세상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 넘쳐흐릅니다. 그저 듣기만 해도 행복한 광경이 그려지네요.
이 세상에서 맺어지는 모든 결실은 인간의 손과 발품과 수고를 빌리기는 하나
결국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굶주리는 이 없이 모든 이가 영육으로 충만하고 흡족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당신 앞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이르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드릴 건 감사와 찬양입니다.
복음은 비유 속 부자의 수확 이야기입니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루카 12,17)
예수님의 비유 속 어떤 부자는 그해에 원래 소유했던 곳간이
모자랄 정도의 엄청난 소출을 거둡니다.
그런데 그토록 많은 수확에 놀란 그에게서
만물의 지배자이신 분을 향한 감사나 찬양은 드리지 않습니다.
그저 그는 이 많은 소출을 어떻게 저장하고 어떻게 누릴지에만 관심이 있지요.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
생명의 주인이신 분께서 당장 오늘 밤에 목숨을 거두어가실 줄도 모르는 그는,
마냥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에 흐뭇해하고 있습니다.
재화를 온전히 자신의 힘이나 노력, 행운의 결과로 여기는 이들은
자신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도, 생명과 죽음의 인간 실존에 대해서도 거의 관심이 없지요.
잠시 지날 이 지상에서 물질적으로는 두 손 가득 뭔가를 움켜쥐고 있지만,
어쩌면 그들의 하늘 나라 통장 잔고는 거의 0원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제2독서의 추수는 우리에 대한 주님의 수확입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묵시 14,15)
여기서 땅은 이 세상을, 한창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된 곡식은 우리 인류를 가리킵니다.
이 수확은 종말인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심판과 구원의 표상입니다.
농부가 잘 여물고 튼실하게 자란 열매들을 수확하며 기뻐하듯
주님도 이 지상에서 달릴 길을 다 달린 우리의 무르익은 영혼을 보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최대한 기회를 주시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건만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살아온 이들의 쭉정이 같은 상태에 가슴 아파하실 테지요.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처럼, 그날에는 다 자라 구별이 확실하게 된 상태에서
가라지는 따로 거두어 불에 태우고, 밀은 주님의 곳간으로 모아들이게 될 겁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베푸신 풍성한 수확에 기뻐하고 감사하듯
우리를 수확하실 그분께도 그런 기쁨을 안겨드릴 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비록 세상 재물은 그리 풍족히 누리지 못해도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이들,
그분과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고 사는 이들이라면 그분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세상을 떠난 조상들과, 서로서로를 성장시켜주는
부모, 형제자매, 친지, 지인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이 한가위는,
주님께서 맺어 주신 모든 영적 물적 결실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축복의 날입니다.
유한하고 나약한 인간인 우리 자신의 시작과 끝을 관상하며,
부족함 없이 돌봐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도 그분 때문에 흡족하고 그분도 우리 때문에 흡족해하시니,
함께 행복하고 충만한 명절 되시길 기도합니다.
한가위는 이렇게 묻는다: “돈 버는 이유가 뭔데?”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한가위 명절입니다.
모든 것이 풍성한 때에 조상에게 감사하고 이웃과 나눌 줄 아는 마음을 키워주기 위해
모든 나라에 존재하는 추수감사절과 같은 명절입니다.
지금까지 돈을 벌기 위해 살았다면 이 날 만큼은
나눔을 위해 살게 만든 조상들의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추석에도 감사하고 나눌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그냥 세상에 속한 사람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한 부자가 많은 수확을 하여 그것을 모아둘 커다란 곳간을 짓지만,
그날 그의 생명이 끝난다는 비유입니다.
탐욕과 생명, 혹은 죽음. 이것이 오늘 주제입니다.
‘탐욕’도 하나의 ‘법’(法)입니다. 자신이 그 규칙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탐욕을 법으로 따르는 사람이 사는 곳은 ‘지옥’이란 나라입니다.
모든 나라는 법이 있고, 그래서 내가 어떤 법을 따르는지 알면
내가 어느 나라에 속해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고지전’(2011)은 백마고지 전투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내내 자신들끼리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싸우는 이유가 뭔데?”
줄거리는 대충 이렇습니다.
배경은 여러 차례 휴전협정이 결렬되는 시기였습니다.
장교였던 신하균은 높은 분 앞에서 그만 군인에 합당하지 않은 발언을 하여
그 벌로 전방으로 발령이 납니다.
전방의 악어 중대에 북한군과 내통하는 군인이 있으니 조사해 보라는 임무였습니다.
중대장이 죽은 사건이었는데 심지어 그 총이 아군의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신하균은 신임 중대장과 함께 악어 중대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같은 고지를 뺏고 뺏기는 전쟁에 지친 군사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이 전쟁을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신하균은 전쟁의 실태를 눈으로 목격합니다.
금지된 약물을 투여하며 약의 기운으로 독하게 죽여대는 임시 중대장.
여자라 살려준 사람이 그 은혜와는 상관없이 한국군을 마구 죽여 대는 북한군 저격수.
자기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즉결처분하려는 새로운 중대장.
그리고 휴전이 조인되고 그 휴전이 발휘되는 하루 동안
고지를 다시 점령해야 한다며 마지막 전투를 시키는 고위 간부 등...
그런데 이들과는 다른 전장에서 만난 친구, 고수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좀 특이했습니다. 알고 보니 북한군과 내통하는 군인이 바로 자기 친구였습니다.
내통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고수는 전쟁판에서 유일하게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생명을 존중하는 이였습니다.
그는 동료들과 후퇴할 때 막사에 땅을 파고 그들을 위한 초콜릿 등 음식을 넣어놓습니다.
그리고 다시 탈환해 땅을 파보면 그들이 남한에 있는 자기 가족들에게
전해달라는 편지들이 있고 감사의 표시로 술도 들어있습니다.
전쟁터에서 나눔이 실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사실은 자신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오만한 중대장을 그가 죽인 것입니다.
고수는 군인으로서 나라의 배신자입니다.
신하균은 자신의 친구가 군법을 어기고 북한군과 먹을 것을 나누어 먹고 편지를 전해주고
심지어 동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아군 장교를 총으로 쏘는 것을 목격하고는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러다 자기가 살려준 여자 저격수에게 친구가 살해되자
본인도 도대체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는 전쟁의 의미에 대해 다시 묻게 됩니다.
이 영화를 보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과 독일군 사이의 치열한 전투 속에서
성탄절을 맞아 그날 하룻밤만 휴전하며 성탄절을 즐기려 했다가
모두가 군법에 따라 처분된 실화가 생각나게 합니다.
독일군 한 병사가 불렀던 크리스마스 캐럴은 자기 동료들을 죽였던 적군과 비무장 상태로
서로 포옹하고 보급품을 나누며 축제를 즐기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군법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고지전’에서 고수는 저격수의 총에 맞아 죽어가며 신하균과 이렇게 대화를 나눕니다.
“오지 마. 오면 너도 죽어. 가끔 그런 생각해? 난 아주 오래전에 죽었다는 생각.
우리 악어 중대 모두. 아주 오래전에 죽었다고.
그렇게 많이 죽여댔으니까 당연히 지옥에 가야 되는데
여기보다 더한 지옥이 없어서 그냥 여기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은표야, 우리 엄니 얼굴이 기억이 안 나.”
여기서 북한군 간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죽어가는 그 앞에서 신하균은 묻습니다.
“도대체 싸우는 이유가 뭔데?”
“확실히 알고 있었어. 근데 너무 오래돼서 잊어버렸어.”
신하균은 그 잔혹한 북한군 간부에게,
어쩌면 전쟁이란 명목으로 살인 기계들을 배출하는
북한과 남한 정부에 말하는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주저립니다.
“개새끼!”
이 전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고 지속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잠시 한가위를 맞아 이 전쟁에서 벗어나
어머니 얼굴도 떠올리고 서로 경쟁하던 사람들과 가진 것을 나누고 사랑의 캐롤을 부르며 지냅니다.
이 짧은 행복이 끝나면 다시 전쟁터로 나가 피조물의 법인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싸우겠지요.
탐욕이라는 법은 피조물 세계에서는 피할 수 없는 법입니다.
이 법은 생명을 경시하게 만들고 그래서 자기 생명도 지키지 못하게 만듭니다.
모두가 이 법의 피해자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나눔의 법을 알려주러 오신 분이 계십니다.
사랑의 법은 탐욕의 법과 반대입니다.
탐욕은 모으는 것이고 사랑은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나눔의 법을 실천하면
이 세상에서는 군법에 넘겨지고 심지어는 십자가에 매달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용기를 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어떤 법을 따르느냐가 어떤 나라에 속하는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싸울까요?
그건 그 나라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속한다면 이 지옥과 같은 세상에서도 날마다 한가위처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피조물은 사라지지만 천국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탐욕은 피조물의 법이지만 사랑은 창조자의 법입니다.
생명을 창조한 분이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죽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매일 한가위처럼 나누는 사랑의 법을 실천하여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에 속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짧은 행복을 알게 하려고 나눔의 한가위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