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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22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에즈 9,5-9
복 음 : 루카 9,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2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3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4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5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6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는 스포츠 경기를 좋아합니다.
예전에는 몸으로 직접 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체력도 안 되고 또 여건도 되지 않아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응원하는 팀이 생겼습니다.
며칠 전에도 응원하는 팀의 경기를 보고 있었습니다. 여유 있게 이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판에 실수가 계속 터져 나오면서 역전되어 지고 말았습니다.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났습니다. 그냥 신경질적으로 텔레비전 전원을 껐습니다.
원래 어떤 경기든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길 수도 있고 반대로 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졌다고 해서 신경질을 내는 것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나의 욕심대로 흘러가야 한다는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불평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뜻을 내려놓으면 삶 자체를 즐길 수가 있습니다.
자기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르면 세상의 눈으로는 어렵고 힘든 삶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서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여기까지는 당연히 그렇게 해줘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주님의 말씀은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게 합니다.
글쎄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합니다.
조그마한 유혹에도 금방 흔들리는 제자들이 아닙니까?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처음으로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러 나가니까
부족함 없이 챙겨줘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서 주신 권한만을 간직할 것을 명하십니다.
세상의 관점이 담겨 있는 자기 뜻을 내려놓고 대신 주님의 뜻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있어야 하고 저것도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주님께서 주시는 권한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를 직접 체험하게 됩니다.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든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줄 수 있었습니다.
성공적인 전교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주님께 얼마나 많은 청원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까?
그런데 정작 가장 필요한 주님의 뜻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은 청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청하면서, 점차 주님을 내 삶에서 제외합니다.
만족의 삶이 아닌, 불평불만의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삶이 아닌, 어렵고 힘든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만족의 삶은 주님의 뜻을 품을 수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우리를 되살려 주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에즈 9,5)
제1독서에 등장하는 에즈라의 기도는 바빌론 유배가 끝난 뒤 돌아온 유배자들이
성전을 다시 지어 봉헌하고 파스카 축제를 지낸 뒤의 일입니다.
이후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즈라는 아론 가문 출신으로 모세의 율법에 능통한 학자였는데,
유다인들이 이민족들과 혼인하여 그들의 풍습과 우상을 따라간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 망연자실 있다가 주님께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저희 눈을 비추시고, 종살이하는 저희를 조금이나마 되살려 주셨습니다."(에즈 9,8)
"정녕 저희는 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
저희에게 자애를 베푸시어 저희를 되살리셔서"(에즈 9,9)
에즈라는 나라의 멸망과 유배, 귀환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자신들의 죄악과 잘못에서 찾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희망이 없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되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을 지으시고 사람을 빚어 코에 숨을 불어넣어 주실 때부터, 하느님은 살리는 분이십니다.
죄악으로 넘어지고 죽어가는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분도 주님이시지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 날이 오면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을 영원히 살게 하실 분도 주님이십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은 살리고, 되살리고, 마침내 영원히 살게 하는 분이시지요.
복음에서는 되살리시는 하느님의 활동이 성자 예수님을 거쳐
제자들에게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루카 9,1-2)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당신의 능력을 나눠 주시고는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구마와 치유, 하느님 나라 선포 등등, 그들에게 원래부터 그런 능력이 있었을 리 만무하지만,
주님께서 권한을 부여하시고 파견하시니 믿고 가야 합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 머물러라. ... 떠날 때에 먼지를 털어 버려라."(루카 9,3-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지침은 소유와 머무름, 떠남에 대한 것들입니다.
구마나 치유, 선포 등 내용에 대한 것은 애초부터 그들의 것이 아니었으니
필요한 순간에 그분께서 친히 채워 주실 겁니다.
이제 제자들에게 필요한 건 믿음입니다.
교통이나 지역 정비가 잘 되어 있지 않은 시대에 길을 떠나면서
식량과 옷, 생필품과 무기 등을 챙기지 않는 것은 안전은 물론 목숨까지도 내어맡기는 결단입니다.
미지의 고장에서 신세지거나 떠나는 일조차 일면식 없던 사람들의 호의에 맡겨야 하니,
그 호의나 배척 뒤에 자리한 하느님의 섭리를 철저히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6)
제자들은 자기들을 파견하신 예수님을 믿고 되살리는 일에 전념합니다.
그들이 전하는 말씀이 어둠에 갇힌 이들을 희망으로 되살리고,
구마와 치유로써 악령과 질병에서 그들을 되살립니다.
제자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억울하고 지치고 절망스런 영혼들을 되살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단 한 번의 단발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눈조차 떼지 않으시고 지켜 주시는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 죄와 질병과 두려움으로 스러져갈 때마다 지치지 않고 반복해서 되살려 주십니다.
우리의 어둠이 아무리 짙고 절망이 커도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반드시 다시 일으키러 오실 것이니,
언제라도 온 힘을 다해 그 손을 붙잡을 수 있도록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그분이야말로 우리에게 유일한 생명,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아멘.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복음 환호송)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 6)
한상우 바오로 신부
새로운 날이다.
돌보시는
주님께
드리지 못할 것은 없다.
사람과
함께 하시는
복음의 주님이시다.
우리가 아프면
예수님께서도 아프시다.
끝이 없으신
지극한 사랑이다.
못난 우리들의
마음과 몸을 고쳐주신다.
묶이고 갇힌
우리들 삶을
복음으로
활짝 열어주신다.
치유 없이
우리는
성장하지 않는다.
한계와 결핍이
주님의 치유를
만나는 은총이 된다.
주님의 치유는
사랑이다.
참된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올바른 삶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사람들을
돌보시는 복음이다.
고통을
치유하는 복음을
우리는
오늘도 만난다.
복음은
새로운 차원의
하느님 사랑을
만나게 한다.
회복시켜
살게 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복음 앞에
우리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연약함을 봉헌하는
새로운 날이다.
온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나는 믿는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산보 길에 길 잃은 어린 참새를 보았습니다.
가까이 가니 아직 잘 날지 못합니다. 날개 짓을 하지만 1미터를 넘지 못합니다.
가녀린 날개, 걷기에도 힘이 부치는 작은 발, 갈 곳을 몰라 하는 눈망울을 보았습니다.
어린 참새가 엄마를 찾고, 친구를 만나서 재잘거리면 좋겠습니다.
알을 깨고 이 세상으로 나왔으니, 참새로서 기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2005년 캐나다 연수를 시작할 때입니다.
추운 겨울 온타리오 호수 주변의 가로등에 외로이 앉아 있던 갈매기를 보았습니다.
당시에는 외로운 갈매기처럼 저도 외롭고 쓸쓸했습니다.
겨울이 지나니 봄이 찾아왔고, 한인성당의 미사를 도와주면서 교우들을 만날 수 있었고,
여름에 활짝 꽃이 피듯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련한 추억입니다.
지난 8월 23일에는 서품 30주년을 맞이해서 감사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1년 동안 미사를 도와드리고 있는 부르클린 한인 성당에서 축하해 주었습니다.
퀸즈 한인 성당에서 동료신부님들과 감사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의 필진, 엠이 봉사자들, 부르클린 교우들, 퀸즈의 교우들이 함께 하셨습니다.
필라델피아 한인성당에서 서울교구 사제들이 함께 감사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태풍의 영향으로 하루 종일 비가 내렸지만
저를 기억해주고, 함께 해주신 분들이 있어서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80이 넘으신 신부님께서 덕담을 들려주셨습니다.
지나온 30년을 감사드리고, 앞으로 남은 시간도 감사드리면서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2코린도 4,16)
그렇습니다. 나이를 숫자로 생각하면 주름이 늘고, 경험으로 생각하면 연륜이 쌓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마치 내가 너희를 이리 때 속으로 보내는 것 같구나!’
제자들이 가는 길이 결코 쉬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현실의 삶에서 꼭 필요한 것들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주님과 함께 지냈고, 주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제자들이 파견되어서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소유와 욕심을 버릴 때, 우리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2달간 뉴욕에 머무시던 신부님은 제게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행동으로 사제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매일 아침 미사를 혼자 준비하셨습니다.
미사에 오는 교우들을 위해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80이 넘은 노구에 힘이 들기 마련이지만 신부님을 찾아오는 신자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셨습니다.
허리가 아픈 사람, 다리가 아픈 사람, 잠을 잘 못자는 사람,
말이 어눌한 사람, 늘 피곤한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신부님은 정성껏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수경침으로 도움을 주셨습니다.
돌아갈 때는 활짝 웃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이스라엘의 다른 마을로도 복음을 선포하여야 한다.’라고 하셨던 것처럼
신부님도 뉴욕에서의 시간을 마무리하시고 LA로 가셨습니다.
그곳에도 신부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훌쩍 떠나셨습니다.
내년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오시도록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 ‘나의 세례명’은 무엇인지, 나의 성인께서는 어떤 삶을 사셨는지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먼저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를 이긴 사람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산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병을 고치는 권한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재물에도 집착하지 말고 애정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집착이 영적 능력을 감소시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줍니다.
따라서 루카 복음의 이 말대로 하면 병을 고치는 능력과 복음을 전하는 능력은 같은 것입니다.
영적인 능력이 부족한 상태로 말로만 복음을 전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말보다 사람의 존재를 먼저 믿으려 합니다.
진실한 사람에게서 진실한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여자 임금이 딱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로 당나라의 측천무후입니다.
측천무후는 훌륭한 남자를 늘 곁에 두고 국정에 관한 의견을 듣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주위의 눈총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좋은 꾀를 생각해 냈습니다.
당대에 덕망 높기로 유명한 두 스님을 궁궐로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한 스님은 당시 국사(國師)로 있던 ‘충국사’였고 또 한 스님은 ‘신수’(神秀) 대사였습니다.
여왕과 함께 있으려면 조금이라도 여색을 탐해서는 아니 되었기에
측천무후는 두 스님 중 여색에 초연한 스님을 고르려는 것이었습니다.
“스님들도 때로는 여자 생각이 나십니까?”
측천무후가 두 스님을 떠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충국사는
“우리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라고 단호해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신수 대사는
“몸뚱이가 있는 한 그런 생각이 없을 수 없겠지만 다만 방심치 않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측천무후는 두 번째 테스트에 들어갔습니다.
두 스님을 큰 목욕탕으로 안내하여 목욕을 시킨 다음
아름다운 궁녀를 시켜 두 스님의 때를 닦아 드리게 하였습니다.
그래놓고 자신은 목욕탕 꼭대기에 앉아 두 스님을 몰래 관찰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절대로 여색에 동하지 않는다던 충국사는 몹시 흥분해 어쩔 줄 몰라 했고
신수 대사는 여여(如如)하여 조금도 달라짐이 없었습니다.
측천무후는 “물에 들어가니 길고 짧음을 알겠더라(入水見長).”라는 시를 짓고
이후 신수 대사를 곁에 두고 늘 국정을 논하였습니다.
[출처: ‘이 책을 읽으면 유능해지고 부자가 됩니다’, 유튜브 채널, ‘북올림’]
사람이 믿을 수 없다면 말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성덕의 길고 짧음은 실제 그런 상황에 다다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사람은 자신과 싸워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과 싸워본 적이 있다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이길 수 없음을 잘 알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상황이 오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재물을 아예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재물이 있으면 그것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며,
이집 저집으로 거처를 옮기지 말라는 말도
역시 더 좋은 거처나 사람을 찾기 위해 신경을 분산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세속-육신-마귀’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사람 자체가 믿지 못할 사람이 되기 때문에
누구도 그런 사람들이 전하는 복음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이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나의 말도 믿게 됩니다.
영국이 역사상 가장 부강했던 때는 엘리자베스 1세 시기라고 합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눈치 보며 살아야 했던 영국을
무려 40년 동안 세계 최강국으로 만든 여군주가 엘리자베스입니다.
그녀는 특히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앞으로 수백 년 동안 전 세계인이 영어를 배워야 하게 만들었습니다.
군주는 백성의 신임을 얻어야 하거나, 정략결혼 등을 통해 적을 만들지 말아야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이전의 대부분의 왕은 정략결혼을 통해 세상과의 타협을 추구하였습니다.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 헨리 8세도 재혼을 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을 등졌습니다.
심지어 재혼을 위해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인 앤 볼린을 참수하였고,
6번의 결혼을 하는 동안 또 다른 아내도 참수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였지만 실제로 세 번째 아내에게 아들을 얻었기에
이것도 핑계로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아버지로부터 딸로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그 사람과 나누었던 편지가 있었고
마지막 때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고도 합니다.
그녀는 결혼하는 대신 독신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짐은 국가와 결혼했노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당시 무적함대를 무찌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백성을 하나로 집결할 힘이었습니다.
수적 우세에도 제대로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한 아프가니스탄 군인들을 보며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싸움을 승리로 이끈 엘리자베스 여왕의 힘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국은 그녀를 중심으로 똘똘 뭉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꼭 종교 안에서만 자신을 절제하는 이가 성령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어디에나 해당하는 예외가 없는 규칙입니다.
육을 살리려면 영은 죽고 영이 살면 육이 죽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진정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끊어야 하는 것을 끊습니다.
영과 육은 반대입니다. 그러니 육을 끊는 작업을 죽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믿게 될 것이고 나를 믿게 되면 내가 전하는 복음도 믿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다음 하는 말들은 허공의 메아리가 될 뿐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