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집을 드리지 못해 이렇게 양해를 구합니다 *
백우선 시집 “탄금” 저자 자선작 11편
고드미* 모과
고드미마을 단재 선생 묘소에는
모과나무 한 그루가 높고 곧게 서 있었다.
한겨울 주말, 떨어져 있는 모과는
꽁꽁 얼고 서리가 하얗게 서려서도 향기로웠다.
아직도 가지 끝에 달려 있는 모과 한 알은
한낮에도 별로 빛나고 있었다.
* 고드미 : 곧음이. 곧은 선비의 은거와 관련됨.
탄금
우륵은 중원에서 가야로 흐르는 마음을 가야금 가락에 실어 대명산 바람결에 띄워 보내곤 했다.
그 뒤로도 간도에서 남쪽으로, 사할린에서 코리아로, 중앙아시아에서 사할린을 거쳐 코리아로, 멕시코와 일본에서 코리아로,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그리고 땅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땅으로 흐르는 바람결에서는 가야금 가락이 끊임없이 울리고 울려 나왔다.
타지 마할
한 남자의 한 여자에게 눈먼 사랑이다.
백성에게 눈멀어야 할 왕은
백성도 대리석도 보석도 그녀에게 눈멀게 했다.
눈먼 아름다움에 온 세계는 눈이 먼다.
정조의 술잔
―수원 ‘不醉無歸’상*
화성 일주 중 전통시장 거리에서 따르는
정조의 술잔을 받았다.
축성 당시 장인匠人 위로연 술잔에
‘불취무귀’라는 말씀도 여전하였다.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한다.
말씀 그대로이기도 하겠으나
백성들이 마음놓고 취할 수 있는
전쟁도 없고 살기도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아직은 미안하다는 뜻도 전해졌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을 들어
아름다움은 적을 두렵게 하는
강한 것이라는 말씀을 덧붙이기도 했다.
* 정조가 좌정하여 술병을 들고 술상에 놓인 잔에 술을 부어, 비어 있는 앞자리에서 누구나 받아 마시게 하는 모습의 조각으로 팔달문 근처 도로변에 설치돼 있으며, 그 곁의 안내문을 이 시에 반영함.
백범 성좌
경교장 임시정부 주석실 유리창에는
하수인이 쏜 흉탄 중 두 발의 파열흔이
지금은 대낮에도 성좌로 빛난다
번개우레좌로 번쩍이며 쩌렁댄다
아직도 남북으로 분쟁 중이냐며
아직도 그 하수인들의 세상이냐며
아직도 아름다운 나라와 멀어지느냐며
닫힌 문
사람이 죽은 뒤 거의
백골로 발견되는 일이 이어졌다.
60대 여자는 5년,
50과 60대 남자 둘은 5개월 만이었다.
셋 다 홀로 살던 세입자였다.
옷을 껴입고서
이불 속에 모로 누워 웅크리고
부엌 바닥에 엎드리고
주검째 철거된 주택 폐기물 처리장에
해체돼 버려진 채였다.
사람의 장례에 벌레들뿐이었고
부고는 전혀 없었거나
늦게나마
문틈으로 기어 나온 구더기,
쓰레기로 흩어진 자기 몸이 전부였다.
명사
언제 어떻게
울 것인가를 아는
명사산 모래는
어디에나 있다.
온 나라 모래가
또다시 운다.
방파제, 길, 아파트, 빌딩의
콘크리트 모래까지 운다.
작아도 너무 커도
못 듣는 소리,
모래는 바람으로
우레의 우레로도 운다.
물낌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 관련
행사 프로그램에는 ‘?!-물낌표’라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기억을 얽은 생각이
생몰년 사이의 ‘~’(물결표)인 우리 삶은
‘?+!’라는 것이었다.(~ = ?+!)
산다는 것은 묻고 감탄하는 것
감탄을 위해 묻고 또 묻는 것,
이 물낌표들의 연속이 바로 삶이라는 것이었다.
더 많은 물음표와 느낌표를 위하여
더 바른 물음표와 느낌표를 위하여
이 많은 물음표와 느낌표의 밥상을 차려서는
눈, 귀, 코, 입, 머리――온몸으로
배부르게 먹고, 부른 배를 두드려 보자는 것이
출렁출렁 반짝이는 삶이라는 생각이었다.
괜히
그냥 편히 살게 할 걸
괜히 시를 쓰게 했다며
세상을 앓게 했다며
여든이 다 되신 은사님*은
술김에 울먹이셨다.
아니 선생님 덕분에 행복합니다라고 했지만
나도 목이 메어 제대로 말씀드리지도 못했다.
너무 잘 쓰려고도 하지 말고
많이 발표하려고도 하지 말고
천 명이 한 번 읽는 시보다
한 명이 천 번 읽는 시를 써.
사람들의 입맛을 따라가지 말고
쓰고 싶은 대로 쓰되
오래 남을 시를 써.
그냥 편히 살게 할 걸 괜히…
댁으로 모시는 차에 오르면서도
그 말씀을 덧붙이셨다.
* 조재훈 교수, 시인
파도
일어서다 주저앉고 일어서다 주저앉고 일어서다 주저앉고 ……
평생을 절룩이면서
물과 뭍의 식구들을 안고 업고 기른다.
바닷가에서
밀려오고 밀려오는 것
마냥 다가오는 저걸 뭐라면 좋을 것인가
부서지면서도 달려오고 달려오는 것
끝없이 좇아오는 저걸 뭐라면 좋을 것인가
뻘을 핥고 바위를 타넘어 매달리려는 것
저렇듯 기어이 따르려는 저걸 뭐라면 좋을 것인가
하늘까지 끌고서 휘감아 오는 혼신의 몸부림
저처럼 한사코 목을 매는 저걸 뭐라면 과연 좋을 것인가
백우선 약력
1981년 『현대시학』 등단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 『우리는 하루를 해처럼은 넘을 수가 없나』, 『춤추는 시』, 『길에 핀 꽃』, 『봄비는 옆으로 내린다』, 『미술관에서 사랑하기』, 『봄의 프로펠러』
동시집 : 『느낌표 내 몸』, 『지하철의 나비 떼』
이메일 : woo-sun777@hanmail.net
첫댓글 주옥같은....이라는 말 이럴 때 쓰는가 보아요~
주옥같은 시 11편~!!!
지금은 비록 아프고 쓸쓸한 댓글이 8할쯤 되지만, 오래지 않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오면 사회면 뉴스를 떠나 조금은 나른하고 사소한 것들에 관하여 쓸 수 있을 게다.
-제페토가 '그 쇳물 쓰지 마라'에 남긴 서문-
감사드립니다.
지식이 아니면 불가능한 서사적인 시편들이 의미있게 읽힙니다. 잘 감상했습니다. 선생님~^.^~
좋은 시편들... 시집 사서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