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금정(披襟亭)
비로봉(毗盧峯) 대자연을 사람아 묻지 마소
눈도 미처 못 보았는데 입이 능히 말할 손가
비로봉 알려 하옵거든 가보소서 하노라.
이광수(李光秀)
*위의 시는 춘원 이광수가 금강산 비로봉을 구경한 소감이다.
신설동에서 금강산 피금정(披襟亭)을 눈요기 하다 !
북한산 우이경전철을 타고 신설동에서 1호선을 갈아타기 위한
방향으로 가다보면 산수화 그림 한 폭이 걸려있다.
그냥 지나치려도 눈길이 가는 그림이다.
산 밑에는 자욱한 안개, 정자(亭子)주위에 늘어진 수양버들가지에서는
파릇파릇 새움이 돋는 느낌이 꼭 이맘때(3월 하순)를 표현한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어 스마트폰으로 찰칵 했다.
그림의 왼쪽 위에 있는 한자(漢字) 글씨를 보면
白下尹尙書詩(백하윤상서시)-백하 윤상서의 시에서
曰峽色深如莫(왈협색심여막)-말하기를, 골짜기의 빛은 깊어 저문듯하고
邨容静若眼(촌용정약안)-마을 모습은 고요하여 잠자는 것 같네 !
煙客(연객)
이라 쓰여 있다.
연객(煙客) 허필(許佖)이란 사람이 그림의 화제(畫題)를 쓴 내용이다.
그림의 끝에
披襟亭(피금정)
謙齋(겸재)
낙관(落款도장)에는 “鄭(정)” “敾(선)”이라고 각각 표시되어 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 !
중국 당(唐)나라 시대에 남종화(南宗畵) 북종화(北宗畵)라는 중국화풍이 조선의
동양화(東洋畵) 화단(畫壇)을 물들이든 시대에 조선의 자연을 실물 그대로
그려낸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는 새 화풍을 개척한 천재적 화가다.
중국의 남종화(南宗畵) 북종화(北宗畵) 화풍은 당대(唐代) 불교의 선종(禪宗)인
남종(南宗), 북종(北宗) 두 종파가 그림에 영향을 준 명칭이다.
북종화(北宗畵)는 외형의 사실적 묘사를 위주로 하고,
남종화(南宗畵)는 작가의 내적 심경(內的心境) 즉 생각을 그림에 나타내는데
중점을 둔 화풍이다.
이런 중국의 사대주의 화풍에 새바람을 일으킨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는
과히 한국화(韓國畵)의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은
국보 217호 “금강산전도(金剛山全圖)”를 그린 주인공이다.
“披襟亭(피금정)”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72세에 그렸다고 한다.
披襟亭(피금정)”
披-헤칠 피
襟-옷깃 금
亭-정자 정
“披襟亭(피금정)”은 금성(金城 강원도 김화)을 거쳐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가는
입구(入口)에 위치(位置)한 정자(亭子)로 금강산을 유람하는 여정(旅程) 중
길손들이 여행에 지친 무거운 다리도 쉴겸 옷고름을 풀고 잠시 쉬어가는
곳이라는 뜻의 정자(亭子) 이름이다.
그림의 제일 가까운 곳에는 남대천(南大川)을 건너 피금정으로 가려는
여행객들이 보인다.
가운데 경치는 울창한 나무 사이의 피금정(披襟亭)이 부끄럼 타는 큰애기처럼
얼굴을 내밀고 있다.
제일 먼 곳 원경(遠景)에는 뽀얀 안개구름 위로 마치 쌀알을 쌓아 놓은 것
처럼 붓으로 미점(米點)을 찍어 묘사한 큰 산들이 옆으로 병풍처럼 벌려
있다.
필자는 1998년 남북 교류로 금강산 관광이 시작될 때에 3박2일로 금강산을
구경했다. 그러나 이름만 금강산 관광이지 2일간으로 어떻게 금강산을
볼 수 있었겠는가?
앞으로 남북이 정상화 되면 금강산, 대동강 부벽루, 개성 왕릉을
먼저 가 보고 싶다.
조선왕조 왕릉 총 42기 중 태조 이성계의 정비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과 2대 정종의 후릉(厚陵)이 개성에 있다.
필자는 한국에 있는 40기를 답사하였고 북한 왕릉 2기만 답사를 못했다.
4월에 남북 정상회담
5월에 북미 정상회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수립이후 국가의 운명이 결정되는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의 순간이 닦아오고 있다.
披襟亭(피금정) 그림 한 점이 국가의 안위(安危)를 생각게 하고 있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