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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2,1-5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4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5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8,5-11
5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6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7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
우리는 대림의 첫 월요일을 맞이했습니다.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합니다.
곧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을 묵상하며, 동시에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과 ‘다시 오심’은 둘 다 거룩하고 신비로운 변형이 일어나는 ‘구원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구원의 만남’을 우리는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에게서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으로 누워있는 종은 백인대장의 ‘집’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은 예수님을 모시기에는 자격이 없는 이방인의 지붕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당혹스런 일을 벌이십니다.
지금까지는 당신을 찾아오거나 당신께 데려온 병자들을 고치셨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먼저 발벗고 나서십니다.
그의 ‘집’, 곧 주님을 모실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 ‘이방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나서십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
(마태 8,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찾아 나서기도 전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오심’으로 이미 ‘인류의 집’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마치 자캐오에게 “오늘은 내가 너희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하시며, 모든 이들이 ‘매국노의 집’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침 뱉고 피해가던 그 ‘집’으로 들어오셨듯이 말입니다.
오시어 우리를 고쳐주시고 새롭게 탄생시키시고 변형시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모실 자격이 없는 저희 ‘마음의 집’에 들어오시겠다고 하십니다.
마치 묵시록의 말씀에서처럼 말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묵시 3,20)
그러니 오늘 제 마음이 기뻐 설렙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시어 제 마음에 ‘당신의 집’을 지으신 까닭입니다.
지금 이 시간, 바로 여기에, 당신 몸과 피로 하늘나라의 잔칫상을 차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마태 8,11)
또한 당혹스럽고 놀라운 것은 백인대장의 말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마태 8,8)
그렇습니다.
그는 진정한 참된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이방인의 처지였지만, 바로 그 속에서 이미 자비와 사랑의 위력을 알기에 믿음의 굳셈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이 ‘구원을 이루는 힘’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권능으로부터 진정한 참된 힘이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 말씀의 힘에 승복하고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마태 8,8)
주님!
당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게 하소서!
당신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만을 제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은 머리 위에 계시되 속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유를 주시니,
당신께 온전히 속한 자로,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이웃에게 사랑을 , 하느님께 믿음을>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대림 시기 첫날인 오늘 백인대장 얘기를 교회 전례가 들려주는 것은 창세기의 그리스도론을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얘기가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옵니다.
1장은 어디 계시는지 알 수 없는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얘기입니다.
이 하느님은 신비의 하느님이고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곳에 계시는 분입니다
이에 비해 2장의 하느님은 인간이 있는 땅에까지 내려오시어 흙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코에 숨을 불어 넣어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땅에까지 내려오시어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러 땅에 다시 내려오시는데, 그분이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십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땅에까지 내려오지 않고도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하느님이 굳이 땅에까지 다시 오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능력으로만 구원하시지 않고 사랑으로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백인대장이 자기 종을 치유해달라고 청하자 주님께서는 즉시 “내가 가서 고쳐주마.”라고 하시는데,
백인대장은 주님이 자기 집에까지 오실 필요가 없다고, 말씀으로 충분히 치유하실 수 있다고 믿음을 보입니다.
이 대림 시기에 우리도 백인대장과 같은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종에게는 사랑을, 주님께는 믿음을 지닌 백인대장과 같이
이웃에게는 사랑을, 하느님께는 믿음을 지닌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나이다>
오래전의 일입니다.
대전 공설 운동장에서 한국성체대회가 거행되던 날, 하늘은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이었고 태양은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의 파견 강복이 있기 직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수환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뭐 나타났어요?”
그 말씀에 자극받아 참가자 모두가 환호하며 하늘을 바라보았고 저도 태양을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성체 모양으로 빛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런 현상에 부정적인 저였지만 저도 모르게 성호경을 그으며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때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죠!”
오래전 일이지만 너무도 확실한 기억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으셨지만,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 13,58).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셨지만, 그 말씀의 능력은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힘을 내느냐 못 내느냐는 그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행하면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믿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라 하시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명하는 것은 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고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을 유다인이 아닌 한 이방인 백인대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다인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열심하다고 하는 사람, 활동을 많이 하고 본당의 여러 직책을 맡은 사람들, 성직자나 수도자도 믿음을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 해도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믿음에는 소홀할 수 있습니다.
머리가 아니 가슴으로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으로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나이다.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선포하신 아드님의 일생을 통하여 제게 불어 넣어 주신 그 믿음으로 오 하느님! 당신을 애타게 부르나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히브 11, 6)
믿음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이 구조를 갖추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백인 대장의 종인 중풍 병자를 고치십니다.
로마 백인 대장은 종을 위해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서 고쳐주시겠다고 하시는데,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미사 때 성체를 바라보며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원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에 지배 당하는 상황이었고, 일제 강점기로 보자면 일본군의 높은 장교가 한 시골 선생에게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으니 한 말씀만 하시면 자신의 종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겸손해질 수 있었을까요?
희망과 믿음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교만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가끔 남자와 여자가 사귀다 보면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자신이 잘났기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처음엔 ‘나 같이 자격 없는 사람을 사랑해주다니 정말 감사하네!’라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저 사람이 나에게 자격이 되나?’라는 교만한 생각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면 둘의 사랑은 실제적으로는 끝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겸손이 사라지면 사랑도 믿음도 희망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진정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그 사랑이 자기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사랑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예가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들을 너무 사랑했지만, 그래서 많은 애정을 쏟았지만, 결국 아들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어머니가 아들의 아내에게 못살게 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어머니의 잘못이 무엇일까요?
사랑을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우리의 어머니가 되시기 위해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아버지께 순종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혼자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로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순종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순종을 배우지 못했다는 말은 큰 자아만 남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어머니가 자녀를 참으로 사랑한다면 남편과 자녀에게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를 상상해봅시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고 있을 때 교만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 덕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고도 배 위에 머무는 이들은 교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예수님인가? 물 위를 걸으려고 하게?”라며 베드로를 나무랄 것입니다.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나를 가장 사랑해주신 분처럼 나도 그분을 사랑하고 나의 자녀들도 그분처럼 사랑할 수 있도록 순종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따라서 백인 대장이 이미 종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사랑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원천을 쉽게 알아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겸손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도 맞겠지만, 믿기 때문에 겸손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도 예수님께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주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나는 일 분 일 초도 생존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분임을 믿는 것은 이렇게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하여 주님께 합당하지 못한 존재임을 알게 합니다.
이때 심지어 저는 예수님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격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겸손함은 결국 하느님 앞에서는 너무 당연하고 이웃 앞에서도 상대를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다는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따라서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하지도, 믿지도, 그래서 희망할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백인대장을 칭찬하신 이유>
주변을 살펴보면 참으로 꼴불견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머릿속에 든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자기 잘난 맛에 여기저기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사람,
말로는 만리장성을 쌓지만, 딱 까놓고 보면 뒤가 엄청 구린 사람,
시궁창 냄새가 풀풀 나는 사람,
죄란 죄는 다 짓고 사는 악의 종합선물세트인데도 어깨 딱 힘을 주고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
더 슬픈 일이 있습니다.
정신 나간 정치인들과 중심을 잃은 매체 종사자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그들을 날개 없는 천사로, 세상 멋진 의인으로 둔갑시킵니다.
그 숱한 악행과 비리에 대한 정확한 진상조사는 뒷전이고, 물 좋은 자리로 보은 인사를 시킵니다.
수사와 처벌 대신 멋진 훈장을 수여합니다.
지나가던 개가 뒤집어져 배를 잡고 웃을 일입니다.
다행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다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이지 천사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 되는 일도 아닌데,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통받는 이웃을 나 몰라라 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깊은 연민의 정과 측은지심으로 가득합니다.
본인도 힘들면서, 가진 돈을 나눕니다.
빠듯한 시간을 쪼갭니다.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칭찬하실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이 그랬습니다.
그가 얼마나 마음 따뜻한 사람이었는지, 그의 신앙심이 얼마나 깊었던지, 예수님께서 그를 칭찬하시는데,
수제자나 애제자에게도 하지 않으셨던 특별한 칭찬의 말씀을 그에게 던지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마태 8,10)
칭찬의 이유를 묵상해봅니다.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청하는 바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아들이나 딸, 가족이 아니라 거느리고 있던 노예의 치유를 간곡히 청했습니다.
당시 사람들 머릿속에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가축처럼 시장에서 매매가 될 정도였으니 그들의 처지가 어떤 정도였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인대장은 자신의 노예를 살려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인간미가 철철 넘쳐흐르는 사람,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향해 지니고 있었던 겸손의 덕은 또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루카 8, 6~7)
거기다 예수님을 향한 강렬한 믿음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예수님께서 그토록 흡족해하셨던 것입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주십시오.”
참 신앙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 믿음, 사랑, 겸손의 덕을 완벽히 지니고 있었던 백인대장을 바라보며,
그 무엇 한 가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 제 모습을 부끄러워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다.>
오늘 복음 이야기의 주인공은 당연한 말이지만 백인대장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주인공은 보지 않고 조연만 보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보라는 예수님은 보지 않고 백인대장만 본다면, 복음 말씀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원래 복음서는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서 기록한 책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을 백인대장의 입을 빌려서 증언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이 하느님에게서 왔다고 믿는 것과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라는 백인대장의 말은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병마(病魔)’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면 그 ‘병마’가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떠날 것이고, 그러면 병자가 나을 것이라고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시는 분’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병을 지배하시는 주님’(하느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병을 지배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백인대장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은 사람은 백인대장이 첫 번째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거나 ‘메시아’로 믿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 믿은 사람은 그때까지는 아직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게 된 것은 ‘예수님 부활 후부터’입니다.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 20,28)
그리고 그 뒤에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을 맨 먼저 적은 다음에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요한 1,1)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을 증언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고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제때에 드러난 증거입니다."
(1티모 2,4-6)
여기서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는 말은 “하느님이신데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신 분이고, ‘참 사람’이신 분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기본 신앙’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 가운데로 오신 날”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성탄절을 성대하게 경축하는 이유입니다.
성탄절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은 ‘나중에’ 메시아가 되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 되신 분이 아니라, 원래 메시아이신 분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하느님이신 분인데, 아기로 태어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꾸짖으신 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도, 성경도 모르고 살던 이방인도 이렇게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었는데, 하느님도, 성경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너희는 왜 이렇게 믿지 않느냐?”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알아볼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보여 주어도 보려고 하지 않고, 말씀을 하셔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다른 것만 찾고 다른 곳만 보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구원이 아닌 것, 즉 재물 같은 것만 찾고, 영원한 생명이 아닌 것, 즉 허무한 쾌락 같은 것만 찾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복음을 전해 주어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어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떻든, 사람들이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진리는 진리입니다.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의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 믿으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손해’ 라고 표현했지만, 그냥 ‘손해’가 아니라 ‘영원한 멸망’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행복하여라 - 겸손과 평화의 참 좋은 믿음의 사람들!>
행복한 체험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일년중 가장 별들이 잘 보이는 계절이 초겨울의 요즘일 것입니다.
거의 날마다 일어나 자비의 집 숙소문을 열었을 때, 한 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 오는 푸른 하늘, 빛나는 별들의 체험은 늘 새롭고 마음을 황홀한 기쁨으로 가득 채웁니다.
이승의 세계가 이처럼 아름답다면 저승의 천국문이 열렸을 때의 그 아름답고 황홀함은 상상을 초월하리란 생각이 듭니다.
이어 집무실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바치는 만세육창 기도가 또 하루의 출발을 행복하게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성호경, 주모경을 바친후의 만세육창과 신원 확인을 하면 마음이 참 상쾌해집니다.
아무리 인용해도 늘 새롭고 좋습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와 겸손, 그리하여 참 좋은 평화의 삶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 ‘평화의 전사’ 수도승(修道僧)이다.”
어제 인용했던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서 발표된 교황님 말씀을 다시 나눕니다.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한 주옥같은 내용들인지 다시 정독할 계획입니다.
종파를, 국적을 떠나 세계 최고 영적 지도자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우리 가톨릭 교회의 수장,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충심으로 호소합니다.
생명을 선택합시다!
미래를 선택합시다!
지구의 부르짖음에 주의를 기울입시다!
가난한 이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입시다!
젊은이들의 희망에, 어린이들의 꿈에 민감합시다!
우리는 그들이 미래를 부정하지 않도록 하는 중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참으로 생태적 회개가 절박한 시점입니다.
이런 호소에 응답하는 이들이 참으로 겸손과 평화의 참 좋은 사람들입니다.
언젠가 원장 수사와 대화중 일치된 내용이 있습니다.
“피정 지도 신부님을 구할 때 우선적 조건이 학식 많은 분이 아니라 좋은 분을 선택합시다.
사람이 좋으면 말도 글도 행동도 생각도 다 좋기 때문입니다.”
우선적 선정 조건이 참 좋은 겸손과 평화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나이들어갈수록 점점 평등해지는 사람들이요 남는 것은 좋고 편안한 사람인가, 사람 하나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쳐주신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고, 백인대장은 이교인인데도 참 좋은 겸손과 평화의 사람입니다.
참된 믿음은 겸손과 평화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의 세 스타일을 지닌 분들입니다.
친밀하고, 연민의 사랑 가득하며. 부드러운 분들입니다.
마침 어제 새벽 겨울 나무 가지들마다 가득 달린 별들을 보며 산책 기도중 써놓은 “나, 겨울에는” 시가 생각납니다. 이런 겨울 나무, 겨울 땅 같은 이가 예수님이요 백인대장입니다.
“푸른 하늘
배경한
빛나는 별 열매들
가득 달린
텅빈 충만의
겨울 나무들인데
누가 감히 가난하다 하는가
밤마다
푸른 하늘 빛나는 별들
꼭꼭 품에 안아 두었다가
봄, 여름, 가을에
무수한 사랑의 꽃들 피어낼
텅빈 충만의
겨울 땅인데
누가 감히 가난하다 하는가
나
겨울에는 동안거(冬安居)의
추위에도
따뜻한
텅빈 충만의
겨울 나무가, 겨울 땅이 된다
이 행복에 산다
나 겨울에는!”
-2023.12.3.
저는 어제 엊그제 12월2일 뉴욕타임스 “한국 소멸하나? 흑사병 창궐 수준 인구 감소”라는 칼럼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백인대장의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 병든 사회, 병든 대한민국을 고쳐 주시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각골분투(刻骨奮鬪)의 노력과 지혜가 필요함을 절감했습니다.
다음이 바로 매우 불길한 내용들입니다.
‘지난 29일 통계청에 의하면 한국의 올해 3분기(7-9월) 합계 출산율은 0.7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합계 출산율은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이다.
...그는 “2067년 한국 인구가 3500만명 밑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통계청 인구추계를 인용하여 이 정도만으로도 한국 사회를 위기에 넣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한국 저출생 원인으로 극심한 입시경쟁, 남녀대립, 인터넷 게임에 빠진 한국 남성들이 이성보다 가상의 존재에 빠져들게 한 점이 거론된다고 적었다.
그는 “노인 세대는 불가피하게 방치되고 엄청난 유령도시와 황폐해진 고층빌딩이 생기고, 고령층 부양 부담에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젊은 세대의 이민이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한국이 유능한 야전군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합계출산율 1.8명인 북한이 어느 시점에선가 남침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합계출산율 남과 북이 “0.7대 1.8” 너무 충격적입니다.
단적으로 총체적 위기의, 병든 한국사회의 반영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기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반려견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하나 깨어 참 건전하고 건강한 영육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해야 할 때입니다.
정말 개인이든 사회든 영적 혁명과 같은 기도와 회개, 겸손과 평화의 삶이 절대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의 백인대장같은 겸손하고 평화로운 참된 믿음의 삶이 절실할 때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아래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한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 근거한 미사중 성체를 모시기 전,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고백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백인대장의 믿음에 대한 감동의 고백에 하늘나라 잔칫상에 자리잡을 사람들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대로 제1독서 이사야서 예언의 실현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
여기까지가 백인대장 믿음에 대한 감동의 고백이고 다음 내용이 실로 중요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대로 믿는 우리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교인 백인대장이 초대 손님의 모범으로 제시되는데 바로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종은 나았다 합니다.
바로 하늘 나라 잔칫상에 초대 받을 자격은 백인대장 같은 겸손한 믿음을 지닌 평화의 사람들임을 봅니다.
참으로 겸손한 믿음을 지닌 평화의 사람들이 참 좋은 사람들입니다.
이사야가 환시로 받은 내용도 이와 일치합니다.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으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하늘의 모든 별들이 모두 하늘 안에 있듯이 모든 인류가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새삼 전 인류에게 예외없이 활짝 열린 구원의 하늘문이요, 모든 인류가 구원의 대상임을 봅니다.
주님의 은총과 우리의 노력으로 이런 이사야와 하느님의 마음, 인식수준까지 우리의 마음을, 인식지평을 넓힘이 평생숙제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배워야 할 것은 주님의 길, 평화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참 좋은 사람은 겸손과 평화의 사람입니다.
바로 다음이 하느님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영원한 평화의 꿈입니다.
바로 이런 꿈을 실현하러 오시는 대림의 주님이요, 그 모범적 인물로 제시되는 참 겸손한 믿음의 사람, 평화의 사람, 백인대장입니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바로 이런 평화가 하느님의 간절한 소망이자 꿈이요 우리에게, 특히 정치지도자들에게 부여된 평생과제입니다.
무기로 낭비되는 돈을 인간복지에 사용한다면 모두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삶은 전쟁입니다.
영적전쟁으로 전환하여 참으로 주님의 전사, 평화의 전사로 살아야 할 것이며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가 되어 주님의 빛 속에 걸어 가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 5,9)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에 남을 아프게 하는 말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일부러 아프게 하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평상시에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큰 아픔을 주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미망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까?
이 뜻은 남편을 여의고 혼자 된 여인입니다.
그런데 한자 뜻을 살펴보면, 아닐 미(未), 죽을 망(亡), 사람 인(人)으로 ‘죽지 않은 사람’입니다.
바로 여기에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따라 죽어야 한다는 유교적 사상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살색’ 역시 황인종 중심의 사고로, 피부색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표현입니다.
또 ‘결정 장애가 있다’도 그렇습니다.
무언가를 결정할 때 주저하는 사람을 두고 흔히 하는 말이지만, 장애를 단순한 불편함이 아닌 부족하고 열등한 것이라고 바라보는 시선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 있는 말을 자기도 모르게 사용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도 그런 잘못을 많이 범했음을 반성합니다.
실제로 제 말을 듣고서 크게 상처를 받았다면서, 한동안 저를 많이 원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계속해서 실수할 수 있는 우리였습니다.
따라서 최대한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는 말을 하는 데 노력해야 그나마 아픔을 주는 말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합니다.
자기 종이 중풍으로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백인대장의 대답이 의외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말이 기억나십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고 계속해서 표징만 보여달라는 말이었고, 예수님이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서 기적을 행한다면서 철저하게 반대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로마의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진정한 회개와 겸손의 말이었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의 말이었습니다.
이 말에 감탄하시며 이렇게 이르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우리는 과연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특히 주님께 하는 말은 어떠했습니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에서 나오는 겸손과 감사의 말이었습니까?
아니면 주님께 대한 불평에서 나오는 불평과 원망의 말이었습니까?
우리의 말에 주님께서는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슬퍼하실까요?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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