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종합예술이라고 말하는 영화는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
그 시대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읽어내거나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흘러가 버리는 일상의 사소한 생각들을 짚을 수 있지요. 사실 역사란 이러한 기록되지 않은 사소한 생각들이 쌓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조금 세월이 흐르면 기억 속에서만 살아 있다가 결국에는 묻혀버리는 것입니다. 세월의 갭이란 다름 아닙니다. 이런 일들이 쌓여서 크레바스만큼이나 큰 갭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영화는 주목할 만합니다.
사실 영화는 만드는 이의 눈에 좌우되는 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만든 이, 감독이 보는 눈은 당대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지닌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동시에 새로운 유행을 이끌어내기도 합니다. 혹은 시대에 대한 반동일 수도 있지만 그 또한 그 시대가 있지 않으면 나올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러니이기도 하지요. 호응을 받는 영화 혹은 인기를 끌었던 영화는 그만큼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속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시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혹평을 받은 영화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진지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혹은 예술적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런 평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아보노라면 그 시대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영화 관련 기록은 당시 사람들이 어떤 기술을 사용했는지, 최신이라는 평을 들은 이유가 무언지 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지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던 주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살펴보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호머(Homer)의 “일리어스(Illios)”는 신과 영웅의 서사시입니다. 신이 인간의 일에 참여하고 인간은 신이 정한 운명에 따라 항거해도 어쩔 수 없는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한편 인간답게 살며 사랑하며 싸움과 분쟁으로 아픔과 고통을 느끼지요. 이런 일리어스는 서양뿐 아니라 동양인 역시 누구나 읽고 지나가는 책일 뿐 아니라 좋은 영화의 소재가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사실 같은 내용의 원본을 가지고 영화로 만든다 하더라도 각 시대마다 영화로 만드는 사람마다 시각이 다르고 시대상이 다른지라 이미 아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상당히 재미있지요. 만드는 이, 즉 감독이 어떤 시각으로 영화를 만들었느냐에 따라서 집중 조명하는 부분이 다르고 그런 감독의 표현을 읽으면서 영화가 만들어진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과 발전상들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화 하나에 담긴 시대를 읽는 일도 커다란 즐거움입니다. 문학과 예술이 시대를 반영하듯 영화도 예외는 아니거든요.
“일리어스(Illios)”는 다양한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하고 여러 영화에서 인용되기도 했습니다. 1956년도에 나온 로버트 와이즈(Robert Wise) 감독의 “트로이의 헬렌(Helen Of Troy)”도 그 중의 하나지요. 이 영화는 일리어스라는 원본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감독이 충실하게 원전을 영화로 옮겼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럼에도 비평가들, 혹은 문학전문가들은 감독이 도대체 책을 읽기나 한 거냐고 볼멘 소리를 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저 잘 팔리게끔 만든 상업용 영화라는 거지요. 요즘 영화 트로이에 대한 혹평과 쌍둥이처럼 닮은 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우선 기억에 남는 헬렌의 모습은 이탈리아 여배우인 로사나 포데스타(Rosana Podesta)가 그리스조각처럼 단정합니다. 헬렌은 흠이라곤 없는 여신, 마치 아프로디테 자신처럼 분장했었지요. 그리고 오직 헬렌과 파리스로 인해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그들의 사랑에만 초점을 맞춘 이 영화는 지금 상영되고 있는 트로이와는 사뭇 달라 원전에 충실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전쟁의 이면에 있는 인간의 추악한 욕심과 인간끼리의 다툼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당시 꽤나 인기를 끌었고 현재도 간혹 찾는 이들이 있는 이 영화의 주제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Paris)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우스의 왕비 헬렌의 사랑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유명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Brigitte Bardot)가 켈트 여신의 이름을 가진 시녀 안드라스테(Andraste)로 분해 함께 나왔습니다만 그녀의 역할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고 여주인공 로사나 포데스타의 뛰어난 외모에 비해 그녀의 모습은 형편없었지요. 사실 이 영화를 찍을 당시 브리지트 바르도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생각자체가 가능한 것은 아니긴 합니다만 안드라스테가 켈트 여신이었던 만큼 헬렌이 그리스 여신 아프로디테를 대변하는 사실로 볼 때 이 또한 그들에게 잠재한 어떤 시각이 아닐까요. 야심만만한 아가멤논, 그리고 아내를 빼앗긴 분노에 불타는 메넬라우스, 이타카의 왕으로 훗날 오딧세이아의 주인공이 되는 오디세우스, 바다의 여신 데티스의 아들인 아킬레우스,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와 프리암 왕 등의 인물들, 이들은 일리어스에 나오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모든 것은 신이 정한 운명대로 펼쳐집니다. 원전 그대로 인간사에 신이 개입한다고 보는 이런 태도는 어떨까요. 세상사는 모두 내가 노력하는 바와는 상관없이 운명을 따른다는 그런 뜻이 아닐까요.
2004년작 “트로이(Troy)"는 다릅니다.
철저히 인간의 시각에서 바라본 일리어스라고 해도 될 정도로 신의 이야기는 좀처럼 나오지 않습니다. 혹자는 이 영화는 일리어스가 아니라고 혹평하기도 하지요. 이 영화에 대한 반발과 혹평은 일리어스를 개작했다는 아니면 감독이 자신의 입맛대로 요리한 영화라고 하는 시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감독의 시각은 어떤가요. 앞서 말했듯이 영화가 동시대에 대한 가장 좋은 반영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런 혹평도 감내할 만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영화를 인간의 시각에서 바라본 신화라고 해도 좋겠지요. 아니 신이 빠져버린 신화, 인간으로 돌아온 신화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이는 우리 시대가 그렇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신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더 이상 흥미를 갖지 않습니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심리학자들의 도움으로 무의식의 세계가 깊이 연구되고 그 결과 우리가 신비롭게 여겼던 신화의 세계는 신성을 잃었습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세계에서 신을 충동과 본능의 자리에 놓았고 융 또한 내 안에 있는 종교적인 원형으로 신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겪었던 신비의 체험이라는 신과의 접촉은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일 정도로 격하되어버린 거지요. 따라서 인간이 더 이상 신의 세계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신화는 사라지고 대신 인간이 신화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인간탐구가 이루어진 겁니다.
-To be continued-
주: 트로이의 헬렌(Helen of Troy), 1956년 작으로 2003년에 만든 TV 시리즈용인 헬렌 오브 트로이가 아닙니다. 미국의 웹 사이트 아마존에서는 이 영화의 DVD를 팔고 있으며 영화에 대한 감상 평이 아직 올라오곤 합니다. 가장 최근의 감상평은 2004년 5월 11일자입니다.
첫댓글 그리스 로마 신화 자체도 인간적인 것이 아니던가요? ...<영화 하나에 담긴 시대를 읽는 일도 커다란 즐거움입니다.>에 공감하며 . 후편 기대합니다.
신화는 사라지고 대신 인간이 신화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인간탐구가 이루어진 겁니다./ 재미있네요. 과학이 발달하면 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김천에 상영중이라고 강력히 추천하던데 보고싶네요.
트로이.....꼭 보라고 얘기해주던데 아직 보지를 못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