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장훈
장훈은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적 인물이다.
장훈 선수가 히로시마 출신이고, 원폭 피해자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것도 당시 원폭피해 현장 1Km 이내에 있었다고 한다.
무더운 여름 날씨였던 1945년 8월 6일
당시 5살이던 장훈 소년은 친구들과 밖에 놀러 가려던 참이었다.
번쩍! 쿵! 하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되찾았을 때 어머니가 꼭 껴안고 계셨다.
유리 파편에 찔린 어머니 치마저고리는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급히 피난을 하려고 마을의 밭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살이 탄 사람들 천지였다.
사람의 살이 타는 심한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원폭이 일으킨 3,000도가 넘는 열기는 지옥이었다.
완전 전소되거나 파괴된 건물은 5만2천 채, 폭발지에서 1.2Km 구역 내에 살던
히로시마 주민 절반이 사망했다.
백혈구 감소 등 방사능 피폭 후유증으로 히로시마 인구의 40% 14만 명이 사망하였다.
열이 사람 몸을 태워 얼굴과 손모양이 바뀌었다.
사람의 살이 타는 냄새는 끔찍스러웠다.
뜨거운 열기를 피하려고 물속에 뛰어든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순간 장훈 선수가 겪은 충격적 회고다.
부유하지 못했던 그의 가족들은 에도시대(1603-1868년)부터 산 중턱의 후미진 부락에서 살았다.
산이 원폭 방사능과 열기를 막아 주었기에 살아날 수 있었다.
원자폭탄은 인간을 살상하고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가장 흉포한 무기다.
더욱 무서웠던 것은 원폭 이후의 사회상(社會相)이었다.
피폭자는 한국인이건 일본인이건, 일본 사회에서 차별을 받았다.
원폭으로 인해팔 다리가 없거나, 화상을 입은 아이들하고는 친구들이 놀아 주지를 않았다. 부모들이 ‘피폭도 전염병처럼 옮는다'. 고 생각했다.
피폭 순간이 기억날 때면 장훈 선수는 ‘사람 타는 냄새’가 떠오르고 무서워
정신없이 배트를 휘둘렀다고 했다.
장훈 선수는 “한국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다.
한 번도 한국인임을 숨긴 적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했다.
장 선수를 한국인이라고 자각하게 해 준 사람은 어머니 이었다.
한 일본 프로야구 구단에서 장훈 선수에게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일본 구단으로 들어가려면 일본 국적을 가져야만 했다.
해결 방안으로 구단주의 양자로 입양하여 입단 시키겠다는 것이다.
구단 측의 말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됐다. 야구 그만둬라.
조국을 팔면서까지 야구선수가 될 필요는 없다.”
장훈 선수의 전부였던 야구보다, 지긋지긋한 가난 탈출보다, 어머니에겐 조국이 더 소중했던 것이다.
‘국적은 종이 한 장으로 바꿀 수 있지만, 민족의 피는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장훈 선수는 23년간 2,752 경기에서 3활 1푼 9리의 타율, 안타 3,085개, 수위타자 7회의 대기록을 남겼다.
장 선수가 3,000안타의 대기록을 세웠을 때 어머니 박순분 여사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야구장에 들어섰다.
피나는 연습을 한 이유로 어머니를 꼽았다.
“성공해서 어머니께 비단저고리 사 드리고 돈도 많이 드리겠다”.고 다짐했다.
대한민국 훌륭한 어머니에 장한 아들이다.
우리는 지금 북한의 반복되는 핵도 발을 보며 살고 있다.
언제라도 ‘번쩍’ ‘쿵’하는 순간이 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핵폭탄에 의한 인류의 비극은 히로시마에서 끝나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만은 일어나선 안 된다.
첫댓글 모두 다시 한번 생각하며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은 일이지요.
피해 받은 원폭돔을 그대로 두고 보면서 정신교육을 시키는 일본
우리도 정신 무장은 물론 마음가짐도 항상 잊어서는 안되겠지요.
모두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