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 사는 건 늘 못마땅했다. 대단지 아파트는 뭔가 단체생활을 하는 느낌이랄까, 단지 안에 감금되어 사는 듯한 느낌이랄까를 떨칠 수 없게 했다. 똑같이 생긴 집이 적어도 수백 개 이상인 것도 잘 생각해보면 지루한 일이었다. 특별히 방문해보지 않아도 이웃집 내부 구조를 알 수 있었고, 윗집 자녀수를 알 수 있었고, 옆집 화장실 사용 시간을 알 수 있었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그나마 이웃들을 가장 많이 마주칠 수 있는 날은 쓰레기 분리수거 날이었다.
나는 좀 더 땅 냄새를 맡으며, 동네 가게들과 가까운 곳에서,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역과도 가까운 곳에서, 내 집이 어떻게 생긴지 모르는 사람들과 동네라는 느낌이 드는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선택의 순간이 오면 떠밀리듯 아파트 전세계약서를 썼다. 서울과 근접한 수도권에 살면서 1~2억 원의 돈으로 내가 바라는 그럴듯한 주거 형태를 기대할 순 없었다. 어쩔아파트.(‘어쩔티비’라는 신조어는 ‘어쩌라고 티비나 봐’라는 뜻이란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라고 아파트에서나 살아’로 읽히길)
나는 행신동에 산다. 서울을 관통하는 1~9라는 숫자를 획득하지 못한 아마도 변두리 전철노선인 경의중앙선 행신역 앞으로 상권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주변을 대단지 아파트가 둘러싸고 있는 일산 옆 작은 동네다. 상권에 비해 어찌나 아파트만 많은지 행신동에만 초등학교가 4~5개쯤 있는 것 같다. 행신역은 나름 KTX의 종착역이지만 명성에 비해 역 자체는 아담하다. 내 마음에는 쏙 드는 정도의 규모다. 나는 행신역 앞에서 작은 탁구클럽을 운영하며 산다. 아차차, 나 말고 내 남편이.
결혼하고 10년이나 단체생활 같은 아파트살이를 전전하던 나는, 드디어 3년 전 행신역 앞 상권들 속에 위치한 아파텔(원래는 오피스텔인데 주거용으로 만들어서 이름을 아파텔로 부른다) 입주에 성공했다. 개성 있는 14층짜리 아담한 아파텔 건물을 보는 순간, 나는 당장 아파트를 버리고 아파텔 매매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아파텔 1층엔 ‘이차돌’이 있고 정문만 나서면 바로 편의점, 슈퍼마켓, 순댓국집, 치킨집, 횟집, 약국, 미용실, 옷 수선집, 문구점이 있는, 그리고 무엇보다 탁구클럽과 1분 거리인 나만의 동네를 갖게 된 것이다. 요즘 이런 걸 ‘슬세권’이라고 한단다. 슬리퍼 신고 다니는 상권이라는 뜻으로 ‘로컬’과 함께 트렌드다.
내가 늘 꿈꾸던 그 무엇이 바로 ‘동네살이’였다는 걸, 3년을 살아보고 알게 되었다. 코로나로 모두가 위기였지만 아예 탁구클럽 영업을 할 수 없었을 때도, 저녁 9시까지 영업시간제한을 지켜야 했을 때도 동네분들이 꾸준히 회비를 내주고 기다려주고 안부를 물어주며 가게를 지켜주었다. 나 역시 필요한 물건은 최대한 온라인에서 사지 않고 집앞 슈퍼마켓에서, 동네 문구점에서 샀다. 외식도 동네 맛집에서 하고 자주 찾던 동네 카페 사장님과는 어느새 친구가 되었다. 아파트에 살 때는 탁구클럽이 그저 남편이 출근하는 영업장에 불과했는데, 탁구클럽 가까이에 살아보니 근처 상권이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이면서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상점을 지키는 사장님이 보이고 그들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먹여살려주는 동네 사람들의 존재가 더 고맙게 느껴졌다. 이 동네에선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지켜주었기에 코로나 위기 속에서 각자가 조금씩 휘청이긴 했어도 무너지진 않았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내에 있는, 프랜차이즈를 제외한 수십 군데의 작은 상가의 사장님들 얼굴을 이제 대부분 알게 되었다. 명절에 시골에서 가져오는 음식이나 과일이 아무리 넘쳐도 이젠 걱정이 없다. 동네에 나눠 먹을 이웃들이 있기 때문이다. 낚시하는 남편이 물고기를 아무리 많이 잡아와도 이젠 걱정이 없다. 못 줘서 미안할 뿐 남는 물고기는 없다. 동네에서 만난 탁구 회원님께 길 가다 세뱃돈을 받았다며 신나서 집에 들어온 딸아이를 보며 나는 오늘도 아파트살이를 버리고 동네살이를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첫댓글 부럽네요, 동네살이~
그리고 공감가는 옆집 화장실 사용 시간.ㅋ
우린 옆집에 아들 3학년 때 담임샘이 사셔서, 화장실 사용할 때마다 뭔가 불편함을 느꼈거든요.ㅠ
사람이 보이는 그 동네가 매우 궁금해집니다. 동네이야기 또 써주세요.^^
30층 이상의 대단지 고층아파트에서(명절, 시댁) 층층마다 들여다 보이는 거실, 똑같은 곳에 똑같은 아일랜드 주방, 똑같은 불빛.. 순간 그 모습이 너무 비인간적으로 보여서 아찔하더라구요. 이런 따듯한 사람사는 이야기가 너무 좋아요.
따뜻한 동네에 사시네요. 멋집니다!
글을 읽고 상상하기론 적어주신 동네는 역 근처니까 상가들이 많고 밤에도 훤한 곳인 것 같아요.
가 생각하는 동네살이란 좀 더 옛스런 마을 같은건데, (그니까 낮은 단층건물에 골목길이 있고 상가의 번잡함과는 거리가 먼) 에그썬님이 적어주신 아파텔에서의 동네살이는 좀 새로운 느낌이라 더 궁금해지네요. ^^
윗집의 사생활을 강제로 학습하게 되는 층간소음과 함께 40년 아파트 살이에 염증이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아파트의 편리함과 주택의 자유로움 사이에서 고질병인 결정장애로 내내 갈등만 하고 있어요.ㅠㅠ
따스하고 부러운 동네살이 이야기네요. 함께사는 즐거움이 그대로 전달이 되네요. 다음편 이야기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동네 이야기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