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미군의 양민학살 진상규명 전민족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왜 하필이면 지금 이러한 문제를 들먹이는가 하는 문제제기도 있을 수 있다. 미군 주둔 이유에 대한 논란이 한창 진행되는 이 시점에서.
이제는 알아야 할 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 알아야 한다. 지나간 가슴아픈 역사를 제대로 봐야 다시는 이러한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고 당연시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광주항쟁 또한 그러했다. 수천명이 죽어간 그 때 사건에 대해 정부는 물론이고 언론, 지식인, 대다수 사람들의 침묵으로 희생자들의 거룩한 항쟁은 폭도들의 난동으로 둔갑되어 왜곡된 역사의 한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진상규명을 위한 희생과 노력으로 완전한 진상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미국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과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항쟁이라는 새로운 성격의 역사적 사실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해방 이 후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보는 것은 우리 후세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언제까지 있었던 사실을 은폐하고 거짓을 가르칠 수는 없다. 그렇게 넘어간다면 언제 또 다시 되풀이될 지 모르며 정치적 목적의 정당성을 앞세워 정당화되고 은폐될 지 모른다.
어떠한 이유로도 인명을 앗아가는 것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이 비록 강자와 약자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일들을 예방하고 준비할 수 있는 것은 과거사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속에서 출발한다.
한국전쟁당시 미군의 양민학살 문제는 어느 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벌어진 일들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굳이 민감하게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우리는 지나간 과거 역사에 대해 무관심해져서는 안 된다. 있는 사실만이라도 올바로 이해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과거 없는 현재 없고 현재 없는 미래 없다. 과거를 제대로 되돌아보지 않는 속에서 올바른 현재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고 미래 또한 희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우리는 양민학살 문제를 보아야 한다. 진실은 은폐될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싣게 될 글은 < 대구민주청년회 >에서 발간한 자료집 내용을 분류한 내용이다. 있는 자료와 사실을 근거로 발간된 것이기 때문에 본 방송국은 별도의 편집이 없이 그대로 싣고자 한다. 자료를 제공해준 대구민주청년회에 감사드리며. 대구민주청년회에서 이야기하는 발간 취지를 들어보는 것도 왜 미군 양민학살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되기에 첨부하는 바이다.
노근리에서 저지른 미군의 양민학살이 이제서야 가해자 미국으로부터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다수의 국민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지만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주목시킨 이 역사적 진실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은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졌고, 이로 인해 수 백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노근리 학살은 한국전쟁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특히, 노근리에서 다섯 살 난 아들과 두 살짜리 딸을 잃은 정은용씨(양민학살 대책위원장) 는 미군의 양민학살이유를 ' 피난민들을 살려 줄 경우 언제 인민군들과 합세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 ' 이라고 나름대로 정리하였다. 이는 한국전쟁의 성격도 짐작하게 해준다. 하지만 여기서는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 등에 대해 기술할 생각은 없다. 여기서는 순전히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벌인 양민학살만을 싣고자 한다. 수집한 자료를 재구성하지 않고 본문 그대로 실었다. 새로운 사실을 밝히거나 현장을 취재하여 실을 여건은 못되며, 남의 글을 짜집기하여 자기 글인 양 기술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본문을 그대로 싣고 출처를 밝힘으로써 근거를 명확히 하고자 함이며, 가능하면 그 출처자료를 찾아 연구하였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다.
이 자료를 읽기 전에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 나는 미국이 나쁘고 잔인하다는 것을 알아 ' 라는 생각이나, ' 양민학살에 대해서 알고 있어 ' 라는 생각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비록 계속되는 미군의 반인륜적인 만행과 너무도 가슴아픈 민족의 고통을 대하다보면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미군의 학살을 상세히 알아야 할뿐만 아니라 전 민족에게 이 땅에서 벌어졌던 진실을 말해야 한다. 하나도 남김없이 진실을 밝혀야 하며, 하나도 남김없이 우리 가슴에 새겨야 하며, 하나도 남김없이 전 민족에게 고하여야 한다. 와신상담의 자세로... 한국전쟁당시 미군의 양민학살 전모를 밝힌다.
< 이해참조자료 >
1. 미군 양민학살 진상규명 전민족조사특별위원회 결성식 공동선언문
2. 주한미군 범죄 고발장 - 노근리와 베트남
2. 세균전과 화학전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일부를 점령한 일제는 신의 관용으로도 용서될 수 없는 많은 죄악을 저질렀다. 그 중에서도 인간을 실험도구로 사용한 731부대의 악명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2차 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은 전범국가로서 책임을 져야 했고, 살인마들은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실제로 승전국 미국에 의해 일부 전범자들은 심판을 받았다. 하지만, 사령관 이시이 시로를 포함한 731부대 관계자는 단 1명도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다. 소련과 아시아 각국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미국은 그들에게 면책특권을 주었다.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실험자료와 세균표본 및 기술 등을 모두 미군에게 넘겨주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이를 곧장 한국전쟁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많은 민중들과 반전인사들, 양심적인 지식인에 의해 미국의 세균전을 규탄하는 시위가 있었다. 아래 글들은 미국의 세균전을 기록한 자료들이다.
※ 미국의 세균전 계획과 731부대 사령관 이시이 시로
【한반도에서의 범죄적인 세균전계획은 통합 참모본부에 의해 작성되어, 1951년 10월 리치웨이에게 한국에서 세균전을 시작할 것, 다만 처음에는 시험적 단계로 하고 이어서 점차 확대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지시는 즉시 미국 극동 공군사령관 웨이런드에게 전달됐고 그는 이 지시 하에 한반도 주둔 미제5공군 사령관과 오끼나와의 제19폭격기 연대장에게 세균전 수행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 오끼나와 기지의 B29폭격기는 1951년 11월 이후 세균전을 개시하였다. 미군은 막대한 병력을 세균전에 투입하였다. .......세균탄에 무수한 파리, 벼룩, 거미, 남경충, 모기, 이, 귀뚜라미 등의 해충이 가득 채워졌고 그것들에는 콜레라, 페스트, 장티푸스 등 가장 지독한 전염병균이 부착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평안남도 안주군 발남리에서 페스트환자가 발생하여 36명이 사망한 것을 비롯해 각지에서 귀한 인명을 빼앗겼다. 미국은 북한측 후방에 대해 화학전도 강행하였다. 1951년 5월 6일 B29 3기는 남포시 근교의 삼화리, 후포리, 축돈리, 용정리, 용수리 일대에 가스탄을 투하하여 379명을 살상하였다. 1951년 8월 1일에는 황해도의 연성리와 원철리에, 1952년 1월 9일에는 원산북방의 학성리에도 가스탄을 투하하였다. 】(김희일 침략의 역사, 항전의 역사 238쪽)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이 731세균부대의 세균표본과 기술, 관련문서와 주요 '기술자'들을 확보하였다. 소련은 이들을 모두 전범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다 쓸모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성광 민중의 역사 147쪽)
【1952년 5월 미국의 과학자 연맹이 "미국이 세균병기를 개발해 왔고 그 계획을 위한 자금을 계속 늘려 온 것이 사실이다"라고 폭로함으로써 미국정부는 궁지에 몰렸다. 과학자연맹은 "미국정부는 세균전계획의 규모와 목적에 관해 명백한 설명을 하고, 세균병기의 사용을 금지한 제네바협정 - 이 협정은 1925년 6월 17일 제네바에서 체결되었지만 미국은 여기에 가입하지 않았다. - 에 가입하라고 촉구했지만, 미국정부는 침묵만을 지킬 뿐이었다. ....미국이 고용한 일본인 세균전문가 가운데 만주에서 한국인, 중국인을 상대로 한 생체실험으로 악명을 날린 731부대 사령관 이시이 시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소련이 만주를 점령하자 일본으로 도주했는데, 소련 측이 이시이를 재판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신병인도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한 바 있었다.】 (데이비드 콩드, 분단과 미국 ; 유성하, 한미관계의 발자취 대동 136쪽에서 재인용)
※ 국제과학조사단에 의한 세균전 조사
【 그 벌레만도 못한 반인륜적인 잔혹광 이시이가 미군의 보호아래 1951년 겨울, 극비리에 직접 한반도의 '현장'을 다녀갔다. 이 인간쓰레기가 돌아간 후 북한과 중국의 화북지방에서는 해괴한 일이 발견되었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엄동설한에 파리ㆍ모기가 산채로 발견된 것이다. 이후 주민들은 콜레라에 감염되고 페스트에 걸려 수 십 명씩 죽기도 했다. 1952년 2월 22일에 북한 외무상과 중국의 외교부장은 미국이 감행한 세균전에 반대하는 정식 항의를 제출하였다. 이후 스웨덴, 프랑스, 영국, 이태리, 브라질, 소련 등의 중립적인 과학자들로 구성된 국제조사단이 구성되어 1952년 6월 23일 ∼ 8월 6일에 걸쳐 중국의 화북지방과 북한지역에 대한 전문적인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국제과학조사단의 보고에 따르면 미군의 비행기가 폭격도 기총 소사도 없이 조용히 지나간 뒤에 그 지역에서는 파리ㆍ모기ㆍ벼룩ㆍ거미ㆍ딱정벌레 등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이 벌레들은 콜레라균 또는 페스트균에 감염이 되어 있었는데, 재래의 한국 곤충과는 다른 종류의 것들이었다. 파리를 보기로 들어보면, 한 겨울 눈 위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이 파리들은 한국 파리보다 비교적 큰 편이었고 긴 날개를 가진 것이었다. 미국의 비행기는 벼룩을 뿌리고 가기도 했고 죽은 들쥐를 무더기로 내던지며 지나가기도 했다. 이 벼룩과 들쥐들도 페스트에 감염되어 있었다. 산꼭대기에서 감염된 조개와 썩은 생선이 발견되기도 했다.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세균무기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북한지역에 침투했다가 체포된 간첩의 진술로도 확인되었다. 그는 북한 지역의 티브스ㆍ페스트ㆍ콜레라ㆍ뇌염ㆍ적리 및 천연두 등의 상태를 알아오라는 지령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세균무기의 효과를 검증해 오는 게 그 간첩의 임무였던 것이다. 또 1952년 1월에 격추된 B20 폭격기의 조종사 존 퀸 중의와 항공사 K.L 이노크 중위가 자신들이 세균전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상세히 진술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 (이성광 「민중의 역사」148쪽)
【 그로부터 얼마 후 미국의 과학자연맹에서 "미국이 세균병기를 개발해왔고 그 계획을 위한 자금을 계속 증액해 온 것이 사실이다"라고 지적함으로써 세균전을 둘러싼 국제적 공방전은 더욱 세차게 달아올랐다. 드디어 1952년 6월 오슬로에서 개최된 세계평화회의 집행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7인의 중립적인 과학자로 구성된 국제과학조사단이 발족하게 되었다.
조사단은 7월 9일부터 2주간에 걸쳐 중국의 동북지방을 조사하고 그 다음에는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8월 6일까지 조사를 하던 중 조사단은 미군의 공습을 받기도 했다. 조사단은 여러 가지 물고기, 풍뎅이, 거미, 벼룩, 모기, 쥐가 북한과 만주에 걸친 오염지대에 흩어져 있는 것을 연구했다. 이들은 이러한 보균자가 인간과 동물 모두에 페스트, 장티푸스, 콜레라, 이질, 뇌염, 천연두를 감염시켰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상세한 연구를 해 본 결과 이러한 곤충의 대부분은 엉뚱한 장소와 엉뚱한 시기에 발견되었다. 즉, 그 지역 토산이 아니던가, 아직 발생기가 아닌 시기에, 그리고 눈 덮인 산과 가옥의 지붕에서 다수 발견된 것이다. 또한 중국 동북부지방과 북한에는 장티푸스뿐만 아니라 폐탄저열병, 출혈성 수막염 등 이름 모를 병들도 많이 전염되었는데, 이런 곳을 조사해 보면 반드시 그러한 병원균을 보균한 '생물류'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국제과학조사단은 다음과 같이 최종 결론을 내렸다.
본 조사단은 결론으로서 미 공군은 일본군이 제 2차 대전 중에 장티푸스를 퍼뜨리기 위해 사용한 것과 정확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동 조사단의 의견으로는 장티푸스에 감염된 쥐가 비행기로부터 낙하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이러한 조사단의 발표에 대해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한결같이 공산주의의 악선전이라고 주장하였다.】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48쪽)
【하지만, 미국은 이러한 비난이외에 과학적인 논증을 통한 반박은 하지 못했다. 】(유성하, 한미관계의 발자취)
【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세균전이 신문의 화제로 되는 일이 좀처럼 없었고, 있었다해도 전쟁에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희박한 전망에 동요하여 가끔 발표되는 특별기사뿐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발발과 함께 미국 육군은 이미 41년에 세균전 계획에 착수했다. 그후 수년간은 사소한 내용 이외에는 신문에 새어나오지 않았다. 메릴랜드주의 캠프 페드릭의 생물학본부 외에도 '야외실험시설이 미시시피주와 유타주에 설립되었다. 또한 대규모적인 제조를 연구하기 위해 설계된 공장이 인디아나주에 건설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군은 비밀유지의 임무를 엄중히 수행했다. '군은 세균전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군은 세균병기에 관한 기사를 금지하고 있다. 세균전에 관한 침묵(샌프란시스코 연대기 47.1.27 사설), 세균병기의 사용과 유독가스ㆍ질식가스의 사용을 금지한 제네바 협정은 49년 트루만 대통령이 상원에서 철회하여 비준되지 않았던 19개 조약 가운데 하나였다. 이 조약은 미국을 포함한 41개국에 의해 조인된 것이었다. ...】(데이비드 콩드, 한국전쟁 또 하나의 시각2 371쪽)
미, 일본에 '731'자료 요청 (출처 : 한겨레신문 1999년 10월 28일 20:51)
【미국의 톰 랜터스 하원의원(민주당)은 일제의 악명 높은 세균전 부대인 '731 부대'요원에 관한 자료를 미국정부에 제출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오부치 게이조 총리 앞으로 보냈다고 일본 언론들이 28일(99년 10월) 보도했다.
또한 나치전범을 추적하는 유대인 인권단체도 재닛 리노 미국 법무장관에게 731부대 관계자들에 대한 전범 면책특권을 취소할 것을 촉구했다.....
일본 정부는 731 부대원에 대한 문제는 미국의 면책 결정으로 이미 해결된 사건으로 재차 불이익을 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자료 제공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
. 잔인한 학살만행
1950년 9월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이천에 상륙한 미군에게 "서울을 탈취하라. 그곳에는 아가씨도, 부인도 있다. 3일 동안 서울은 제군의 것으로 될 것이다. 제군은 서울의 아가씨와 부인을 내키는 대로 손에 넣으며, 제군은 그곳에서 눈에 띄는 어떤 것이라도 소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군사령관 워커라는 작자는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자기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설사 그대들 앞에 있는 것이 어린애나 노인이라 할지라도 그대들의 손이 떨려서는 안 된다. 죽여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들은 자신을 파멸로부터 구하는 것이며 또 유엔병사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이러한 명령에 의하여 겨우 1년 동안에 200만 명 가까이 학살되었다. (합동통신) 1951년 9월 15일자에 따르면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 1951년 여름까지 학살된 남한 민간인만도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최근 미 CBS방송을 통해 당시 참전 미군병사는 어린이와 여성 등을 가리지 않고 "걸어다니는 모든 것을 사살하는 작전이 진행됐다"고 폭로했다. 걸어 다니는 모든 것을 사살하는 작전... 이제 그들의 만행을 담은 자료와 최근 언론 보도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 걸어 다니는 모든 것을 사살하는 작전
【노근리 사건 외에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 사건이 최소한 2건은 더 발생했다고 미 CBS 방송이 참전 미군을 인용, 보도했다. 또 한국전에서 무공십자훈장을 받은 칼 버나드 예비역 대령은 LA 타임스지 기고문을 통해 {미군은 정신적 무장해제 상태에 있었다}며, {노근리 학살사건은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미군들에 의해 저질러졌을 것}이라고 밝혔다.
CBS 방송은 8일(현지시각) 레스터 토드라는 당시 미군 이등병의 증언을 토대로, 지난 51년 북쪽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어린이와 여성 등을 가리지 않고 {걸어다니는 모든 것을 사살하는 작전이 진행됐다}고 폭로했다. 토드는 CBS 회견에서 {여자나 어린이를 포함해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모두 사살했다}고 말하고, 이 같은 내용을 상부에 보고했으나 함구할 것을 지시 받았다고 전했다. CBS 방송이 입수한 53년의 한 군 메모에 따르면 토드의 증언을 비밀 분류해야 하는 이유로 {미국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점을 꼽고 {그가 관계 당국 외의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이에 대해 말하지 않도록 하는 점을 확실하게 하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관련, 윌리엄 코언 미 국방장관은 {우선 노근리 사건 조사에 초점을 맞추고, 만약 다른 (학살) 주장들에 충분한 근거가 있을 경우 사안별로 이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 (조선일보 1999년 10월 10일 19:36)
【머리에 명중될 때의 기분은 정말로 통쾌했다. 나를 쳐다보는 부상자를 목표로 겨냥해서 방아쇠를 당기면 두개골이 날아가고 눈에서는 눈동자가 뽀르르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야말로 명사수가 아닌가? (어느 미군병사가 고향의 신문에 투고한 편지에서, 미촌수수, 한국현대사연구1)
미군들은 증인 남편의 손과 코를 쇠줄로 꿰뚫었다. 그들은 방에 있던 노동표창장을 그의 이마에 못으로 박고 그가 죽을 때까지 고문했다...... 우말재의 며느리는 미군장병들이 그 시아버지를 고문하는 것을 보고 제지하려 하였다. 미군장병들은 이 여성의 머리채를 잡아서 나무에 비끌어 맨 다음 젖을 베고 xx에다 막대기를 박았다. 그리고는 기름을 부은 다음 산채로 불을 질렀다. (「미국의 범죄에 대한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의 보고서」, 김주환 엮음,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 청사, 187쪽)
...특히 황해도 신천군에서의 집단학살행위는 구월산 빨치산에 대한 보복까지 겹쳐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12월 7일 미군은 신천군 원암리에서 900명을 창고 안에 처넣고 한꺼번에 학살하였다. 한 생존자는 당시의 끔찍한 정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학살 뒤) 먼저 창고문을 열자 입구 부분에 어린이들의 시체가 겹겹이 쌓여 있었는데 그것은 분명히 모두 창고에서 도망치려고 발버둥친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얼어죽은 사람, 굶어죽은 사람 외에도 불에 타 죽은 사람 또한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고통에 못 이겨 몸부림치느라고 손톱이 빠져 있거나 닳아져 있었고 몸부림치며 긁어댄 자리마다 피가 홍건하게 고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고통으로 몸부림쳤다는 것을, 그러다가 죽어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촌수수, 한국현대사 연구1) 45일동안 신천군에서는 전체 인구 14만 2,786명의 약 25%에 이르는 3만 5,383명이 무참히 학살당했다. 특히, 신천군 궁흥면 만궁리에서는 주민의 87%, 온천면 운봉리에서는 66%, 신천면 양장리에서는 남자는 모두 학살되는 참극이 빚어졌다.】(유성하, 한미관계의 발자취 129쪽)
【남한에서는 이른바 '후방안전'을 내세우면서 무고한 민중을 닥치는대로 학살하였다. 미국의 〈UP통신〉(1951. 9. 15)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전쟁이 일어난 뒤 1951년 9월까지 미군과 국군이 남한에서 학살한 주민은 100만 명에 이른다. 집단적 민중학살은 남한 곳곳에서 저질러졌는데 거창, 산청, 함양의 대학살사건은 그의 대표적인 예이다. 거창대학살의 경우 제11사단 제9연대 제3대대가 거창군 신원부락에서 젖먹이까지 포함한 600명의 모든 부락민을 '유격대와 내통하였다'는 이유로 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고 모조리 쏘아 죽인 뒤 시체를 한 곳에 쌓아 놓고 휘발유를 뿌리고 불질렀다. 특히 이북을 점령하였을 때의 미군의 만행은 처참했다.
황해도 신천군을 비롯하여 미군이 점령하였던 모든 도시와 모든 부락에서 수십 수만 명의 민중들이 무참히 학살되었다.
※ 사람들의 머리에 조짚과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다.
황해도 신천군의 경우 1950년 10월 18일에 미군중위 해리슨이 직접 지휘하여 신천군당 방공호에 300여 명의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포함한 900여명의 사람들을 가두어 넣은 다음 휘발유를 뿌리고 불질러 태워 죽이는 집단학살을 저질렀으며 19일과 25일에는 군당 방공호 주변 전호에서 무려 650여명을 생매장하거나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1950년 12월 7일에는 신천면 원암리 화약창고에서 사람들의 머리에 조짚과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으며 그것도 모자라 수류탄을 마구 던져 창고 두 개에서 만도 400여 명의 어린이와 102명의 어머니를 포함한 910명의 무고한 민중들이 무참히 학살되었다.
....또한 1952년 3월 미군의 만행을 조사한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은 조사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여성들과 어린이를 포함한 조선의 일반주민들에 대하여 미국군대가 범한 대량 및 개별 학살과 짐승 같은 행동의 증거는 감행된 범죄의 양에서나 또한 그 사용된 방법의 다양성에서 전례 없는 것이다.
실로 미군이 감행한 학살만행은 학살의 규모와 크기, 수법의 잔인함서 제 2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서 히틀러 일당이 저지른 치떨리는 만행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한민우, 한국정치의 발자취 87쪽, 89쪽)
무차별 폭격
1999년 10월 18일 국회 국방위의 국방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국민회의 장영달 의원은 “51년 1월10일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에서는 미군이 양민을 학살하는 데 월남전에서 악명을 떨쳤던 네이팜탄을 사용했다는 의혹이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 낮 12시경 미군 전투기 6대가 날아와 폭탄을 대량 투하하고 기름을 뿌려 마을이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고 한다”면서 “이로 인해 50여명이 숨지고 90여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장영달 의원은 “한국전쟁 연구가 데이비드 콩드는 저서를 통해 ‘미 공군은 네이팜탄을 한반도 전역에 사용했다’고 밝히고 있으며 뉴욕타임스 51년 2월9일자도 당시 네이팜탄에 의한 처참한 피해상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장영달 의원이 지적한 네이팜탄은 당시 엄청난 위력을 가진 신형무기였다. 네이팜탄이 투하되면 스쳐간 어떠한 물체도 파괴하고, 화재를 일으켜 모든 생물도 태워 죽이는 죽음의 무기였다. 데이비드 콩드는 '현재와 같은 원자폭탄의 시대에도 네이팜탄은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공포의 병기'라면서 '한나라의 대부분을 불태운 것은 전 세계 역사상 한국전쟁이 처음'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전쟁동안 미국은 약150만 발의 네이팜탄과 약 9만 7000톤의 폭탄을 사용하여 한반도를 완벽하게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태평양전쟁을 치루는 동안 미군이 사용한 총 폭탄량보다 더 많은 양을 한반도 민중의 머리에 쏟아 부은 것이다.
【폭격기의 아래 부분에 특별히 고안하여 설치한 탱크에 들어있던 반 톤 가량의 네이팜탄은 떨어지는 충격에 의해 폭발하면서 불꽃을 일으키고, 고열 제리 상태의 가솔린으로 된 몇백만 개의 작은 방울을 뿌리는데, 그 하나 하나가 광폭한 지옥의 불을 사르는 것이었다. 건물ㆍ차량ㆍ사람 등 스치기만 해도 모두 불꽃이 되어 타오른다. 현재와 같은 원자폭탄의 시대에서도 네이팜탄은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공포의 병기이다. 50년에 증명된 것처럼 네이팜탄은 초가집이 많이 있는 아시아 지역에서 사용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병기였다.】(데이비드 콩드, 한국전쟁 또 하나의 시각Ⅰ)
【<뉴욕타임지>는 네이팜탄이 스치고 간 마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중공군이 전진을 보류하고 있을 때 네이팜탄 공습이 3,4일 전 그 마을을 강타했다. 마을 어디에도 사망자를 묻기 위해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본 특파원은 생존한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사람인, 그녀 가족 4구의 시체가 까맣게 탄 마당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 늙은 부인이 인상에 남았다. 네이팜탄이 강타했을 때 거주자는 기습을 당해 마을과 들판 도처에 그들이 취했던 그대로의 자세로 죽어 있었다. 자전거를 타려는 남자, 고아원에서 놀고 있던 50명의 소년소녀들, 작은 마을에 거의 200구의 시체가 있음에 틀림없다. (<뉴욕타임즈>, 1951, 2, 9, 데이비드 콩드, 분단과 미국)
영국 <BBC>의 특파원 르네 컷포스는 자신의 목격담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기묘한 자세의 사람이 서 있었다. 약간 굽은 등, 벌어진 다리, 두 팔은 축 쳐져 있었고 눈은 없었다. 그는 불에 타서 다 헤진 낡은 헝겊조각을 몸에 걸쳐 속살이 다 보였다. 단단하고 검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으나 몸의 여기저기엔 누런 고름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의 옆에 있던 한국인 부인이 말하기 시작했다. 통역이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는 서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앉을 수도, 옆으로 누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서 있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의 피부는 피부가 아니라 임시로 발라놓은 껍질로 덮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이비드 콩드 위의 책)
【남한을 포함하여 전체파괴의 9할은 직접적으로 미군의 물량작전ㆍ융단폭격의 결과였다. ......남한에서 만도 6십 1만 채의 일반 주책과 1만 5천 동의 학교, 1만 7천 개의 기업체, 연 9,315km에 이르는 교량, 239만 두의 가축이 소실되었다고 한다....(미촌수수, 「조선 민중의 희생과 일본의 역할」)】(한동혁 지배와 항거 67쪽)
【전쟁도발 후 4개월 사이에 미국은 폭탄, 소이탄, 네이팜탄, 함포사격 등으로 남한의 50개 도시와 1만 2, 460개의 농촌부락을 방화, 파괴하였다. 이러한 파괴로 인한 남한경제의 전쟁피해액은 남한정부'공보처' 발표자료에 의하더라도 무려 4,123억 원에 달했다. 즉 가장 심한 공업부문에서는 112억 원에 상당하는 33만 8,000평의 공장건물과 288억 원 이상의 기계설비가 파괴되었다. 일반공업 시설의 43%, 발전시설의 41%, 탄광시설의 50% 더욱이 남한공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섬유공업에 있어서는 건물의 54%, 방추의 67%, 직기의 47%가 파괴되었다. 서울지역에서는 거의 모든 공업시설이 인천지역에서는 공업시설의 90%가 파괴되었다. 】(김희일 침략의 역사 항전의 역사 247쪽)
【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우리 민족에 대한 무차별 인간도살로 전 한반도를 피에 물들였던 처참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1950년 9월 24일자 「뉴욕 타임즈」에 의하면 광부에서 덤럼탄으로 학살된 3,000명의 남녀 어린이들이 매장되어 있는 무덤이 발견된 것을 비롯하여 이와 같은 학살은 전국도청에서 감행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김인수 민족사의 재발견)
[경남사천시 곤명면 조장리 일대에서의 미군 폭격](한겨레신문 1999년10월14일 15:31)
【 6.25 전쟁당시 경남 사천시 곤명면 조장리 조장마을일대에서 미군기 사격에 의해 사망한 주민은 당초 알려진 68명보다 많은 9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주민자체조사 결과 드러났다. 14일 조장리 양민 미군 피폭사건대책위(공동위원장 김상만, 강두식)에 따르면 최근대책위를 구성해 전국의 유족 40여명을 대상으로 당시 피해자를 1차 신고 받은 결과 사망 74명, 중상 14명 등으로 나타났다. 대책위는 아직 신고되지 않은 사망자가 10여명에 이르고 조장 마을 폭격 당시 인근 옥동마을과 서정마을에서도 같은 미군기로 부터 폭격을 받아 사망한 주민이 1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조장리 일대에서 사망한 사람은 모두 9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장마을에서 사망한 주민은 남자 40명, 여자 34명이었으며 10세 이하 어린이 11명, 60세 이상 노인 6명 등으로 나타났다. 또 사망자 가운데 중상을 입고 집에서 치료를 받다 숨진 주민이 7명이었으며 2명은 치료 중 자살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책위는 추가신고를 받으면서 자체 진상조사를 병행하고 유족들의 서명을 받아 미국 대사관과 정부에 진상조사와 보상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대책위는 이밖에 진상규명 후 마을 앞 위령비 건립도 추진키로 했다. 대책위원장 강씨는“당시 조장마을은 인심이 좋은 것으로 소문이 나 외지인들도 셋방을 얻어 일시 거주하기도해 피해자는 신고된 숫자보다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미군 폭격에 양민 희생" 광주서도 주장] (동아일보 1999년 10월26일 10:33)
【 광주에서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과 기총 소사로 민간인 10여명이 숨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광주시 광산구 연산동 두산마을 나종섭(80)씨 등 한국전쟁 당시에도 이 마을에 살고 있었던 주민들은 지난 50년 8월2일 오후 해질 무렵 마을 상공에 미군 3대가 날아와 폭탄 3-4발을 투하했다고 26일 증언했다. 이로 인해 나씨의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숨지고 나씨의 어머니 등 마을주민 수 십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인근 산정마을, 웃솔매마을 등도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다음날인 3일 오후에 다시 미군 비행기 2-3대가 날아와 2-3차례 마을 상공을 선회하더니 마을을 향해 기총 소사를 해 또 다시 마을 주민 4-5명이 숨져 이틀동안의 폭격과 기총 소사로 주민 10여명이 죽고 수 십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마을이 불에 탔다고 주장했다. 나씨는 "연합군과 국군이 한창 밀릴 때 인근의 황룡강 철교를 폭파하려고 미군기들이 하루에도 2-3차례씩 철교를 향해 폭탄을 퍼부어 댔다"며 "이 때문에 인민군뿐만 아니라 국군도 들어온 적이 없는 우리마을이 완전 쑥대밭이 됐다"고 말했다. 같은 마을에 사는 나인호(70)씨는 또 "그때 사건으로 인해 매년 음력 6월19일과 20일이 되면 마을 대부분의 가정에서 제사를 지내는 진풍경이 벌어진다"고 증언했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동아일보 1999년 10월 18일19:27)
【51년 초 미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마을 동굴에 피신해 있던 주민과 피란 민 300여명이 사망했다. 당시 마을 인근의 곡계굴에는 강원 영월 평창 등에서 내려온 피란민 200여명과 마을 주민100여명이 추위와 폭격을 피해 숨어 있었다. 그러나 미군은 51년 1월20일 비행정찰 도중 동굴 앞에 주민들이 쌓아놓은 가재도구 등을 보고 북한군이 숨은 것으로 오인, 동굴 입구를 집중 폭격해 안에 있던 주민들이 질식사하는 등 떼죽음을 당했다는 것. 이날 폭격으로 어머니와 동생들을 잃은 조준형(趙俊衡·61)씨는 “당시 동굴 앞에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 많았으며 흰옷가지를 흔들며‘살려달라’고 외쳤는데도 미군기가 무차별로 폭격했다”며 “한달 뒤 미군2명이 헬기편으로 폭격현장을 방문, 동굴 안에 방치돼 있던 시신들의 사진을 찍어갔다”고 증언했다.】
[전국서 드러나는 미군 6.25 양민학살] 충북 단양군 괴개굴 (중앙일보 1999년 12월 29일 20:16)
【 한국전쟁 때인 51년 1월 20일 오전 10시쯤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느티마을 괴개굴. 갑자기 달려든 미군기 4~5대의 폭격으로 3백여 명이 희생됐다.
"굴속에 불길과 함께 연기가 밀려들어오면서 그야말로 순식간에 아비규환을 이뤘습니다. " 당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조봉원(趙逢元.64.전 제천고 교장. 당시 제천농업 중2)씨는 당시 참상을 이렇게 회상했다. 趙씨는 "소이탄을 떨어뜨렸는지 순식간에 굴속까지 불이 붙었다" 며 "여기저기 비명소리와 ''하느님'' 을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헤매던 중 정신을 잃었다" 고 말했다. 이날 굴속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질식사했으며 일부는 굴속에 깔아뒀던 멍석과 가마니에 옮겨 붙은 불에 타기도 했다. 趙씨도 부친과 여동생을 잃었으며 趙학수(당시 35세)씨 가족 등 일가족 7~8명이 몰살당한 가구도 세 가구에 이른다.
당시 피해자들은 참변 며칠 전부터 공습이 잦아지자 마을에서 5백m 떨어진 괴개굴로 대피했었다. 굴 밖에는 살림살이 등을 쌓아놓았었다. 주민들은 "미군기가 북한군이 은신한 것으로 오인했을 수 있으나 굴 주변에 소가 매어져 있고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는 데도 폭격을 한 것은 명백한 학살행위" 라고 주장한다. 면 직원이었던 조태원(趙泰元.75)씨는 "일부 깊숙이 들어갔던 사람의 시신은 몇 달 뒤 장마때 물이 차면서 떠내려 나오기도 했다" 고 말했다. 최근에도 굴속에서 유골이 발견되고 있으며 이 마을 주민들은 음력 12월 12일만 되면 집집마다 제사를 지낸다. 주민 엄기준(嚴基俊.73)씨는 "지금까지 사상이 의심을 받을까봐 아무런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을 하지 못했으나 위령탑이라도 건립해주길 바란다" 고 말했다.】
미군기 이리역 폭격으로 300여명 사망 (주간 내일신문)
속속 드러나는 양민학살
본보 보도 뒤 제보 잇따라 … 유족회원들 “오폭 아니다”
【 충북 영동군 노근리 양민학살 진상조사와 관련, 한국전쟁을 전후로 국군이나 미군에 의해 무고한 양민들이 떼죽음 당했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본지(1월19일자 제316호)를 통해 보도 연맹원과 청주교도소 제소자 처형에 대한 기사가 나간 뒤 가족이나 친지의 죽음에 대한 제보가 잇따르고 있다.
폭격 당시 북한군은 수원에 있었다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전북 이리역(현 익산역) 폭격사건도 진상해결을 위한 시민대책위가 꾸려져 미 대사관측에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당시 이리시는 전쟁 소식을 들었지만 피난가는 사람도 없었고 일상 생활 속에서 평화로운 상태였다.
이리역이 미 공군기에 의해 무차별 폭격을 당한 것은 1950년 7월11일 오후 2시40분 경. 이날 B-29폭격기는 이리역 상공을 선회했고, 기관사들은 국적을 확인하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잠시 후 비행기에서 시커먼 물체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낙하산이 떨어진다며 신기해했다. 그 물체는 낙하산이 아닌 포탄이었으며, 순식간에 이리역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 폭격으로 300여명의 주민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됐다. 7월15일에도 평화동 변전소와 철길 주변과 마을은 미 공군기의 기관총탄 세례를 받았다. 당시 북한군은 수원 근처에 있었다. 북한군과의 교전은 열흘 후인 7월20일경이었다.
이날 이리시내에는 우시장이 열려 김제 황등 전주 군산 등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군 입대를 위해 소집영장을 받고 이리역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날 폭격으로 이리역에 근무하는 철도청 직원 54명이 몰살했다.
강순예(77·익산시 목천동)씨는 미군기 폭격으로 동갑내기 남편 이경옥씨를 잃었다. 강씨는“폭격이 있고 나서 남편의 시신을 찾으려 했지만 죽은 사람이 워낙 많았고 시커멓게 타버려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사흘 뒤에 스텐레스 결혼반지를 보고서야 남편 시신을 찾았다”고 말했다. 이날 폭격으로 부모를 모두 잃은 이창근(65·송학동) 이창규(62)형제는 당시 이리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이리역과 송학동 일대가 형체가 알아볼 수 없이 뼈대만 남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3일이 지나서야 채탄장에서 아버지 시신을 확인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시커멓게 타버린 시신은 기관조사 전용 회중시계를 목에 걸고 있어 확인이 가능했다. 이씨의 어머니 시신은 시에서 일괄 처리해 지금도 어디에 매장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피해자 유족회원들은 “미군기의 이리역 폭격은 오폭이 아니라 고의성이 짙다”며 “천안역과 이리역은 200km나 떨어져 있어 납득이 안 간다”고 말했다. ‘1950년 이리시 미군기 폭격사건 진상해결 익산 시민대책위원회’(위원장 김 현 교무·대책위)의 손문선 집행위원장은 “당시 상황으로 미군 측이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한 것이라면 만경강 철로를 폭격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며 오폭이 아닌 고의성이 짙다고 말했다......】
[전국 곳곳에서 미군기 폭격] (출처 ; 동아일보 1999년 10월 18일 19:27)
【 미군정기인 48년 6월 8일 독도로 미역 채취 나간 울릉도 주민들은 서도 앞에 배를 세워놓고 작업을 하다가 울릉도 방향에서 나타난 10여대의 미군기로부터 융단폭격을 받았다. 이날 80여 척의 배가 파손되고 배에 타고 있던 어민 150여명도 대부분 희생됐다. 사건 직후 미군당국은 피해조사를 벌이고 소정의 배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으나 피해자들은 배상을 받은 적이 없다며 이를 부인하고 있다.
또 경남 의령 사천 함안, 경북 구미 예천, 전북 익산 등에서도 미군기의 무차별 총격 또는 폭격으로 수십 ∼ 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주장이 최근 제기됐다.】
[적군인가 아군이가?(2)] 미군, 피난민 무차별 학살 (호남저널)
△경북 구미시 형곡동
50년 8월 16일 경북 구미시 형곡동 상공에 나타난 미군 비행기가 2∼3차례 폭탄을 투하했고, 이어 뒤따라온 제트기의 무차별 기관총 난사로 1백 30여명이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다고 목격자들은 증언했다.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
51년 1월 19일 낮 12시경 미군 정찰기 1대가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 마을 상공을 저공비행 한 뒤 나타난 폭격기 6대의 폭격에 의해 가옥 1백 20채 중 88채가 전소됐으며, 48명이 사망하고 9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경남 의령군 정동리 기총소사 사건
경남 의령군 용덕면 정동리 마을 주민들은 50년 8월 22일 오후 7시쯤부터 2시간 동안 미군 전투기 4대가 마을 집중 폭격해 2백 50 가구 중 1백 여 채가 불타고 33명이 사망했으며 30여명이 부상당했다고 주장했다.
△경남 함안군 장지리
50년 8월 20일 오전 7시 20분 경 미군 비행기의 집중폭격을 받아 100여명이 숨지고 100여 명이 부상당했다고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