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들의 역사
마야 룬테 장편소설 마야 룬테는 1975년 생 노르웨이 오슬로 출신
내가 초등 이삼학년 때 우리 집 건너 방 뜰에는 꿀벌 통이 서너 통 있었다, 학교에서 삽짝을 들어서면 벌들이 까막게 벌통으로 드나들었는데 꼬맹이들은 벌이 무서워 들어오지 못하고 피했으니 벌이 저절로 집을 지키는 듯 했다. 그 벌통의 벌이 드나드는 구멍의 크기는 꿀벌은 들어가고 침입자인 큰 왕벌(말벌)의 침입을 막는 크기인데 이것이 적확하게 얼마인지는 모른다. 큰 벌이 입구에서 들어가려면 꿀벌과 싸움을 벌이고 꿀벌들이 허리가 짤리여 죽은 놈이 많아서 노란 왕벌들이 오면 벌통입구에 기어 다닐 때 막대로 눌러 죽이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크기가 정확하게 높이가 4.2mm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우리 벌통은 6~8mm는 넘었을 것이다. 우리 벌들이 서양 벌보다 , 사람도 우리가 백인보다 작은데 클 이는 없으니 가끔 말벌의 침입이 있는지 벌통을 열고 검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농촌의 삶이란 늘 현금이 귀해서 돈을 주고 아이들 먹일 꿀을 살 여력은 없으니, 자급자족 밖에, 그리하여 벌통을 마련한 모양인데 덕분에 대두병으로 둬 서너 병 꿀을 따서 여름에 보리차에 넣어 먹는 호강을 했다. 그런데 이 벌들이 분봉과정에 여왕벌과 벌집에서 가출을 하여 날아가 없어졌는데, 이 소설을 보니 벌은 한 통에 여왕벌이 하나이고 여왕벌이 생식을 위한 숫 벌과 교접을 하기 위해 수박덩이처럼 뭉쳐져 날아갔다. 우리 벌은 감나무가지로 날아가 볼일을 마치고 여왕벌에 수놈의 생식기가 덜래덜래 잘리어 달린 여왕벌이 들어오는 과정에 관리를 잘 못하여 놓치고 만 것이었다. 여왕벌은 벌통에서 볼일을 안보고 야외에서 수많은 수벌과 볼일을 보는 것을 우리가 몰랐던 것 같다.
단어장 들고 다니며 시간을 아끼고 공부했던 7080세대들인 우리들을 가르치시던 부모님은 늘 교육비에 쪼들리셨는데, 도시근교 농가는 부업으로 봄, 가을에 누에를 치거나 농촌은 고생은 해도 몫 돈이 되는 담배농사를 하거나 하는 방법이 제일 효과적이었다. 누에치기는 한 달만 여인들이 바쁘면 곧바로 중고생 둬 서넛 등록금은 마련이 된다. 대학등록금은 돼지 먹여서는 부족하여 자갈논을 팔거나 소를 대여섯 마리 먹여서 팔아서 등록금 대고, 남은 것은 송아지 종자돈으로 다시 송아지를 사와 먹이시던 기억이 있다. 우리 선친은 공무원 급여 소득이 있지만 내 위로 형과 누이 세 명을 잃고 늦게 둔 자식들이 형님만 대학을 끝내고 터울이 없이 기차놀이하듯 세 명이 한 줄에 매달렸으니, 등록금은 지금으로 환산해도 년 삼천만원이 넘었을 터인데 녹녹치 않은 교육비이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아들이나 조카들이 손자나 손녀를 둘 이상은 겁을 내고 안 낳으려고 하는 것도 이해는 된다. 월 700만원 소득자는 최 상위 소득자로 한국은행통계본부에서 5분위 중 1순위자로 꼽는데, 이들이 월 300만원을 저축해야 아이 셋 대학등록금을 납부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생존전투를 해야 하는 시기가 오십 전 후에 닥치는 셈이다. 작금의 현실은 이제 경제력을 짱짱하게 둔 할아버지가 있어야 손자 손녀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을 여건이 되는 모양이다. 자식들 세대는 부부 ‘쌍 벌이’가 돼도 소위 “사” 급은 돼야 손자 손녀를 셋 이상 키울 경제력특권이 생기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대학을 가기위한 교육이, 대학은 취업을 잘하기 위한 도구가 돼 버린 지금은 모두 편하고 수입 많은 직업이 뭔가를 찾아서 전 국민이 골몰한다, 재미있고 하기 싫은 공부안하고 갈 길을 찾아다니다 보니, 찾은 것이 전 국민의 가수, 배우, 코미디언, 연극인, 예술인과 프로 스포츠인 등등 길로 나선다. 계집아이들은 난 공부 때려치웠다 자랑하는지, 머리는 물들이거나 치마를 초 미니로 올려 입고 ,조기화장을 시작하여 중학생부터 입술에 립스틱 바르고 다닌다. 거의 대다수 학생들이 등하교 길에 스마트 폰에 눈을 못 떼고 전화기 들고 다닌다. 무엇이 그리 궁금한가? 쓰레기 정보가 홍수를 이룬다. 가치의 우선순위가 없어진 세상이다. 가치의 우선순위를 정할 지식도 없고 가치의 규준도 없으니, 개와 고양이 등 가축과 설치동물과 사람과의 차등이 없어져간다. 애완동물이 죽으면 장례를 후하게 치러야 하고, 같은 동 같은 동네 늙은이가 고독사한 것은 무감각해 져간다. 저 늙은이는 자식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고, 우리 개나 고양이는 주인인 나를 잘 만나서 내가 잘해 주는데 둬 잘 못된 것 있냐? 그러다 싫증나면 과감하게 버리면 되는 것이고? 뭐 잘 못된 것 있냐?
이 소설의 나는, 아이를 일곱 명 뒀는데 그 중에는 쌍둥이도 있고, 약간 멍청한 녀석도 있다. 그 놈은 특수학교에 가야 한다. 작가는 어린 세 살 때 글을 읽었단다. 그러다보니 짤막한 동화책을 읽고, 아이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책과 어울린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우리아이는 친구가 많다거나, 달리기를 잘한다거나, 나무에 잘 오른다거나 수를 잘 놓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듣고 싶어 한다. 그는 책 속에서 인간이 자연 속에서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연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과, 교육의 가치를 배운다. 자연을 파괴하고 거부하고자 하는 자는 인간의 본능을 억제하고 자연과 함께 살아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은 교육과 지식임을 여덟 살에 터득한다.
단일 개체가 무리를 지어 하나의 커다란 유기체, 즉 초유기체를 구성하는 동물에 관심을 갖고 호박벌 말벌 막시류 곤충 꿀벌과 흰개미 등의 연구에 관심을 갖는다. 사람은 성장을 하고 후손을 보고, 자신의 삶보다는 자식들이 요구하는 것과 그들의 삶을 본능적으로 더 앞세우는 일, 자식들의 배를 채워주는 일, 인간은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노예로 변한다. 지능과 지성이 자연과 본능 앞에서 머리를 숙어야 하는 삶을 찾아야 한다고 결심한다.
작가 소설가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단어를 잘 배열해야 하는 것인가를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다. 콧물을 흘리는 여인을 표현한 말을 보자.
“틸다는 울고 있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막론하고, 항상 콧물을 킁킁 들이마실 정도로 몸에 물이 많았다. 밑부분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 부분은 언제나 슬플 정도로 바짝 말라 있었고 차가웠다. 그런데도 그녀가 자식을 여덟 명이나 낳았다는 것은 놀란 만한 일이다. 나는 그녀의 킁킁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내게는 신사들이 사용하는 중절모와 지팡이, 외알 안경도 없고 매너도 없다. 그렇다. 나는 신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내 가족의 배를 굶기고 가난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사람이니까.
벌들은 벌집 안에서 배설을 하는 일은 없다. 깨끗하고 청결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햇볕이 따스해지면, 벌들은 밖으로 날아가 몸속에 쌓여 있던 분비물을 배출한다. 그는 324통의 벌통을 치며 산다. 한 곳에 20 통 정도의 벌통을 배치해야지 그 숫자를 넘기지 않는다. 벌통은 외부에 색을 칠하기도 하나 백색을 하는 집이 많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열아홉에 돌아가셨다. 그 때 아버지는 쉰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어깨와 등, 피부와 관절은 늙은 고목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아버지는 병원치료를 받지 않으려 했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병원에 가 당시 구하기 힘든 항생제를 맞고 조그만 상처가 악화돼 숨졌다. 그리고 어머니는 재혼치 않고 수절하여 살다 야위어 간다. 어느 날 어머니를 찾으니 문을 닫쳤고, 아무도 사람이 없었다. 그는 어머니가 어느 요양원에 보내진 것을 알고 어머니를 뵈려 직장에 휴가를 신청하나 할 일이 많으니 꽃이 지고 나면 휴가를 주겠다는 상사의 만류에 기다린다. 몇 주 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죽음도 환경과 관계가 있는 듯 묘사하나 정확한 이야기는 못 찾았다.
플로리다의 한 양봉인이 자신의 벌통이 갑자기 텅 빈 것을 발견한다. 이 후 같은 경험을 했다는 양봉인 플로리다뿐 아니라 캘리포니아, 오클라호마, 텍사스 등지에서 줄지어 나타난다. 벌 통 안에는 충분한 먹이와 애벌레무리가 있는데 자취를 감춘 벌은 돌아오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벌들은 죽을 때가 되면 삶터를 떠나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무리가 사는 집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것이다. 책의 후반에 저자의 벌통도 벌 소리가 없어 열어보니 지드기도, 해충도 없는데. 질병이 지난 흔적도 없고 벌의 시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남아 있는 것으 여왕벌뿐이었다.
벌을 쳐서 돈을 모으기는 힘이 든다. 양봉인이 돈을 벌 방법은 이제 인공수분이다. 농업이나 과수업은 벌이 없으면 이제 불가능하다. 아몬드나 블루베리 덤불은 이제 벌이 없으면 꽃가루를 옮길 수 없으니 열매를 열수가 없다. 그들은 사업자금을 얻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값 싼 중국 꿀의 수입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봉업자도 확신 못하는 말을 은행직원에 해대고 있다. 가을이 되면 꿀은 잘 팔릴 것이고 수입 도 예년보다 나을 것이란 거짓말을 해댄다.
양봉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미국인도 무식한 모양이다. 당시 주민들은 과학리라는 분야는 생소하고, 그들의 세계관은 성경으로 이루어졌고, 그들이 읽은 책이라곤 성경밖에 없다. 이 세상의 크고 작은 것들의 연결고리, 창조주와 창조물의 연결고리를 이해시키고, 그들의 눈을 열어 주기위해 작가는 교육을 시작한다. 그러나 주민들은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것들에 집착하는데 그런 주민들은 바뀌지 않는 점에 고민을 한다.
에이원이란 아이가 희귀병에 걸리고 병원은 병명도 부모에 알리지 않고 격리 입원시키고 접근을 차단한다. 그리고 에이원을 발견한 장소에 갖가지 모양의 비행기가 와 빙빙 돌고 그의 집 앞에는 탱크가 줄지어 벽을 만든다. 탱크 뒤에는 군인들이 수백 미터에 이르는 울타리를 세우고 하안 방수포를 씌운다.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출입을 통제한다. 주민을 격리시키고 도시는 황폐해져간다. 시정부에서 허가된 사람만이 남을 수 있다. 강제퇴거명령을 거부하고 숨어든 사람도 있다. 부모는 에이원이 입원한 병원을 찾아 베이징으로 나선다. 그러나 어느 병원에서고 에이원의 진료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위안 화 여비는 거의 소진되는데 노후를 보장할 수도 없고 이제는 돌아갈 차비도 없다. 에이원의 병명 사인 치료 처 모두 극비로 처리 의구심을 돋구나 결론은 없이 독자의 상상 몫이다.
2007년에 생긴 단어가 ‘군집붕괴증후군’CCD로 벌의 몰사를 말하는데 양봉의 역사는 2차대전
후 전 세계적으로 펴진다. 미국만 농장이 590만개에서 1988년에 절반으로 준다. 벌의 떼죽음과 행방불명이 계속되는데 원인은 농약의 살충제였다. 살충제가 벌의 방향감각을 마비시킨다. 농업은 살충제 없이 불가능하고 2014년이 되자 유럽은 70억 마리의 벌이 부족해진다. 벌의 사망원인은 진드기도 한몫을 한다. 벌의 몸에 기생하는 진드기가 림프액을 빨아 먹는다. 또 기상이후도 중요한 원인이다. 벌이 없으니 꽃과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결국 흔한 과일과 채소들이 사라질 것이다. 2030년이 되면 육류의 생산도 줄어든다. 가축의 수가 줄어듦에 기인한다. 인구도 감소한다. 제자리걸음을 하다 하강곡선으로 들어간다. 아메리카 대륙은 벌들이 죽으면 농업에 심각한 타격을 준다. 미국인은 중국인처럼 인공수분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붕괴는 세계적인 식량문제를 초래한다. 유럽과 아시아에서도 벌들이 죽어나간다. 가장 마지막으로 오스트레일리아다. 이유는 그곳은 진드기가 없었다. 그리고 살충제의 영향을 그다지 많이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과수 농가도 인공수분으로 사람이 수정을 한지 오래다. 벌 보기가 귀해 졌다. 영악한 인간들이 단순논리로 그리 될 리는 없겠지만 인간의 자연파괴는 멈춰야 한다. 먼저 대기 오염을 중단시켜야 하고 화석연료의 사용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 작가는 이 말을 하려고 609쪽의 장편 소설을 지루하고 엄숙하게 썼을 것이다. 나도 오기로 끝까지 읽는 끈기로 덤볐다.
2018 03 02
벌들의 역사
마야 룬테 지음
현대문학