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날씨가 더워 아스팔트 바닥은 지글지글 타듯이 뜨거웠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으며, 그늘 하나 없었다.
버스 정류장을 앞두고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마침 맞은 편에 내가 타려던 버스가 도착했다.
다행히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그 당시엔 사람이 안 지나가면 버스가 신호를 무시하고 휙 가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기에, 난 옆에 차가 멈추는 것을 확인한 후, 왕복8차선인 횡단보도를 열심히 뛰었다.
그러다 1차선을 건널 때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포터(1톤 트럭)에 난 부딪히고 말았다.
내 기억으론 차 바퀴가 내 발등 위로 지난간 것 같다.
나를 쳤던 차도 가 버리고...
난 쓰러졌고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신호가 바뀌고 다른 차에 치이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나를 보며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려왔고.
그런데 기적같이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마침 경찰이 있었고, 나를 쳤던 차는 돌아와 나를 태우고 병원에 갔다.
다행히 뼈가 다치진 않았지만, 발등엔 심한 찰과상이, 팔다리는 꼭 순대처럼 변해 있었다.
난 걸을 수가 없어서 대신 아빠가 경찰서에 갔었다.
운전자는 나보다 2살이 많고 시골에서 올라와 이모부 밑에서 트럭을 모는 일을 하고 있는데, 아빠는 불쌍하다며 병원비만 보험 처리하는 걸로 하고 합의를 해 주었다.
병원비 뿐만이 아니라 그 외 들어가는 돈도 있고(심지어 그 당신 1회용 주사기도 따로 사오라고 했다) 엄마는 병원에서 나를 간병하느라 힘들었을테고 아빠랑 언니도 퇴근 후엔 병원으로 왔었다. 게다가 병원이 집하고는 멀어서 이래저래 가족들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입원한 후로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피의자에게 화가 난 엄마는 괜히 합의해 줬다며 속상해 하며 피의자에게 전화를 했고,이모부란 사람이 오렌지 쥬스를 사가지고 와서 병원비는 보험으로 다 처리되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간 게 전부였다.
난 입원해 있느라 개강을 하고도 한동안 학교에 못 갔고, 그 해 찬바람이 불 때까지 물리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다녀야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는 차를 다 보내고야 길을 건넌다.
우리 아파트 앞 상가에 가려면 신호등이 없는 왕복2차선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예전엔 별로 차가 없었는데, 길이 뚫리면서 지나다니는 차가 많아져 요즘은 하염없이 기다릴 때도 많았다.
그러다 작년 연말에 친구 페북에서 2022년에 바뀌는 교통법규에 대한 글을 보았다.
친구는 우리나라는 보행자보다 운전자 위주라는 내용의 글이었고, 그래 나도 이제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널 때 차에게 양보하지 않으리란 결심을 했다.(내 권리를 찾아보겠다는 소심한 결심)
그 후 횡단보도에서 차가 달리고 있을 때 길을 건너자, 그동안 멈추지 않고 달리던 차들이 마법처럼 멈추기 시작했다.우와~
그렇게 한 달여가 지났고, 며칠 전 길을 건너려고 하는데 상가 건물 앞에 트럭이 정차되어 있었다.
지하에 주차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아끼고자 또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트럭들이 상가 앞에 차를 세우고 물건을 옮긴다.
길을 건너려니, 트럭 때문에 오는 차가 보이질 않는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 앞에서 차가 멈췄다 가야하지만 그런 운전자는 정말 가뭄에 콩나듯 찾아보기 힘들다.
이럴 때 길을 건너다 다치면 나만 손해지.
새해 나의 소심한 결심은 무너지고, 또 3대의 차를 보낸 후 길을 건넌다.
물론 차조심은 해야겠지만, 살다보면 규칙을 지키면 손해본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 때가 있었다.
공교육만 믿고 학원에 안 보내다 내 아이 점수가 낮게 나왔을 때...ㅠ
그리고 문득 나를 쳤던 그 운전자가 궁금해진다.
그 후론 신호를 잘 지켰을까?
첫댓글 헉!! 큰일날 뻔 하셨네요. ㅠㅠ 뉴스에서도 정차된 트럭 사이로 아이가 뛰어나오다 오토바이사고가 난 경우를 봤는데(왕복 2차선 넓이의 골목) 애먼 부모가 애를 방치했다느니 애들이 조심성이 없다느니 하면서 오토바이 운전자가 불쌍하다는 반응들이 많아서 정말 화가 나더라구요. 제가 봤을 땐 불법 정차된 트럭 잘못이 제일 큰데요.. 에휴.. 그 당시 아버지는 선생님 또래의 젊은이라 측은하게 봐주신 것 같네요. ㅠㅠ 고생 많으셨어요.
오마이갓! 트럭에 치인 추억(?)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건데…. 규칙을 지키면 손해보는 기분 뭔지 알듯요. 하지만 쌤이 그런 분이라 저는 쌤이 좋은걸요~~~
영화관에서 앞 줄 사람이 일어나니까, 뒷 줄 부터는 앉아서보고 싶어도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비유가 생각나요. 아이 키우기야말로 상식적인 규칙을 지키면서 해야 하는 일인데...
어머나~ 엄청난 경험을 하셨군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