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미움
소순희
초등학교 2학년 그해 가을까지 나는 한글을 읽지 못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고도 오랜 뒤, 밤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어느 밤부터
나는 이웃 선예네 마실 가는 큰 누나를 따라가 숙제로 내어 준 국어책 한 단원을 몇 번이고 따라 읽으며 차츰 한글에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다음날 국어 시간에 담임 성낙형 선생님께서 그 단원을 펴시며 읽어 볼 사람? 하신다.
나는 슬며시 손을 들었고 한글을 읽지 못한 나를 놓칠 리 없는 선생님은 "순희 읽어봐!" 하신다.
어젯밤 늦도록 외우다시피 한 글을 읽기 시작 했고 한글을 읽지 못한 애가 줄줄 읽어 내려가자
선생님과 반 애들은 의아한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으리라.
다 읽자, 선생님은 그윽한 눈빛으로 "자 박수!" 하며 먼저 박수를 치자 반 애들 모두 손뼉을 쳐 주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박수를 받아 본 순간이었다. 이건 희망이었다. 그리고 가을은 짧게 지나갔다.
그리고 십여 년이 훌쩍 지나, 도회지(서울) 생활 중 나는 군대 문제로 귀향했고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독자였던 터라
의가사 명을 받아 자전거로 사십 여 리를 통근하며 지역 중대 행정병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아, 근데 이백면 입구 버스 정류장에 성락형 선생님이 서 계시지 않는가!
왜 그랬을까! 특수임무를 띤 병이 어떻다고 창피해서 그만 선생님을 지나치고 말았다.
특수 임무는
ㅇ유사시 산꼭대기에 올라가 도시락을 번쩍거려 적의 레이다를 교란시킨다.
ㅇ 유사시 적의 포로로 잡혀 적의 식량을 축낸다.
ㅇ유사시 적의 동사무소에 침투해 동 행정을 마비시킨다.
ㅇ적의 포로로 잡혔어도 5시만 되면 칼 같이 퇴근한다. ㅋㅋㅋ
선생님을 지나치고만 그 후 그 모습이 늘 머릿속에 생생하다.
선생님께서는 이미 세상에 아니 계시다는 걸 안다.
그 때 따스한 선생님 손 한 번 만이라도 잡아드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글을 깨우치도록 지도해 주신 우리 선생님!
학교란 집단생활이 시작 된 1학년에 입학 하고 부터 생소한 학교생활에 적응하기까지는
몇 개월이 흘러야 했다. 그때 내 모습은 빡빡머리에 마른버즘이 핀 새까만 얼굴에
유독 눈만 희번덕거렸고 코는 늘 오르락 내리락 흘러나와 옷소매로 닦느라 양 옷소매 끝은 늘 반들거렸다.
검은 고무 신에 보자기로 책을 싸 들고 어깨에 메고 다녔다. 그러기를 6년 내내 했으니 더 떨어질 것도 창피함도 없었다.
1학년 그 어린 시절 다른 과목은 물론 국어 시간 받아쓰기는 내게 고문이었다.
그야말로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인 게 사실인데 눈 뜬 소경이나 매양 한 가지였으니 어찌하랴!
받아쓰기 시간, 내 공책은 붉은 비가 내렸고 두 줄 위에 ㅇ 이 늘 올라앉아 있었다.
그러면서 어린 내게 마음 졸이며 보낸 시간은 스트레스였고 허무였다.
담임인 여자 박 선생님은 그런 나를 마주칠 때마다 눈을 흘기고 쥐어박았다.
그 손맛은 왜 그리 아픈지 눈물이 찔끔 나곤 했다.
나는 그 눈빛과 굴욕감에 학교 가기가 죽기보다 싫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학교에 다녔고
1학년도 덧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2학년이 되자 살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 여자 선생님 닮은 얼굴만 보면 피해지는데 상처가 컷던 게 사실이다.
코 흘리면 닦아 주고 모른 것 있으면 용기와 사랑으로 감싸주며 이끌어 주었으면 오늘을 사는데 더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지 않았을까!
오늘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나 가끔은 되돌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모든 생명 있는 것은 사랑을 준 만큼 자란다고 하지 않던가!
2008.11
<구례구 역에서>
<중리가는 사잇길/100호/소순희>
첫댓글 그게 참...사람의 마음이란 어쩔 수 없는 듯.
오래 세월이 흘러도 각인된 기억은 흐려지지 않고
마음을 넓히려 해도 쉽게 너그러워지지 않는.
그래도 또 여전히 살아는 간다 는.
어린 마음에 얼마나 두렵고 괴로운 시간들이었을까요?
어린 순희를 따스하게 안아주고 토닥여주고 싶네요.
지금의 제 손주에게 해 주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