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글쓰기는 분명 망각의 결과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이고, 미술은 그 다음으로
중요한 방편이다. 그림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 하나가 정확히 이 동기를 설명해준다. 로마 역사가 대 플리니우스가 전해주었고, 18~19세기 유럽 미술에
종종 등장하는 주제다. 사랑에 깊이 빠진 젊은 남녀가 헤어질 순간에 이르자, 아쉬운 마음에 여자는 연인의 그림자 윤곽을 그리기로 결심한다. 여자는
기억을 잃을까 두려워 까맣게 태운 지팡이 끝으로 무덤 벽면에 비친 남자의 그림자 선을 따라 그린다. 르노의
장면 묘사는 특히나 애절하다. 부드러운 저녁 하늘은 연인이 함께하는 마지막날이 저물고 있음을 암시한다. 양치기의 전통적 상징인 소박한 피리는 남자의 손에 무심히 쥐여 있는 반면, 왼쪽에서
여자를 올려다보고 있는 개는 보는 이게게 정절과 헌신을 일깨운다. 여자는 남자가 떠났을 때 자신의 마음
속에 남자를 더 선명하고 더 강하게 붙잡아두기 위해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코의 정확한 모양, 곱슬거리는 머릿결, 둥근 턱선과 치켜 올라간 어깨는 남자가 수 마일
떨어진 푸른 계속에서 가축에 신경쓰는 동안에도 여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17)
삶에 고단할수록 우리는 우아한 꽃 그림에 더 깊이 감동하게 된다. 눈물이
나온다면 이는 그 이미지가 얼마나 슬픈가에 반응해서가 아니다. 유리병 속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국화를
그린 사람은 그의 자화상이 말해주듯, 인생의 비극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자화상은 이 화가가 어리석은 천진함 때문에 우리에게 즐거운 이미지를 보여줬을 거라는 일말의 우려를 확실히 잠재운다. 앙리 판 탱라투르는 비극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반대쪽으로 더 강한 생명력을 뿜어냈다.
(19)
세상의 많은 예술이 단지 예쁘기만 하진 않다. 어떤 예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삶을 철저히 이상화해 보여준다. 이는 현대적 감수성에 훨씬 더 난처하게 다가올 수 있다. 스코틀랜드 왕립의사협회는 에든버러 뉴타운의 중심부에 서 있다. 이
건물 안에서 벌어질 법한 절차들을 상상해보라. 고결한 품위, 박식함과
온화한 권위, 전문가에게 꼭 들어맞는 얼굴, 에든버러의 의사들은
분명 그런 것을 보여주고 싶어하리라. 이 건물은 세상에 당당한 전면을 내보이고서, 존경, 더 나아가 숭배를 요구한다.
이 건물은 이상을 구현하고 있다.
(24-25)
우리는 수많은 예술적 성취를 예술가의 ‘승화된’ 슬픔이라고 보고, 결국 관객도 작품을 접하며 슬픔을 승화시킨다고
본다. 승화라는 말은 화학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단단한
물질이 액체 상태를 거치지 않고 직접 기체로 변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예술에서 승화는 천하고 보잘것없는
경험이 고상하고 세련된 경험으로 변환되는 심리적 변형 과정을 가리킨다. 슬픔이 예술을 만날 때 일어날
수 있는 바로 그것이다.
(27)
그림은 우리의 인간관계나, 일상의 스트레스와 고난을 직접 가리키지
않는다. 이 그림의 기능은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의 거대함을 날카롭게 의식하는 심리 상태를 일깨우는 것이다. 작품은 슬프다기보다 음울하고, 고요하지만 절망적이지 않다. 그런 심리 상태, 좀더 낭만적으로 표현하자면 영혼의 그런 상태에서
예술작품을 접할 때 종종 그렇듯, 우리 앞에 놓인 강렬하고 다루기 힘든 구체적인 슬픔들은 더 잘 극복할
채비를 하게 된다.
(53)
우리의 주된 결점,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 원인 중 하나는 우리 주위에
늘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 있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의 가치를 보지 못해 고생하고, 매혹적인 것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종종 엉뚱한 갈망을 품는다.
문제의 한 원인은 상황에 익숙해지는 우리의 능력, 즉 우리가 습관화라는
기술의 달인이라는 데 있다. 습관이란 우리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준다.
운전 습관이 들기 전 우리는 운전대 앞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을 빈틈없이 의식해야 한다. 소리, 빛, 움직임에 그리고 강철 상자를 조종해 빠르게 세상을 누비고 다닐
수 있다는 순진하고도 놀라운 경이로움에 바짝 긴장해 모든 감각을 동원한다. 이 과잉 의식 때문에 운전은
신경과민의 시금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몇 년을 타고 다니고 나면 점차 기어 변속이나 계기판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먼길을 운전하게 된다. 행동은 기계적이 되고, 로터리를
도는 동안 인생의 의미에 침잠할 수도 있다.
(94)
사랑은 당연히 인생의 큰 즐거움이어야 하지만, 나와 가장 쉽게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은 다음 아닌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연인들 사이에 오가는 잔인함의 정도는 철전지원수
저리 가라다. 우리는 사랑이 충만함의 강력한 원천이길 바라지만, 사랑은
때때로 무시, 헛된 갈망, 복수, 자포자기의 무대로 변한다. 우리는 부루퉁하거나 째쩨해지고, 성가시게 잔소리를 하거나 화를 내고, 어떻게 혹은 왜 그런지 이해조차
못하고서 자신의 삶과 한때 자신이 좋아한다고 맹세했던 사람의 삶을 망가뜨린다.
(135-6)
우리가 억누르고 있는 걱정거리는 생의 특별한 마지막 순간만이 아니다. 거기엔
우리가 나이를 먹고, 건강을 잃고, 시들고 쇠약해진다는 사실이
딸려 있다. 생의 현 단계는 순식간에 흘러가고, 돌이켜보면
무상하기 그지없다. 스무 살이 되면 일곱 살 때 보낸 수천 시간은 휴지 조각처럼 느껴진다. 쉰 살이 되면 이십대에 보낸 십 년 세월이 한순간처럼 덧없어진다. 삶의
문제들은 오늘, 우리 앞에 펼쳐진 며칠, 그리고 강렬하거나
혹은 멍한 몇 시간 동안은 아주 크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모두가 사소해져 기억조차 희미한 하찮은
과거의 일이 된다.
(228)
예술에 진정한 열망은 그 필요성을 줄이는 데 있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술이 다루는 가치, 즉 아름다움, 의미의 깊이, 좋은 관계, 자연의 감상, 덧없는
인생에 대한 인식, 공감, 자비 등에 냉담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예술이 나타내는 이상들을 흡수한 뒤, 아무리
우아하고 의도적이어도 단지 상징적으로밖에 드러내지 못하는 가치들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궁극적 목표는 예술작품이 조금 덜 필요해지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