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세이] 탈해왕릉에서 신라의 향기에 취하다
민병식
경주 도심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월성원자력발전소가 위치해 있는데 바로 여기에 신라 제4대 탈해왕의 탄생 설화가 스며있는 곳이 있다. 원자력 발전소 정문으로 들어가다 보면 왼편에 주차장이 보이는데그곳에 고풍스러운 비각이 한 채 세워져 있는데 바로 바로 석탈해왕탄강유허비가 있는 곳이다.
왜국에서 동북으로 400여 km 떨어진 용성국 왕비가 오래도록 아들이 없다가, 7년 뒤에 큰 알을 하나 낳았다. 이는 상스럽지 못한 일이라 하여 왕이 궤 속에 알과 칠보를 넣어 바다에 띄워 보낸다. 왕은 궤를 띄워 보내면서 인연 있는 땅에 도착하여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고 한다. 궤를 실은 배를 붉은 용이 나타나 호위하며, 그 궤가 신라 땅에 닿자 아진의선이라는 노파가 이를 발견한다. 삼국유사 기이편에 의하면 신라 동하서지촌 아진포라 기록되어 있는 곳에 아진의선이란 노파가 살고 있었다. 노파는 매일 멀리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살았는데, 하루는 한 척의 배 위에 수많은 까치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이를 기이하게 여겨 배 위로 올라가 이곳저곳을 살펴본다. 배 위를 살피던 중갑판 위에 놓여있는 큰 나무 상자 하나를발견한다. 궁금하여 열어보니상자 안에는 알에서 깨어난 남자아이와 종들이 있었고, 수많은 금은보화가 쌓여 있었다. 이 사내아이를 데려다 키우면서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고 한다. 노파가 아이를 발견하여 데려올 때 배에 까치들이 울며 따라왔다. 그래서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 자를 떼서 석(昔)으로 성을삼았다고 전해진다. 또 타밀어로 대장장이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뜻으로 대장장이의 지도자임을 암시하고 있다고도 한다.
신라 땅 아진포에 도착한 탈해는 거주할 집을 찾기 위해 토함산에 오른다. 토함산에 올라 7일동안 서라벌을 관찰하다 초승달 모양의 산봉우리를 발견하는데 풍수지리적으로 지세가 오래 살 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탈해는 지략을써서 그곳에 몰래 숫돌과 숯을 묻고, 이 집이 원래 자기 조상의 집터라고 주장한다. 탈해의 강력한 주장에 황당해하던 호공은 이를 관청에신고한다. 고를 받은 관리가 직접 현장에 와서 "무슨 근거로 너희 집이라고 우기느냐?"라고 물었다. 탈해는 기다렸다는 듯이 관리에게 "이땅은 아주 오래전부터 살던 곳으로, 우리 집안은 대대로 대장장이였으니, 집 주변을 파 보면 그 증거물이 분명히 나올 것이오"라고 허위 진술하여 호공의 집을 빼앗았다. 탈해가 자기 집터라고 우겨 뺏는 집터가 바로 지금의 경주 반월성이라고 한다.
신라왕은 박, 석, 김 세 성씨이다. 그중 석씨 왕 가운데 최초가 제4대 탈해왕이다. 탈해는 남해왕의 부인 아효부인과 혼인하여 사위가 되었고 남해왕이 죽은 후 유리왕과 왕위를 두고 경쟁을 벌이는데 이빨로 떡을 깨물어 이빨의 개수를 센 결과 유리왕이 왕위에 오르고 유리왕이 죽은 후 탈해와 왕위에 올랐다.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웅장하고 경건한 분위기의 탈해왕릉은사적 제174호로 지정되어있다다. 높이4.5m, 지름 14.3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 무덤이다. 그 중요성을 살펴보자면 신라에서 석씨성을 가진 여덟 왕 중에 무덤이 남아 있는 것은 '탈해왕릉' 뿐이다. 왕릉 주변에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았고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이라고 한다.
왕이 세상을 떠나자 삼국사기에는 성북(城北)의 양정(壤井)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였고, 삼국유사에는 문무왕의 꿈에 탈해왕이 나타나 수장하였다가 뼈로 소상(塑像)을 만들 것을 이야기했고 문무왕은 뼈로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였다고 하나 삼국사기 기록이 현재의 탈해왕릉 위치와 부합된다. 또한 굴식돌방무덤이기에 500년의 차이가나는 무덤양식으로 탈해왕의 무덤이라고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조선후기부터 탈해왕의 왕릉으로 내려져 왔으며 그 의미는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탈해왕릉 동편에는 제사를 모시기 위한 숭신전이 있다. 숭신전은 경주 반월성에 있던 민가를 철거하면서 1980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왔으며, 서북쪽에는 경주 표암이 위치해 있다. 경주 표암은 신라6촌 가운데 근본이 되는 알천양산촌의 시조 이알평공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전하는 곳이다. 신라 유리왕 9년 육촌을 육부로 개칭하고 각 촌장에게 성을 하나씩 하사하니 알평에게는 이씨, 즉 경주이씨의 시조가 되는데 삼국 유사에 의하면 바로 알평이 하늘에서 내려온 장소가 경상북도 사적 제54조인 표암이다. 표암과 탈해왕릉을 가까이 있으나 함께 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표암은 기원전 69년에 6촌장이 모여 화백회의를 열고 신라 건국을 의결했으며 기원전 57년에 신라가 건국되었다. 따라서 표암은 신라 건국의 산실이고, 없어서는 안될 역사적 유래를 가진 곳이라 보면 되겠다.
석탈해는 사실 태생부터 신비하고, 석씨왕조의 시조 답게 신기한 탄생설화를 갖고 있다. 즉, 박혁거세 설화, 김알지 설화로 더불어 신라의 3대 설화라고 할 수 있는데 신라 역사상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탈해는 동해안을 거쳐 경주지방으로 들어왔다는 것이고 바로 지금의 형산강 하류를 의미한다. 둘째는 토착세력인 호공을 제압하고 당시 사로국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것이다. 이는 토착세력들이 탈해에게 지배당했음을 알 수 있는 증거이다. 셋째, 토착대장장이의 우두머리 등의 이야기로 볼 때 토착 세력을 제압할 만한 우수한 철기 문화를 갖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탈해왕릉은 8년 전만 하더라도 경주 시민들의 화장터가 있었던 소금강산 아래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자연적으로 사람들의 발길도 뜸했던 곳 그러나 주변에 주차장과 현대식 화장실을 설치하고, 왕릉의 울창한소나무 숲 사이로 산책로가 만들어지자, 요즘은 힐링 숲으로 널리 알려져 주민들과 관광객의 발길이 부쩍 잦아지고 있다.
사실 우리는 경주의 왕릉 단지, 석굴암, 첨성대 등 여러 번씩 가보았지만 사실 표암이나 탈해왕릉등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표암과 탈해왕릉 신라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임에도 신라의 중요한 한 줄기임에도 잘 몰랐다. 이번에 탈해왕릉을 방문하면서 삼국유사에서도 기록되어있는 이 역사의 현장에 모두 한 번씩 가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어졌다. 박, 석, 김으로 이루어진 신라의 왕들가운데 한 줄기를 당당히 형성했던 탈해왕, 그의 의기와 기상이 있는 곳에 천년고도 신라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