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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23일 목요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제1독서 : 하까 1,1-8
복 음 : 루카 9,7-9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7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외부 식당에 가는 것이 꺼려집니다.
그래서 신부 모임이 있으면 사제관에서 고기를 구워 먹거나
몇 가지 요리를 직접 해서 함께 먹곤 합니다.
얼마 전에도 신부 몇 명이 갑곶성지를 찾아왔고,
이 신부들을 위해 양고기 요리를 했습니다.
신부들의 만족도는 아주 높았고, 너무 맛있다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맛있는 양고기를 어디에서 샀어?”
좋은 양고기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사실 굽기 전에 미리 해놓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
핏물을 제거하고 고기 손질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올리브기름과 소금 그리고 마늘 다진 것을 올려놓아 밑간한 뒤에
랩에 싸서 냉장고에 5시간 정도 숙성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 뒤에 만족도 높은 양고기 요리를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신부들은 이런 전 단계가 있는지를 전혀 모릅니다.
단순히 고기 상태만으로 이런 양고기 요리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전 단계 없이는 만족도를 높일 수도 없고 맛을 제대로 낼 수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면서 결과만을 말하는 우리의 모습을 삶 안에서 종종 발견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해 지금을 잘 사는 것이 아닐까요?
헤로데 영주가 몹시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죽은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소문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디아의 춤 값으로 아무런 죄가 없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내어 준 커다란 죄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가 이렇게 했던 이유는 눈에 보이는 체면 때문이었습니다.
체면 때문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헤로디아가 춤추는 것을 보고서
사람들 앞에서 어떤 소원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자 헤로디아는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고,
자신의 체면 때문에 그 소원을 들어주었던 것이지요.
눈에 보이는 많은 사람 앞에서 했던 약속을 스스로 철회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유한한 사람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커다란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체면은 그 순간에 손상된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하느님과의 관계가 손상된다면 다시
이를 회복하기란 너무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바라보며 사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것을 바라보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황하며 두려워하는 헤로데 영주의 삶이 아닌,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본질을 잡으라고 촉구하십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루카 9,7)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헤로데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그가 몹시 당황합니다.
자기가 목을 벤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건 아닌지
걱정하는 것으로 보아 두려움이 영 없지 않은 것 같기도 하지요.
예수님의 인격과 가르침, 구마와 치유에 대한 백성의 놀라움,
기대, 희망이 헤로데에게는 썩 달갑지 않아 보입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 하였다."(루카 9,9)
헤로데의 물음은, 하지만 진정한 앎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알고 싶고 또 만나고 싶다는 건,
그로 인해 자신이 변화되기를 허락하는 모험을 감수하겠다는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헤로데에게서는 그런 지향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두려움이 더해진 얕은 호기심일 뿐이지요.
제1독서는 주님께서 하까이 예언자를 통해 성전 건립을 재촉하시는 대목입니다.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하까 1,5.7)
이 말씀이 두 차례나 반복된 이유는, 성전 건립이라는 절대 과제 앞에서
백성들에게 먼저 지난 삶을 성찰해 보라는 강조하시기 위함입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뒤 나름 사명감과 열정을 가지고 시작한 성전 건립이었지만,
그리 넉넉지 않은 귀향민들의 재정 형편과 사마리아 주민들의 방해로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건립의 재개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과 같은, 먹고살기 위한 일상에 매몰되어 버렸지요.
주님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라고 하시면서,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하까 1,6)이지 않았느냐고
아주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일깨워 주십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리라."(하까 1,8)
주님께서는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성전을 지으라고 촉구하십니다.
하느님 백성에게 성전을 짓는 일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다시 세우고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이 본질을 외면한 채로는, 아무리 세상사에 혈안이 되어 애를 쓴들
손에 바람을 잡듯 헛수고일 뿐이지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이 말씀을 재차 음미해 보면,
"산"은 하느님 현존의 장소를, "나무"는 생명의 나무인 십자가를 떠올리게 해 줍니다.
"집"은 문자적 해석으로는 당시 건립이 시급한 실제의 성전이지만,
그 이면에는 성령의 성전인 우리 존재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돈도 좋고 인간관계도 중요하고 신분과 스팩, 커리어도 필요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게 본질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존재의 주인이신 분, 그 정수로 들어가는 과정 곳곳에 쌓여 있는
여러 층의 껍질들 정도일 듯합니다.
우리의 과제는 그 껍질들이 주는 풍요와 안위에 취해 거기서 멈추기보다,
그것들을 뚫고 본질로 들어가 거기 계신 주님을 알고 만나고 사랑하고 하나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심리적 두려움이나 기복적 청탁, 얕은 호기심이나 체면치레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세례를 받고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갈망 없이
신앙과 데면데면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면,
행여 신앙에 물들어 세속적 성공 대열에서 이탈하게 될까 봐 선을 긋고 있다면,
자칫 신앙 때문에 자신이 변화될까 봐 경계하고 있다면
아직 헤로데 차원의 헛된 물음만 남발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아직 영혼의 성전 건립은 시작조차 못한 거지요.
사랑하는 벗님!
이렇게 날마다 말씀을 중심으로 모이는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진심으로 궁금하고,
그분을 만나 그분 인격에 맞닿고 싶고,
그분과 일치하여 사랑이 되고픈 이들입니다.
이 사랑의 갈망이 나날이 뜨거워지고 열렬하지고 성숙해지길 기원합니다.
생명의 근원이시고 목적이시며 본질이신 분께
매일 조금씩 더, 더, 더 가까워지고 있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오상의 성인,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 9)
한상우 바오로 신부
끌림과 울림
사이에
깊어가는
가을이 있다.
존재와 존재의
참된 만남이
참으로 중요한
우리들 관계이다.
복음은
참된 만남이다.
헛소문은
빠르게 사그라들지만
참된 만남은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 된다.
참된 만남이
삶의
참된 본질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바로 기적이다.
주님은
사람 사이에서
언제나
함께 살아계신다.
만남은 열림이 되고
관계는 행복이 된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변화이다.
이와 같이
변화는
삶의 전환이며
삶의 회개이다.
오상의 비오 사제는
자신의 고유한 길을
뜨겁게 걸어간다.
삶의 참된 의미와 목적이
변화된 생활에 있음을
가르쳐준다.
성찰과 성장은
생활의 변화로 드러난다.
비오 사제를 통해
수도자의 소명
신앙인의 소명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다.
소문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붙잡고 사는
복음의 생활이다.
주님과
함께 생활하는
우리들이다.
복음과 생활은
부활과 십자가처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만남이 선물이면
생활은 만남의 사랑이다.
이제 우리가
사랑할 때이다.
생활에서
복음은 깊어진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어린 날 문구점에서 완구를 훔쳐서 집에서 장난감으로 조립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양복을 곱게 차려입고 어린 아들을 경찰서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가족과는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니 감옥으로 보내 주십시오.’
어머니는 문구점 주인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
아이는 그 뒤로 정직하게 살기로 했고,
지금은 한의사가 되어서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다고 합니다.
한의사로 수련하는 과정에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가서 침을 놓아 드렸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아버지는 정신을 차렸고, 다행히 건강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아이를 위해서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을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말씀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자식이 술 때문에 어려움을 겪자 그 순간부터 아버지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되는 원인 자체를 없애시는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늘 책을 가까이 하였고, 서예를 하였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 족자에 시편의 말씀을 써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좋은 가르침이었습니다.
사제는 책을 통해서 마음의 양식을 얻으라는 뜻이었습니다.
사제는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라는 뜻이었습니다.
사제는 성서의 말씀으로 살라는 뜻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자상하였습니다.
대녀들을 잘 챙기셨습니다.
집안 어르신들의 기일, 생일을 꼭 챙기셨습니다.
사제는 온유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사제는 신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사제는 성사를 거룩하게 집전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길을 보여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천상에서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언젠가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행복이란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이란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 합니다.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싶어 합니다.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더 건강하게 그리고 더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하는 것, 더 많은 권력을 가지려 하는 것,
더 건강하게 그리고 더 오래 사는 것’들은 정말 헛된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매 순간 삶의 자리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사람의 손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이 세상을 좀 더 깨끗하게 하였다는 행복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형편이 어려운 조카의 등록금을 내준 삼촌이 있습니다.
본인도 그리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공부할 조카를 보며
삼촌은 이 세상이 좀 더 환해진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오늘은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저는 성지순례를 통해서 신부님이 사목하던 성당을 다녀왔습니다.
신부님의 삶을 기록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신부님은 1918년부터 세상을 떠난 1968년까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지닌 채 고통 받았습니다.
곧, 양손과 양발, 옆구리에 상흔이 생기고 피가 흘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말보다는 삶으로 예수님 십자가의 상처를 보여주었습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결국 꽃이 시들어야 결실을 맺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땀을 흘리고, 자신을 희생해서 누군가를 위한 다리가 되어 줄 때,
진정한 결실을 맺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인생은 허무 한 것이 아니라, 인생은 하느님을 만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하고 싶은 일만을 좋아했던 헤로데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행복입니다.
해야 할 일은 좋아하다면 우리 모두는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죽이면서 예수님은 만나려는 사람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복음을 전할 때 임금을 회개시키면 그 나라 전체가 회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만나보려는 헤로데는 무시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가 먼저 세례자 요한을 죽임으로서 당신의 초대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일까요?
세례자 요한을 죽이며 그리스도를 만나려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교회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만나겠다는 이들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세례자 요한입니다.
예를 들면
나주 율리아는 교회는 거부하면서도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만나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죽이는 이들을 절대 만나주지 않으십니다.
혹은 냉담자들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면서 힘들 때면 왜 자신들도 신앙인인데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시지 않느냐고 불만을 표출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에 머물지 않으면서
당신이 주시는 은총을 기대하는 이들을 만족시키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된다면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가 아무것도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들을 둔 40대 남편이 희귀암에 걸렸습니다.
의사들은 암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저기 전이된 암은 그 뿌리가 깊어서 면역항암제를 투여해도 줄어들지 않았고
방사선 치료로도 더 커지기만 했습니다.
아내는 1년 동안 미국에서 연수하던 김범석 교수가 9월에 돌아온다는 말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꿈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의사가 큰 등산 가방을 메고 뛰어오면서
“방법이 있어요! 방법이!”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인터넷에서 사진으로만 본 얼굴이었는데도 꿈에서는 너무 생생했습니다.
그러나 1년의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의사는 환자의 상태를 보고 더는 희망이 없음을 알아차렸습니다.
미국에서 보고받던 것보다 훨씬 안 좋은 상태였습니다.
항암제도 말을 듣지 않고 방사선 치료도 무용지물인 상태에서 더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만 오래전부터 눈 빠지게 기다렸다는 가족의 기대를 갑자기 무너뜨리기 뭐해
항암제는 계속 투여해 보겠다고 말하며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겠고,
외부로 드러난 암 덩어리의 크기를 매일 스마트폰으로 찍어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커지는 것을 보며 그들도 마음을 접을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의사는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나름대로는 모진 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3주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온 환자를 보고 의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일에 의사로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렸습니다.
“참 기적 같은 일이네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암이 반으로 줄어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암은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환자의 아내는 의사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그렇게 기다렸던 선생님께서 군더더기 없이 말씀해주신 첫 회진 덕분에
이렇게 감사의 편지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날 ‘모진 말’을 하셨다고 했는데 아니었어요.
온 가족이 엉뚱한 기도로 새는 힘을 모아 더 격려하고 기도하며 단단해졌어요.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의도를 그때도 지금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 꿈에 나타나서 외치신 그 ‘방법’이 정말이었다는 게 저희 가족의 생각입니다.”
특별한 처방도 한 것이 없고 이전에 해오던 치료와 다를 바가 없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가족의 믿음이 큰 역할을 했을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의사도 그 가족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형식적으로나마 치료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구구절절 쓴 편지 곳곳에서 남편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새삼 이들을 죽음의 나락에서 건져낸 것은
의사의 처방도 아니고 면역항암제도 아니라 그 사랑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암 투병은 환자도 가족도 모두 지치는 일입니다.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이 이어져가다 보면
그나마 남아있던 사랑도 남루해지기 쉽고 희망도 쉽게 잃습니다.
어쩔 수 없이 긴 투병의 모든 끝이 상처만 가득한 폐허로 남는 경우를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니 희망 없는 속에서도 그 사랑을 잃지 않았다는 것은
암 덩어리가 줄어든 것만큼이나 기적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왜 그 가족의 믿음을 직접 들어주시지 않고
1년 동안이나 자리를 비운 의사를 기다리게 하셨을까요?
그리고 별다른 처방도 아닌 그동안 맞아왔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던 면역항암제 처방을 내리는 의사에게 순종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 그 의사를 통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나의 믿음은 구체적이지 못합니다.
만약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하느님께 대한 나의 사랑이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누군가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보이지 않는 분을 믿는 것은 거짓입니다.
따라서 더 구체적이고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파견자인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가
당신을 보려고 할 때 예수님은 그를 믿을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눈에 보이는 교회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께 순종할 수 있을까요?
눈에 보이는 교회는 곧 세례자 요한과 같습니다.
교회를 무시하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현 시대에 헤로데와 같이 헛되게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김용태 마태오 신부는 성 김대건 신부님의 4대손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순교자 집안의 후손답게 살 수 없는 처지였고,
당연히 형님들 모두 사제가 되다 보니 자신도 신학교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제품을 받기 직전에 자신은 김대건 신부님처럼 순교할 자신이 없어서
사제직을 포기할까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성체조배를 하며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는 사제품을 받아들입니다.
빛과 성령으로 둘러싸이는 그 체험은 마치 기적과도 같이 모든 두려움을 이겨낼 힘을 주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에 대한 믿음은 항상 보이는 파견된 자에 대한 믿음으로만 증명됩니다.
그 파견된 교회 안에 머무르다 보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파견된 것에 대한 믿음은 파견하신 분에 대한 믿음의 시작입니다.
보이는 것을 무시하면 보이지 않는 것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