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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계승국인 발해의 대문예는 고구려의 강병이 30만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강병은 사전적 의미 그대로 굳세고 강한 병사나 군대를 일컫습니다.
"당은 대국으로서 군사가 우리보다 1만 배나 되는데, 그들과 원한을 맺는다면 우리는 곧 망합니다. 지난 날 고려가 전성할 적에 강병 30만으로 당과 맞서 싸운 것은 영웅 스럽고 굳세다 할 만하지만, 당병이 한번 덮치매 땅을 쓴 듯이 멸망하였습니다. 오늘 날 우리의 군사는 고려에 비한다면 3분의 1에 지나지 않으니, 왕께서 그들을 어긴다는 것은 불가합니다.(신당서 발해전)"
"당은 사람의 많음과 군사의 강함이 우리의 1만 배가 되는데, 하루아침에 원수를 맺는다면 스스로 멸망을 부를 뿐입니다. 지난 날 고려가 전성할 적에 강병 30만으로 당과 맞서서 복종을 하지 않다가, 당병이 한번 덮치매 땅을 쓴듯이 다 멸망 하였습니다. 오늘날 발해의 인구가 고려의 몇 분의 1도 못되는데, 그래도 당을 저버리려 하니, 이 일은 결단코 옳지 못합니다.(구당서 발해말갈전, 발해고)"
어떤 이들은 고려의 인구가 구당서 고려전의 69만 7천호라는 기록 하나만 맹신하여 대문예의 발언 자체를 과장으로 보아 고려는 30만의 군사를 동원할 능력이 없다고들 합니다. 과연 이 기록이 단순히 과장인지 각종 기록에 나온 1차 고당전쟁시 고려가 동원한 군사의 숫자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차 고당전쟁시 고려가 동원한 군사의 숫자
*** 참고: +@는 기록되지 않은 함락된 성의 전사자 숫자와 기록되지 않은 함락 안 된 성의 주둔군임.
국내성: 2만+@ (구당서,신당서의 고려전과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조 참조)
→ 신성의 군사와 합하여 보기 4만 명의 구원군을 보냈으므로 편의상 2분의 1로 나누었음.
오골성: 1만+@ (자치통감 참조)
→ 백암성으로 고돌발이 지휘하는 1만 명의 구원군을 보냈음.
신성: 5만 (자치통감,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조 참조)
→ 장손무기가 건안성과 신성에 10만 명의 군사가 있으므로 오골성으로 진격을 하면 이들로부터 후방의 위혐을 받을 수 있다고 했으므로 편의상 2분의 1로 나누었음.
비고: 요동성에 보낸 구원군 숫자와 장손무기의 발언에 나온 신성 군사의 규모는 중복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므로 따로 계산하지 않았다.
건안성: 5만 (자치통감,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조 참조)
→ 장손무기가 건안성과 신성에 10만 명의 군사가 있으므로 오골성으로 진격을 하면 이들로부터 후방의 위협을 받을 수 있다고 했으므로 편의상 2분의 1로 나누었음.
비고: 자치통감과 삼국사기에서는 장검이 건안성의 고려군을 수천 명을 죽였다고 하지만, 이후 장검의 부대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곧 건안성의 고려군의 반격을 큰 타격을 입고 군사적 역량을 잃었다고 여겨진다. 주필산 전투 후 비사성을 점령한 장량이 건안성을 공격하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비록 장검과 장량의 군대를 물리쳤다고는 하나, 건안성도 만만찮은 타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당서 고려 열전에서 당태종이 건안성을 두고 군량은 많으나 군사는 적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자치통감에는 당태종이 건안성을 두고 군사와 군량 모두 적다고 했다. 신당서 고려 열전과 자치통감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건안성이 지속적인 공격으로 인해 전력이 약화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자치통감에 기록된 장손무기의 건안, 신성의 10만 운운 발언을 하며 건안성을 경계대상으로 여긴 것으로 볼 때 이적이 안시성을 공격하자, 연개소문이 건안성에 병력을 증파하여 전력을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안시성: 수 백 명+@ (구당서, 신당서 고려전과 자치통감,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조 참조)
→ 토산 점령할 때 수 백 명 동원함.
비고: 신당서 고려 열전에는 장손무기가 안시성의 군사가 10만 명이라고 한 반면 자치통감에는 장손무기가 건안과 신성의 군사를 10만 명이라고 하였는데, 성들의 규모와 정황상 자치통감의 기록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요동성: 약 2만 명으로 추정(구당서, 신당서의 고려열전과 자치통감,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조 참조)
→ 당이 포로로 잡은 정예군사가 1만 명이고 함락 직전 화공으로 죽인 숫자가 1만 명임.
백암성: ① 2,400+@ (구당서 고려전 참조)
② 2,000+@ (신당서 고려전 참조)
→ 당이 포로로 잡은 군사 숫자가 2,000~ 2,400명임.
가시성: 700+@ (구당서, 신당서의 고려열전과 자치통감,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조 참조)
→ 700명의 군사를 개모성으로 보냈음.
주필산 전투: ① 15만 명(구당서, 신당서의 고려전과 자치통감,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조 등 참조)
② 25만 명(구당서 설인귀 열전 참조)
③ 20만 명(신당서 설인귀 열전 참조)
④ 10여 만 명 (자치통감,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조 참조)
비고: 주필산 전투에 동원된 북부의 흑수말갈 군사의 숫자는 수서 말갈전의 기록을 볼 때 최대로 잡아봤자, 6천 명 안팍으로 여겨진다.
비사성: 알 수 없음.
개모성: 알 수 없음.
현도성: 알 수 없음.
후황성: 알 수 없음.
은산성: 알 수 없음.
마미성: 알 수 없음.
맥곡성: 알 수 없음.
횡산성: 알 수 없음.
1차 고당전쟁시 고구려 동원한 군사의 숫자는 중복 가능성을 가급적 제외하고도 최소 272,700명이며 평균은 323,100명, 최대는 373,100~423,100명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기록된 것만" 산출하여 단순 계산했을 때 나오는 숫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사성, 개모성 등 "기록되지 않은" 성들의 군사와 +@까지 합한다면 1차 고당전쟁시 고려가 동원한 군사의 숫자는 더욱 늘어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렇듯 대문예의 고려 강병 30만 발언은 각종 기록들에 보이는 1차 고당전쟁시 고려가 동원한 군사의 숫자와 비교했을 때 신뢰도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대문예의 발언은 고려가 무리 없이 동원 가능한 군사의 숫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한 과장이 아니며 상당한 근거가 있는 발언이라는 것입니다.
무엇 보다 반전주의자인 대문예가 당을 과대평가했으면 과대평가 했지, 고려를 과대평가하여 과장되게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반전론을 펼치기 위해 고려를 과소평가 하거나 당과의 국력 비교를 통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가를 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실제 기록에서도 보이는 바와 같이 대문예는 고려가 30만의 강한 군사를 가지고도 굳세게 맞섰으나 결국 당에게 멸망했는데, 우리는 고려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고 당은 우리의 1만 배이므로 당과 어긋나게 지내는 것은 불가하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대문예는 당을 발해의 1만 배로 보면서 지나치게 과대평가 했으며, 고려에 대해서는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결국 고려는 당이 한 번 덮치니 망했다는 식으로 축소하거나 과소평가하였기 때문에 대문예의 고려 30만 발언은 각종 사료에 나온 기록으로 볼 때 축소했으면 축소했지, 과장으로 볼 여지는 거의 없다고 여겨집니다.
오히려 비판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할 기록은 구당서의 176성 69만 7천호가 아닌가 합니다. 이 글에서 구체적으로 거론은 않겠으나, 이 기록은 여러모로 그 신빙성이 의심됩니다. 이 기록 맹신하자고, 위의 나온 다른 기록들을 모조리 무시하는 행위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첫댓글 그렇게 계산하면 누구나 간단히 알 수 있는걸...기존 학계에서는 아무도 안 하지요. 참 이상하게도 말입니다. 그나저나 장손무기가 안시성 병력에 대해 말한 부분은 단순히 오기로 보기 힘들 것도 같습니다. 안시성의 주둔병력이든, 아니면 그 주변에 진을 치고 있던 고정의의 병력을 언급한 것인지 모르지만 안시성 주변의 병력에 대해서 장손무기가 언급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을 듯 합니다. 암튼 고구려의 인구나 상비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보다 더 정밀하게 다가가야 할 것 같습니다. ^^
여휘님 말씀대로 볼 수도 있겠으나, 신당서 고려전에 나온 장손무기의 발언과 자치통감에 나온 장손무기의 발언에서 건안, 신성과 안시성 빼고는 발언 배경과 시점 그리고 앞, 뒤 문장 내용이 너무 비슷해서요.^^;
오골성 하나만 해도 10만이 거주할수 있는 규모인데... 고대 우리나라의 성곽은 도시를 둘러싼 산성형 조합으로 타국과는 달리 실제 거주 인구수는 성곽 외곽에도 분포하는 형태가 많습니다.현재의 저 구당서 기록에 의한 한호를 5명으로 추산한 고구려 인구을 대략 350만 정도로 보면서 인구에 10퍼센트에 이르는 군사를 동원해서 수,당의 대전을 거듭 했다는 것은 이해할수 없는 대목이죠. 삼국지의 고구려 초기 기록의 인구 대목도 상당히 조잡한 산술로 보입니다. 고구려 초기의 기병이나 여러 군사 동원 병력을 보면 전혀 이해 할수 없는 조잡한 인구수치기록이죠.
맞는 말입니다. 어느 책에서는 고구려 인구가 1000만은 된다고 들었는데 350만은 헛소리지요
몽고(당시 돌궐?)도 인구 500만에서 10만을 차출했는데 말입니다.
군대 규모는 몰라도 인구를 1000만까지 추산하는 것은 조금 오바인 것 같습니다. 고대 및 중세에 군대 규모는 인구 규모 대비 최대 20~30%까지도 나타나는 경우도 드물지 않을 정도로 원래부터 비율이 높았습니다. 게다가 혼란기나 유목민족에 의해 세워진 국가들은 인구 대부분이 군대가 되기도 했죠. 단적인 예로 후금 초기의 인구 규모는 100만에 미치지 못했지만 병력은 십만 이상 씩 너끈하게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근대의 인구대 군대 비율을 가지고 고대·중세를 재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학계에서는 350만도 많다고 보는 것으로 아는데 1000만이라는 것은 좀 과하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비유가,...고구려가 유목 국가인가요??? 고구려의 수많은 성곽들은 무엇을 말하는가요? 고구려 성곽들의 규모들을 본다면 350만이라는 숫자가 도리어 상당히 보수적 견해임을 알수 있을 것임. 저 천만이라는 숫자는 고구려의 부용세력들등 고구려 세력권에 있던 주변 유목민족들을 다 합친 총괄적 개념으로 말한것 같네요.
역사님// 규모를 말씀하신다면, 저는 한양의 인구가 10만에도 미치지 못했던 기록(세종실록 지리지)을 제시하여 드리겠습니다. 역사님의 견해대로 성의 규모가 인구를 말해준다면, 한양성 정도의 규모는 과연 몇 명의 인구가 살았다는 의미일까요?
성곽이라는 것이 현대의 도시계획처럼 "인구 몇명 전용" 이렇게 딱 규격화되서 짓는 것입니까? 지형에 맞춰 짓다보니 엄청나게 커졌는데 실제 사는 인구는 얼마 안될 수도 있는 것이고, 반대로 축성해 놓고 살다보니 인구가 늘어나서 북적북적댈 수도 있는 것이 역사이고 인간의 삶입니다. 역사님의 개인적인 추측 만으로 한 나라의 인구나 위치를 재단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이런 말씀까지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생각난 김에 말씀드립니다.
역사님은 일전에 낙랑토성의 규모를 두고 로마의 예와 비교하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낙랑군 관련 연구에는 요령성이나 내몽고 일대에 존재하는 현성의 크기와 비교한 것도 익히 존재하는 바, 그것을 좀 찾아 보시는 것을 권합니다. 흉노와의 최전방에 해당하는 요동, 요서, 운중 등의 현성들도 낙랑 일대의 토성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규모입니다. 규모를 근거로 낙랑토성을 부정하시는 역사님의 견해와는 아주 대조적인 연구 결과죠.
같은 시대, 같은 나라의 예를 먼저 비교하시고 나서 로마 같은 머나먼 이국과 비교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겠습니까?
조선시대의 한양 인구로 설명이라??? 님 죄송합니다만 조선시대과 삼국시대의 도시의 특성이 다르군요.. 조선시대는 도리어 삼국, 고려시대와 다르게 도시의 규모가 축소되는 시기입니다. 이는 유교적 국가답게 선비나 사대부들의 사고가 도시보다는 전원 향촌생활을 즐겨했고 그러다보니 기존의 사대부들은 낙양을 하거나 물좋고 산좋은 촌으로 이동해서 살았고 유명한 학자나 석학을 따라 여러 신진 동문 글선비도 함께 모이면서 촌락을 형성했습니다. 그유명한 안동의 하회마을도 왕도와는 먼곳이죠. 이런 조선의 국가성격이나 지향점이 인구 대비 도시화율을 낮추는 이전과 다른 시기입니다.
서구의 고대성곽은 인구에 비해 훨씬 더 큰 규모를 짓습니다. 실제 로마의 변방 론디니움도 건물 대비나 인구 면적에 비해 훨씬 더 큰 규모로 짓었구요. 그러나 <삼국시대의 우리나라 성곽들은 산성을 배후 방어 시설로 하는 도시형 성곽이기에 실제 도시규모보다 취락이 성곽 외곽에도 밀집되어 있는 형태입니다. 그리고 삼국시대는 빈빈한 정복 약탈등의 마찰이 많아서 성곽의 방어 시설이 매우 중요한 시기인점도 이해하고 논하길 바랍니다. 즉 삼국시대의 성곽은 당시 우리나라 인구의 추산을 알수 있는 상당히 중요한 실질적 척도중 하나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 구당서처럼 고구려의 요동 일부와 평양쪽의 일시 점령에 의한 부분적 타국가의 보고기록정도의 인구 추산기록보다 성곽등의 고구려 도시규모등이 고구려 인구추산에서 더욱 실체적이고 믿을만한 증거 척도중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동 일대와 평양 일대의 지리적 위치와 인구수는 인지하고 한나리식토성이나 크기를 말하는지요???
역사님. 성곽 내부 인구 수용 능력이 도시의 실제 인구 규모를 담보하지 않는걸 예로서 한양을 들고 있는데 뭔 도시 특성이 다르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까... 지금 성곽 인구 수용능력을 초과하는 인구 유입으로 도시 근교에 새로운 거주지가 생겨서 도시 규모가 커진다는 얘기를 하는데 왠 향촌, 전원생활이라고 하시는 건가요...한양 근교의 이현 칠패는 수백, 수천리 떨어진 곳입니까? 제발 글의 맥락을 제대로 잡아서 읽어주세요...
??? 야스페르츠님의 엇박자 내용에 한단님이 동조하니 의외군요. 조선시대와 삼국시대가 다르다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이해를 못하니?? 고대 인구추정방법이나 삼국시대의 성곽에 대한 개념정립의 선행이 없는듯 하군요. 고구려의 중,대형 산성들은 그냥 타국처럼 군사 요새적 성격이 아닙니다. 유사시 인근 도시주민들 즉 고구려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인근 인구수에 최소한 맞게 만들어진 공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말은 곧 고구려 인구 전체 추정을 명확히 할수는 없지만 이런 도시 배후 산성등을 통해 최소한의 리미터 인구수는 실체적인 확보를 하고 들어갈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고구려 삼경인 남평양의 장수산성이나
중공식의 백성거주와 함께하는 장안성, 국내성 배후의 환도산성등을 보면 기본 고구려 인구수는 최소한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기에 장수산성에 버금가는 크기의 오골성, 철옹성 기타 요동성등...근세조선으로 갈수록 화포의 무기 발달등 삼국시대의 도시개념이 성곽의 기본 개념에서 점차 현대로 오면서 성곽이 도시라는 개념은 희박해집니다.그나마 상대적으로 근세로 오면서 남아있는 문헌적 기록들이 많이 존재하고- 물론 이도 세종 실록 지리지에서도 보이듯 기록과 실제 인구수에는 차이가 상당한 다른 기록도 나오죠. 그나마 일제 시대 조선 인구조사로 더욱 정밀하게 조선 말기의 인구수를 알수 있는 것이고.. 요는 고구려 전체
인구수인데 인구의 명확한 추정에 근대 일제 정도 수준이나 현대 통계수준의 문헌 자료나 아니면 고고학적으로 전국토의 고대 취락을 다 까발리면 알까.. 문제는 그런 문헌기록도 저런 매우 단편적인 몇호 정도라는 식에 일시적, 타국의 자의적 해석의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하니 우리가 현재 여러 고생을 하는 것이고 여기에 이런 고구려성곽의 특성이나 규모는 그만큼 초소한의 실체적 인구 추정을 담보할수 있는 접근법중 중요한 하나임에는 주지일 것임. 그기에 주변 고고학적 상황에 따른 취락 분포의 발굴 성과에 따라 당시 도시화율의 상태나 기타 문헌상의 고구려가 복속해가는 여러 국가들의 규모와 인구수 군사 동원력,농업생산력등
초기라면 몰라도 중, 후기의 고려는 거의 농경국가입니다. 농경국가가 전체 인구의 5% 이상을 군사로 동원한다면 자멸의 지름길입니다. 수양제가 몸소 보여주었지요. 저는 고려가 무리 없이 강병 30만 명을 운용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요동, 부여, 황해도, 평안도, 책성일대의 곡창지대를 보유했다는 것과 당과 비슷하다는 농경법, 요동성 한 곳에 군량이 50만 석, 작은 개모성에 조차도 10만 석이 있었다는 것 등을 감안하여 고려의 인구를 6백만 명 정도로 봅니다.
그리고 수나라 때만 해도 말갈 7부 중 정병 7천 명을 동원할 수 있는 백돌부와 이와 비슷하게 동원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속말부를 제외한 나머지 5부 말갈족들의 정병은 3천 명 정도입니다. 이 때문에 본문에서 주필산 전투에서 고려군에 동원된 북부 흑수말갈의 규모를 최대로 잡아도 6천 명 안팍으로 계산한 것입니다. 말갈 7부를 제외한 거란, 실위 등 기타 고려의 속민들의 인구까지 모두 합한다 해도 1천 만 명까지는 가지 않을 듯 합니다.
거란의 일부는 몰라도 실위가 고구려의 속민이라는 얘기는 처음 들어봅니다;;;;
실위는 철이 나지 않기 때문에 고려로부터 철을 수입해서 쓴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고대의 철이란 매우 중요한 군사적 자원이기에 함부로 외국에 보낼 만한 성질의 자원이 아닙니다. 이러한 철을 고려가 실위에 수출했다는 것은 실위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단 것으로 볼 수 있지요. 게다가 실위는 631년 이후로 당과의 교류가 전혀 없다고 고려가 멸망한 이후에야 당의 간접통치를 받는 것으로 보아 실위는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고려의 영향력 안에 있었다는 것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참고로 이러한 고려와 실위의 관계에 대해서는 김용만 선생님과 박경철 교수님께서 언급하신 걸로 압니다.
글쎄요.... 고구려의 실위 간접 지배(?)또는 영향력 행사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없는 판에... 철수출만 가지고 속민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김용만선생님이나 박경철 교수님 말씀처럼 철을 수출했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증거가 아닌가 싶군요. 게다가 631년부터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당과의 외교가 일절 없다는 것은 실위가 고려의 통제 하에 있었다는 반증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약소부족인 실위가 당 말고 의지할 만한 거대세력이라고는 고려 밖에 없었지요.
고구려 인구 천만명설은 자치통감에 근거를 두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요...구체적으로 자치통감 어디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아시는 분은 답글 좀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자치통감 당2를 갖고 있는데, 관련 기록은 찾을 수 없네요.^^;
개인적으로는 저 군사력 통계의 계산 과정이 꽤나 위험할 수 있을거 같은데요. 왜냐면 저 통계는 시기별 병력의 이동성이 그다지 감안되지 않았고(특정 전투에서 발생한 패잔병의 합류라던가 시기 차이에 따른 병력 이동의 상황 등을 고려하면) 무엇보다도 병력을 기록한 것이 실제 인원을 가리킨 것인지 근사치를 관용어구로 과장한 것인지를 판별하기가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최저 병력 계산과 최대 병력 계산을 해서 평균을 내는 것은 잘못된 통계치를 낼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물론 저도 30만 이상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공감하지만요.
한단인님의 지적대로 저 계산은 병력의 중복 가능성이라든지 여러 면에서 변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밝혔듯이 사료에 나온 병력을 (변수 고려 없이) 단순 계산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고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전부 따지고 들다 보니 삼국의 병력 기록 자체를 전부 의심하게 되서...ㅠ 그래도 그나마 사료상에서 유추할 수 있는 최소한의 중복 가능성을 염두하고 계산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료에서는 병력의 중복 가능성이라든지 패잔병 합류 여부나 보기 4만이니 10만이니 하는 것이 실제 인원인지 근사치인지는 파악하기 힘듭니다. 특히 건안, 신성 10만 운운은 관용어구로 과장했을
것이라는 의심의 여지가 있으나, 당군에게 위협적인 대상이 된 것으로 봐서 마냥 관용어구로 과장했다고 보기도 그렇지요. 사실 본문에서는 딱히 입증할 만한 사료가 없어서 언급은 안 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건안, 신성의 10만 병력은 중복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렇듯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들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딱히 위의 병력들을 두고 과장이다, 중복이다, 뭐다라고 논할 만한 기록은 없는 듯 해서 일단은 믿는 것이 타당치 않을까 해서 단순계산하여 올린 것입니다. 솔직히 변수들 고려해서 정말 낮게 잡아도 1차 고당전쟁시 고려가 동원한 병력은 20만은 넘을 것 같습니다.
아, 최저병력치는 주필산 전투의 병력을 10만을 기준으로 하여 합산한 것이고 평균 병력치는 대개 주필산 전투의 병력을 15만으로 잡는 것을 감안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합산한 것이기에 평균으로 일컬은 것입니다. 마땅한 대체 용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최대 병력치는 구, 신당서 설인귀 열전에 나온 주필산 전투의 병력을 기준으로 하여 합산한 것으로 복잡한 계산을 통해서 나온 결론은 아닙니다. 여튼 한단인님의 지적은 분명 일리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