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필(權韠)-감회(感懷)(둥지 잃은 참새)
黃雀何翩翩(황작하편편) 참새 왜 저리 파닥거리는가
寄巢枯葦枝(기소고위지) 마른 갈대에 둥지 틀더니
江天喟然風(강천위연풍) 강가에 바람 세차게 불어오자
葦折巢仍欹(위절소잉의) 갈대 꺾이고 둥지마저 쓰러졌구나
巢破不足惜(소파부족석) 둥지 부서진 거야 아까울 것 없지만
卵破良可悲(난파양가비) 알이 깨진 건 참으로 슬프구나
雄雌飛且鳴(웅자비차명) 암수 날아다니며 우짖지만
日夕無所依(일석무소의) 해 저물어도 깃들 곳 없네
君看彼黃雀(군간피황작) 그대여, 저 참새를 보게나
物理因可推(물리인가추) 세상 이치 미루어 알 수 있나니
結巢豈不固(결소기불고) 둥지 튼 것이 어찌 단단치 않았겠는가
所託非其宜(소탁비기의) 둥지 튼 곳이 마땅치 않아서지
*위 시는 “한시 감상 情정, 사람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석주집石洲集)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장미경님은 “권필은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조선 중기의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하고 풍자한 시를 다수 남긴 시인이다.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로 경세에 대한 포부를 안고 과거를 준비해 1587년 19세의 나이로 과거의 초시와 복시에서 장원을 하였으나 글자 하나를 잘못 쓴 것이 밝혀져 합격이 취소되었다. 이후 1591년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신묘당사로 서인들이 실각하고 동인들이 득세한 후 벼슬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권필이 과거를 포기하게된 결정적 이유는 정철을 포함한 서인의 실각가 동인의 득세에 있다. 아버지 습재 권벽은 율곡 이이의 천거로 두 차례 벼슬에 오른 적이 있는 서인이었고, 권필 자신도 평소 정철과 성혼, 박순, 조헌, 고경명 등 서인의 중심 인물들을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인이 세력을 잃는 것은 권필의 정치 기반이 몰략하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들을 모한하여 정계에서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동인들엥 대한 혐오감이 정치 전반에 대한 강한 불신과 불만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권필은 그의 시에서 당시 지배층에 대한 강한 분노를 표출했다. 그리고 광해군 때 외척의 전횡을 풍자한 〈궁류시(宮柳詩)〉를 지었다가 필화(筆禍)로 목숨을 잃었다. 위의 <감회(感懷)> 시에도 그의 비판적 시작(詩作) 태도를 잘 볼 수 있다.
위 시는 <감회> 3수 중 제2수인데, 제1수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비극적 상황이 시를 짓게 된 동기였음이 나타나 있다. 삶의 터전인 둥지와 목숨 같은 새끼를 잃은 채 울부짖으며 주위를 맴도는 참새는 바로 왜적의 침입으로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몽진해야 했던 임금 선조(宣祖)와 지배층에게 버림받고 삶의 터전마저 짓밟힌 채 고통받고 있던 조선 백성들의 모습인 것이다.
무엇이 그러한 상황을 초래한 것일까?. 마지막 네 구에서 그 총체적 난국의 책임소재가 드러난다. 그것은 둥지 자체의 견고함과 무관했다. 굳게 지켜줄 것으로 믿고 의지하며 둥지를 튼 곳이 마른 갈대였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이는 국가 안위와 민생을 책임지지 못한 지배층에게 난국의 책임이 있음을 비유한다.
16세기 조선 시대는 ‘둥지를 틀 곳’에 대한 선택이 임금 한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면 21세기 현대는 그 선택의 권리와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난국을 초래하는 것도 그 난국을 타개하는 것도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 시대다. 그리고 그 모든 권리는 희생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권리와 책임을 값지게 활용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권필[權韠, 1569(선조 2)∼1612(광해군 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조선 중기의 시인. 승지 권기(權祺)의 손자이며, 권벽(權擘)의 다섯째아들이다.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술로 낙을 삼아, 부인이 금주를 권하니 시 「관금독작(觀禁獨酌)」을 지었다. 젊었을 때에 강계에서 귀양살이하던 정철을 이안눌(李安訥)과 함께 찾아가기도 했다. 동료문인들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이 되고, 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으며, 강화에서 많은 유생을 가르쳤다.
임진왜란 때에는 구용(具容)과 함께 강경한 주전론을 주장했다. 광해군초에 권신 이이첨(李爾瞻)이 교제를 청했으나 거절했다. 유희분(柳希奮) 등의 방종을 임숙영(任叔英)이 「책문(策文)」에서 공격하다가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삭과(削科)된 사실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하여 「궁류시(宮柳詩)」를 지어서 풍자, 비방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대노하여 시의 출처를 찾던 중,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연좌되어 해남으로 귀양가다가 동대문 밖에서 행인들이 동정으로 주는 술을 폭음하고는 이튿날 44세로 죽었다.
시재가 뛰어나 자기성찰을 통한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고,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 풍자하는 데 주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인조반정 이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고, 광주(光州) 운암사(雲巖祠)에 배향되었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위양리에 있고, 묘갈은 송시열(宋時烈)이 찬하였다. 『석주집(石洲集)』과 한문소설 「주생전(周生傳)」이 현전한다.
첫댓글 현실 세계도 비슷한 상황이지요......
지켜주지 못하는 위정자들의 모습에서 권필님의 시에 공감을 느낍니다....
이번 주도 건강하시고 빨리 뵙는 날이 왔으면 합니다....
지기님의 정성 가득한 댓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번 주도 행복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