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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63,16ㄹ-17.19ㄷㄹ; 64,2ㄴ-7
16 주님,
당신만이 저희 아버지시고 예로부터 당신 이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17 주님,
어찌하여 저희를 당신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희 마음이 굳어져 당신을 경외할 줄 모르게 만드십니까?
당신 종들을 생각하시어, 당신의 재산인 이 지파들을 생각하시어 돌아오소서.
19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이다.
64,2 당신께서 내려오셨을 때 산들이 당신 앞에서 뒤흔들렸습니다.
3 당신 아닌 다른 신이 자기를 고대하는 이들을 위하여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예로부터 아무도 들어 보지 못하였고 아무도 귀로 듣지 못하였으며 어떠한 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4 당신께서는 의로운 일을 즐겨 하는 이들을, 당신의 길을 걸으며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죄를 지었고 당신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당신의 길 위에서 저희가 늘 구원을 받았건만
5 이제 저희는 모두 부정한 자처럼 되었고 저희의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들도 모두 개짐과 같습니다.
저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어 저희의 죄악이 바람처럼 저희를 휩쓸어 갔습니다.
6 당신 이름 부르며 경배드리는 자 없고 당신을 붙잡으려고 움직이는 자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희를 외면하시고 저희 죄악의 손에 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7 그러나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1,3-9
형제 여러분,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4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어떠한 말에서나 어떠한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6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에 튼튼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8 그분께서는 또한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9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33-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4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35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깨어 있어라”>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입니다.
바야흐로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청색 대림환과 자색의 대림초가 기다림과 봉헌의 색동옷을 입었습니다.
새해 첫날, 먼저 양광모 시인 시 <기다림>을 들어봅니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눈부신 일인가.
아침이 기다리는 태양처럼
밤이 기다리는 별처럼
그에게 한 줄기 밝은 빛이 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가슴 따뜻한 일인가.
그리하여
그날을 손꼽으며 내가 그를 기다리는 건
또 얼마나 가슴 뜨거운 일인가.
태양을 기다리는 아침처럼
별을 기다리는 밤처럼
그를 위해 아름다운 배경이 될 수 있다는 건
또 얼마나 맑은 눈물같은 일인가.
우리는
태어나고 기다리고 죽나니
살아서 가장 햇살 같은 날은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촛불처럼
기다리는 날이라네.
(대림촛불처럼 기다리는 날이라네)
'대림'은 'Aventus'(도착)라는 단어의 번역입니다.
곧 ‘도착’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사실 모든 역사는 대림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모든 시간이 대림이었으며, 마찬가지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간도 모두 대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온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림'은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도 감동적인 사건인 메시아의 도착을 알리는 성탄을 반향하고 있지만, 우리를 과거의 사건에만 머물게 하지는 않습니다.
대림은 항상 계속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총괄하여 항상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히브 13,8)
이 대림시기의 제일 큰 주제는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인생은 기다림이 있어 아름답습니다.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소중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열망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열망하고 기다립니다.
오늘도 우리는 사랑하는 임을, 소중한 임을, 주인이신 임을 열망하여 기다립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 기다림의 열망을 아주 강렬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다.”
(이사 63,19)
참으로 강렬한 기다림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개입이 야기시킬 놀라움이요 경이로움입니다.
하느님은 역사를 그저 스쳐 지나서 통과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를 새롭게 변형시키기 위해 역사 안에 임하십니다.
곧 당신의 구원 계획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해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에 개입하셔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이기 때문이요,
당신은 주님, 저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사 64,7 참조)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기다림을 더 명백하게 삶의 모든 순간에 확대 적용합니다.
곧 '그분의 오심'을 '항상 기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순간순간이 그분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드리는 ‘만남의 시간’이 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우리의 삶 안에 임재한 주님을 열절하게 영접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단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깨어 지켜라.”(마르 13,33), “깨어 있어라.”(마르 13,35.36)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깨어났습니다.
주님의 오심과 더불어 깨어난 영혼들입니다.
곧 '깨어남'은 주님으로부터 선사되었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깨어있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선사받은 은총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있음'은 이미 오신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합니다.
곧 면전에서에서 깨어있는 것이요, 인격적인 대면입니다.
그런데 사실 깨어있기 위해서는 먼저 깨어나야 하고, 깨어나려면 먼저 깨부수어야만 합니다.
곧 우리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야 하고, 습관을 깨야 합니다.
이미 몸에 익은 타성을 깨야 하고, 안주와 편함을 깨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기 자신을 깨부수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보다 먼저 깨부수어져 쪼개지고 나누어져 우리를 기다리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깨어있음'은 우리를 기다리시는 바로 그분을 만나는 일입니다.
진정 그분께서는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현전하신 그분의 면전에서 자신을 개방하고, 바로 그분이 주님이심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과 생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깨어있음의 표시는 무엇일까?
또 무엇을 통해서 우리는 깨어있음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잠을 자든, 일을 하든, 기도를 하든, 대화를 하든, 주님께 지향을 두는 일입니다.
그 무엇을 하든 ‘주님을 향하여’ 하게 되면 깨어있는 일이 됩니다.
그것은 곧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야말로 깨어있음의 표시가 됩니다.
‘늘 기도하면, 늘 깨어있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병행구절인 루카복음에서는 말합니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6)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깨어 있어라.”
(마르 13,35)
주님!
깨어 있게 하소서.
깨어 기다리게 하소서.
고대하고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고 준비하게 하소서.
헛군데 눈 돌리지도 않고, 언제나 임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빛의 갑옷을 입고, 빛 속을 걷게 하소서.
동행하시는 당신께 깨어 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성실하신 주님>
대림절의 시작입니다.
대림이란 주님께서 오실 것을 기다린다는 뜻이고,
전례적으로는 성탄 대축일을 준비 없이 기다려서는 안 되기에,
주님의 성탄을 거룩하게 맞이하기 위해 거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오심에는 2천 년 전 처음 오심과 다시 오심이 있고,
그러므로 우리 인간에게도 처음 오심과 다시 오심이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나 이미 세례를 받은 여러분에게 올해 주님의 오심은 어떤 것입니까?
첫 번째입니까, 다시 오심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처음 오심은 아닐 것이고, 다시 오심이며 또 오심이어야겠지요.
그런데 주님이 어찌 우리에게 다시 오시고 또 오십니까?
한 번 오신 주님이 떠나시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왜 다시 오시고 또 기다리는 것입니까?
주님께서는 분명히 약속하지 않습니까?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가 주님과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습니다.
엄마의 마음은 늘 자식과 함께 있지만
자식의 마음은 언제나 엄마와 함께 있지 않고
애인에게 마음이 빼앗길 때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저의 경우 수천 번 다시 오시고 또 기다리고,
햇수로 따지면 제 나이만큼 대림절을 보내고 있으며,
그래서 작년에도 대림절을 지냈지만 올해 다시 대림절을 지냅니다.
그러니 저의 대림은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제가 다시 주님께 돌아서는 것이라고 함이 맞을 것이고,
굳이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게서 내쫓았던 주님을 이제 다시 돌아와달라고 애원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런 저에게 주님께서는 ‘내쫓을 땐 언제고 다시 돌아와달라고 하느냐?’며 거절하지도 않으시고 타박하지도 않으시는 분입니다.
늘 성실하게 함께 계시고, 늘 성실하게 다시 오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주님은 언제나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디모 2, 13)
우리는 성실하게 함께 있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해도
주님은 성실하게 함께 계시고 다시 오시는 분이시니
뻔뻔하지만 이것을 믿고 다시 오십사! 청하고 기다리는 올해 우리가 됩시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해 줄 주님을 기다리지만, 실은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가 문을 열어주기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이 시간 기다림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길 바랍니다.
대림절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대림절은 우리의 구세주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탄 전 4주간을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이 되어 기다리고, 신약의 백성으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 번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 사이에서 설렘과 감사함으로, 긴장으로 기다립니다.
대림초가 4개 꽂혀 있습니다.
4개는 4주간을 뜻하지만 본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세주, 메시아가 오심을 기다린 세월이 약 4,000년이 됩니다.
그 4,000년을 4주간으로 상징화해서 네 개의 초에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또한 네 개의 초는 예수님께서 동서남북 온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의미합니다.
초를 장식하기 위해서 둥글게 만들기도 하는데, 바로 온 우주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대림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탕을 녹색으로 꾸미는 것은 생명의 푸르름을 나타냅니다.
또한 색깔을 보면 어두운 자색으로 시작해서 점점 밝은색으로 불이 밝혀지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시는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마음도 맑고 또 밝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맑고 밝아진다는 것은 우리의 허물을 벗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초의 색깔과 제의 색깔이 자색인데 자색은 바로 회개와 보속의 의미를 담은 색깔입니다.
그것은 외적인 화려한 트리를 장식하고 구유를 준비하는 것보다도 몸과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에 들도록 목욕재계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초대입니다.
회개한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을 낳아드리도록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기다림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한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
(이사 64,7)
하느님의 작품으로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성탄을 준비하는 기초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외침에는‘저희가 회개할 테니 저희에게 오십시오. 저희가 당신이 늘 함께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시오’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맑은 마음으로 아버지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는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가정에 어떤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기도 하며 준비할 것입니다.
기다림이 간절하면 그 기다림의 여정에 따르는 모든 수고는 기쁨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더욱 예수님을 기다린다면 기다림이 간절한 만큼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일상 안에서 손님을 모시려 할 때, 청소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부산을 떠는데, 예수님을 모시길 원하면서 그만한 준비가 없어서 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깨어 있어라”(마르 13,33.37)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영적인 깨어있음을 말합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부끄러워 숨었을 때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찾아 나서시던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하고자 모세를 선택하신 분이 하느님이시고(탈출 3장 참조),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탈출 13,22)으로 함께 하심을 드러내시고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시며(탈출 15,22-27),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부르게 먹게 하신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시록에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깨어있을 때 우리를 위한 주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알게 되면 우리의 처신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 바뀝니다.
그러나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를 찾으시는 하느님을 뵐 수 없습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결국 주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있으십시오.
깨어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왜 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받는 작품으로 무엇을 하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경계하는 마음을 늘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철저히 단호하게 거부되어야 합니다.
내가 너보다 더 낫다는 마음으로 거들먹거리거나 자만자족하는 태도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 하느님의 눈으로 이웃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운데 기쁨을 간직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사랑이신 예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순간은 하느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인 만큼 사랑할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부터 후회할 일을 줄여야 하겠습니다.
믿는 이들은 과거에 매이지 않습니다.
지난 일은 하느님의 자비에 맡깁니다.
그렇다고 현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만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약속된 천상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날을 보고 전진하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현재를 모른 체 하면서 미래 속에서만 산다면 비현실적인 세상에 산다는 뜻입니다.
현재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에 지금은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주님의 마음에 들도록 활용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동경 없이 현재에만 집착하여 산다는 것은 아무런 발전도 없이 어중간한 상태에서 평범하게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어중간은 없습니다.
양다리도 없습니다. 천
상을 희망하는 만큼 선물로 주어진 오늘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기보다 주님께서 우리를 더 기다리십니다.
성경 안에서 당신의 말씀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십니다.
감실 안에서 당신을 경배하는 이들을 기다리시고, 기도하는 이들을 보고 싶어 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기다리십니다.
고해소 안에서 큰 자비와 사랑으로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주님을 외롭게 해 드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거룩함으로, 깨어있음으로 주님을 만나는 한 주간 되시길 희망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창세 49,1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인생이 공짜라는 잠에서 깨어나라>
오늘부터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됩니다.
이때마다 나오는 복음의 주제가 ‘깨어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깨어있음은 각자가 주인이 맡긴 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있으라고 분부한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마르 13,34-35)
누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고, 왜 어떤 이들은 그 일을 하지 않을까요?
그 해답은 우리 마음에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들이 ‘공짜’라고 믿게 만드는 자아의 계략에 속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렸습니다.
영화 <치킨 런>(2000)은 1950년대 요크셔 양계장을 배경으로 한 무리의 닭들이 농장주인 트위디 부부에게서 탈출하려는 과정을 다룬 애니메이션입니다.
주인공 진저는 자유를 꿈꾸며 거듭 탈출을 시도하는 암탉 무리의 리더입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이가 공짜일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냥 편하게 주인이 주는 모이만 먹으며 알이나 낳으며 살자고 말하는 닭들도 있지만, 진저는 자유를 갈망합니다.
수 없는 시도와 실패 끝에 비행기를 만들어 닭장에서 탈출한다는 내용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 닭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고 성적을 높이기 위해 공부를 합니다.
노력한 만큼 얻어지는 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우리 생명만큼은 공짜라고 여깁니다.
만약 아이가 부모에게 주어지는 것이 공짜라고 여기면 어떨까요?
예전에 박한상이라는 청년은 부모의 재산을 노리고 부모를 살해하고 불을 질러 방화로 위장하려다 잡혔습니다.
그는 부모가 워낙 부자라 자신에게 주는 것이 그렇게 고맙지 않았습니다.
극히 일부분을 주면서 생색낸다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되면 돈과 쾌락과 자존심의 노예가 되어 사람이 망가집니다.
부모의 뜻을 따라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문제는 자녀가 부모에게 받는 것이 공짜라 여기며 ‘감사’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 데 있습니다.
만약 우리 생명이 공짜로 주어졌다고 여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분명 생명은 부모가 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다시 생명을 줄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주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주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에게 받은 생명이 공짜가 아님을 안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이 마음밖에 바라지 않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저절로 부모의 뜻을 따르게 됩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에덴 동산에 해 놓은 장치가 하나 있습니다.
선악과입니다.
선악과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받은 에덴 동산과 자신들의 생명 전체에 대해서 공짜로 여기냐, 받은 것으로 여기냐를 시험하는 버튼과 같았습니다.
하느님은 땅에서 나는 소출의 십 분의 일은 당신의 것이라며 당신께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사를 몰라 불만 속에서 더 가지려고 세상 것에 집착하며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악해집니다.
닉 부이치치는 손과 발이 없이 태어났습니다.
처음엔 그것이 불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못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살 시도도 몇 번이나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자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손과 발을 안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만 빼놓고 다 주신 것입니다.
생명을 주셨으니 감사해야 합니다.
아니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느끼게 되자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왜 생명을 주셨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결론은 하느님께서 자신과 같이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전도사가 되라고 세상에 보내신 것이란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대로 살아 결혼하고 자녀들까지 낳고 수많은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목동들이나 동방 박사들은 하나 같이 그러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처지에 감사하며 무슨 일을 하든 하느님께 보답해드린다는 마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불만에 싸여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해도 자기들 부족한 것들만 청합니다.
닉 부이치치의 경우면 팔과 다리를 달라고 청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깨어있을 수 없습니다.
깨어있음이란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공짜는 없음을 깨달아, 받은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깨어 있어라.>
‘대림 시기’ 라는 말은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는 시기라는 뜻인데, 주님을 기다린다는 생각이 고정관념처럼 굳어져 버려서 신앙생활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기다리는가?
신앙생활의 관점에서는 ‘대림 시기’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에게로 우리가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그리고 늘 깨어서 우리를 기다리시는데, 우리가 자꾸만 주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깨어 있어라.”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잠들지 마라.”가 아니라, “취해 있지 마라.”입니다.
36절의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취해서 자고 있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태 24,48-51; 루카 12,45-46)
여기서 ‘술에 취하다’는 “세속의 즐거움에 취하다”, 또는 “세속 일에 집착하다” 라는 뜻입니다.
‘세속 일’만 생각하면서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깨어 있다’ 라는 말은 구원받기 위해서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잠자는 이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이들은 밤에 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
(1테살 5,7-8)
이 말에서 ‘밤’은 믿는 것도 거부하고 회개도 거부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상징하고, ‘낮’은 충실하게 믿고 회개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상징합니다.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날이 빨리 올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모르니까’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이루어지니까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는 ‘재림과 심판의 때’를 뜻하는데,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각 개인이 인생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설 때”도 포함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라는 말씀에서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종교가 다른 사람들도,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온 세상의 주님이신 분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깨어 있어라.” 라는 말씀과 관련해서, ‘겟세마니’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앞으로 조금 나아가 땅에 엎드리시어, 하실 수만 있으면 그 시간이 당신을 비켜 가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돌아와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하시고, 다시 가셔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다시 와 보시니 그들은 여전히 눈이 무겁게 내리감겨 자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분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랐다.'
(마르 14,34-40)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세속 일에 취해서’ 자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마음으로는’ 예수님과 함께 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지만, 그 마음을 행동으로 실행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향’은 올바른데, 실천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루카복음서 저자는 제자들이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루카 22,45).
슬픔에 지쳐 있었다는 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다가오는 상황에 대한 압박감과 두려움에 짓눌려 있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때는 제자들이 아직 ‘부활’을 모르고 있을 때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라는 말씀은 ‘깨어 있음’은 곧 ‘기도하고 있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깨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한 시간’만이라도 당신과 함께 깨어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신 ‘한 시간’은 ‘최소한의 시간’입니다.
신앙생활은 무슨 거창한 수련이나 수행도 아니고, 무슨 대단한 성덕을 쌓는 일도 아니고,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또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각자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최선을 다해서 하면 되는 생활입니다.
그것이 곧 ‘깨어 있음’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대림의 희망과 기쁨 - 깨어 있어라, 회개하라, 감사하라>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으로 오늘 12월3일은 새해의 첫날, 대림 제1주일입니다.
영롱하게 타오르기 시작한 대림촛불 하나가 주님의 오심이 시작됐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대림의 희망과 기쁨이 꽃처럼 피어나고 있습니다.
사순시기가 산문(散文)같은 분위기라면, 따뜻하고 아늑한 대림 분위기는 시(詩)와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방금 부른 애절한 화답송도 주님의 도래를 간청하는 듯 깊은 울림을 줍니다.
“하느님 우리에게 힘을 도로 주시고 부드러운 얼굴을 보여주소서.”
매해 대림1주간 아침 성무일도 두 번째 후렴도 제가 참 좋아하는 가사와 곡입니다.
대림주간 흥얼흥얼 자주 끊임없는 기도로 바치는 다음 노래입니다.
“그날에 모든 산에서 단것이 방울져 내리고,
언덕 들에서 젖과 꿀이 흐르리라.
알렐루야.”
더불어 11월 위령성월 산책시 내내 애창했던, 지금도 간혹 부르는 모든 성인 대축일 저녁 성무일도 시 마리아의 노래 후렴곡도 생각납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주님 성탄의 그날은 이미 오늘부터 시작됐음을 알립니다.
대림의 희망과 기쁨의 빛이 우리 마음을 환히 밝힙니다.
대림을 앞둔 대림 전날 저는 크리스마스의 꽃이라 불리는 포인세티아를 세레나 자매님에게 선물로 받았습니다.
“축복, 행복, 제마음은 불타오르고 있어요.”라는 꽃말도 멋집니다.
빨갛게 불타오르는 잎들이 마치 환히 타오르는 불처럼 깨어 살라는 가르침을 주는 듯했습니다.
포인세티아를 보는 순간 25년 전 성탄절에 카타리나 수녀님에게 선물로 받은 빨갛게 타오르던 칸나 꽃이 생각났고 더불어 즉시 썼던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 라는 시도 생각났습니다.
그대로 대림의 희망과 기쁨이신 주님께 바치는 헌시(獻詩)가 되겠습니다.
수 차례 나눈 시이지만 나눌 때 마다 좋고 새롭습니다.
더욱 주님 향한 사랑이 불타오르게 하는 시입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
-1998.12.25.
지금도 여전히 늘 주님의 무엇이 되고 싶은 갈망이, 열망이 기쁘게 설레는 마음으로 깨어 살게 하니 참 축복입니다.
대림의 희망과 기쁨 자체가 주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데, 저는 포인세티아와 함께 참 좋은 도반으로부터 받은 또 다음 선물에 감사합니다.
올해 3월부터 7월까지 5개월 동안 뇌졸중으로 쓰러져 재활치료를 받던 자매님이, 25년 동안 한결같이 제 매월 강론집을 편집 제본해다 준 자매님이, 바로 그 세실리아 자매님이 기적처럼 회복되어 불편한대로 최선을 다해 2학기 대학에서의 강의를 어제로써 끝냈다는 반갑고 기쁜 소식이 저에겐 대림을 앞둔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었고 감사하는 마음 가득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우리를 깨어 살게 합니다.
또 하나의 대림 선물이니 도합 셋이 됩니다.
수도원 하늘길에서 십자가의 길을 통해 “부활의 집”, 일명 “천장암(天藏庵;하늘을 감춘 암자)”, “산천재(山天齋;산속에 하늘이 담긴 집)”라 불리는 제 집무실 사이 맨발걷기 순례운동기도 한 지도 한달이 넘었습니다.
어제 아침 식사후 맨발걷기 기도 중 <바다>란 동요를 부르고 있던 저를 대림특강차 외출하던 빠코미오 원장 수사가 뒤에서 찍은 동영상과 더불어 <태능 갈매기>란 제하에 곡의 가사를 전해 줬습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아침 산책 때 마다 늘 부르는 노래요, <희망의 여정>이란 피정 강의 시 꼭 피정자들과 함께 부르는 노래입니다.
어제도 대림을 앞두고 상계동 성당 미사해설단 피정팀 형제자매들과 열강중에 노래하니 얼마나 기운차게들 부르던지요!
60대 넘어 남녀 누구나 참 좋아하는 희망과 기쁨으로 얼굴들 환히 빛나게 하는 동요입니다.
이런 동요가 참으로 희망과 기쁨에 깨어 살게 합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들은 이처럼 우리를 깨어 살게 합니다.
방금 예로 든 세 선물은 참 좋은 도반들을 통한 주님의 선물입니다.
여기서 저절로 나오는 고백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주님의 선물 중 최고의 선물이 바로 오늘부터 시작된 대림시기 희망과 기쁨의 하늘나라입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응답은 셋입니다.
첫째, “깨어 있어라!”
대림시기 내내 이 말씀 마음에 담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희망이 기쁨의 샘입니다.
희망중에 기뻐하는 대림시기입니다.
막연한 기다림이, 희망이, 기쁨이 아니라, 사랑하는 임의 오심이 있어 희망이요 기쁨이요 기다림입니다.
깨어 기도하며, 깨어 준비하며, 깨어 책임을 다하며 살게 하는 대림시기의 주님입니다.
주인은 주님으로 바꿔읽어도 무방합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깨어 있어라.”
비단 신자들뿐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사람”이 깨어 있어야 할 그 대상입니다!
깨어 살아야 비로소 참사람입니다.
깨어 있음의 은총은 헤아릴 수 없이 무궁무진합니다.
도대체 기다릴 희망의 주님이 없다면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겠는지요!
깨어 있음은 참 좋은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대림시기는 바로 깨어 있음의 집중적 훈련시간이기도합니다.
이번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 보낸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메시지 제목이 강렬했습니다.
“Choose life, choose the future!(삶을 선택하라, 미래를 선택하라!)”
삶은 선택입니다.
기후도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미래도 선택입니다.
무엇보다 대림시기 주님을, 깨어 있음을,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희망의 주님을 늘 깨어 기다릴 때 저절로 참기쁨, 참행복입니다.
늘 주님의 무엇이 되고 싶은 열망이 우리를 늘 깨어 있게 합니다.
참 아름답고 매력적인, 향기롭고 빛나는 영혼이 희망의 기쁨중에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영혼입니다.
'깨어 있어라!'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늘 깨어 기도하며 책임을 다할 때 저절로 영육의 건강이요 죄악의 유혹도 범접하지 못합니다.
둘째, “회개하라!”
바빌론 유배 후 귀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선적으로 한 일은 하느님의 도우심이요 회개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이 가슴을 칩니다.
무디어진 우리 마음을 감동에 휘말리게 합니다.
참으로 깨어 있을 때 저절로 마음은 주님을 향하게 되고 회개가 뒤따르게 됩니다.
“주님, 당신만이 저희 아버지시고, 예로부터 당신 이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이다.
저희는 죄를 지었고 당신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저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어, 저희의 죄악이 바람처럼 저희를 휩쓸어 갔습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갈 때 참나의 회복입니다.
광야인생 주님을 떠나 살다보면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십중팔구 괴물이 되거나 폐인이 되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대림시기 주님 안에서 깨어 사는 시기이자 주님께 돌아와 참나를 회복하는 회개의 시기, 성화(聖化)의 시기입니다.
덧없는 인생, 회개를 통해 주님 안에 날로 깊이 영혼의 뿌리를, 믿음의 뿌리, 희망의 뿌리, 사랑의 뿌리를 즉 신망애(信望愛)의 뿌리를, 진선미(眞善美)의 뿌리를 깊이 내리며 깨어 살 때, 참기쁨, 참행복, 참나의 영원한 삶이겠습니다.
셋째, “감사하라!”
주님께 돌아와 회개로 눈이 열릴 때 저절로 감사입니다.
몰라서 불평불만이지 알면 알수록 감사와 찬미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니 바로 감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말 감사하는 이들은 살 줄 아는 이들이요 지혜롭고 겸손한 이들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한 이들이 진정 지혜로운 자들이요 이 또한 감사를 통해 이뤄집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대림을 맞이한 우리들에게 샘솟는 감사의 마음을 지니게 합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오로의 말씀이 우리가 얼마나 감사해야 할 존재인지 깨닫게 합니다.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한, 끝이 없는 감사입니다.
감사할수록 풍성한 은혜입니다.
감사 또한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내려주시니 감사할 수 뿐이 없습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바로 대림의 희망과 기쁨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선물에 참 좋은 응답은 깨어 있음, 회개, 감사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은총의 대림시기,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시며 주님과의 친교를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말씀은 우리 신원에 걸맞는 실천을 요구하십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이 누구이시며 우리가 누구인지 기초부터 짚어 주십니다.
그 안에는 각자의 신원에 맞는 본분 또한 들어 있지요.
먼저 제1독서에서는 아버지시며 구원자이신 주님께 간구하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주님, 당신만이 저희 아버지시고, 예로부터 당신 이름은 '우리 구원자'이십니다."
(이사 63,16)
예언자는 백성을 대신해 주님을 부릅니다.
아버지시고 구원자이신 분. 예언자는 이 신원 앞에서 주님이 꼼짝하실 수 없다는 걸 압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에게서 멀어지면 그들이 뉘우치고 다시 돌아오도록 애타게 타이르며 부르셨지요.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싶지만, 아버지시고 구원자이신 하느님은 번번이 속아주시며 백성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애쓰십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
(이사 64,7)
예언자는 백성의 온갖 악행과 배반의 고통이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이름을 걸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사 애원합니다.
우리가 진흙과 같이 미약하고 덧없는 존재임을 아시는 당신께서 눈을 돌려 다시 백성을 돌보아달라고요.
염치없지만 피조물이고 미물인 우리가 기댈 곳은 주님의 자비뿐이니까요.
제2독서에서는 부르심의 목적을 듣습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1코린 1,8-9)
우리는 하느님께 불성실하지만 그분은 우리에게 성실하십니다.
하느님은 말 많고 탈 많은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의 백성,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아드님을 내어주셨지요.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을 받아 모시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룹니다.
이 뜨겁고 친밀한 사랑의 일치를 누리라고 하느님은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복음의 말씀은 우리 신원에 걸맞는 실천을 요구하십니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마르 13,34)
하느님은 주인이시고 우리는 종입니다.
종은 주인을 기다리며 제게 맡겨진 일을 하는 존재지요.
종이 무언가를 할 권리가 있다면 그건 주인에게서 받은 권한일 때입니다.
"깨어 있어라."
(마르 13,35)
종은 주인이 곁에 있건, 부재 중이건 주인이 맡긴 바를 성실히 수행합니다.
기다림도 그 중 하나지요.
기다림은 깨어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이 "깨어 있음"이 물리적으로 잠들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문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깨어 있음"은 우리가 신원에 맞게 존재하며, 그 신원에 요구되는 본분을 수행하는 상태입니다.
하느님도 아버지시고 구원자이신 당신다움을 늘 깨어 간직하고 계시지요.
"보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께서는 졸지도 않으시고 잠들지도 않으신다."(시펀 121,4)는 시편 저자의 고백처럼 그분은 우리를 보살피시느라 언제나 깨어 계십니다.
"깨어 있어라."
우리가 우리다움을 간직하는 것이 곧 깨어 있음일 것입니다.
그분의 작품인 피조물이고 종이며 자녀이고 신부인 우리의 신원에 걸맞게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갈망하는 것이 곧 우리의 깨어 있음입니다.
주님과 우리가 자신다움을 간직하고 서로를 향해 깨어 있으면 그 안에서 친교가 이루어지고 일치로 나아갑니다.
"사랑"이 우리 모두의 권한이고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당신께 제 영혼을 들어 올리나이다."
(입당송)
사랑하는 벗님!
우선 우리가 건강히 살아 숨쉬며 새해를 맞이할 수 있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지난 한 해의 부족함과 무질서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올해는 벅찬 감사와 기쁨을 담아 우리다움을 성실히 살아가는 한 해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영혼을 들어 올려 주님을 향하고 찬양과 사랑을 바치는, 깨어 있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2023년에는 ‘성지순례’를 6번 다녀왔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는 것은 2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지를 보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기도 하고, 사진에 담기도 합니다.
저도 처음 성지순례를 다닐 때는 주로 보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른 새벽 시나이 산에 올라가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오병이어 성당, 진복팔단 성당을 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주님의 무덤성전을 보았습니다.
나자렛에서 성모마리아 대성당을 보았습니다.
로마에서는 베드로 대성당을 보았습니다.
루르드에서는 성모님의 발현 동굴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목적이 되면 눈은 즐겁지만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일반 여행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의 선조들이 걸었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순례를 통해서 나도 신앙의 선조들처럼 치열하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지순례의 목적은 ‘멈춤, 만남, 변화’가 됩니다.
성지순례를 위해서는 일상의 삶을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성지에서 신앙의 선조들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만났다면 더 나은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했던 것처럼,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던 것처럼 변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지순례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오늘은 교회의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세상의 달력은 아직 24일이 남았지만 교회의 전례는 오늘부터 새로운 한해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주제는 ‘깨어있음’입니다.
깨어있음에도 2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저도 오늘 아침 4시에 일어났습니다.
여러분들도 잠에서 깨어났기에 지금 이렇게 미사에 참례하고 있습니다.
깨어난 모든 생명은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생존과 종족의 보존입니다.
약한 것은 강한 것에게 먹히는 ‘양육강식’의 세계입니다.
환경에 적응한 것이 살아남은 ‘적자생존’의 세계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인 깨어남입니다.
우리는 이런 깨어남을 ‘깨달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 구도의 길을 갈 때 영적인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영적인 ‘깨달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깨달음에도 2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선물처럼 주어지는 깨달음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가슴 벅찬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치열한 성찰과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깨달음입니다.
부처님은 7년간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고, 그 깨달음을 이웃에게 전하였습니다.
영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면 비록 배움이 부족해도, 이방인일지라도, 죄인일지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문이 굳게 닫혀 완고해진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하느님의 기적은 이방인이었던 시렙다의 과부에게서 일어났다.
엘리사 시대에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치유의 기적은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에게서 일어났다.”
율법과 계명을 잘 알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선물처럼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이미 알고 계신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을 찾아라.
그러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선물로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새들을 보아라, 들의 꽃들을 보아라.
저들은 수고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다 먹이고 입히신다.
그러니 너희는 아무런 걱정하지 마라.”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짐 진다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
다른 하나는 ‘말씀’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내비게이션’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이 말씀에 ‘예’라고 응답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요셉 성인도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나자렛의 성 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 안에 살았을 때는 낙원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악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을 때는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2024년 교회의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겸손과 온유로 마음의 문을 열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선물처럼 받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깨달음을 얻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1986년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 직후 폭발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모리 대학의 교수 율릭 나이서는 다음 날 자신의 강의를 듣는 100여 명의 학생에게 ‘위 사고 소식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자세히 적게 한 다음, 그 답지를 보관했습니다.
그리고 2년 반 후에 같은 학생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고 답을 받았습니다.
이제 두 답지를 비교합니다.
그 차이는 어떠했을까요?
학생 중에서 25%가 완전히 다른 대답을 했고, 65%는 세부 사항에서 큰 차이를 보였으며, 단 10%만 동일하게 답변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대부분 현재의 기억이 아주 확실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기억은 이렇게 정확하지 않습니다.
대략적이고 나머지는 추론으로 채워가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 감정, 환경 등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 기억하는 것, 생각하는 것 등이 정확하지 않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자기 기억이 무조건 맞는 것처럼 생각하고, 다른 이의 기억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지혜로운 사람은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자기주장을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틀림도 인정할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진짜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겸손을 강조하신 이유는 이렇듯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의 종말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주인이 집을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을 맡긴 종들처럼 우리 모두가 부지런하고 충실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지요.
주인은 언제라도, 또 아무 때라도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종이 언제 올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까요?
종은 절대로 예측할 수 없습니다.
종은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기 생각만을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가 언제 올지 전혀 모르면서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자기 생각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하긴 언젠가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사람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초대 교회 때부터 신앙인의 참된 자세를 ‘깨어 있음’으로 묘사했습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깨어서 주님께서 오실 날을 잘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깨어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하느님의 큰 선물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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