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쉬고 싶다.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
지역에서 활동을 하면서부터 이 말을 달고 사는 것 같다. 위 이야기를 하면 주변에서도 또 그소리냐고 할 정도다. 처음부터 뭔가 본격적으로 할 생각 없이 발만 담그려 했다가 미끄러져서 넘어졌다는 표현을 쓰곤한다. 그렇게 지역 활동을 하게 되었다. 물론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다. 2013년에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후원회원이 되면서 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은 2016년부터 지역주민들의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는 작은도서관으로의 활동으로 넓어졌다. 도서관과 함께 마을공동체, 혁신교육지구, 문화예술교육 등은 물론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과 네트워크하며 다양한 활동들을 해오고 있다. 많은 지역 활동가들이 그렇듯, 활동비가 따로 있지는 않다. 그런데도 애 셋에 밤에 씻지도 않고 곯아떨어지는 날이 많은 이 활동을 이어가는 이유를 찾기 위해 참 많이 고민했다. 내 생겨먹은 모습을 인정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지지만 말이다.
작년에는 정리한 보조금사업의 갯수가 9개였다. 분명 작년 초에도 올해는 아무것도 안하고 책을 읽는 한해를 보내고 싶다고 했는데 말이다. 양치기 소년이 되는 것 같아 뭔가를 많이 하고 있는 것이 매우 부끄럽기까지 하다. 암튼, 작년의 모든 정산을 마무리한 후 스스로 겨울잠이라고 칭하며 휴식을 가졌다. 그런데 겨울잠도 불편하다. 급한 일도 없고, 뭘 특별히 하지도 않는데 마음이 불안하고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 머리는 알아서 쉬고 있어서인지 뭘 해도 잘 까먹고, 둔하고 실수연발이다. 원래도 쉬는 방법을 잘 모르는데 내리막에 세워놓은 바퀴처럼 멈출 줄 모르고 불안하게 굴러가는 딱 그런 순간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둘째아이도 뭔가 쫓기는 느낌이었단다. 잠시라도 아무것도 안하고 뒹굴뒹굴 마음 편하게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한다. '초등학생이 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모습이 겹쳐져서 안쓰럽다. 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00야, 졸업도 하고 그러는데 엄마랑 단둘이 여행 다녀올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바다보다 오자!"
무슨 생각이었을까?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그곳에 가면 조금은 출구가 보일 것 같은 느낌이다.
"어디로 갈까? 제주도?"
"와! 정말 좋겠다! 00(막내 동생)이 없는데서 우리 이야기도 많이 하고 마라탕도 먹어요!"
이렇게 짧은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고, 지난 주말 둘째아이의 초등 졸업 후 단 둘이 여행을 다녀왔다. 처음에 계획했던 제주도는 막내를 맡기고 다녀오려니 동선이 너무 커져서 있는 춘천의 할머니 할아버지댁을 지나가는 동해바다로 결정을 했다. 바로 바닷가에 있는 펜션을 적당한 가격으로 예약하려니 속초 위에 있는 고성이 눈에 들어온다. 바다 바로 앞의 숙소라니, 설렌다. 예약한 숙소 후기에는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왔다는 이야기들이 많다. 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구나.
첫번째 날에는 저녁 늦게 도착해서 더 일찍 바다를 보지 못해 아쉬웠다.
두번째 날, 밝고 파란 에메랄드 빛 바다가 너무 예쁘다. 조용히 해변을 걷고 또 걸었다.
낮 동안에 잔잔했던 바다가 내일 비 예보 때문인지 파도가 높아졌다.
그 모습은 마치 애니메이션 '벼랑위의 포뇨'에서 표현한 파도같다. 오전에도, 오후에도 해안을 걸었지만 밤 9시에는 아직 추워 숙소 베란다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해안에서 꽤 먼 바다부터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는 파도가 넘어오고 있다. 끊임없이 넘어오는 파도는 하얗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서진다. 거친 파도가 너무 매력적이다. 끊임없는 에너지 그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계속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파도가 밀려올때마다 조금씩 그 에너지가 나에게도 미치는 것 같다.
집어 삼킬듯한 검은 바다가 무섭기도 하다. 거대한 고래가 저 바다에서 솟아오른다면 어떤 느낌일까?
잔잔한 호수가 안전하지만 때론 거친 파도를 만나고 싶은 건 삶 또한 그러하겠지?
추운데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이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한다. 나를 위한 불꽃놀이가 아닌데도 무슨 이유에선지 불꽃놀이가 너무나 위로가 된다. 엄마 아빠 손잡고 있는 조그마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너무 아름답다. 청량감이 든다.
긴 시간을 둘째아이와 딱 붙어 있으며 보고싶었던 드라마도 함께보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중학교에 가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좋아하는 아이돌 최애는 누구인지, 친구관계는 어떤지, 엄마는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친척들간에 문제는 어떻게 발생한 것인지 등등 2박 3일간의 진실게임을 했다. 나와 같은 면, 나와 다른 면 많은 것들을 알게 된 것 같다. 엄마의 모습도 많이 알게 되었겠지?
쉬는 법을 배우고 싶은 나에게 주어진 단 2박 3일은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날이 오늘뿐이랴.
고성의 에메랄드 빛 바다는 잊어버린 줄 알았던 쉬는 방법을 깨닫게 해준 것 같다. 다음에도 이렇게 여행을 하리.
(단, 포장음식을 먹은 후 남은 쓰레기들에는 깜짝)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려고 준비하던 중, 막내아이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금요일 등교한 아이 중 확진된 아이가 있어 검사를 해보라는 문자가 왔다. 할머니 할아버지 뿐 아니라 간호사인 고모네 가족도 가까이 왕래하고 있어 온갖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펼쳐지며 걱정이 된다. 이동하는 사이 간이키트로 검사하니 다행히 음성이 나왔지만 여행의 마지막은 코로나 해프닝으로 마무리 되었다.
혹시 또 다른 쉬는 방법/비결 있으신 분 있으시면 공유해주세요~
(아차, 제가 다녀온 바닷가는 고성의 천진이었습니다.)
첫댓글 쌤의 휴식이 반갑습니다요~~~~ 댓글도 쉬려다가…..
멋진 여행기 감사합니다 ㅎㅎ 선생님의 활동력이 느껴지네요 ㅋㅋ
고성의 에머랄드빛 바다를 한번도 본적이 없어 글을 보면서 언젠가 꼭 가봐야지 다짐해봅니다.
저도 아무것도 안하고 하루종일 가만히 있는것이 서툰 사람이라 마지막 글에 쓰신 다른분들의 쉬는 방법/ 비결이 궁금해져요.
둘째 아이이 온통 엄마와 함께했던 그 충만하고 즐거웠을 시간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되겠지요? 아~ 여행가고프네요.
아.. 글을 읽고 있으니 마치 저도 함께 짧은 여행을 다녀온 것만 같아요. 특히, 이제 막 초등학교 졸업한 둘째와(막내가 같이 가고 싶어했을 텐데, 어찌 달래셨을지~) 단 둘만의 여행이라니! 특히, 2박3일간의 진실게임은 정말 멋져요! 새로운 여행지에서는 내밀한 대화도 술술 잘 될 것만 같거든요.
딸과 여행이라, 멋져요. 딸과 엄마가 얼마나 행복했을지 상상하면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