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21.日. 맑음
직선.
바람이 없어 거의 수직으로 후득 후득 떨어지는 연두 빛 빗방울 사이로 전주全州를 향해 머리를 두르고 서서히 움직이는 버스를 보며 손을 흔든다. 차창에 검은 빛가림이 되어 있는 버스 안에서도 마주 흔들어주고 있는 어른거리는 손은 보이지만 한 분 한 분의 얼굴은 알아 볼 수 없다. 떠나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의 짧은 이별이 있는 공터같이 넓은 주차장에 찍힌 일요일 이른 아침의 풍경이다. 이 아침에 서울에 비가 내린다고 해서 천안에 비가 내릴지는 알 수가 없으며 또한 전주의 날씨를 속단하기는 쉽지가 않다.
여행旅行이든 관광觀光이든 답사踏査든 간에 그 의미와 목적은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큰 공통점은 이 세 가지가 모두 주유여행이라는 점이다 주유여행周遊旅行이란 집을 나서서 다른 고장이나 타국을 유람하고 살펴본 뒤 정주지定住地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위 세 가지 외출은 다 기본적으로 그 노선이 짧은 직선들을 포함한 커다란 곡선이다.
여행과 관광과 답사 중 가장 핵심이 되는 말은 관광이다. 관광이라는 말은 중국 주周나라 시대의 <역경易經>에 ‘觀國之光’이라 처음 언급되어 있다. 이 말은 ‘나라의 빛을 본다.’는 뜻 정도로 풀이를 할 수 있겠고, 여기에서의 ‘국國’이란 타국을 의미하며 ‘광光’이란 풍경과 문물이다. 빛이란 의미를 가진 한자어가 광光과 색色이 있는데 광이란 풍경과 경치를 가리키고, 색이란 오감으로 느끼는 사물이나 사람의 얼굴을 주로 가리킨다. 그래서 우리가 여행 중에 주로 보는 것은 풍경과 경치이며 이것은 빛의 직진하는 성질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게 되는 정서적 감흥으로 이어진다. 물론 여기에 문물文物까지 보고자 한다면 사색이라는 생각하는 곡선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하다.
압구정 공영주차장에서 전주 한옥마을 입구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물론 양 점을 이어주는 직선이다. 하지만 수백 킬로미터의 직선 도로가 불가능할 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다. 오히려 고속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운전자의 안전한 운행을 위해 곡률의 개념을 도입한다. 속도를 뜻하는 효율적인 직선은 여유를 의미하는 완만한 곡선의 도움을 받아 가장 쾌적하고 안전한 길로 태어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곡률이 포함된 직선 도로를 달려 배웅하고 맞이하는 부드럽게 휘어 있는 시선 속에서 버스는 시간여행과 공간이동을 하여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을 하게 된다. 여기가 호남의 관문이자 웅도이며 새로 태어난 막걸리의 예향인 전주全州다.
곡선.
전주는 거의 만월에 가까운 온통 곡선으로 이루어진 도시다. 우선 전주 하늘을 뒤덮고 있는 거대한 기운이 맑고 둥글다. 그 안에는 역사와 문화와 예와 서글서글한 인심이 동글동글 말려 있다. 그래서 전주는 누구든 맞아들이고 무엇이든 포용을 한다. 하지만 전주의 곡선은 타고난 곡선이 아니라 뻣뻣한 직선들을 오랜 세월 동안 누르고, 조이고, 휘어서, 땀과 열망으로 이루어낸 노력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 곡선들은 그대로 이 땅의 멋과 자존심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전주가 가지고 있는 곡선은 하나하나마다 정취와 역사가 담겨있다.
전주의 미인들이 즐겨 입는 한복 저고리의 미적 포인트는 조화와 반전이다. 청아와 순결을 상징하는 예리한 직선인 하얀 동정의 기세는 우아한 곡선인 배래와 도련에 이르러 반전을 일으켜 극적인 불균형의 미를 이루며 모든 시선을 한순간에 사로잡는다. 한복의 아름다움은 외씨버선에서 마무리를 짓는다. 그 흰 버선의 뒤축과 버선코도 곡선이 만들어 낸 절묘한 아름다움이다. 한옥의 늘어뜨려진 처마와 조붓한 길을 따라 휘어 있는 기와담의 곡선은 직선이 꿈꾸지 못하는 은밀한 이상향을 지향하고 있다. 정동성당 내부의 아치형 구조도, 경기전의 두리기둥도, 술 박물관의 커다란 술독도, 점심 식사로 나온 비빔밥 위에 올려진 달걀 노른자도, 막걸리가 넘칠 듯한 대접도, 식탁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찌개 냄비도 모두 곡선이 가져다주는 실용과 미학이다. 그리고 이 땅 위를 굴러다니는 모든 바퀴는 완전한 곡선인 원이다. 전주는 무진장 많은, 하지만 버겁거나 무겁지 않은 우아한 곡선으로 충만한 곳이다.
지평선 혹은 수평선.
전주에서 한 걸음이면 내칠만한 거리에 김제평야가 있다. 이곳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이는 땅이다. 지평선은 하늘과 땅이 마주치는 경계이자 하늘과 땅이 이어지는 연계점이다. 지평선을 유심히 바라보면 부드럽게 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는 어렵지 않게 어디서든지 수평선을 볼 수가 있다. 수평선은 바다와 하늘이 만나 닿아 있고, 서로 부딪쳐 구별이 되는 점들의 연속이다. 그 점들을 따라 가다보면 역시 부드럽게 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평선과 수평선은 그 거대한 곡선으로 인해 한 가지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땅과 큰 바다도 그 보다 더 큰 어떤 것의 한 부분이며 그것들은 마치 직선과 곡선처럼 서로를 보완하고 상생相生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전주 외출길이 우리들에게 역사와 정취로써, 연둣빛 빗방울과 넘치는 막걸리로써, 품격 있는 질서와 가슴 아리는 인정을 맛보게 해주었다면 우리의 생각의 끝은 직선과 곡선을 통해 상생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 금상첨화의 여행旅行이자 관광觀光이고 답사踏査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그림같은 글입니다. 답사때마다 모놀버스 환송해 주셔서...항상 행복한 출발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한번 감사인사 전합니다.
딸내미가 받은 카드에 놀라운 감동이더군요. 저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섬세하신 긴여울님께 감사드립니다.
새벽 이른시간에 배웅나와 주신것도 예삿일이 아닌데 딸들에게 정성과 애정으로 가득한 편지까지 주시다니... 깍쟁이 금지는 내용을 나중에 혼자 본다 저에게도 안보여주더군요.ㅎㅎ 오랫도록 그정성 기억하며 즐거워 하겠지요. 감사 드립니다!!^^*
긴울림님의 자상하신 배려에 따듯한 마음으로 전주답사를 갔다 왔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정말 상생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준 전주 답사였습니다. *^^*
역쉬~~~~ 편지의 주인공들을 잘 선택하셨네요~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