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전라북도 교육청에 수학여행을 현장 체험학습으로 바꿀 것을 제안하다.
요 며칠 사이 소풍과 수학여행 때문에 세상이 시끌벅적하다. “구더기 무서워 장을 담지 않는다.“
내 생각은 이렇다. 법을 손질해서 수학여행이나 소풍을 진행하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선생님들에게 피해를 묻지 않고, 진행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는 생각이다.
1997년 오월에 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춘천초등학교의 교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6학년 학생들을 데리고 전라도로 수학여행을 오겠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수학여행의 장소가 경주나 부여, 또는 제주도가 아닌 전라도를 선택한 의도가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미륵사지나 금산사 일대가 아니겠는가? 지레 짐작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리시설인 벽골제를 시작으로 동학농민혁명의 현장답사와 변산반도의 아름다운 풍광, 그리고 선운산 일대의 문화유산을 답사한 뒤 강진 해남으로 연결되는 2박 3일의 일정이었다.
80년년 대부터 일기 시작한 우리 것 바로 알기 운동이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면서 전국의 뜻 있는 단체나 학생들이 역사 속에 소외 받았지만 문화적으로 풍성했던 전라도 지역의 현장답사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처럼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수학여행을 온 경우는 없었다.
전북 지역의 수학여행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초등은 화엄사 광양제철 오동도가 제일 많았고, 중고등학교는 설악산, 제주도 경주가 대부분이었다.
자료집은커녕 안내자도 없이 며칠 노는 개념의 수행 여행이 몇십 년을 두고 계속되어온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문제는 단 하나 뿐이다. 지금부터라도 수학여행을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찾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진행시키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문화관광산업이 21세기 최대의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망되고 있고, 세계가 문화전쟁시대로 이행되어 가고 있는 지금, 낭비적이고, 소모적인 수학여행과 모든 여행을 바로 잡아야 한다. 물론 일선학교에서 수십 년 동안 내려온 수학여행의 관행을 깨고 새로운 문화기행, 역사기행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활용한다는 것은 쉬운 일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교육담당자들의 단안이 필요하고 대다수의 지역들마다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의 증성과 여행 프로그램에 대한 고민, 준문 여행 가이드 육성 및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각 자치단체들이 이러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교환하고, 기존의 답사단체들과 문화원들을 활성화 시킨다면 그것 역기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문용주 전라북도 교육감을 만날 생각을 했다. 대다수의 회원(교사가 많았음)들은 다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행사와의 유착, 교사들의 무관심, 그런 것들 때문에 안 될 것이라고 했다. 하여간에 부딪혀보자. 하고 전북 교육감 면담 심청을 하고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백제기행, 판소리 기행, 동학농민혁명 전적지 기행, 서해안의 갯벌 탐사와 환경기행, 진안 매잡이 기행, 정여립. 전봉준. 강증산 등 전북 지역의 역사 인물 기행 등 전북 지역에서만 가능한 프로그램을 20여 가지를 만들었고, 학교에서 요청이 있을 시에 프로그램을 진행해 준다는 목표를 세웠다.
며칠 뒤 그 당시 교육감이던 문용주 교육감을 만났다.
처음엔 긴가민가 하면서 내 말을 듣기만 했다. ‘며칠 뒤에 연락 해주겠노라’고 했지만 자신은 없었다. 그런데 며칠 뒤, 문용주 교육감이 직접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선생님, 전라북도 교육청과 한 번 해봅시다.”
당시 아이들 엄마가 남원여고에 있었고, 또 한 사람이 전주여고에 있었다. 두 학교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주 kbs와 함께 절찬리에 방영되었던 <용의 눈물>의 현장인 경기전과 전주 객사, 그리고 풍남문 일대를 걸으며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언론을 통해 알렸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새로운 프로그램을 실천하며 언론을 통해 홍보했다. 그 결과 교육부에서 <수학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어 오고 있던 문화답사를 테마가 있는 현장 체험학습으로 대체하여 전국적으로 시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현장 체험학습과 세시풍속축제를 결합한 행사들을 시행했던 전라북도 교육청이 내리 3년간 전국 교육청의 평가에서 1등을 했던 것은 전라북도 교육청의 뜻깊은 쾌거였다.
하마터면 교육청의 계약직 공무원이 될 뻔했다.
사람들은 대부분이 꿈은 꾸지만 실천하지 않는다. 우선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될 것인데, 하는 생각과 함께 귀찮다는 생각과 함께 겁부터 낸다. 혹자는 나를 돈키호테라고 부른다. 그 말은 맞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즉흥적卽興的이다.
하지만 남명 조식 선생의 말에 의하면 내가 하는 일들이 사실 지극히 정상적이다.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배움만 못하고, 오히려 죄악이 된다.”나는 일이 생각나면 실천해야 하고, 안 하면 병이 날 지경이니, 어쩌겠는가? 그런 인연으로 전라북도 교육청과 세시풍속 축제를 공동으로 개최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번 만난 문 교육감이 나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신 선생님, 교육청으로 들어와서 전라북도 문화를 활성화 시킵시다.” 어떻게요?“ ”계약직으로 직급을 높게 해서(교장 정도의 수준에서) 모시겠습니다.“ 그 제안을 받고 혼자서 많이 고민했다. 그래도 결론이 나지 않아서 가족들과, 가깝게 지내던 지인들과도 상의 했다. 결론은 안 들어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내가 혼자 그 조직 속에 들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문교육감이 있는 동안에는 가능할 테지만, 그래서 정중히 거절했다. 그 뒤로도 문교육감은 두 번을 더 들어오길 권했지만 끝까지 사양했다.
나의 인생에서 최초의 월급은 1975년 이등병 월급 690원을 받았고, 마지막 월급은 1978년 2월 병장월급 2,400원을 받았는데, 제대로 된 월급쟁이가 될 기회를 자진 반납하고 만 것이다.
그때 만약 내가 교육청에 들어갔으면 잘 했을까? 그 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 관료생활에 물든 노회한 교육공무원들에 사회생활이 뭔지도 모르는 내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문을 박차고 나오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때 처음으로 다가온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지만, 그곳으로 들어갔더라면 경험하지 못했을 수많은 일들을 경험했다. 그것들이 모여 내 인생의 가장 공을 들인 <신택리지> 10권을 다시 쓸 수 있었고, 백여 권의 책을 쓸 수 있었다.
그 당시에서부터 오늘의 삶까지를 돌이켜 보면 살아갈수록 모든 것은 운명이라는 것만을 온몸으로 체득할 뿐이다.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산천을 유람하는 것과 같다.”
내가 이 나라 이 땅을 수십 년간 답사하고 걸으면서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떠받들고 섬기는 나의 신념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나 독일의 철학자 니체를 비롯한 수많은 작가나 철학자들, 그리고 <종의 기원>을 밝혀낸 다윈과 <열하일기>를 저술한 박지원도 세상이라는 현장에서 배워서 인류를 위한 커다란 업적을 남긴 것이다.
길 위(현장)에 진리가 있고 답이 있다. 언제 어디서나 배운다. 그리고 위험을 사랑하라. 내가 꿈꾸고 실천한 최상의 덕목이다. 수학여행이나 소풍이라는 이름의 현장 체험학습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2026년 4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