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팽손(梁彭孫)-우음(偶吟)(우연히 읊다)(소 타는 즐거움)
不識騎牛好(부지기우호) 소 타는 것 좋은 줄을 몰랐었더니
今因無馬知(금인무마지) 말이 없고 보니 오늘에야 알겠어라
夕陽芳草路(석양방초로) 석양에 방초 어우러진 길을
春日共遲遲(춘일공지지) 봄날도 함께 느릿느릿
*위 시는 “한시 감상 景경, 자연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학포집學圃集)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이정원님은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양팽손의 작품이다. 소를 타고 가는 저자의 모습에서 느림과 여유를 느낄 수 있다. 먼 옛날의 모습이지만 ‘느림’이라는 느낌 속에 저물녘 향기로운 풀이 자라난 길이 멀리 있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천천히 눈앞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오늘날 우리는 ‘빠름, 빠름’을 수도 없이 외치며 살아가고 있다. 국가 정책이건, 제품 광고건 학습 방법이건 빠름만이 경쟁력인 양 소리 높여 말하고 있다.
전통문화가 단절된 일제강점기의 내상이 미처 치유되기도 전에 한국전쟁이라는 지울 수 없는 외상을 입은 우리나라는 몸과 마음이 모두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재건’이라는 거국적 기치 아래 주위는 전혀 돌아보지 않고 오직 전진만을 강조하게 되었다. ‘하면 된다’는 각오와 ‘중단없는 전진’을 요구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바쁘다. 바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내 갈 길만 바빠 옆은 돌아보지를 않았다. 주위를 돌아보다 보면 내 길이 더뎌진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다 보니 자연 ‘느림’과 ‘멈춤’은 배우지 못한 것 같다. 언제나 빨리 하면 칭찬을 받다 보니, 차를 운전하다가도ㅗ 누군가가 자기 차를 추월하면 괜히 기분이 나빠져 속도를 높이는 경우도 있다.
세상도 빨리 변화하고 있다. 어느 학자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시점부터 이루어졌던 모든 변화보다 최근 100여 년의 변화가 더욱 가파르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디지털의 지배를 받는 세상 속에서 어제 생산된 제품이 오늘 벌써 구식이 된다. 사람들간의 속도 차이로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으며, 갈등의 단계를 지나 어느새 서로 소통조차 불가한 상태가 되고 있다.
이제는 사람들도 지쳐 버린 듯하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부터 ‘힐링’이라는 말이 세상의 화두가 되었고, ‘멈추면 비로소 보임’을 강조하는 책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 사람들도 이제는 아는 듯 하다. 자신이 멈추지 않고 있으므로 힘들다는 것을, 빨리 지나갈 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걸음을 늦추거나 멈추고서 돌아볼 때 비로소 보인다는 것을.
위 시 외에도 소를 타고 가는 여유로움을 보여 주는 또 한 편의 노래가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철(鄭澈)의 시조이다.
재 너머 성권농 집에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운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타고
아이야 네 권농 계시냐 정좌수 왔다 하여라
현대인의 일상은 여유만으로는 살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 소중한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가끔은 일부러라도 속도를 늦추거나 걸음을 멈추고서 주위를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빨리 가면 먼저 도달할 수는 있지만 결코 함께 갈 수는 없다고들 말한다. 지금은 소를 타고 친구를 찾아갈 수는 없겠지만, 잠시 일상을 멈추고서 옛 친구를 찾아 추억 속에서 여유를 찾아보면 어떨까 싶다. ‘느림, 느림’을 되뇌이며……”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양팽손[梁彭孫, 1488년(성종 19)~1545년(인종 1),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 능성(綾城) 출신]-조선 전기에, 교리, 정언, 용담현령 등을 역임한 문신. 양사위(梁思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사복시정 양담(梁湛)이고, 아버지는 양이하(梁以河)이다. 어머니는 해주 최씨(海州崔氏)로, 증 조위사직 최혼(崔渾)의 딸이다. 1510년(중종 5)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으며, 또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었다. 이후 정언(正言) · 전랑 · 수찬(修撰) · 교리(校理)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기도 하였다. 정언으로 재직할 때 이성언(李誠彦)을 탄핵한 일로 인해 대신들의 의계(議啓)로써 직책이 갈렸지만, 조광조 · 김정(金淨) 등 신진 사류들로부터는 언론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1519년 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 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 이 일로 인해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로 돌아와, 중조산(中條山) 아래 쌍봉리(雙鳳里)에 작은 집을 지어 ‘학포당(學圃堂)’이라 이름하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이 무렵 친교를 맺은 인물들은 기준(奇遵) · 박세희(朴世熹) · 최산두(崔山斗) 등의 기묘명현들이었다.
1539년에 다시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44년 김안로(金安老)의 사사 후,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잠시 부임했다가 곧 사임하고 다음해에 58세로 죽었다. 13세 때 송흠(宋欽)에게 나가 공부했으며 송순(宋純) · 나세찬(羅世贊) 등과 동문으로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항상 『소학』 · 『근사록』 등으로 처신의 지침을 삼았고, 당시 신진 사류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회화에도 일가견을 보여 안견(安堅)의 산수화풍을 계승하였다. 1630년(인조 8) 김장생(金長生) 등의 청으로 능주 죽수서원(竹樹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818년(순조 18) 순천의 용강서원(龍岡書院)에 추향되었다. 작품으로는 「산수도」 1점이 전하며, 저서로는 『학포유집』 2책이 전한다. 시호는 혜강(惠康)이다.
첫댓글 느림의 미학인가요...
너무도 빨리 변하는 세상에서
여유로움을 갖는다는 것은 사치인 듯 하지만
그래도 한 박자 쉬어가는 삶도 괜찮을듯합니다.....
지기님의 쉬엄감에 대한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느림의 미학, 그래서 야구에서 변화구가 필요한가 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