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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肅宗, 1661년∼1720년 재위, 1674년∼1720년)
숙종 어필
숙종어진으로 추정 1953년 현재 문화재청의 전신인 이왕직박물관이 소장하던 것들이 6.25전쟁으로 부산 광복동 관세창고에 보관중인 각종 보물과 어진이 국제시장 대화재로 불타고 없어짐. 불타고 남은 어진 쪼가리 몇개가 남아 있다.
使人長智莫如學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를 기르게 하려면 배움만 한 것이 없으니
若玉求文必待琢
옥의 문채를 찾기 위해서는 절차탁마가 반드시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라
經書奧旨于誰問
경서의 깊은 뜻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겠는가?
師傅宜親不厭數
마땅히 사부를 가까이하여 자주 뵙는 것을 싫어하지 않아야 한다네
1715년 11월 4일, 6남 연령군 이훤에게 내린 한시.
조선의 제19대 임금이자 경종, 영조, 연령군의 아버지.
주로 사극의 인기 소재인 희빈 장씨 드라마에서 나오는 일이 잦아 드라마에서는 우유부단한 이미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으며 심한 경우에는 여자들한테 빠져서 말 하나하나에 속아넘어가는 바보로 나오기까지 하는데 실제 숙종은 절대 그런 인물이 아니다. 몸이 병약하고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지만 성격은 다혈질에 가까웠고 정치판에서는 냉혹하며 무수한 환국 정치로 매우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던 군주였다.
왕비를 4번 들였는데 2번째 왕비가 유명한 인현왕후 민씨, 3번째가 장희빈이다. 각종 미디어에서 숙종은 여자 관계가 복잡한 것처럼 비춰지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후궁의 수도 다른 임금에 비해서 적었고 자식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치 여자 문제가 가득한 왕처럼 보여지는 것은 그가 다른 왕들과 달리 정치 문제에 자신의 부인들을 적극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만 봐도 숙종이 얼마나 냉혹했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정치판에서도 유감없이 그 성질을 드러냈으니 다혈질과 냉철함이 합쳐진다면 말 그대로 머리도 갖춘 신하 갈구는 임금이 된다는거다.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장남의 수난이라는 유서 깊은 징크스를 깨부순 유일한 사람이었다. 즉위 당시에는 14세라 약간 어린 편이었는데 당시는 15세만 되면 성년으로 보았다. 왕족이면 빨리 자식을 보길 바라는 마음에 10세~12세에 일찍 결혼시켰지만 손(孫)이 급하지 않은 일반 양가집이면 15세 정도에 결혼을 시켰고 과거 시험에도 응시해 합격하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20세가 되면 이제 완전한 성년으로 보아 아버지도 20살이 된 아들의 집안일에 관여하면 큰 실례로 여겼다. 숙종은 14세(만 13세)여서 조선의 기준으로도 아직은 성인이 되기 전이었다. 모후인 명성왕후, 계증조모 자의대비가 생존했으므로 수렴청정을 해도 되었지만 즉위하자마자 수렴청정을 스킵해 버리고 권력을 휘어잡아 친정을 했다. 이는 정통성을 떠나서 총명함과 결단력을 왕가의 어른들과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히려 비빈 사이를 오가며 아내들을 환국에 이용했다는 평. 이런 상태로 장장 46년을 재위하며 신하들을 휘어잡았다.
본래 휘는 '광(爌)'이었으나 현종 7년인 1666년 전한 때 장군 이광과 음이 같고 폭군의 대명사였던 수양제의 이름인 양광과 음이 같다는 대사헌 조복양의 지적을 받아들여 공모를 통해 휘를 '순(焞)'으로 고쳤다.
2. 강력한 왕권의 원동력
아버지인 현종도 할아버지인 효종의 외아들이었고, 자신도 정실 부인 소생의 고명아들이었으며 딱히 외척에 관련한 트러블도 없어 정통성에서는 꿀리는 게 전혀 없는 왕이었다. 꿀리기는커녕, 부계와 모계 정통성이 모두 완벽한 조선조 정통성의 끝판왕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세조 같이 왕위를 찬탈할 백숙부도 당시에 없었고, 연산군 때의 중종처럼 폐위시키고 세울 대군도 없었다. 2대독자였기에 태어난 기준 가장 가까운 왕족은 당숙, 즉 소현세자나 인평대군의 자손들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소현세자의 자식들은 귀양과 석방을 되풀이하면서 종친으로서의 영향력은 사실상 없다시피했고, 인평대군의 후손들은 현종-숙종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이 때문에 사실상 그 누구도 숙종을 견제할 수조차 없었다. 이 때문에 14세라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렴청정을 받지도 않고 바로 친정에 나섰다.
왕비나 세자빈 소생의 왕의 장남 또는 장손으로 출생, 원자(원손) - 세자 - 왕 순서로 정상적으로 왕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무엇보다도 (당시 기준) 장수하기까지 한 왕이다. 역대 조선 왕조의 적장자들은 단명, 숙청, 폐위 등 유난스러울 정도로 풍파에 시달렸으나 숙종만큼은 이런 풍파를 무난히 피해갔다. 숙종의 성깔은 어머니(명성왕후 김씨)에게서 유전된 것도 있으나 이처럼 귀한 아들(현종의 아들이라곤 숙종 혼자다.)인 탓도 있을 듯하다. 그리고 그 어머니도 세자빈 - 왕비 - 대비 테크를 제대로 밟았다. 추가로 친증조모는 아니었지만 대왕대비까지 있었으니 수양대군 같은 야심 많은 종친이 있었다고 쳐도 계유정난 같은 쿠데타는 아예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수양대군이 개념인으로 보일 만큼 엄청나게 막나가는 종친이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나 다행히도 그런 종친은 당시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문종과 인종과 헌종은 왕위에 올라 단명한데다, 정확히 말해 문종은 원손으로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상기된 최초의 금지옥엽 + 정통성 + 상왕까지 올랐던 단종은 3년만에 수양 대군에게 반강제적으로 양위당하고,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축출되었다. 원손 - 세손 - 왕의 절차를 밟은 정조의 경우 호적상으로는 효장세자의 아들이지만 어쨌든 생부 사도세자의 문제가 있었다. 비슷한 예로 아버지 현종이 있는데 정확히 따지면 현종이 태어날 때의 세자는 소현세자이니 원손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고, 세자 교체와 관련한 효종의 원죄가 남아 예송논쟁이 발생하고 현종 자신 또한 비교적 요절한지라 조금 '격'이 딸린다. 아들인 경종도 장희빈이 중전에서 폐위되어 사사당했으므로 적자라고 보기에는 애매하다. 순종 황제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즉, 숙종의 막강한 왕권은 왕위에 오를 때 어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완벽한 정통성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통과 질서를 강조하는 조선 왕조에서도 정말 정말 보기 드문 케이스. 정통성 면에서 꿀릴게 전혀 없는지라 왕권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었고, 이 양반 시절에 신하들을 손바닥 안에서 가지고 노는 환국(換局)이 그렇게 많이 일어난 것도 이런 정통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3. 불 같은 성미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했지만, 성미는 매우 불같아 궁녀들이 머릴 빗겨주거나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싫어했다고 한다. 결국 머리 빗겨 주는 것은 어머니가 직접 했다고 하는데, 그나마도 못 참아 투정을 부리자 빗 등으로 머리를 때려가면서 빗겼다고 한다. 그래서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도 아들을 평하기를
"세자는 내 배로 낳았지만, 그 성질이 아침에 다르고 점심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니, 나로서는 감당 할 수가 없다 하였다."
어쨌거나 명성왕후는 며느리인 인현왕후에게 이런 언급도 하였다.
"(인현왕후가 출궁당한 장희빈을 불러들이자고 주청하자) 아직 내전이 그 사람(희빈 장씨)을 보지 못하여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그 간교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소. 주상께서는 평소에도 희로애락의 감정이 불길처럼 일어나시는데 간악한 사람이 그것을 옆에서 부채질한다면 그것은 큰 재앙이 될 것이오."
조선왕조실록은 숙종 14년(1688년) 7월 16일 숙종의 건강 상태를 이렇게 전한다. 전형적인 화병 증세다.
"이 때에 왕의 노여움이 폭발하고 점차로 번뇌가 심해져, 입에는 꾸짖는 말이 끊이지 않았고, 밤이면 또 잠들지 못하다, 마음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번뇌가 심했다."
숙종이 평생을 두고 호소한 질병은 산증(疝症)이다. 산증은 아랫배에 병이 생겨서 배가 아프고 대소변이 잘 나오지 않는 증상이다. 현대 의학에선 '간질성방광염'으로, 방광 근육 내부의 궤양과 섬유화로 인해 방광 용적이 줄어들고, 하복부 통증이 만성화 되며 혈뇨가 나오는 등 사람을 굉장히 고통스럽게 만드는 질병이다. 동의보감은 이 병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한다. 전형적인 화병의 증상이다.
"대체로 성을 몹시 내면 간에서 화(火)가 생긴다. 화가 몰린 지 오래되면 내부가 습기로 차가워지며 통증이 심해진다."
숙종 본인도 자신의 이러한 성품을 인지한듯, 실제로 <숙종실록>을 보면 1704년(숙종 30년) 12월 11일자에서 숙종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의 화증(火症)이 뿌리 내린 지 이미 오래고 나이도 쇠해 날이 갈수록 깊은 고질(苦疾)이 되어 간다. 무릇 사람의 일시적 질환(疾患)은 고치기 쉽지만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것은 화증이다. 오랜 시간 동안 일을 하면 화염(火炎)이 위로 올라 비록 한겨울이라도 손에서 부채를 놓을 수가 없다."
이후 영조또한 산증(疝症)에 시달렸던 것을 보면, 선대왕대부터 내려오던 지랄맞은 성격이 불러일으킨 스트레스성 질환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유전적인 요인으로 생겨난 방광의 이상으로 인한 통증의 만성화로 인격 자체가 신경질적으로 변했을 가능성도 있다.
밑의 송시열과의 악연 문단에서 알 수 있듯이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도 조선 왕비들 중에서 둘째가면 서러울 정도로 한 성질하는 왕비였다. 아버지 현종은 온화한 성격이었으니 그의 성격은 모후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명성왕후는 1675년 '홍수의 변' 때에는 수렴청정을 하는 상황이 아닌데도 대전까지 와서 통곡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는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홍수의 변 때 총대를 매고 삼복(복평군 형제들)을 탄핵했지만 결정적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삼복과 반대 당파에게 무고죄로 위기에 몰린 상황이라서 이랬던 것. 신하들 역시 '이건 뭐 문정왕후가 또 나타났나요?'라고 비판하기도 했을 정도.
드라마 등의 영향으로 장희빈만 나쁜 년이고, 착한 숙종은 장희빈에게 홀려 조강지처를 저버리고 끌려다녔다는 이미지가 강한데, 숙종이 다혈질에 사리분별을 모르는 짓을 종종 했던 인간이라는 것은 여러가지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숙종 14년(1688년)에 장희빈이 아들(훗날의 경종 이윤)을 출산하자 장희빈의 어머니가 가마를 타고 입궁한 적이 있다. 이 때 사헌부의 말단 직책인(심부름꾼 수준) 소유들이 장희빈 어머니의 가마를 보고는 이를 적발해 가마를 부쉈다. 그 가마는 옥교라는 지붕이 달린 여성용 가마로, 당시 법에 의하면 정 3품 이상 관리의 여자 가족이나 탈 수 있었다. 즉, 소유들이 원칙대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들은 숙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소유를 전부 때려 죽이라고 명했다. 물론 신하들이 뒤늦게 말려 중단되기는 했지만, 결국 내수사에 끌려가서 심문당하던 소유 중 2명은 고문 중에 맞아 죽었다.
당시 상궁들도 가마를 타고 다니고 암묵적으로 지켜지지 않는 일이었으나 일단 엄격히 법을 적용하자면 장희빈의 어머니가 주제넘은 짓을 한 것이 맞다. 결국 신하들의 극심한 반발로 숙종도 물러서서 법대로 한 것뿐인 자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면서 그들에게 상을 내리고 이 일을 문제삼은 대간들을 칭찬하기도 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면모를 보인 것도 특징. 위의 소유를 패대기친 것은 장희빈의 환심을 사려고 한 짓이며 장희빈을 이용해서 강적인 송시열(과 서인)의 끝을 보려했다는 시각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송시열이 죽고 난 이후에는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를 이용하면서 장희빈을 외면했단 것.
생각해보라. 계비인 인현왕후까지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행동을 트집잡아 폐서인으로 만들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삼아줬다. 하지만 장희빈의 이용 가치가 사라졌고 다시 인현왕후를 왕비로 삼았다. 인현왕후는 다시 왕비로 복위되었지만 폐위됐을 때 얻은 병이 악화되어 결국 복위된지 7년만에 사망했다. 이에 숙종은 그 죽음을 희빈 장씨의 저주 탓으로 돌려 그녀를 사사시켜 죽였다. 즉, 숙종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는 인물이자 권모술수의 달인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다르게 말하자면 왕권 강화를 위해서 바른 말 하는 신하들도 가차없이 죽이고 두 여자를 갖고 놀며 자기의 아들의 인생도 엉망으로 만드는 짓을 많이 저질렀다는 애기도 된다. 일단 인현왕후는 5년이라는 길고 열악한 폐비 생활이 사망에 영향을 많이 끼쳤고, 장희빈은 저주를 했다는 증거도 고문으로 인한 궁녀들의 자백뿐인데다 세자(이윤)의 어머니인데다 남인 세력도 씨를 매우 많이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귀양이고 뭐고 가차없이 죽여버렸다. 거기다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릴 당시 세자는 완전 어린 나이도 아니고 14살이었다.
왕권 강화를 위해 피를 많이 흘린 태종도 적어도 충신들이나 왕비인 원경왕후나 후궁은 건드리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숙종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 수 있다.
숙종의 이런 불 같은 성격으로 인해 극단적인 피해를 본 사람이 많은 건 부왕인 현종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현종은 숙종과 달리 왕권이 지나치게 강하면 다음 왕 때부터 부작용이 나타날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남인에게도 힘을 실었고 사약 같은 극단적인 수단은 쓰지 않았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서 현종 실록 대에 정치적으로 피바람이 불었다는 등의 묘사가 없는것만 봐도 알 수 있다그래서 사극에도 잘 안 나오지만.
양육적인 측면과 결합해서 보면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부터가 독선적이었는데, 조선 시대 왕의 스케줄이 워낙 살인적이었으므로, 중전이자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세자인 숙종의 주 양육자로서 성격적인 측면을 비롯해서 숙종에게 많은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아버지인 현종이나 친할머니이자 효종의 왕비인 웃어른 인선왕후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숙종도 이들의 영향으로 잔혹한 수단들이 다소 완화되거나 최소한 이들이 살아있을 때까지는 왕권을 독단적으로 행사하기 힘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4. 환국(換局) 정치
인조반정 이후 현종 때까지의 정국이 붕당 간의 적절한 견제와 균형으로 이루어졌다면, 숙종 즉위 후 기사환국 이후부터는 한 당파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는 "너 죽고 너 다시 한 번 더 죽자"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서 왕실 종친들은 즉, 숙종의 적당숙인 복평군과 복선군, 복녕군은 아버지인 인평대군(인조의 3남)이 서인에게 탄핵을 받고 외척들인 서인과 사이가 안 좋아 남인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서종조인 숭선군과 서당숙인 동평군 또한 장희빈과 남인편을 들어주었다.
서인은 주로 외척이 중추였는데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이고 외조부인 김우명도 서인이었고 어머니의 사촌오빠인 김석주도 서인이었다. 숙종의 첫째 왕비의 아버지이고 장인인 김만기와 처숙부인 김만중도 서인이었고 둘째 부인인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과 오빠인 민진후, 민진원, 처숙부인 민정중도 서인이였다. 또 숙종의 증조할머니인 장렬왕후의 친척인 조사석도 서인이었다. 게다가 숙종의 매제인 오태주도 서인 중진인 오두인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도 김수항, 김수흥 가문의 종질녀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남인과 서인의 싸움은 종친과 외척의 대리전과 다름 없었다.
간단하게 임금이 남인을 선택하면 서인이 죽어나갔고, 서인을 선택하면 남인이 죽었다. 붕당이 처음 일어난 선조 시절에 붕당간에 정철과 정여립의 난으로 대표되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 혈투를 벌인 것과 비슷했다. 이로 인해 집권 당파가 바뀔 때마다 보복성 숙청으로 피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숙종은 왕비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적절히 이용해 환국을 일으켰다. 보통 조선 역사를 배울 때 이러한 숙청 시기를 환국으로 표현한다. 대표적인 환국과 그에 준하는 정국 뒤집기로는...
•재위 1년(1675년), 예송논쟁 직후 긴장 상태에 있던 정국을 남인 우위로 뒤집었다.
•재위 6년(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허적, 윤휴를 비롯한 남인을 친위 쿠데타에 가깝게 몰아내고 서인 우위로 다시 뒤집었다. 처분 수일만에 사약 크리.
•재위 15년(1689년), (재위 16년차)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왕비 교체에 반대하는 서인을 내몰고 남인을 중용했다. 이때의 남인은 민암 중심.
•재위 20년(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6년만에 남인을 내몰고 서인으로 정권 교체.
•재위 27년(1701년), 신사의 옥으로 남인 잔존세력들마저도 쓸어버림. 그리고 소론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노론의 영향력이 강해지는데 일조함. 이건 어찌보면 갑술환국의 속편이라고 볼 수 있다.
•재위 31~32년(1705년~1706년), 임부의 옥사와 이잠의 옥사로 이미 재기불능에 빠진 남인들을 또 한번 대거 숙청함. 이 사건들로 인하여 소론의 영향력은 더욱 약화되고 노론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됨.
•재위 36년(1710년), 예기유편 편찬에서 불거진 논란이 확산되고 게다가 당시 편찬자였던 최석정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면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고 거기에 대해 당시 영의정이자 내의원도제조였던 최석정이 임금의 병환에 시약을 잘못했다는 의혹까지 확산되면서 이에 분노한 숙종은 소론인 최석정에게 영의정 관직을 삭직하고 노론인 이여에게 영의정으로 제수를 하는데, 이로 인해 노론의 영향력은 계속 강화되고 소론의 영향력은 계속 약화되는데 일조함.
•이미 숙종 즉위 이전, 분명해지기로는 전자로는 경신환국 이후로, 중자로는 기사환국 이후로, 후자로는 갑술환국 이후로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분열되자, 초기엔 소론을 중용했으나 신사의 옥, 임부의 옥사, 이잠의 옥사 등 여러가지 옥사들이 일어난 이후로 노론을 점점 계속 등용하더니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소론을 대거 내몰고 노론을 대거 등용. 재위 21년 시절, 마지막 환국 이후 20년만에 벌어진 속편 격이라 잘 알려지지 않지만 이후의 붕당 대립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환국 정치는 숙종의 왕권 강화책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며, 숙종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숙종은 살아서 신하들에게 존호까지 받게 되었고(그만큼 신하들이 그를 두려워 한다는 뜻), 충(忠)의 상징인 관우를 대대적으로 홍보해 신하들에게 반강제로 왕을 향한 충성을 강요했다.
숙종은 자신이 죽인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훗날 연산군처럼 피바람을 불게 할까봐 두려워 노론과 공모해 경종을 폐세자하려던 중 노환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 택군(擇君) 경험 때문에 노론은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면 소론은 이것을 이용해서 피바람이 일게 한다. 이것이 바로 신임옥사다.
숙종이 잦은 환국과 신권을 억누르는 정치를 한 탓에 몸이 약한 경종이 즉위하면서 정국은 개판 5분 전 + 피를 피로 씻는 배틀로얄이 되었고, 독살설과 역모가 횡행하였다. 영조 즉위 이후에는 점점 소수 붕당의 독재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영조, 정조 시대에는 탕평책을 밀어붙여야만 했다. 사실 탕평책이란 이름은 숙종이 최초로 만들었다.
숙종은 또 기본적으로 신하들을 대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숙종 17년(1691년)엔 우의정 김덕원이 오래 봉직한 내시의 경험담을 듣고 '인조대왕과 효종대왕은 검약하셨는데 님도 좀 검약하시져'라고 했다가 '네가 감히 선조의 일을, 그것도 천한 내시의 말을 들먹이면서 나를 능멸?'이라는 식의 말과 함께 오래 전에 사망한 그 내시는 일가 친척들과 함께 내시 명단에서 삭제되고 발언자 본인은 단칼에 파직 크리를 먹은 적이 있다. 영의정을 비롯해 주변 신하들이 다 싹싹 빌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고. 바로 그해에 '그동안 당쟁이 심해 그거만큼 폐단이 없는데 나님이 그런거 다 없앰'이라는 율시도 지었다. 그 내용을 다룬 만화, 송시열과 윤휴의 혼백이 숙종을 디스하는게 압권.
“예전부터 나라를 어지럽힘은 붕당보다 혹독한 것이 없는데, 동서(동인과 서인)가 겨우 주장을 내세우자 노소(노론과 소론)가 바로 마구 헐뜯어대어 공도는 때로 아주 없어지고 사심이 날로 이어 붙어 있으니 모름지기 은감이 가까운 줄 알아서 끝내 충성의 힘 다하여야 하리라."(從古禍人國/莫如黨比酷/東西纔標榜/老少轉橫拆/公道時淪喪/私心日係着/須知殷鑑邇/終始竭忠力.)
5.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의 악연
환국을 일으킨 끝에 즉위하기 전부터 미워했던 송시열에게 결국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로써 본인의 증조부, 조부, 부친인 인조, 효종, 현종 선대 세 왕을 섬긴 거물 정치가 송시열도 별 수없이 "어, 어"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이 때 송시열이 사약 1사발에 안 죽자, 3사발을 먹여서야 죽었다고 한다. 자세한 건 사약 참조.).
왕권 강화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송시열이 사약을 받은 계기가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삼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인 것을 생각하면 다소 감정적인 요인도 컸을 것이라 추측된다. 원래 숙종은 송시열을 싫어했고 송시열은 하던 버릇대로 숙종과 각을 세우다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다. 그리고 송시열을 따르던 유생들이며 신하들이 상소를 올리자 상소를 올린 이들도 다 유배를 보내는 숙종다운 성질을 보여준다.
결국 계속되는 상소에 열불난 숙종이 송시열을 국문을 열기 위해 한양으로 불렀다. 그때 송시열이 올라오는 길에 그를 따르는 노론들이 몇백명이었다한다. 점점 한양으로 올라가며 졸졸 따르는 이가 500명이 넘었다고 했으니 숙종이 국문이고 나발이고 사약을 출동시켜서 결국 죽여버렸다.
송시열은 할아버지인 효종을 둘째 아들이라 못을 박고, 현종 때도 강씨(소현세자의 세자빈, 강회빈)의 신원 회복을 주장하는 등 당대 왕가에 껄끄러운 문제를 계속 건드렸다. 이는 적자 - 적손으로 이어지는 숙종의 정통성을 건들게 되는 일이니 좋아할리 없었다. 그리고 송시열의 세자 책봉 반대는 단순 반대로 여기기에는 문제가 있다. 송시열 같은 거물이 세자 책봉에 반대한다면 세자의 정통성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다만 이런 일을 했던 숙종이 정작 죽을 때 경종의 정통성을 훼손해서 노론으로 하여금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게끔 만든 게 한편으로는 아이러니.
숙종과 송시열의 다툼은 야사에서는 숙종 탄생 시기까지 간다. 숙종의 회임 기간으로 볼 때 숙종을 임신한 시기가 하필이면 효종 초상기와 맞물린 것. 야사에선 이때 송시열이 원자 축하를 디스했다고 한다.(사실은 상경하다가 중간에 일이 생겨 기일을 못 맞추게 되자 송시열이 이것을 이유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근데 이 어머니 되시는 분도 조선사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하는 성깔을 자랑하던 명성왕후 김씨 되시겠다. 이후 명성왕후는 송시열이 왕실에 한소리 하기만하면 "저 놈의 영감탱이는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어쩌고" 하면서 송시열 디스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뒷날 숙종이 노론의 손을 들어준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단행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송시열의 학통이 교조화되는 데 한몫한 군주도 다름 아닌 숙종이라 할 수 있다.
숙종은 이런 송시열에 대해 짬밥이 너무 엄청나서 맞대결하기가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장희빈을 이용한 것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장희빈이 숙종의 마음을 얻기도 전인 즉위 직후인 14살 시절부터 송시열을 갈구며 송시열의 제자들을 죄다 내쫓고 송시열을 귀양보낸 게 숙종이었다.
6. 치적
경제적으로는 대동법을 평안도, 함경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시행하여 민생의 안정을 추구했고 본격적으로 주전, 즉 화폐 제조를 실시했다. 흔히 우리가 잘아는 상평통보는 숙종 즉위 초년부터 주조되기 시작해 전국의 중앙, 지방 관청에서 유통되었다. 숙종이 상평통보를 발행한 목적은 국가 재정의 확충이라는 목적이 컸다.
숙종의 의도가 적중해서 이후 조선 말까지 화폐 제조를 통한 이익으로 국가재정을 충당한다는 개념이 정착했다. 게다가 대외적으로도 일본과의 은 무역에서 크게 번영했다.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은 숙종 시대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국가 재정 역시 탄탄했다. 특히 숙종은 군주로서의 책임감이 강해서 민생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대동법의 영남 / 황해 확대와 후술하는 을해정식을 통한 궁방전의 억제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의 국경도 숙종 년간에 사실상 확정되었는데, 조정의 본의는 아니었지만 널리 알려졌듯 1690년대 안용복이 울릉도는 우리 땅(덤으로 독도도)을 외치고 왔고, 앞서 말했듯 북쪽은 백두산에 청과 국경선을 다시 긋고 정계비를 세워 "서위압록 동위토문"을 적어넣었다. 문제는 당시 이 작업에 참여한 청나라 관리 목극등의 문제로 근 170년쯤 뒤에 간도 떡밥이 시작되어 버린 것. 이는 조선 왕실에서도 알아챘기 때문에 숙종실록에 토문강을 치면 간도 떡밥을 분쇄하는 가장 큰 근거가 나온다. 다만 그 뒤에 대한 대응은 적혀있지 않다.
한편 1678년, 안남(베트남)의 회안부(호이안)에 표류한 김태황(金泰璜)을 6개월 정도 머물게 한 후 청나라 상인을 통하여 조선으로 되돌려 보내면서 안남왕 희종은 답신을 기대하며 조선에 교류 국서를 보냈으나 조선 측에서는 제주에 도착한 김태황과 청나라 상인 일행을 표류한 것으로 처리하였다.
6.1. 추증과 복권
조선 왕조의 과거사 정리에 관심이 많았는지 정종(定宗)과 단종(端宗)을 왕으로 복권시켰다.
정종은 본래 '공정온인순효대왕(恭靖溫仁順孝大王)'이라는 짧은 시호만 있어 약칭 '공정왕'이라고 불리고 묘호가 없었는데 이때 묘호와 조선의 다른 왕과 동일한 글자 수의 시호(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를 갖추게 되었다.
'노산군(魯山君)'이라 불렸던 단종은 숙종 7년(1681년)에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격상되었다가 숙종 24년(1698년)에 단종의 묘호와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의 시호를 받아 복위되었다. 이 때 혜빈 양씨와 사육신도 모두 복권되었다. 복권시킬 때의 명분은 단종이 강등되고 사사된 것은 세조를 모시던 신하들의 요청과 강요 때문이므로, 단종을 복위시킨다고 세조에게 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상왕(上王)으로 존봉(尊封)하신 뜻이 지극히 극진했었는데, 그 때의 대신들이 그 아름다움을 따르지 못하고 정청(庭請)하고 억지로 간쟁하여, 세조의 어지신 마음으로 하여금 시종(始終)을 보전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신(神)과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오래 되었습니다.
- 숙종실록 39권, 숙종 30년 5월 14일
물론 한 번에 복위한 것은 아니고 이들에 대한 동정론을 배경을 바탕으로, 전국의 여론을 수렴하고 논쟁을 거치기는 했다. 단종 복위 때는 기념으로 특별 과거까지 열었다.
태종의 형인 회안대군 이방간의 자손들이 정식으로 왕족으로 복귀한 것도 이 때였다. 그 전까지는 사실상의 역적처럼 간주돼 그 후손들은 연좌제에 따라 족보상으로만 왕족이고 왕족으로서의 혜택은 아무 것도 누리지 못했다.
신덕왕후강씨의 아들들인 방번과 방석을 복권시켜 이 때부터 무안대군과 의안대군으로 불리게 됐으며 소현세자의 아내인 민회빈 강씨를 복권시키기도 했다.
숙종이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왕권 강화 과정에서 무조건적인 충(忠)을 강조하고 왕가의 정통성을 다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작업이다.
숙종 자신이 출생 배경과 성장 과정에서 오는 정통성이 여느 왕과 달리 튼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왕권이 워낙 튼튼했기 때문에 과거사 정리 쯤 폭넓게 들어줘도 큰 문제가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작업은 후대로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정조 대에 이르면 광해군의 충신으로 여겨져 사사되었던 유몽인이 복권되었고 철종 때에는 광해군의 사돈이자 소북의 영수인 박승종 또한 복권되었다. 고종 때는 정도전을 완전히 복권시켰고 인조를 폐위시키고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한 유효립도 복권 되었고 순종 대에 이르러선 김일경, 유자광, 윤원형, 정인홍 같은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인물들조차 대부분 복권된다.
6.2. 국방 정책
숙종은 방위 체계를 수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손봤다.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진 오군영 제도가 확립된 것이 숙종 대로 평가되는데 방어 체계가 수도 중심으로 재편된 김에 북한산성을 축성한다. 상대적으로 한양도성은 성곽이 너무 길어 수비하기가 어렵고, 강화도는 바다에서 접근하는 적을 못막으며, 남한산성은 한강을 건너가야 하는 위험함이 있다는 이유였다.
실록에 보면 이 과정에서 신료 사이에 의견이 크게 갈려 싸우게 되는데 숙종은 이미 마음을 먹어놓고선 계속 논의토록 지시한다. 아마도 청나라의 간섭 때문에 책임을 피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1711년에 청에서 해구의 준동이 있다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군사와 도성 백성들을 동원하여 그 험하디 험한 북한산에 6개월 만에 성을 쌓아 올리고 행궁을 만든다.
이후에도 북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이 방비가 허술하다며 탕춘대성을 만들고, 크고 수비하기가 어렵다고 한 한양 성곽을 고치고, 허술하고 멀다고 한 강화도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김포에 문수산성을 축성했다.
또한 추가로 개풍군에 있는 대흥산성을 고쳐 쌓고, 평안도 남포에 황룡산성, 강화성, 경상북도 칠곡에 가산산성, 황해도 해주 수양산의 수양산성, 평안북도 염주의 용골산성, 충청북도 청주시의 상당산성을 증개축하고, 남한산성 행궁을 증축한다. 이래저래 성도 많이 짓고 북한산성 행궁과 남한산성 행궁에는 각각 행차하여 잠시 지내고 오는 등 재위 동안 수도 방어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때 만들어진 수도 방어 체계는 영조가 북한산성을 관리하던 경리청을 폐지하고 정조가 장용영을 만드는 등 약간의 변화를 거치긴 하지만 고종 때까지 유지되었고 덕분에 이때의 산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손실된 내부 시설을 제외하고 대부분 잘 남아있다.
또 한꺼번에 무과 합격자를 1만 8천여명이나 뽑아서 국방을 강화시킨다. 그리고 비변사 당상 중 구관당상을 제도화 한 8도구관당상제(八道勾管堂上制)를 도입하였다. 각 도에 1명의 구관 당상관이 임명되어 군무를 분담하여 그 도의 장계(狀啓)와 문부(文簿)를 처리한 것이다.
또한 중국에서 삼번의 난이 터지자 예의주시하며 북벌을 준비하는 구절이 실록에 여러번 등장한다. 결국 흐지부지 하긴 했지만...

첫댓글 조선시대에는 종묘에 춘하추동, 납일에 대제를 지냈는데 숙종이 제일 하기 싫어던 일로 꼽힌다. 제례때가 오면 나는 아플것이다. 하니 정말 아파서 세자 영잉군 또는 영의정이 대신 제례를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도성에 역병이 (콜레라) 돌자 지금의 율곡로에서 광화문으로 나와서 종로로 행차하는 것을 생략하고 창경궁에서 바로 종묘로 건너가서 제례를 지냈는데 한 신하가 "백성을 져버린 왕은 왕이 아니다!" 라고 직언을 하자 깜짝 놀란 숙종은 이를 바로잡았다고 한다. 역사를 많이 아시는 분들은 숙종의 변덕이 죽끊듯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래도 숙종이 임금노릇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공이 더 많은 인물로 평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