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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경렬 (전 앙골라 대사)
역시 가는 게 아니었다. 방산 수출 하려다 더 큰 그림을 날릴 판이다. 나토에 간 순간 선택지는 좁아졌다. 장소 자체가 한국을 조선, 러시아 대결 전선의 언어 속으로 끌고 들어간 것이다. 그러다보니 구태여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나야 했고, 조선군 포로 문제를 회피할 수 없었다. 특히 당사자 자유의사, 강제송환 금지, 국제인도법이라는 포장은 공개적으로 반대하기 어려운 명분이 아닌가. 남북 대화의 ‘바늘구멍’을 뚫기는커녕 아주 방수처리를 할 자세다. 이재명 대통령의 본래 뜻은 아닐 터. 잘못된 참모들의 잘못된 조언으로 대통령과 나라가 길을 잃는 경우란 희귀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생각이 박힌 참모를 써야 하는 법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를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이 막았다. 트럼프는 2018~2019년 김정은과의 정상외교를 자신의 주요 외교 성과로 만들려 했다. 그런데 볼턴은 조선 비핵화에 대해 ‘리비아 모델’을 언급했다. 조선 입장에서 리비아 모델이란 핵을 포기한 뒤 정권이 무너진 사례다. 절대 수용불가다. 트럼프는 나중에 볼턴의 언급이 조선과의 협상에 큰 후퇴를 가져왔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그는 볼턴을 해임했다. 이 사례는 최고지도자가 추진하는 정상외교를 일개 보좌관이 훼손한 경우다. 지도자의 전향적 외교를 구체제 언어로 끌어내린 사례다.
6월 24일부터 26일까지 워싱턴에서 ‘2026 한반도 평화 회의’(Korea Peace Conference)가 열렸다. 미주민주참여포럼(KAPAC: Korean American Public Action Committee)이 주최한 행사였다. KAPAC의 핵심 의제는 1953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고, 북미 간 외교적 접촉을 제도화하자는 것이다. 이번 행사도 미 하원에 발의된 ‘한반도 평화법안’(H.R.1841: Peace on the Korean Peninsula Act)에 대한 지지 확대를 목표로 삼았다. 미 국무부가 북한 여행 제한을 재검토하고, 한반도 영구 평화 로드맵을 의회에 보고하며, 북미 연락사무소 설치 협상을 추진하자는 내용이다. 브래드 셔먼 하원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이다.
‘2026 한반도 평화 회의’에는 미국, 캐나다, 일본 등에서 약 400명의 한인과 평화 활동가들이 모였다. 미 의회 쪽에서는 셔먼 의원을 포함해 10여 명의 연방의원이, 한국에서는 송영길 의원을 단장으로 여야의 김영배, 김용만, 조경태, 강경숙 의원이 참석했다. 아울러 이 대통령, 문재인 전 대통령, 조정식 국회의장, 정동영 통일부 장관, 강창일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김경협 재외동포청장 등이 축사를 보냈다. 이 대통령이 축사를 보내 지지한 행사였음에도 강경화 주미 대사는 어디에도 눈에 뜨지 않았다. 이 대통령 축사는 송 의원이 대독했다.
셔먼 의원은 기조연설에서 대북 압박 중심 정책의 한계를 지적하고,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하는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 연락사무소 설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싸울 필요가 없는 상태, 즉 평화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안보 정책”이라고 했고, 남북·북미 간 신뢰 회복과 대화 재개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행사 참가자들은 민주·공화 양당 소속 50여 개 연방의원실을 방문해 ‘한반도 평화법안’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주미대사관 공개 일정상 강 대사는 KAPAC 기간과 겹치는 6월 24~26일에 여러 공식 외교 일정을 수행했다. 6월 24일에는 빌 키팅 하원의원, 브라이언 마스트 하원 외무위원장과 면담했고, 25일에는 마이크 로저스 하원 군사위원장과 만나 핵추진잠수함, 조선, 원자력 협력, 한국인 비자 쿼터 문제 등을 논의했다. 26일에는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에서 6·25전쟁 제76주년 추모행사를 개최했다. 그러나 ‘일정’만으로 강 대사의 KAPAC 불참은 설명되지 않는다. 빼곡한 일정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대통령이 축사를 보내 지원한 행사였지 않은가.
KAPAC 행사의 의제는 워싱턴 민주당 평화파와 한국 진보진영에는 자연스럽지만 공화당 주류와 대북 강경파, 그리고 한국 보수진영에는 껄끄러운 사안이다. 조선일보는 6월 9일자 기사로 “주미대사와 여권 인사들이 행사에 대거 참석하는 모양새가 불필요한 오해를 낳을 수 있다”는 시각을 드러냈다. 신문은 KAPAC 인사들이 미셸 스틸 주한 미국대사 지명 반대운동을 벌였다는 점도 거론했다. 그런 배경에서 주미대사가 KAPAC 무대에 서면 한국 정부가 특정 정치단체의 로비를 공식 후원하는 듯한 모양이 될 것을 우려해 불참을 결정했다고 추론 가능하다.
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걸 우려했다면 애초에 이 대통령이 메시지를 보내지 말았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메시지를 보내고 대사는 불참하는 방식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진 것일까. 일국의 외교 메시지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 식의 역할 분담은 ‘잔머리’ 술책으로 비난받을 일이다. 이 대통령은 축사에서 남북·북미 대화 재개, 조선 체제 존중, 흡수통일 불추구, 한반도 평화·통일정책 추진을 정부 국정과제로 분명히 언급했다. 아울러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역할도 당부했다. 이 정도면 KAPAC의 핵심 의제와 결이 같은 공식 메시지다.
대통령실, 외무부, 대사관 사이에 메시지와 현장 참석의 정무적 수위가 깔끔하게 조율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일 크다. 대통령실은 새 정부의 한반도 평화 기조를 동포사회에 보여주면서 민간 외교를 독려했고, 대사관은 워싱턴 현지에서 공화당, 대북강경파, 언론의 반발 가능성을 의식했을 것이다. 그 결과 축사는 나갔는데 대사는 빠지는, 정치적으로 애매한 장면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리고 그 회색지대에서 대통령 주변의 숭미 외교 참모들과 강 대사 사이에 통신망을 통해 구두로 오간 대화들이 있었을 것이다. “대사님은 빠지시지요.”
대통령이 전향적인 대북 정책을 추진하고 있고 그러한 메시지를 KAPAC에 냈다면, 대사로서는 당연히 그러한 최고지도자의 행보를 따랐어야 한다. 그것이 제대로 된 국가의 제대로 된 외교다. 그러나 볼턴의 사례처럼 보좌관이 대통령과는 다른 자기만의 어젠다를 갖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우리처럼 미국의 이익을 국익으로 포장하고 숭미동맹을 헌법 초월의 가치로 떠받드는 ‘식민 엘리트’들이 드글거리는 환경이라면 이번 KAPAC 사태쯤은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지 않는 한 숭미 참모들 간에 전결사항으로 처리할 문제에 불과했을 것이다.
대통령이 지지 메시지를 보낸 현장에 대통령의 분신인 대사가 없었다면, 그것은 “별일 아닌 불참”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분명한 설명이 필요한 장면이다. 혹시 미국의 강경 MAGA 세력이라든지 CIA가 행사 참석을 거부하라고 압력을 가한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본부에 보고하고 훈령을 받았어야 한다. 물론 그랬을 가능성은 낮다. “외압”보다는 “외압 가능성을 의식한 위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위축을 부르는 것이 바로 ‘숭미의식’이라는 것이다. 대통령 메시지와 현장 참석을 분리하는 모순적 선택이 현실화된 지점이다. 조사해야 한다.
이 대통령은 지난 6월 8일 취임 1년 기자회견을 갖고 조선의 비핵화를 먼 훗날의 최종 목표로 두되, 그것을 당장 협상의 문턱이나 선결조건으로 삼지 말자는 ‘현실론’을 강조했다. 지금 당장 협상의 출발점은 ‘완전한 비핵화’가 아니라 ‘핵능력 고도화 중단’이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틀 후 한·EU 공동성명은 기자회견의 ‘현실론’이 사라지고, 기존의 완전한 비핵화, NPT 복귀, 핵보유국 불인정 프레임을 전면에 복귀시켰다. 이 대통령의 등 뒤에서 외교 참모들의 숭미적 관성이 여실히 발휘된 결과였다. 이 역시 면밀히 조사할 일이다.
KAPAC은 대통령 메시지를 현지 대사관이 전혀 받쳐주지 않은 사안이다. 한·EU 공동성명은 정상 명의의 공식 외교문서가 대통령 자신의 공개 노선과 충돌한 사안이다. 하지만 둘의 본질은 하나다. 이 대통령이 ‘고독한’ 환경 속에서 외교를 펼치고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 뒤에서 자기정치 하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공해상에서 우리 국민을 불법 납치한 일을 두고도 이스라엘을 두둔하는 참모나, 유럽과의 공동성명 문안을 유럽의 문장으로 홀랑 받아드는 참모나, 대통령의 메시지를 받고서도 내 어젠다가 아니라고 등을 돌리는 대사나, 이제는 잘라내야 한다. 이 대통령의 2년차 외교는 더 이상 고독해서는 안 된다. 할 일이 너무 많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