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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자연식 식생활 운동본부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
2022년 5월 9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나는 양들의 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착한 목자에게만 의지해야 합니다.
세상은 불공평하기도 하고 공평하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정의롭기도 하고, 부정과 불평등이 판을 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눈에 따라서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고, 추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남북 관계가 아주 혼선을 빚고 북한측에서 계속해서 미사일을 발사하고 나서니 걱정이 되기도 하고, 북한의 핵무기가 하루 빨리 무력화되기를 기대하다가도 정치가들의 답답한 모습을 보면서 정이 떨어지기도 하고, 경제의 불황국면을 장기간 체험하면서 난국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나를 더욱 깊은 나락으로 몰고 내려가기도 하고 좌절과 실망에서 희망을 찾으라고 자신에게 최면을 계속 걸기도 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현장에 대한 뉴스를 접하면서 하느님이 야속하기도 하고, 우울한 뉴스를 접하면서 누구의 탓인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현장을 보면서 인간이 왜 이렇게 잔혹하고 심성이 얼룩져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을 흉포하게 죽이고, 위해를 가하면서도 자신의 가치관으로 떳떳하고 자랑스러울 수 있다는 것인가? 하느님의 뜻은 어디에 있으며 그분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사는 삶은 어떤 것인가? 테러범뿐만 아니라 사회 범죄자 모두 각자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이 사회는 큰 모순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인간을 창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죄를 짓거나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죄송스러움이나 부끄러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일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도리(道理)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사람이 하느님의 가장 귀한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강도며 테러범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살면서 점점 무뎌지고 둔해져서 점점 그렇게 변해져 갑니다.
금영무참(衾影無慚)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이불이나 자기 그림자에 대해서도 부끄러운 짓은 아니 한다.’라는 뜻을 가진 고사성어입니다. ‘홀로 있을 때, 혼자 잠잘 때, 즉 남이 보지 아니하는 곳에 있어도 부끄럽거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아니 한다.’라는 의미로 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부끄러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으로 죄를 짓거나 잘못을 하지 않으려고 무수히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자신의 의지 때문에 그 유혹에서 벗어나서 그랬을 것입니다. 악마의 유혹을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 때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말도 유행했었습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큰 도리(道理)나 정도(正道)에는 거칠 것이 없다.’는 뜻으로, ‘누구나 그 길을 걸으면 숨기거나 잔재주를 부릴 필요(必要)가 없다는 말’로 쓰입니다. 사실 큰 도리나 정도를 가지고 산다면 울타리나 장벽이 없어도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은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 통제력과 의지력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통제력과 의지력이 부족하다면 적절한 울타리와 문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의지력이나 통제력도 부족하고, 먹을 것이나 물을 찾아서 천방지축(天方地軸)으로 날뛰는 어린 양들에게는 착한 목자가 있어야 하고, 튼튼한 울타리도 있어야 하고 통행하는 올바른 정문으로만 통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어린 양들은 생명을 부지할 수 있고, 맛있는 풀을 뜯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강도를 당하지 않고 테러를 당하지 않으려면 착한 목자에게만 의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의지력과 통제력이 약한 이 미천한 내가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하느님의 울타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분만을 통한 유일한 통로인 문이 필요합니다. 그분은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1,1-18
그 무렵 1 사도들과 유다 지방에 있는 형제들이 다른 민족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2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 받은 신자들이 그에게 따지며,
3 “당신이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니요?” 하고 말하였다.
4 그러자 베드로가 그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5 “내가 야포 시에서 기도하다가 무아경 속에서 환시를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큰 아마포 같은 그릇이 내려와 네 모퉁이로 내려앉는데 내가 있는 곳까지 오는 것이었습니다.
6 내가 그 안을 유심히 바라보며 살피니, 이 세상의 네발 달린 짐승들과 들짐승들과 길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보였습니다.
7 그때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8 나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제 입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9 그러자 하늘에서 두 번째로 응답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10 이러한 일이 세 번 거듭되고 나서 그것들은 모두 하늘로 다시 끌려 올라갔습니다.
11 바로 그때에 세 사람이 우리가 있는 집에 다가와 섰습니다. 카이사리아에서 나에게 심부름 온 이들이었습니다.
12 성령께서는 나에게 주저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갔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 집에 들어가자,
13 그는 천사가 자기 집 안에 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야포로 사람들을 보내어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데려오게 하여라.
14 그가 너에게 말씀을 일러 줄 터인데, 그 말씀으로 너와 너의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15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16 그때에 나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17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18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잠잠해졌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축일5월 9일 성 제오르지오 프레카 (George Preca)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 연도 : 1880-1962년
같은 이름 : 게오르그, 게오르기오, 게오르기우스, 쁘레까, 제오르지우스, 조지, 호르헤
성 게오르기우스 프레카(Georgius Preca, 또는 제오르지오 프레카)는 1880년 2월 12일 지중해 중앙에 위치한 몰타(Malta)의 수도인 발레타(Valletta)에서 빈첸조 프레카(Vincenzo Preca)와 나탈리나 체라볼로(Natalina Ceravolo)의 아홉 자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열심한 부모에 의해 그는 그 해 2월 17일 발레타의 포르토 살보(Porto Salvo)에 있는 동정 마리아 본당에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1888년 프레카 가족은 발레타에서 멀지 않고 빠르게 성장하는 항구도시인 함룬(Hamrun)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의 성 카예타누스(Cajetanus) 본당에서 게오르기우스는 견진성사를 받고 첫영성체를 했다.
17살이 된 어느 날 그는 플로리아나(Floriana)에 있는 마글리오(Maglio) 정원을 따라 걷던 중 그가 다니던 리케움(Lyceum) 학원의 교수인 에르콜레 몸팔라오(Ercole Mompalao) 신부를 만났다. 에르콜레 신부는 그에게 “네가 어른이 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의 친구가 되고, 너도 그들의 친구가 될 것이다. 너는 그들을 통해 너의 좋은 운명을 찾을 것이고, 그들도 너를 통해서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리케움 학원에서 공부를 마친 게오르기우스는 사제가 되겠다는 뜻을 품고 몰타의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학교에서 그의 고해사제였던 알로이시우스 갈레아(Aloysius Galea) 신부가 1905년 4월 8일에 선종했는데 며칠 뒤 게오르기우스에게 발현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가르치도록 너를 선택하셨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이에 감동한 게오르기우스는 라틴어로 규칙서를 작성하여 교황 비오 10세(Pius X)의 승인을 받고자 했다. 그는 모든 본당에서 평신도 보조자들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양성할 책임을 맡을 7명의 종신 부제들의 모임을 마음속에 그렸다. 1905-1906년 사이에 그는 함룬에서 남성으로 구성된 한 청년 모임을 알게 되어 그들을 자신의 영성 모임에 초대하였다. 여기서 그는 청년 모임의 지도자였던 에우게니오 보르그(Eugenio Borg)를 주목하였고, 그에게 요한 복음에 대해 설명하였다. 에우게니오 보르그는 후에 그리스도교 교리회의 첫 번째 총장이 되었다.
게오르기우스는 사제 서품을 몇 달 앞두고 매우 심각한 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다. 성 요셉(Josephus)에게 전구하여 호된 시련에서 살아났지만 그 질병의 결과로 왼쪽 허파가 영구적으로 손상되었다. 그는 1906년 12월 22일 피에트로 파체(Pietro Pace)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예수 성탄 대축일에 함룬의 성 카에타누스 본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서품식 이후 여러 주간 동안 그는 미사를 봉헌할 때를 제외하고는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는 작은 다락방에 칩거하여 하루 종일 묵상과 관상 생활에 전념하였다. 1907년 1월 말경 그는 예전에 보았던 청년 모임을 불렀고, 2월 2일 함룬의 타누초(Ta’Nuzzo) 성당에서 열린 영성 모임에 그들을 초대하였다. 그 후 이 작은 모임은 함룬의 프라 디에구(Fra Diegu) 거리에 작은 공간을 빌려 같은 해 3월 7일 첫 모임을 가졌다. 이 두 날이 그리스도교 교리회(the Society of Christian Doctrine)의 시작으로 기록되었다.
이 평신도 모임의 회원들은 모범적 생활과 가톨릭 신앙의 원리로 충실히 양성되어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 파견되었다.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처음에 이 모임을 ‘교황의 아들과 딸회’(Societas Papidum et Papidissarum)로 불렀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들이 모임을 갖던 낡고 허름한 공간 때문에 농담 삼아 ‘박물관’(Museum)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별명은 곧 그들 모임의 이름으로 고정되었다. 한편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박물관’ 철자에 라틴어의 첫 글자를 따서 ‘M.U.S.E.U.M’(Magister Utinam Sequatur Evangelium Universus Mundus!)이라는 이름을 고안하였다. 이를 번역하면 “선생님, 전 세계가 복음을 따라가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이다. 1910년에는 지안니나 쿠타자르(Giannina Cutajar)의 도움으로 그리스도교 교리회의 여성 모임이 시작되었고, 그녀는 후에 첫 번째 총장이 되었다.
1910년경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스스로 늘 ‘아기 예수님의 놀라운 발현’이라고 부른 매우 강한 신비 체험을 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마르사 크로스(Marsa Cross) 근처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거름 자루를 실은 손수레를 밀고 있는 12살 소년을 보게 되었다. 그 소년은 그를 바라보며 급히 도와달라고 청했다.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손수레에 손을 얹는 순간 너무도 큰 영적 감미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를 갔는지 또 그 소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결코 기억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 그는 이 체험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바로 그 소년이 예수님이었고, 주님께서는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정통한 교리와 양성으로써 주님의 들판과 포도밭을 재배하기 위해 자신들의 도움을 요청하고 계신다고 이해하였다.
이 교리교사들의 모임(M.U.S.E.U.M.)이 시간이 흐르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 교리회로 발전하였다. 교리교육 사도직에 헌신하는 이 평신도 모임은 자신들을 단순한 복음적 생활양식으로 인도했고, 그들 스스로 짧은 기도나 규칙적인 묵상을 통해 기도 생활에 전념했다. 매일 한 시간 동안 교리교육을 받고 이어서 그룹 모임을 가졌다. 1909년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그리스도교 교리회의 센터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상심하였지만 주저함 없이 이 명령을 따랐다. 그 후 교구 사제들이 자발적으로 교구청에 이의를 제기해 이 금령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914년과 1915년 사이에 여러 일간지들이 새로운 그리스도교 교리회를 모욕하는 기사들을 게재하였다.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회원들에게 온유함의 서약 또는 약속을 하도록 명했고, 장난삼아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까지도 기꺼이 용서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리고 모욕까지 사랑하도록 가르치며 모든 고통을 참아내었다. 1916년 마우로 카루아나(Mauro Caruana) 주교는 그리스도교 교리회에 대한 조사를 명했고, 우여곡절 끝에 호의적인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비록 몇 가지 변경 요구는 있었지만 그리스도교 교리회에 대한 교회의 최종적 승인을 위한 길이 열렸고, 그 결과 1932년 4월 12일 카루아나 주교로부터 교회법적 승인을 받았다.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몰타 제도(諸島)에 복음의 가치와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했다. 그는 몰타 사람들을 위해 교리 · 윤리 · 영성에 관한 많은 책들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회원들의 개인적 사용을 위한 기도나 대중적인 신심을 위한 기도를 담은 수많은 소책자들도 출판하였다. 그는 분명히 하느님의 말씀, 특히 ‘사랑 받은 이의 목소리’라고 부른 복음의 위대한 사도였다. 그는 회원들과 대중들에게 복음서의 문장과 구절들을 기억하도록 고무하였고, 카리스마에 충만한 그의 강론은 항상 성경의 비유나 이야기 그리고 성인들의 생애를 참조하였다. 그는 열정적으로 오직 하느님께만 돌려야할 영광을 지켰고, 어떤 것이 추악한 죄악인지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또한 죽음과 심판, 지옥과 천국에 대해 공공연히 설교하는데 주저하지도 않았다.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철저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감동적으로 선포하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조언이나 격려의 말씀을 듣고자 몰려왔고, 그의 전구로 이루어진 치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사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초자연적 은총을 받았다. 사제로서 겸손과 친절, 온유와 관대함을 지닌 그는 진정 하느님 백성의 거룩한 목자였다.
몰타 사람들에게 있어서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강생(降生)의 신비에 대한 신심을 장려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1917년부터 그는 요한 복음 1장 14절의 말씀에 대한 신심을 전파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Verbum Dei caro factum est!”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회의 회원들이 이 말씀의 배지(badge)를 두르기를 원했다. 1921년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에 그리스도교 교리회는 몰타와 고조(Gozo) 섬의 도시와 촌락에서 처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구유 예식을 준비했는데, 이는 그 이후 몰타 제도에서 성탄절을 경축하는 전형적인 모습이 되었다.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모든 어린이들이 교리반에 참석하여 성탄절을 위해 준비한 작은 구유나 아기 예수상을 만져보기를 원했다.
이 거룩한 사제는 특별히 그리스도교 교리회의 어려운 순간마다 동정 마리아의 모성적 보호하심에 의탁하도록 배웠다. 그는 1918년 7월 21일 카르멜회의 3회원이 되어 이듬해 9월에 서원을 하면서 프란코(Franco)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회 센터에 모인 어린이들에게 동정 성모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일깨워주었다. 그는 스카풀라(Scapulars)와 기적의 메달 사용을 장려했고, 그리스도교 교리회 본원 성당을 기적의 메달 성모님께 봉헌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1957년에는 개인적으로 묵주기도를 암송하기 위해 ‘빛의 신비’ 5단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1951년 5월 19일에는 산타 베네라(Santa Venera)에 성 미카엘(Michael) 학교 주춧돌 축복식을 가졌고, 1952년에는 호주에서 그리스도교 교리회를 시작하기 위해 회원들을 파견하였다. 이후 영국, 알바니아, 수단, 케냐, 페루에도 진출하였다.
복음에 대한 봉사와 하느님 백성의 그리스도교적 양성을 위한 길고도 활동적인 삶을 산 게오르기우스 신부는 1962년 7월 26일 목요일 저녁에 산타 베네라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몰타의 모든 주민들로부터 깊은 애도를 받았다. 생전에 그는 매우 검소한 장례식을 원했지만 시 당국과 교회의 고위층을 포함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몰려왔다. 그의 유해는 함룬 인근에 있는 기적의 메달 동정 마리아 성당에 안치되었고, 이곳은 곧 지속적인 순례의 장소가 되었다. 그는 2001년 5월 9일 몰타의 플로리아나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7년 6월 3일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다른 세 명의 복자들과 함께 시성식을 갖고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의 축일은 전례적으로 5월 9일에 기념하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제오르지오 프레카 (George Preca)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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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자연식 식생활 운동본부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