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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준비된 도발로 연일 나란안이 시끄럽습니다.
바보입니까?
순해 터진 겁니까?
그렇게 당하고도 또 당하다니....
하긴 일제 식민지를 아직까지도 청산하지 못했으니 이런 결과가 생긴 것이겠죠.
정치야 정치인들이 알아서 하고 경제야 경제인들이 알아서 하면 되니까 우리같은 민초들은 우리가 하여야 할 일만 하면 될 것입니다.
초지지나 말고....
이럴 때 백두대간을 떠올린다면 더없이 억울하다는 생각입니다.
일본의 식민지가 아닌 상태에서 근대지리를 받아들였다면 어엿하게 백두대간이니 정맥이니 하는 우리 산줄기가 제 자리에 있겠고 그 다음에 산맥이라는 용어가 나올 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얘기할 때 엉뚱한 얘기하면 실례입니다.
즉 "백두대간이니 정맥이니 하는 얘기 교과서에 나와!"
누가 나오는지 모릅니까!
어떠한 형식으로 나왔냐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즉 사견에 의할 때 "1차 산맥만 중시하고 산줄기의 본질이라 할 2차 산맥은 무시하고 있다."라는 얘기 아닙니까?
지금 우리 아이들의 머릿속에 백두대간과 태백산맥을 비교할 수 있는 개념이 정립되어 있겠습니까?
하긴 우리 어른들도 마찬가지지만....
나아가 백두대간을 걷고 있는 분들은 뭐 또 얼마나 다르겠습니까마는....
반면 우리가 산줄기에서 이야기하는 지맥은 ‘枝脈’이라는 한자를 쓴다. 그리고 이 枝脈은 ‘산맥’이라는 지질학적 개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것이다. 산줄기 개념이기 때문이다. 산줄기와 산맥은 다른가? 다르다. 간단히 얘기해서 산줄기는 우리들 눈에 보이는 산의 이음이다. 반면 산맥은 땅 속에 있는 것을 추측해서 땅 위로 끌어올려 그린 그림이다. 가령 땅속의 지질구조선이 생성 년대나 생성 방법이 같으면 같은 산맥이라 했다. 그러다 보니 산줄기는 곡선인 반면 산맥은 무조건 직선이다. 다시 말해서 산줄기는 자연의 선인 반면 산맥은 인공의 선인 것이다.
우리가 산줄기 즉 산경보다 산맥에 익숙한 이유는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아서가 아니라 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1910년대부터 일제에 의해 교과서에 오른 산맥은 일반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는 있으나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즉 완전한 학설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학자들의 편의상 무리 없이 사용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지질구조선을 반영하면서도 산지의 지리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보다 나은 산맥체계가 연구되고 제시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러한 산맥과 산줄기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좀 억지를 부려 한 마디로 얘기한다면 산맥이 아기라면 산줄기는 현재의 우리라고 보면 어떨까? 즉 태초에 지구가 생긴 다음 융기, 습곡, 단층, 화산 운동 등으로 지구 표면에 어떤 변화(구조적tectonic요인)가 생긴 다음 그것의 높은 부분의 이음이 시간이 흐르면서 풍화와 침식(기후climatic요인)으로 지금과 같은 산들의 이음이 되었을 때 전자는 산맥으로 보고 후자는 산줄기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 산맥도 현재 움직임이 있으므로 생물이긴 하지만 외형 즉 분수계로 돌출되어 있는 산줄기에 비해서 그 움직임은 크지 않을 것이다. 산경표의 대간, 정맥 그리고 하위 개념인 지맥 등이 궁금하긴 하지만 너무 어려우므로 뒤로 미룬다.
- 졸저 '현오와걷는 지리산' 227쪽
지난 주 지리산 도장골에 들르기로 한 계획이 태풍으로 인해 무산되었습니다.
그 덕에(?) 거림에 들어앉아 6명이 친목만 도모하고 왔으니....
너무 시간이 아까울 따름입니다.
능선 산행이었으면 비를 맞으면서라도 강행하였을 텐데....
주중 산행을 계획합니다.
칠선 계곡을 가자는 사람도 있는데 아직 물이 너무 많아서 무리일것 같습니다.
지리 동부 쪽으로 눈길을 돌립니다.
웅석봉이 보이니 바로 남강태극이 보입니다.
지난 여름.
가장 더운 날을 택해 이방태극 ~ 남강 태극을 연계하여 진행하려는 계획은 웅석봉을 내려오면서 중도 포기했고...
그럼 이번에는 내리 쪽으로 올라 웅석봉 ~ 석대산 ~ 망해봉 방향으로 진행하면 어떨까?
태극꾼도 아닌 내가 남강태극을?
거리도 20km 정도 되니 만만하고...
하지만 이번도 역시 더위가 문제입니다.
남부터미널에서 산청으로 가는 버스의 출발시각은 23:00입니다.
산청터미널에 내리니 02:05.
너무 이릅니다.
누구 동행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바로 진행을 할 텐데 혼자서 걷기에는 좀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오르는 내리저수지 ~ 웅석봉 구간도 살펴보아야 하고.....
터미널 옆 PC방에 들어가 유튜브에서 음악도 듣고 기억 속의 영화를 또 봅니다.
팝뮤직의 공연 필름 같은 것을 예전에 볼 수 잇는기회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습니다.
클래식이란 영화.
개인적으로는 작품성이 있는 영화로 보여집니다.
음악도 좋고...
무엇보다 구성이 좋은 것 같습니다.
대충 시간을 죽이다 편의점에 가서 도시락 하나를 먹고 아점 용으로 하나를 더 준비합니다.
그러고는 택시를 불러 내리 마을로 갑니다.
04:08
내리에 있는 화장실.
산꾼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앞에서 대강 준비를 마치고 산행에 듭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제 충전식 랜턴의 건전지가 수명이 다 됐나 봅니다.
점점 조도가 약해지더니....
할 수 없이 부근에 있는 심적사와,
지곡사를 하릴없이 왔다갔다 합니다.
지도 #1
5시 정도가 되면 랜턴 없이도 산행이 가능할 것이니 말입니다.
05:05
이제 슬슬 시작할까요?
일단 개념도를 살펴보고....
주차장,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는 그 개념도 좌측에 이정목이 보입니다.
내리저수지에서 십자봉 방향을 따릅니다.
비가 많이 올 경우 이 길은 폐쇄가 되겠군요.
좌측 내리저수지.....
임도를 만나 좌틀한 다음 '웅석봉 가는 길' 표지판 앞에서 좌틀합니다.
그러면 다시 임도를 만나 좌틀하고는,
05:24
이 차단기 앞에서,
우측 나무 계단으로 오릅니다.
이제부터 흙을 밟기 시작합니다.
지도 #1의 '가'의 곳입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이 임도와 등로가 같이 진행합니다.
좌측으로 잠시 조망이 트이긴 하는데....
정수산입니다.
05:44
오르는 도중 아주 시원하고 깨끗한 샘을 만납니다.
지도 #1의 '나'의 곳입니다.
오늘 더위를 감안하여 물을 한 통 더 채웁니다.
그런데 조금 전 지나온 곳이 참새미 즉 참샘이었는데 이 물한 즉 찬샘과는 다른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 생각건대 예전의 사람들은 무엇이든 사람에게 좋은 것이면 ‘참’이라는 접두사를 붙였고 나쁜 것이나 해로운 것에는 ‘개’를 붙였다. 그러니 물을 중요시하는 선조들은 좋은 물을 특히 약수라 하였으니 약수는 곧 참샘이고, 참샘은 샘 중에서도 좋은 샘을 뜻한다 하겠다. 그러니 좋은 샘이 있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면 샘골이 되는 것이다. 결국 좋은 물은 찬물이 아니라 사시사철 온도가 일정하여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한 물이 좋은 물인 것이다.
반면 찬샘 즉 찬새미는 사실 그렇게 좋은 물은 아니다. 농사를 짓던 마을에 찬샘은 좋은 의미가 아니라 그나마 그에 의지하여 뙈기논이나 부쳐 먹는다는 의미이다. 예전엔 논농사를 밭농사보다 우선시 하였으니 그나마 물이 있다면 논농사를 지으려 하였으나 샘은 찬물이라 저수지의 물을 쓰는 논보다 농사가 잘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찬샘을 웅덩이에 가두거나 수로를 일부러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물이 수로에 오래 머물게 하여 수온을 높임으로써 냉해를 방지하는 방식을 썼던 것이다. 이렇게 농사를 짓던 논이 ‘찬새미’이고, 이런 마을을 ‘찬새미골’이라 하였다.
- 졸저 전게서 370쪽
땀은 비오듯 흐르는데 거미줄이 사람을 성가시게 만듭니다.
산청군에서는 조금 전 지나친 산약초 재배단지 목책을 설치하면서 이렇게 훌륭한 작업도 병행한 거 같습니다.
06:17
가끔씩....
아주 가끔씩이나마 조망을 내어 줍니다.
조금 전 보았던 양천지맥의 정수산 뒤로 남강지맥의 황매산이 구름 위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시간을 내어 저 양천지맥으로 가서 이쪽을 다시 봐야 하는데.....
작년 이한검 대장과 진행할 때는 여름이어서 덩굴 때문에 고생 무지 했었습니다.
11월 정도에 진행해야겠군요.
06:30
783.2봉에 이르러서는 간간이 바위도 보게 됩니다.
06:30
계속 고도를 높입니다.
단 한 번도 내리막이 없는 계속되는 오르막입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길도 거칠어지는군요.
그리고 그 우측으로 남강지맥과 황강지맥의 수도산이나 가야산도 보여야 하건만 오늘은 그저 이 정도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긴 이런 운해를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으로 애써 오늘 날씨에 대한 아쉬움을 털어 버립니다.
아!
그런데 밤머리재 삼거리 뒤로.....
천왕봉과 중봉 등.....
그 라인 즉 동부능선 라인이 보입니다.
물론 구름을 머리에 이고....
웅석봉으로 오르면 조금은 벗겨진 모습으로 보일라나....
우측 기산능선 뒤로 필봉산과 왕산이 늘어서 있습니다.
지리동부능선의 왕등재봉에서 가지친 줄기들입니다.
그 우측의 산청시내는 구름이 완전히 덮었고....
그러니 양천지맥과 남강지맥 그리고 황강지맥의 연봉들은 살펴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고도를 높였으니 이제 양천지맥의 정수산이나 그 좌측의 와룡산 정도는 확실하게 보이기는 합니다.
바로 아래 좌측의 꽃봉산237.5m.
그 우측 뒤의 정수산829.8m.
하지만 계속 보이던 황매산1113.1m은 이제 구름에 가렸습니다.
아!
천왕봉!
조금 당겨볼까요?
그나마 천왕봉이니 와불산은 아직 그대로 보이고....
06:55
드디어 웅석봉이 보입니다.
좌측 십자봉을 오른 다음 우측 안부로 떨어져서는....
조금 밀어 보면....
우측이 밤머리재로 가는 기산능선이 되겠습니다.
왕산.
필봉산도 서서히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있고.....
07:00
십자봉 갈림길입니다.
지도 #1의 '다'의 곳.
누군가 바보같이 좌측 십자봉으로 오르는 길에 진입금지 표시를 해 놓았습니다.
웅석봉을 가면서 십자봉을 패스하다니!
실제 길도 우측이 반들반들하고 표지띠도 너절하게 달려 있습니다.
그건 아니죠!
좌측에 제 표지띠 하나 걸고 나뭇가지 위로 들어섭니다.
십자봉을 건너뛰다니....
07:04
그 십자봉으로 올라서는 데에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조금 전 올라온 웅석북능.
이곳이 십자봉900.2m 정상입니다.
실제 십자봉 능선은 부족하나마 잡목 사이로 위 정경을 확인시켜주기는 한다. 다만 둔철산으로 한정한다. 679.4봉 오르기 전에 어천에서 올라오는 길을 만나는데 이정표가 너무 낡았다. 헬기장을 지나면 ‘십자봉과 웅석봉’을 가리키는 옛 이정표가 차라리 반갑다. 성심원에서 설치한 조형물을 몇 개 지나면 십자가에 피뢰침까지 설치되어 있는 십자봉 전위봉이다.
여기서 지리동부의 조망이 가능하다. 우선은 경호강이 내려다 보이면서 그 우측으로 외송마을을 따라 둔철산이 가깝고 그 뒤로 의령지맥(진양기맥)의 한우산과 자굴산이 보이며 우측으로는 석대산에서 남강태극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선명하다. 정면으로는 드디어 웅석봉이 그 큰 덩치를 드러내며 꾼을 부른다. 기산 능선 우측으로 왕산과 필봉산이 가까우니 발걸음이 빨라진다.
오리지널 십자봉인 900.2봉은 노송과 알만한 꾼들의 표지띠들이 날리고 있다. 산청읍 주변을 둘러보고 봉을 내려오자마자 산청군에서 설치한 이정표가 우측으로는 지곡사 방향을 ‘내리’로, 좌측으로는 ‘어천4.0km’가 어천을 안내하고 있는데 정작 십자봉 혹은 성심원 방향은 없다. 명색이 군립공원이라 산청군에서 다져 놓은 정규등산로인데 성심원 방향은 무시한 것이다. 명색이 지리동부능선인데 말이다.
- 졸저 전게서 514쪽
그러니 이 십자봉이라는 이름을 갖게해 준 봉우리는 여기서 조금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바로 이런 모습으로....
지금은 여름이고 산꾼들이 너무 다니지 않아 아주 거칩니다.
오늘은 생략합니다.
십자봉에서 보는 정수산의 모습도 그저 이 정도 뿐....
다시 웅석봉 방향으로 나갑니다.
07:11
그러면 바로 아까 지나친 그 우횟길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 이정표를 보면 십자봉 루트는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산청군에서 애써 십자봉 루트를 외면한 것 같습니다.
물론 안전상의 문제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마 성심원이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는 곳이고 예전에는 성심원 ~ 십자봉 루트가 그 환자들의 산책로였을 겁니다.
그런데 산객이 많아진 요즘 이런저런 이유로 그 루트가 거의 폐쇄 지경에 이르다 보니 아예 그 루트는 아는 이들만 진행하는 그런 곳이 된 느낌입니다.
표지띠 또한 십자봉 루트에는 단 한 장도 걸려 있지 않고 모조리 우횟길 방향입니다.
그렇다면 처음 들머리에 안내를 하던 '십자봉'은 도대체 왜 표기한 이름이고 이곳을 지나면서 십자봉'을 지났는지 아니면 그냥 지나쳤는지에 대한 의문도 없었다는 얘기?
헷갈릴까봐 아니면 혹시라도 가고 싶어하는 분들이 있을까봐 십자봉 방향으로 제 표지띠 한 장 걸어 둡니다.
웅석봉 좌측에서 구름이 올라옵니다.
07:20
1km?
500m로 바꿔야겠죠.
아까 내리 4.3km 이정목을 지났는데 무슨 3.1km?
된비알입니다.
바위도 잡고 올라야 하고....
기산능선 뒤로 천왕봉.....
구름은 내리內里와 산청시내를 다 덮었고.....
기산능선.....
07:49
그러고는 웅석봉입니다.
우선 먼저 보이는 게 삼각점이군요.
늘 보던 2등급삼각점(산청25).
그러고는 웅석봉 정상석.
곰이 그려져 있죠?
산이 하도 거칠어서 곰이 굴러떨어졌다 해서 웅석봉?
그 굴러떨어진 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가 없으니...
산이름은 그렇게 어설프게 막 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리산은 두류산이라 했다. 백두산(頭)이 흘러내려와(流) 만들어진 산(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을 가지기 전에 지리산은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을 것이다.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의 이동은 잦아졌으며 그러다 보니 장소에 대한 특정이 필요해졌다. 그 장소가 사람들이 신성시 여기는 곳이라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하여 이름이 지어졌을 것 같다. 이런 인식은 우리 선조들이 언어를 사용할 때부터 시작됐고 문자를 가지면서 표기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런 어휘 중 그 활용도가 가장 높은 것이 지명이다. 지명은 사람이 활동하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지명은 사용되는 어휘 중에서도 가장 보수성이 강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번 그 이름이 정해지면 어지간해서 바꾸기 힘들다.
지명은 보수적이다
이런 지명은 문화와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새로 생기고 없어지며 변화하는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그러니 고대사회에서 근대사회를 거쳐 복잡다기한 현대사회에 이르면서 그 지명이 세분화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리라. 이러다보니 반야봉, 천왕봉으로 대표되는 지리산은 마을에 따라 혹은 그 주변인의 역정歷程과 문화, 전설이나 민속 그리고 자연 환경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지리산이 그 크기만큼이나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진 이유이다.
- 졸저 전게서 22쪽 이하
그렇다면 이 웅석봉은?
곰이 굴러 떨어져 죽은 산이라서 웅석봉이라고?
웅석봉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히 볼까? 이 웅석봉 정상에 곰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곰이 굴러 떨어져 죽은 산이라고도 하는데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필자는 이를 차라리 우리 옛말에서 그 유래를 찾고 싶다. 즉 옛 사람들에게 모든 산이 그렇겠지만 특히 지리산은 ‘신성’, ‘신령’ 그 자체였다. 그러니 신神이나 그 정도로 신성하고 높은 존재를 뜻하는 우리말에 ‘ᄀᆞᆷ’이라는 단어가 있다. ‘감’, ‘검’, ‘곰’, ‘고마’, ‘구마’ 등이 거기서 파생된 단어이다. 지금의 ‘고맙다.’라는 말이다 ‘감사하다.’라는 말이 다 그런 말이다.
그러니 그런 신성한 바위가 있는 골이면 ‘가마골’, 그런 신성한 곳 즉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땅이면 산이나 커다란 바위 등과 관련하여 ‘검산’, ‘검암’ 등이었을 것이니 그들의 한자어는 ‘劍山’, ‘劍巖’ 정도였을 것이다. 같은 취지로 그런 발음을 가진 동물들 중에 우리 신화와 관련된 동물이 바로 ‘곰’이다. 그 한자어가 ‘熊’이니 다른 곳도 아닌 이 신성한 지리산의 한 봉우리가 신성한 산 즉 ᄀᆞᆷ바위 〉 곰바위〉 웅석이 됨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웅석봉은 그저 ‘신성한 산’ 정도라고 보면 될 것이다.
- 졸저 전게서 517쪽 이하
서쪽을 봅니다.
이 웅석봉은 지리동부의 끝입니다.
그러니 지리 전체를 개관하려면 이 웅석봉에서 바라보면 됩니다.
웅석봉으로 오른다. 웅석산에 오르면 우선 숨이 멎게 된다. 갑자기 세상의 정상에 올라온 느낌이다. 도대체 어디부터 어떻게 감상하여야 할지 머리가 멍해질 따름이다. 그저 두 군데의 전망대를 오가며 살펴보는데 이마저도 시원치 않고 만족할 수 없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잠시 침착해져야 한다. 그러고는 아무래도 올라온 곳부터 살펴보는 게 예의라는 생각이 든다.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 슬쩍 둔철산으로 눈길을 준다. 그런데 둔철산은 혼자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의령지맥의 한우산과 자굴산까지 함께 데리고 온다. 차근차근 그 줄기를 따라 우측으로 눈길을 옮기면 꾼들의 눈은 자잘한 봉우리들을 지나 그래도 특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백마봉과 집현산을 지나 남강을 따라 진양호에서 머물게 된다.
웅석봉에서 봐야 비로소 지리산이 ‘한국의 산’으로 구체화된다.
여기에 더하여 양천의 흐름까지 느낄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이다. 둔철산 좌측으로는 척지고개에서 정수산으로 넘어가는 능선이 명백하고 황매산이 높게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상여봉 ~ 와룡산을 보고 산청읍을 지나면 필봉산에서 왕산으로 오르게 된다. 그 뒤로 거창의 황석산과 거망산 그리고 남덕유의 흐름도 읽을 수 있는가? 그러면 그 우측의 대덕산을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다시 왕산에서 좌측을 보면 법화산에서 삼봉산으로 이어짐이 보이고 그 앞으로 와불산에서 새봉. 그 앞의 도토리봉이 보이니 이제는 동부능선의 봉우리들이 한 번에 읽힌다. 눈길은 천왕봉으로 간다. 천왕봉에서 중봉으로 내려온 능선이 좌측으로 황금능선을 타고 구곡산으로 내려가는 것을 그리면 그 좌측 뒤로 촛대봉이 보이고 왕시루봉까지 보인다. 낙남정맥의 흐름까지 느끼면 이방산과 수양산에서 달뜨기능선을 따라 이리로 올라오는 것을 다 볼 수 있으니 웅석봉에서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존경하는 글쟁이 산악인 박인식은 웅석봉을 이렇게 얘기한다. “지리산은 어디서 보아도 그 산세가 확실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워낙 넓은 산자락 탓이다. 그래서 ‘한국의 산’으로 추앙받으면서도 지리산은 애매모호한 추상화로 인식되기 쉽다.(중략) 웅석봉에서 바라보아야 지리산은 추상화의 이미지를 벗고 ‘한국의 산’으로 구체화 되는 것이다.”
웅석봉은 이런 봉우리이다. 어디서 보아도 지리산 전체를 다 볼 수는 없지만 웅석봉에서 만큼은 다르다는 얘기다. 박인식 선배의 얘기를 들으니 어느 정도 웅석봉이 정리됨을 느낀다.
- 졸저 전게서 516쪽 이하
웅석봉의 북쪽.
이젠 왕산만이 살짝 보이고....
하지만 그나마도 금방.....
하지만 남서쪽 방향으로는 그나마 조망이 좀 됩니다.
바로 앞이 달뜨기 능선의 시작 지점.
웅석봉에서의 진행은 2등급삼각점(산청26)을 확인한 다음 초소방향으로 나간다. 헬기장을 나가면 바로 삼거리이다, 여기서 삼장면을 만나는데 좌측 삼장면과 단성면의 면계가 이른바 달뜨기 능선이다.
이날 오후, 시퍼런 강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산모퉁이를 돌아섰을 때였다. 앞서 가던 문춘 참모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 정면을 바라보고 있더니 뒤를 돌아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동무들! 저기가 달뜨기요. 이제 우리는 지리산에 당도한 것이요!” 눈이 시원하도록 검푸른 녹음에 뒤 덮인 거산이 바로 강 건너 저편에 있었다. 달뜨기는 그 옛날 여순사건의 패잔병들이 처음으로 들어섰던 지리산의 초입이었다. 남부군은 기나 긴 여로를 마치고 종착지인 지리산에 들어선 것이다. 제2병단 이래 3년여의 그 멀고 험난했던 길을 이제 다시 그 출발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1천 4백의 눈동자가 일시에 그 시퍼런 연봉을 응시하며 “아아!” 하는 탄성이 조용히 일었다. 여순 이래의 구 대원들이 마치 고향을 그리워하듯 입버릇처럼 되뇌던 달뜨기…… 이현상이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고 했던 빨치산의 메카, 대지리산에 우리는 마침내 당도한 것이다. 나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회에 젖으며 말없이 서 있는 녹음의 산덩이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지리산아, 이제 너는 내게 어떤 운명을 가져다주려느냐?
이병주 선생의 ‘지리산’ 7권에도 빨치산이 황석산을 넘어 둔철봉에서 지리산으로 입산하는 과정에서 달뜨기능선을 보면서 환호하는 장면이 거의 같은 내용으로 나온다.
- 졸저 전게서 518쪽 이하
덕유산에서 백두대간 능선을 타고 육십령을 지나 백운산에 거점을 마련한 이태 일행(남부군 제2병단)은 추적해 오는 토벌군을 피해 백운산을 떠납니다.
그들은 백운산에서 우틀하여 중치재를 거쳐 봉화산으로 가는 루트를 택해야 하나 부득이 이를 버립니다.
그러고는 좌틀하여 산을 내려가 남강(이 남강은 백두대간이 남덕유산을 지나면서 가지를 친 남강지맥 사이에서 발원한 물줄기입니다.)을 건너서는 남강지맥으로 오릅니다.
장수 쪽은 이미 회문산 본부가 궤멸된 뒤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쪽으로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지리산으로 가기 위해 택한 곳이 남강지맥 루트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황석산1183m에서 남계천(남강의 상류지역을 특히 부근 주민들이 부르는 이름이 아닌가 싶음)을 건너 남강지맥으로 갈아타고는 덕갈산669m ~ 철마산774m ~ 보록산664m을 거쳐 생초지서를 위협한 후, 황매산1113m까지 진행하게 됩니다.
합천에서 가회전투를 벌이고는 입석마을(이 부근의 입석마을이면 단성의 그곳을 이야기하나 그렇다면 이는 이미 남강을 건너게 된 것이라 내용과 맞지 않음)까지 진출하기에 이르릅니다.
그러고는 양천지맥 상에 있는 정수산이나 둔철산을 넘을 때 발밑에 펼펴지는 남강(산청 사람들은 특히 경호강이라 부름)을 보며 위와 같이 외쳤던 것이죠.
그런데 이 산청이 참 재미있는 동네입니다.
볼 것도 많고 알아야 할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 내력에 대해 무심하다 보니 그 지역의 사는 사람들조차 점차 잊고 있습니다.
지리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산청에 대해서 무관심하면 좀 그렇죠?
남강이 산청에 들어오면 경호강이 된다
이 산청의 예전 이름은 산음이었다. 중국을 사대事大하다 못해 모화慕華까지 한 경덕왕( ? ~ 765)은 지품천현이었던 이 산청을 산음으로 바꿨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산양이라고도 불리다가 영조43년 그러니까 1767년에 이르러서야 지금의 산청으로 부르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쓰는 지명은 대부분 신라 경덕왕 때 정비된 이름이다. 경덕왕은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실시하여 우리나라의 모든 지명을 한자화하는 작업에 몰두한 인물이다.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중국 절강성 소흥현 산음(상해 바로 아래의 소흥시紹興市)의 빼어난 산수와 비견比肩된다고 하여 거기서 따온 이름이란다. 그래서 중국 산음에 경호강이 있으니 이 남강도 산청으로 들어서면 특히 경호강이라 부르는 것이다. 단성의 끄트머리까지는 그렇게 부른다.
그러니 경호강의 본 이름은 남강이다. 이 남강이 하는 역할 중 하나는 지리산의 동쪽 영역을 한정한다는 것이다. 즉 남강을 만나면서 지리산의 모든 맥들은 다 끝나게 된다. 그러니 덕천지맥이나 지리태극종주, 남강태극종주, 하다못해 진양태극종주는 물론 지리동부능선까지도 모두 그 맥의 끝은 이 남강까지 인 것이다. 남강과 지리산과의 관계는 이것만 이해해도 된다.
경호1교를 건너면서 좌측을 보면 경호교 앞 우측으로 산청초등학교가 보이는데 그 초교 본관 자리에 예전에 ‘환아정換鵝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밀양의 영남루, 진주 촉석루와 더불어 영남 3대 누각으로 알려진 큰 정자였다. ‘환아換鵝’ 하니까 중국 산음의 대표적인 인물로 문학가이자 서예가인 왕희지(307~365)가 떠오른다. 환아정과 관련한 얘기를 들어볼까?
환아정이라는 정자
<사진 4〉 영남 3대 누각 중 하나였던 환아정. 인터넷에서 퍼왔다.
김선신의 두류전지는 “산청지에는 객관 서쪽에 있으며 강가(경호강)에 임해 굽어보고 있다. 현감 심린이 건립할 때 당시 저명한 선비였던 화산(花山) 권반權攀(1419∼1472)이 우군 왕희지의 고사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 우암 송시열과 백헌 이경석의 기문이 있다.”고 적었다.
권반이 ‘백아환자白鵝換字’ 즉 ‘유난히 거위를 좋아했던 왕희지가 흰 거위白鵝를 얻기 위해 ’도덕경‘을 자신의 필체字로 써서 그 둘을 바꿨다換.'는 유명한 고사에서 따와 ‘환아정換鵝亭’이라 이름 지었고, 그 현판의 글씨는 당대 최고의 명필 한석봉(1543~1605)이 썼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소실됐고 다시 복원된 것이 1950년 3월 1일 01:00 원인 불상의 화재로 또 소실되었으나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들어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1489년 4월 봄이 무르익는 계절에 탁영 김일손도 지리산 유람을 떠나면서 이곳을 지났다. 그는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기문記文을 보고는 “북쪽으로 맑은 강을 대하니, 유유하게 흘러가는 물에 대한 소회가 있었다. 그래서 잠시 비스듬히 누워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다. 아! 어진 마을을 택하여 거처하는 것이 지혜요. 나무 위에 깃들여 험악한 물을 피하는 것이 총명함이로구나. 고을 이름이 산음이고 정자 이름이 환아換鵝니, 아마도 이 고을에 회계산會稽山의 산수를 연모하는 사람이 있었나 보다. 우리들이 어찌 이곳에서 동진東晉의 풍류를 영원히 이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 규모에 대해서 정유재란 뒤 복원한 환아정을 본 김회석(1856~1934)은 “매우 웅장하고 아름다웠다.”고 그렸는데 이런 환아정을 지나면서 시를 지은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남주헌(1769~1821)은 함양군수 재직 중이던 1803. 3. 산청현감 정유순鄭有淳, 진주 목사 이낙수 등과 함께 지리산을 올랐다. 산행 도중 산음에 들러서는 이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주변을 이렇게 그렸다. “정자 아래로 강물이 흘렀고, 강가에 절벽이 임해 있었으며, 예쁜 꽃과 길쭉한 대나무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곳의 옛 지명은 산음山陰이다. 그래서 산은 회계산會稽山이라 일컫고 물은 경호강鏡湖江이라 이름하며, 왕일소王逸少(필자 주 왕희지)의 고사를 본떠 환아정을 지은 것이다. 여기는 내가 여러 차례 본 곳이다.” 그렇게 둘러보고는 산음을 떠나면서 시 한 수를 읊는다.
稽山鏡水繞空臺 계산경수요공대 회계산과 경호강이 빈 누대를 감싼 자리
癸丑春年上巳會 계축춘년상사회 계축년(353년)의 봄날이 상기일과 겸해 돌아왔네
그러면서,
籠鵝已去沙鷗至 농아이거사구지 거위 안고 떠나가니 갈매기만 날아오고
道士難逢洞客來 도사난봉동객래 도사 상봉 어려우니 동객만 찾아오네.
그런데 그 경호강과 어우러진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회계산이 어디인가? 대동여지도와 조선지도에도 나와 있는 이 회계산이 현대 지도에는 위치가 불분명하다.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회계산은 ‘동산’의 북동쪽 정곡 마을 좌측에 있다고 하고, ‘비변사인방안지도’와 ‘광여도’에 의하면 ‘관문으로부터 5리 거리’라고 되어있다. 그럴 경우 ‘동산’이 현재 산청의 진산인 꽃봉산237.5m이라고 하니 회계산은 지금의 산청군 하수 종말 처리장 옆에 있는 231.7봉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이 정도의 조망의 봉우리에 그 수려한 이름을 갖다 붙였을까?
깊게 살펴보면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친 남강지맥이 소룡산 부근에서 양천지맥을 다시 분기시키고 이게 비득재 부근에서 다시 우측으로 가지를 친 줄기가 상여봉506.9m~와룡산416.7m으로 내려오다 마지막에 빚은 산이 바로 꽃봉산237.5m이다. 또 꽃봉산에서 5리 정도라면 와룡산이 거의 맞을 거 같다. 그런데 사실 와룡산은 그렇게 풍치가 없으며 경호강변에 위치한 곳도 아니다. 사실 강변에 있으며 정곡마을 왼쪽에 있다고 하면 당시의 지형이 지금과 똑같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 아까 얘기한 231.7봉 밖에는 없다.
- 졸저 전게서 159쪽
동쪽 양천지맥의 정수산이나 둔철산은?
지난 번 만난 초소장님은 아직 출근 전이시고.....
07:56
지도 #1의 '라'의 곳에서 이정목을 만납니다.
조망이 되지 않는 고로 서둘러 하산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바로 좌틀하여 어천 방향을 따릅니다.
그러고는 이제부터 산청읍을 벗어나 단성면 안으로 들게 됩니다.
지도 #2
예전 이정표.....
08:01
남강능선 방향으로 완전히 구름이 걸렸습니다.
저는 저 능선을 따라 중앙의 792.8봉을 넘어 1001번 도로가 지나는 한재로 진행할 것입니다.
능선 우측 임도를 따라 내려가도 한재로 이어집니다.
간간이 바위도 나타나고....
08:23
임도를 만납니다.
이곳에서 지리산 둘레길 제7구간인 성심원 ~ 운리마을 구간도 만나게 되죠.
표지띠가 걸려 있는 좌측 숲길로 잠시 진행하면,
08:27
다시 임도를 만나게 되고....
지도 #2의 '마'의 곳인 이곳이,
등산 안내도와,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우측 임도로 진행하거나 ,
표지띠가 있고 진입금지 로프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면 아까 본 구름의 구분선이 되는 남강태극 길입니다.
그 두 길은 조금 전 얘기한 바와 같이 1001번 도로가 지나는 한재에서 만나게 되고....
로프를 넘습니다.
08:40
아까 지난 임도와 가장 근접한 곳.
그 안부의 정경입니다.
간벌을 한 곳 좌측으로 오르면 되는데 아까 웅석봉에서 본 그 상황의 연속인 거 같습니다.
구름 속을 걷고 있는 것이죠.
우측으로 그 임도가 보이는군요.
폰을 만지작 거려 산울림 노래를 터치합니다.
그러고는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를 터치합니다.
반복되는 베이스 기타 소리가 깔리면서....
08:48
지도 #2의 '바'의 곳인 792.8봉 전위봉을 오릅니다.
그러고는 바로 숲속으로 들어 거미줄과 사투를 벌입니다.
이놈들은 사람 얼굴 높이에 딱 거미줄을 칩니다.
참 이상한 놈들....
09:02
그러고는 792.8봉입니다.
이렇게나마 근근이 길을 이어가는데 걷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거미줄.....
통풍이 잘 되는 멀티프로 안면을 가리긴 했지만 이미 땀과 물방울로 젖은 상태라 자칫하면 남영동에서 수건을 씌우고는 고춧가루를 탄 물을 들이 붓는 것과 똑 같은 현상이니....
어쨌든 그렇게 거미줄과 사투(?)를 벌입니다.
09:24
갈림길이 나오는군요.
지도 #2의 '사'의 곳인데 꼭 이런 곳에는 그 많던 표지띠도 사라집니다.
자신이 없었던 것이겠죠,
그렇다고 조금 진행하다 그 길이 맞음을 확신한다고 해도 되돌아 와 표지띠를 달기에는 좀 그렇고....
그랬을 겁니다.
우측으로 내려갑니다.
09:28
멧선생 목욕 흔적도 보고....
09:42
그러고는 임도를 만납니다.
아까 헤어졌던 임도죠.
내려가는 방향 우측으로 표지띠가 보입니다.
그 안으로 들어서서는 바로 한재로 떨어지는 곳은 출구가 없으므로 좌측을 주시하면서 내려가야 합니다.
물론 그 길을 안내하는 표지띠는 없습니다.
제 것을 두어 장 달아 둡니다.
09:47
그 날머리입니다.
그 입구에 방금 단 제 표지띠 한 장이 보이는군요.
저 위가 바로 한재.
이 도로가 1001번 도로입니다.
어천과 원지와 덕산과 20번 도로가 지나는 길리를 잇는 도로입니다.
1001번 도로가 중요한 것은 지리산 둘레길 제7구간 중 단속사지를 지나게 되고 조금 더 멀리는 '구간 외'이긴 하지만 위 단속사지의 대문 즉 일주문이 있던 광제암문 옆을 지나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속사지에 대해서는 이따 다시 봅니다.
다음 진행은 이 안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이 안내판 바로 뒤로 아주 작은 물줄기 하나가 흐릅니다.
그걸로 얼굴도 씻고 목 뒤에 붙은 나뭇잎도 쓸어냅니다.
그런데 이때 어천 부근에서 한 분이 올아오시는군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분도 석대산 방향으로 간다고 하는군요.
10여 분 쉬다가 올라갑니다.
길은 이 정도입니다.
10:12
499.2봉을 지납니다.
봉우리라는 인식을 들지 않는군요.
지도 #3
편안한 길의 연속.
10:24
바위도 군데군데 나타나고...
10:27
그 바위 중 한 군데를 올라 진행방향을 조망합니다.
좌측 봉우리가 지도 #3의 '아'의 곳이고 우측이 592.6봉이로군요.
저 바위봉에서 멋진 장면이 연출되겠건만 오늘은 별로 기대를 안 합니다.
그러나저러나 손이나 옷이나 심지어 배낭까지도 다 젖어 휴대폰에 터치가 제대로 되지 않다 보니 GPS조차 지대로 작동이 안 되는군요.
다시 껐다가 켭니다.
역시 에러가 납니다.
그러고는 제대로 위치를 잡는군요.
10:28
우측으로 청계저수지가 펼쳐지고....
동행하시는 분은 이곳이 자기 집 바로 뒷산이라고 하면서 세세히 알려주시는군요.
달뜨기 능선 바로 옆으로 진행한 둘레길은 저 저수지 좌측의 414.4봉 뒤로 진행하게 되죠.
조금 전 본 지도 #2의 '아'의 봉은 들러가도 되고 우회해도 되는 봉입니다.
아무리 오늘 조망이 안 좋다 해도 우선 들러는 봐야겠죠.
직진합니다.
역시 좀 그렇습니다.
잔뜩 찌푸린 날씨지만 경호강 건너 심거 마을 뒤로 둔철산이 일부가 그 모습을 보이는군요.
10:45
우회하는 길과 다시 만나고....
592.6봉을 오르면서 지나온 길을 더듬어 봅니다.
좌측 아래 건물인 청계산장 우측으로 1001번 도로가 지나고 있으니 좌측 높이 솟은 게 792.8봉.
그리고 우측 앞이 조금 전 직진하여 지나온 지도 #3의 '아'봉입니다.
592.6봉의 북쪽 사면은 이렇듯 바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로프도 설치되어 있고....
지나온 길....
우측 청계저수지 방향.
10:57
조망이 터지는 이곳에서 잠시 놀다 가기로 합니다.
오늘 만난 그분도 상당히 지리산에 대해서 잘 아시고....
그분이 싸가지고 온 감자를 세 개 정도 얻어 먹고 자리를 텁니다.
그분은 아까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가고 이제부터는 다시 저 혼자 진행합니다.
믿지 못할 거리....
11:31
지난 번 이한검 대장님과 저 외송마을로 들어가서 둔철산으로 올랐죠?
11:31
그러고는 정상에 있는 4등급삼각점(산청428)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안내문을 보면 이 삼각점이 마치 경상남도에서 설치한 것 같이 얘기하는군요.
11:32
그러고는 1분 정도 더 가야 이 정상석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다른 이름의 정상석이 세워져 있었숩니다.
바로 문제의 정상석입니다.
즉 진주의 남가람 라이온스 클럽에서 단순히 자기네의 모임 이름을 남기기 위해 '석대산 남가람봉'이라고 작명하여 정상석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가람'이라면 '강'의 고어인데 그렇다면 결국 남가람은 남강이라는 이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남가람봉' 이라는 지명은 전혀 근거도 없고 명분도 없는 지명인 것 같습니다.
산에 스스로의 이름을 걸어 놓는 것도 남부끄러운 짓입니다만 지명을 자의적으로 지어 붙여놓으면 오히려 산을 욕되게 하는 짓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정상석의 봉우리 이름은 덧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석대산을 그렇다치고 '수리봉'이라는 이름은 괜찮은가요?
자료를 찾아보니 이곳에서 4~5분 정도 내려가면 안동권씨 음택이 나옵니다.
그 무덤의 묘비명을 보면 "정조 10년 1786년 석대산 취암鷲巖아래 자리를 잡다.'라는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봉우리 두 개를 넘어 도착하는 만월봉1280.4m에서 삼각점(연곡434)을 확인하고 큰 등산안내도도 본다. 인상적인 주목 한 그루를 보고 안전시설이 잘 되어 있는 계단을 오르면 1등급 대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는 응복산1360.0m이다. 우리나라에 설치된 174개의 1등급삼각점 중 이게 그 하나이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 중에는 鷹伏山의 응이 매鷹자여서 매복산으로 표기된 것도 있다. 매가 웅크린 형상이란 말인가?
이미 ‘수리’는 ‘높은 곳’ 또는 ‘맨 꼭대기’를 나타내는 순 우리말이고 여기서 파생된 말이 ‘사라’, ‘사리’, ‘설’, ‘솔’, ‘시루’, ‘수’, ‘싸리’, ‘수락’ 등 여러 가지 형태라는 건 이미 봤다. 당연히 높은 곳을 나는 새(鳥) ‘수리’나 ‘독수리’도 여기서 나온 이름임은 자명하다. 그러니 이 수리를 한자로 표현하면서 취(鷲)자를 쓰는 건 사실 시간 문제였다. 영취산(靈鷲山), 취성산(鷲城山)이 그 가장 비근한 예이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매’이다. 그리고 그 매의 한자인 응(鷹)이 응봉(鷹峰)이 된다거나 매봉이 되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니 이런 이름의 산을 볼 때에는 주위 산보다 높은 곳을 일컬음이니 비약하여 ‘수리 모양’, ‘매가 많이 사는 곳’ 등의 얼토당토않은 의미를 부여할 일은 아니다. 따라서 응복산도 응봉산의 잘못된 표기이리라.
같은 취지로 위의 매복산도 매봉산 혹은 매봉의 오기이다.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465쪽
이런 취지로 석대산 수리봉은 타당한 작명으로 보여집니다.
11:35
청계저수지 삼거리를 지납니다.
조금 전 얘기한 안동권씨 문중 음택입니다.
제 조상 님 묘소입니다.
그런데 뒷면의 묘비명 좀 일거보려고 해도 너무 희미해서 알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쨌든 제 조상 님들은 이렇게 산꾼들을 위해 묘비명에 지명을 남기셨습니다.
11:47
안부를 지나,
11:51
지도 #3의 '자'에 위치한 송전철탑을 지납니다.
석대산을 향한 부드러운 능선은 여전히 계속되고.....
11:55
그러고는 청계삼거리입니다.
정상 즉 석대산까지는 아직 3.5km 남았다고 하는데....
지도 #4
12:06
478.3봉에서 뒤를 좀 돌아보고....
12:07
우측 중앙으로 아파트들이 보이는군요.
행정구역명으로는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이지만 '원지'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바로 서울로 오가는 버스 때문입니다.
예전 삼남대로의 길목에 있고 단성(丹城)고을과 도천서원(道川書院)으로 가는 길목이라 하여 '원목정'이라 하다가 '원지'가 되었다고 하는군요.
지리산으로 오히려 대부분 저 원지에서 내려야 하기 때문이죠.
어떨 때는 진주 손님보다 원지 손님이 더 많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산꾼에게는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아파트 단지 우측으로 흘러들어오는 물줄기 때문입니다.
바로 양천이죠.
남강지맥 금곡산382m에서 발원하여 합천 쌍백면, 삼가면과 의령군 대의면을 거쳐 산청군 생비량면, 신안면으로 흘러들어 신동천을 흡수하고 마지막에 남강으로 유입되는 물줄기입니다.
산청 생비량면에서는 이 물줄기를 생비량천이라고 부른다고 하지만 공식적인 이름은 엄연히 양천입니다.
그 양천이 남강과 합류되는 그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는 산줄기.
바로 양천지맥입니다.
신산경표에서는 정수지맥이라고도 부르지만 산경표가 산줄기의 이름을 물줄기의 이름을 따 명명하였듯이 양천지맥으로 부르는 게 맞습니다.
그럴 경우 그 마지막 봉우리가 어딥니까?
원지의 아파트 촌 좌측으로 보이는 산.
그렇죠 적벽산166.3m입니다.
산청의 여느 산이나 물도 중국의 그것을 모방해서 이름을 지었듯이 이 역시 필경 삼국지에 나오는 적벽대전에서 착안했을 겁니다.
이 벽면에 우암 송시열이 각자한 ‘赤碧’이라는 글도 있고 대동여지도에도 표기되어 있는 이름이니 꽤나 이름 있는 산입니다.
여기서도 보이지만 그 벽면인 절벽이 붉은색을 띈다고도 합니다.
작은 소로를 건너 그 좌측이 백마산286.3m이긴 합니다만 하얗게 보이는 길 옆으로 갈전천이라는 둔철산에서 발원하는 개천 하나가 흐르기 때문에 백마산 ~ 월명산320m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지맥枝脈이 되지 못합니다.
양천지맥은 적벽산 좌측 뒤로 아슬아슬하게 넘어가 둔철산 정도에서나 큰 봉우리로 세워지게 됩니다.
그러니 지금 뒤로 보이는 광제봉420m, 집현산578m 등이 오히려 무척이나 높아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양천지맥은 남강지맥이라는 더 큰 지맥에서 분기한 줄기이니 그럴만도 한 것이라 봅니다.
좌측 맨 뒤 구름에 싸인 의령지맥의 자굴산897m이나 한우산836m을 또렷하게 보지 못한다는 것이 유감이군요.
여기서 주의할 게 있습니다.
신산경표에서는 저 뒷줄기의 산들의 이름을 진양기백으로 부르고 있으며 한우산 뒤로 넘어가는 줄기를 우봉지맥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반면 대한산경표에서는 물줄기를 중시하여(그렇다고 하여 신산경표가 물줄기를 무시한다는 것은 아니고 다만 물의 세력까지 감안하여 유역을 본다는 점이 다릅니다.) 남강과 그보다 상위의 물줄기인 낙동강의 합수점으로 맥이 진행하는 곳을 따라 그 합수점에서 맥이 다하게 되니 그 지맥의 이름을 남강지맥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황매산에서 내려와 자굴산을 지나 저 집현산과 광제봉을 지나 진양호로 잠기는 줄기는 합수점형 지맥이 아니라 지맥의 제3유형인 산줄기형에 해당되는 지맥이어서 그 지방의 이름을 따 집현지맥으로 불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렵죠?
지금은 그냥 그런가 보다하시면됩니다.
우리나라 지맥을 다 하신 분들도 이것을 이해하는 분들 별로 없습니다.
그냥 남들이 그어놓고 "따라 와!"하면 그냥 갈 뿐.
그 원리나 방법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이러는 저와 같은 부류들을 보고는 '산줄기 공학적'인 접근 방식이라고 비난을 하는 분들도 있으시니.....
지도로 설명을 할까요?
너무 복잡해지죠?
예전에 남강지맥을 설명해 드리면서 해 놓은 산행기가 있을 겁니다.
궁금하시면 찾아보십시오.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중앙 맨 뒤 능선이 달뜨기이고 그 좌측으로 수양산이니 뭐니 하는 봉우리들도 관찰하여야 하는데....
12:16
사면을 좀 돌고....
12:29
여전히 등로 사정은 양호!
저곳이 행정구역 상으로는 단성면 운리이죠.
저곳이 재미있는 것이 바로 단속사지 때문입니다.
탑이 두 기 중 동탑이 보이고 그 우측 건물 뒤로 정당매각도 보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서 나오는 길목에 서산대사 시비도 있고....
사진의 윗점이 전봇대인데 그 우측에 정당매각이 있고 그 앞에 탑이 있으며 아랫점에 시비가 있습니다.
단속사 소고
8세기경 신행이 창건하여 북종선을 받아들이고 고려 무신정권 최우의 아들 만종이 출가한 그곳은 과연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강회백의 정당매는 비록 그의 증손 강용휴가 다시 심은 것이긴 하지만 그 오랜 세월을 어떤 모습으로 버티고 있을까? 호기로운 성여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
1001번 도로를 만나는 사거리 우측으로 마을이 보인다. 탑동마을이다. 한가운데 탑도 보인다. 바로 저곳이다. 단속사지 동탑이다. 탑이 있는 마을이어서 탑동마을이다. 우측 금계사에서 직진하여 탑동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금륜대라는 작은 절집을 지나면 바로 좌측으로 정당매각이 나온다.
<사진 3〉 단속사지에 있는 정당매각.
비각 안에는 두 기의 비석이 있는데 좌측의 ‘통정대부 강선생 수식 정당매비’는 1847년에 후손인 강세주, 강택주가 세웠고, 우측의 비는 1915년 새로 지은 것으로 이 비를 세울 때 비각도 함께 세웠다. 비각 안에는 강회백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시를 걸어놓았다. 이 비에서 얘기하는 매화나무는 비각 바로 맞은편에 있다. 비록 시멘트로 덧씌워져 있어 매화나무 본래의 모습은 아니겠으나 65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꽃을 피운다. 이 매화나무의 주인공 강회백의 손자 강희안의 양화소록養花小錄을 보면 이 나무는 자신의 할아버지 강회백이 이 단속사에서 과거 공부를 할 때 절의 뒤뜰에 심었던 것이라 한다.
"우리 조부 통정공께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조부께서 정사를 바르게 하여 조화를 이루고 임금을 보필하여 백성을 구제한 일이 많았기에 단속사 스님들도 조부의 덕을 생각하고 그 깨끗한 풍채와 고매한 품격을 사모하여 그 매화를 보면 곧 조부를 본 듯하였다. 그러므로 오늘에 이르도록 정당매라 부른다.'고 하였다."
이렇듯 강회백의 손자 용휴가 심은 나무도 세월을 이기지 못해 2013년 이 정당매의 일부를 다른 나무에 접목하여 후계목으로 관리하고 있다. 사람도 자손으로 그 가계를 이어가듯 이 정당매도 이제는 손자를 본 모양새다. 그러니 굵은 모습의 시멘트 옆에 새롭게 올라오고 있는 나무가 바로 후계 정당목이다. 이 정당매는 하즙 선생의 원정매, 남명 선생의 남명매와 함께 ‘산청삼매山淸三梅’라고 불린다.
우측 단속사지로 나간다. 단속사의 단속斷俗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말일 게다. 금계사였던 원래 이름을 단속사로 바꾸면서까지 용맹정진하려는 수도승의 의지가 자못 결연해 보인다. 이 단속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신라 경덕왕 7년(748년) 대내마 이순이 임금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어느 날 관직을 버리고 승려가 되어 단속사를 창건하고 그곳에 거처했다.”는 ‘이순’설과, 삼국유사 신충괘관조의 763년 신충이 벗들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왕의 복을 빌었다고 하는 ‘신충’설 등이 그것이다.
1489년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에서 단속사 승려의 말을 인용하여 “신라의 유순(이순의 오기인 듯)이 녹봉을 사양하고 불가에 귀의해 이절을 창건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이순’설이 맞는 것 같다.
이 단속사는 한국 불교사에서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사찰이다. 즉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를 통하여 선종이나 교종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던 사찰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8세기 초 신라 승려 신행(704~779)이 등장한다. 그는 당나라에서 북종선을 배워와 신라에 그 불법을 전했는데 그 최초의 선종사찰이 바로 이 단속사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선종을 볼까? 인도의 불교를 중국으로 가지고 온 달마대사가 세운 중국의 선종은 8세기 초 크게 북종선과 남종선으로 나뉜다. 북종선은 중국 선종 4대 조사 도신의 법맥을 계승한 선종 불교로서 당시 교종이 성행하던 신라사회에 불교사상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
이전의 단속사는 신라 왕실이나 귀족사회와 교종을 통하여 깊숙하게 연결이 되어 있었다. 이런 단속사가 위 신행과 그의 스승인 법랑으로 인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들의 활동은 김헌정金憲貞(신라 하대의 왕족으로 생몰년 미상)의 ‘단속사 신행선사비’에서 잘 나타나 있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171쪽
그런데 조금 전 만났다 헤어진 분께서 저 단속사지를 보고 저에게 질문을 하나 던지셨습니다.
저 단속사지의 규모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최치원 얘기를 꺼냅니다.
바로 이 각자를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만 거론해도 지리산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이 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러면서 이 글씨를 직접 봤다고 하면서 폰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최치원의 글씨라고 하면서....
그냥 넘어가도 되겠지만 혹시나 제 책을 읽은 분하고 대화를 하다가 다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가 오류를 바로 잡아드렸습니다.
광제암문廣濟嵒門은 고운의 필체가 아니다!
<사진 4〉 광제암문 각자. 이 글은 최치원이 쓴 게 아니다.
그들이 출입하던 예전 단속사 입구는 고운 최치원이 썼다는 광제암문廣濟嵒門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는 곳이었다. 단속사지에서 약 2.7km 정도 떨어진 곳이었으니 “광제암문에서 짚신을 갈아 신고 절을 한 바퀴 돌고 나오면 다 헤졌다.”라거나 “쌀뜨물이 10리 밖에서도 보였다.”는 말들로 단속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널리 세상을 구하라!’라는 취지의 이 글을 사찰에서는 주로 대문 입구에 새겨 놓아 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가짐을 다지게끔 해주었다. 그런데 고운 최치원이 새긴 걸로 알려진 이 글에 대해 논의가 있다. 사실 이 글이 고운의 필체라는 근거는 중종25년(1530년)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진주晉州편 불우조佛宇條에 있었다. 즉 ‘불우 단속사 지리산 동쪽에 있다. 골 입구에 최치원이 쓴 ‘광제암문(廣濟嵒門)’ 네 글자를 새긴 돌이 있다.’는 글이 그것이다.
남효온은 “진주 여사등촌을 출발하여 단속사로 향하였다. 동구에 ‘廣濟巖門’이라는 네 개의 큰 글자가 바위 표면에 새겨져 있으나 누가 쓴 것인지는 모른다.”고 하였는데, 그 뒤 김일손은 “단성에서 서쪽으로 약 15리쯤 험한 길을 구불구불 다 지나고 나면 널찍한 언덕이 나온다. 거기에서 단애를 따라 북쪽으로 3, 4리쯤 가면 곡구谷口가 나오는데, 그 입구에 바위를 깎아 새긴 ‘廣濟巖門’이라는 네 글자가 있다. 글자의 획이 힘차고 예스러웠다. 세상에서는 최고운의 친필이라고 전한다.”라고 두류기행록에서 적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19년 발행된 조선금석총람의 단속사동동구석각斷俗寺東洞口石刻에 의하면 이 글은 고려 성종 14년(995)에 석혜? 스님이 쓰고 석효선 스님이 각자한 것이라는 게 밝혀졌다. 즉 일본인 학자가 이 글을 탁본하는 과정에서 이끼를 걷어내다 바로 옆에 새겨진 문장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統和十三年乙未四月日통화십삼년을미사월일 즉 성종 14, 995. 4월일, 書者釋惠? 刻者釋曉禪서자석혜? 각자석효선, 즉 글을 쓴 자는 승려 석혜?이고, 새긴 자는 승려 석효선’이라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쓸 때 자료를 수집해 온 사람의 성격이 좀 덜렁대는 스타일이었나?
그 정도였던 단속사가 김일손이 방문했을 때인 1489년 4월에는 절이 황폐화되기 시작하여 승려가 거처하지 않는 방이 수백 칸이었다고 그리고 있다. 억불숭유 정책과 사찰에 대한 과도한 노역, 세금 등으로 쇠락하다가 1568년 이 절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특히 성여신) 불상을 훼손하고 경판을 불태운 사건이 있은 후 그 쇠락의 속도가 더해지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완전히 소실되어 현재의 터만 남아 있다.
- 졸저 전게서 175쪽 이하
그러면서 쌍계사의 '쌍계석문'이나 삼신동의 세이암은 고운 선생 필적 맞다고 얘기해주니 바로 순응을 하십니다.
12:51
그러고는 535.9봉에 오릅니다.
석대산입니다.
정상에는 3등급삼각점(산청316)과,
정상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입석초등학교 20회 동창들이 모여서 기증한 정상석이군요.
아주 훌륭한 동창회입니다.
아까 그 라이온스 클럽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이제부터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능선이 급좌틀하여 석대마을 쪽으로 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만연히 직진을 하다가는 입석초등학교가 있는 입석마을로 떨어지는데 그 코스는 남강태극 방향과는 다른 곳입니다.
13:09
석대산을 출발한 지 15분이 조금 지난 곳.
지도 #4의 '카'의 곳입니다.
바로 폐헬기장인데 이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직진하는 길이 더 좋고 등로의 흐름입니다.
좌측에 제 표지띠 하나 걸어 놓고 좌틀합니다.
13:12
지도 #4의 '타'의 곳.
아마 이것을 상투바위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케른도 있고...
무속인들이 기도터로 이용하는 곳은 아닌지....
이곳에서의 진행이 어렵습니다.
이 바위를 우측으로 돌아 좌측으로 나가면 길이 갈립니다.
우측 바위 밑을 보면 희미한 길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데 과감하게 계곡 옆으로 내려옵니다.
그러면 두어 차례 아주 작은 물줄기를 오가게 되지만,
13:22
이내 길은 제자리를 잡고,
13:33
물도 보충하고 대강 몸도 씻으면서 내려오다 보면 이렇게 기도터도 만나게 됩니다.
산청군 산림과에서 팻말까지 붙여놓은 것을 보면 민속학적으로 보존가치가 있는 듯 싶습니다.
13:43
사람 사는 곳 같은 느낌이 듭니다.
종점을 따르고....
석대마을이군요.
대단한 곳입니다.
전원 마을로 조성을 하였는데 제대로 분양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도로를 따라 삼거리로 나갑니다.
아주 멋진 마을.....
13:57
지도 #4의 '파'의 곳입니다.
좌측 숲으로 들어야 하는데 온몸이 물투성이입니다.
앞으로 6km 정도를 더 걸어야 하는데 야산을 걷는 것이니 별로 힘들 것은 없으나 여전히 찝찝하기만합니다.
"내가 뭐 산줄기 진행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자르기로 합니다.
내려온 골목.....
원지로 택시를 부르니 7분 만에 도착합니다.
원지에 새로 지은 목욕탕으로 가서 5,000원 내고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는 옷을 갈아 입습니다.
어탕국수 한 그릇 때리고 예매해 놓은 15:20 버스에 탑승합니다.
마침 프리미엄 버스 밖에 없군요.
오늘 땀을 많이 흘렸으니 이온 음료도 마셔야죠.
매장진열대에서 손은 자연스럽게 포카리스웨트에서 파워에이드로 가는군요.
일본에서 가져온 것은 먹지도 마시지도 말아야죠.
원래 그랬는데 포카리도 거기 자본인 줄은 정말 몰랐었네요
오늘 걸은 거리 14.90km.
소요시간 : 08:52(놀며, 쉬며)
첫댓글 멎지십니다. 응원합니다.
멋지긴요......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항상 읽고 있습니다
워낙 정보가 없는지라.... 도움이되셨우면 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9.07.28 09:39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9.07.30 05:31
현오선생님 산행기를 재미있게 읽고 많은 공부가 됩니다.
한가지 궁금한것이 있어서 여쭙니다.
산청의 시천면 일대를 그쪽에서 사는 사람들이나 소설속에서도 대부분 "덕산" 이라고 부르는데 (덕산장터, 덕산 중학교, 등 등)
덕산이란 이름을 놔두고 왜 "시천"이란 행정 구역 명칭으로 불리게 된건지요?
선생님의 재미있고 자세한 설명 기다리겠습니다.
덕산은 지리산의 다른 말이고 덕천강은 그 덕산을 동쪽으로 싸고 지나는 물줄기이고.....
그런데 그 덕산을 좌측에서 싸고 있는 물줄기가 아무래도 높은 고지에서 떨어지다 보니 상당히 유속이 빠른 것을 보았나요?
마치 쏜살같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제 거림 옆에서 일행들과 앉아 그 물줄기의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뭐... 그래서 화살 矢를 쓰게 되었다는 데....
다른 말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명 유래집에도 그렇게 나오니까....
남명 조식선생 사당인 덕천서원 앞에서 이 두 물줄기 만나게 되죠.
기회가 되면 두류산가 얘기도 해드리죠.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궁금했던곳들의 반가운사진 잘 보았습니다
삼복더위에 참 수고하셨습니다
권선생님은 대단한 애국자 이십니다.
애국자는요...
다만 왜 일제를 쓰느냐에 대해서는 늘 의문이 있었고 분개를 했기는 했죠.
오선생님이 더 그러시겠죠.
시천이란 지명은 감과내를 뜻하는건 아닐까 하는 지극히 갠적 생각을 더붙여 봅니다.
글은 다못읽고 사진만 즐감하고갑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글을 읽어보시고 발못된 것은 지적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